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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64화 (16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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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약은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무슨 맛인지 느낄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곧 폭발하듯이 안에 담긴 기운을 사방으로 뿜어댔다. 이는 벨로크의 혈도를 타고 흐르려다가 그곳이 막혀있자 속을 강하게 진통시켰다. 그는 코와 입으로 울컥 피를 쏟았다.

이건 좀 쌘대? 괜히 죽으니 마니 한 게 아니군. 그는 자신의 몸이 망가지기 전. 다급히 신성을 끌어올렸다. 비틀어 버릴 섭리는 간단했다.

대환단은 아무나 흡수할 수 없다.

아니다.

대환단은 누구든지 흡수할 수 있다.

목에 걸린 청금석 펜던트가 요란하게 반짝였다. 오래전 세상을 호령했던 고대신의 권능이 법칙을 비틀었다.

“세상에! 벨로크씨! 이런 무모한···”

이를 모르는 화린은 다급히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몸을 뒤흔들고 있는 넨을 진정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곧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환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너무 강했다. 속에 담긴 넨은 마치 폭풍처럼 벨로크의 내부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건 틀림없이 죽는다. 화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지만 그녀는 곧 정신을 다잡으며 와락 소리쳤다.

“벨로크씨! 어서! 어서! 심법을 운용하세요! 빨리요! 이러다 죽···어?”

그녀가 벙쪘다. 휘몰아치던 넨이 어느 순간 잠잠해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마치 영약에 담긴 기운을 다 흡수한 듯 보였다. 그녀는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생각대로군.”

벨로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는 새하얀 기운과 푸르스름한 기운이 같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시나 내면에 있는 절대신이 이 기운에 반발하여 힘을 내뿜었다.

스파크와 함께 가시 채찍으로 몸이라도 얻어맞은 듯 강력한 고통이 느껴졌다. 여기에 법칙을 뒤흔든 것에 부작용 또한 전해져왔다.

느닷없이 그의 상체가 `기역`자로 접혔다. 벨로크는 울컥 피를 토했다. 내장 조각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벨로크씨!”

하지만 그는 웃었다. 화린의 팔을 고쳤을 때보다는 덜 심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생명체의 운명을 뒤흔드는 것보다 영약의 특성을 바꾸는 것이 더 쉬운 모양이다.

“이 정도면 할만한데.”

그는 익숙한 듯이 피 섞인 침을 퉤 뱉고는 포션을 들이마셨다. 안 그래도 피곤함을 못 느끼던 육체였다. 하지만 대환단에 담긴 기운. 넨이라 불리우는 새로운 힘마저 흡수하자 그의 육체는 폭발할 것 같은 기세를 뿜어냈다.

화린은 걱정스레 그를 쳐다보다가 곧 설명을 요구했다.

“어떻게··· 어떻게 영약에 담긴 넨을 다 흡수하신 거죠? 그것도 이리 완벽하게···”

“당신의 팔을 고쳤던 그 힘 덕이요. 신성이라 불리는 고대신의 권능이지.”

“네? 아니, 초승달 섬에서 녀석과 계약을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명이, 설명이 좀 더 필요해요.”

화린은 그녀답지 않게 캐물었다. 자신이 평생을 다해서 쌓아온 능력들. 이 모든 것이 부정당한 듯한 느낌이 든 모양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벨로크 역시 검 한 자루 들고, 기괴한 권능을 부리는 악마나 마법사를 상대할 때 허탈함을 느꼈었으니까. 그는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비밀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화린은 믿을 수 있었다. 설령 이게 새어 나간다 해도, 현세에서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남은 대악마들이 연합하거나, 천상신들이 직접 이곳에 강림한다면 모를까. 그 정도의 힘이었고, 그 정도의 자신감이었다.

“제 팔도 그런 식으로 고치셨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벨로크씨가 한 말이 아니라면 대번에 부정했을 거예요···”

화린은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는 흔들렸다. 마음의 동요가 큰 모양이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벨로크에게 걱정의 말을 건넸다.

“그보다 그 힘. 계속 남발하셔도 되는 거예요? 꼭 육체적인 손상만이 아니라···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지는 않을까요?”

그래,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자신 역시도 신성이 가진 권능에 때때로 소름이 돋을 지경이니까. 하지만 벨로크는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세상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의 인생이나 운명 역시도 그랬다.

이렇게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절대신에게 몸을 뺏길 수도 있었다. 괴물의 눈먼 손톱이나 강도의 칼, 주문쟁이의 마법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무엇이 됐든 죽음은 찾아올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늘 하던 대로 행동하고자 했다.

내가 살아왔던 대로, 내가 발버둥 쳤던 대로. 나의 선택대로.

그렇다면 적어도 후회는 남을지언정 미련은 적어지겠지.

“내가 뒷일을 생각하고 살아왔다면 진작 무덤에 묻혔을 거요.”

어깨를 으쓱인 벨로크는 남은 대환단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윽고 화린에게도 만년설삼을 건넸다.

“이걸 왜···?

“드시오. 이번엔 내가 도와주지.”

그날 밤. 벨로크는 강철권의 비전 중 하나인 철금강을 배웠다. 화린은 자신의 경지를 몇 단계나 뛰어넘었다. 짐가방이 한층 더 가벼워졌다.

#

-흔적은?

-많은데.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합니다. 북에서 나타났다가 다시 남, 이번에는 서쪽입니다. 쓰러진 나무들만 몇 그루를 보는 건지··· 게다가 중간중간 인간과 괴물들의 시체까지 섞여 있는데. 무슨 귀신에 홀린 기분이에요.

-위험한 악마다. 빨리 찾아서 처리해야 해.

-주변 부족의 장로님들부터 시작해서 고위 순찰자들 역시 움직이고 있으니 곧 잡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손 놓고 있다간 경을 칠 거다. 빨리 움직여!

-예!

-젠장. 안 그래도 그 뱀 새끼 때문에 골치가 아프건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자벨의 남동생 이든의 것이었으니까. 잠시 후.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뭇가지들 역시 대롱거리며 흔들렸다. 벨로크와 화린은 몸을 숨기고 있던 수풀에서 나왔다.

“후우.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점점 더 많이 마주치게 되네요. 중심부로 갈수록 요정 마을들이 많다고는 해도··· 이건 좀 심한데.”

대화를 못 들은 화린이 속삭였다. 벨로크는 머리카락에 묻은 나뭇잎을 때며 말했다.

“무슨 사달이 난 모양이오. 괴물이니 악마니. 녀석들을 찾기 위해서 난리군.”

“악마···! 틀림없이 아가레스 그놈의 부하겠죠? 또 뭘 꾸미고 있는 걸까요.”

이를 으득문 화린이 중얼거렸다. 악마를 죽이기나 하지. 놈의 생각은 읽을 수 없는 벨로크는 침묵으로 답했다. 그가 화린의 어깨를 툭 쳤다. 순찰대를 따돌렸으니 다시금 이동하자는 뜻이었다.

'가급적이면 이든에게 손을 쓰고 싶지는 않다.'

두 사람은 수풀이나 나무에 몸을 숨겨가며 움직였다. 요정들의 말이 맞았는지 중간중간 부서진 나무나 괴물, 인간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시체는 신체 어디가 사라져 있거나 피가 쪽 빨려있었다. 나무들은 벨로크가 팔을 뻗어도 다 못 안을법한 크기였는데. 가지처럼 툭툭 부러져 있었다.

‘보통 놈이 아닌 모양인데.’

녀석이 날뛰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다행인 동시에 불행이었다. 흔적을 워낙 많이 남겨줘서 요정들을 교란시켜주는 것은 좋았지만, 덕택에 돌아다니는 요정들이 많아져서 번번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쪽이다!

-쏴! 죽여!

게다가 그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벨로크의 초월적인 감각에 힘입어 들키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마주칠 것 같았다. 요정들은 이 밀림 전체에 넓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제압하고 가야 하나?”

“제압한다 해도 뒷일이 걱정이에요. 아틸란타는 온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에요. 그것도 삼중으로요. 게다가 마법사들과 정령사, 기사들이 상시 경계근무를 서고 있어서 몰래 들어가는 것 또한 어려워요.”

벨로크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튼튼했던 그의 살갗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동방의 비전. 철금강이었다. 요근래 수련에 정신이 팔렸더니. 이에 대해서 대비책을 세워두지 못했다. 이건 명백히 그의 실책이었다.

‘어떻게 한다.’

이제 수도까지는 마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의 장애물이 너무 많다. 수풀 흔들리는 소리가 더 가까워진다. 부츠 발과 나뭇가지가 대롱거리는 소리도 요란하게 들려왔다. 아래에서, 그리고 위에서도 추격을 하는 모양이다. 원숭이 새끼들도 아니고, 벨로크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수백의 요정들을 때려잡고 수도로 들어갈지, 아니면 지금 껏 해왔던 것 처럼 유화적인 방법을 찾아볼지.

그는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신성을 써볼까? 뭘 비틀어야 하지? 벨로크가 고민할 때. 화린이 손을 턱 잡았다.

“일단 물러나서 생각을 좀 해봐요.”

그래, 이 힘에 너무 기대는 것도 안 좋겠지.

“그럽시다.”

밀림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요정들은 천부적인 사냥꾼이자 추격자들이었다. 빨랐고, 집요했다. 하지만 벨로크와 화린도 보통 인간들이 아니었다.

진탕 투성이의 땅이든, 앞을 가로막는 나무나 덩굴이든 모조리 분쇄해버리며 움직였다. 두 사람은 요정들의 포위망을 피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웬 낯선 무리를 만났다.

“허억, 허억. 이봐···! 저거 사람들 아니야?”

“잡을까?”

“뭘 잡아 개새끼야! 지금 그 괴물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얼굴에 때가 가득한 남자의 말이 끊겼다. 저 멀리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어느새 그의 눈앞에 와있었기 때문이다.

“시,씹? 무··· 무슨. 컥.”

벨로크는 사내의 얼굴을 턱 잡아서 들어 올렸다. 얼굴 가죽이 축 늘어지며 그의 침이 손에 묻었다. 새키. 더럽게. 혀를 쯧 찬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 녀석과 비슷한 꼴을 한 인간 다섯이 그를 보며 무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두 놈은 웬 장대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귀가 조금 길쭉한 사내가 묶여 있었다. 요정처럼 보였다. 벨로크가 말했다.

“너희들. 인간 사냥꾼처럼 보이는데. 아까 했던 말 다시 해봐라.”

“우우웁!”

“이 시발놈이! 패튼을 놔···”

다른 사내의 말이 끊겼다. 벨로크의 손에 잡혀있던 패튼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부서졌기 때문이다.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휙 털며 말했다.

“아까 했던 말이 뭐라고?”

“이 개새끼가!”

그의 괴력에 얼어붙은 놈이 셋 이었다. 나머지 둘 중 하나는 퉁. 석궁을 쐈고, 또 다른 한놈은 칼을 들고 덤벼들었다. 벨로크는 무정한 기계 장치의 살인 예고를 맨손으로 턱 잡아챘다. 이윽고 그 검은 깃을 도로 되돌려주었다.

“컥.”

미간에 구멍이 뚫린 사내가 석궁을 놓고 쓰러졌다.

"흐아아압!"

칼을 들고 덤벼드는 놈은 어느새 다가온 화린의 발차기를 얻어 맞고, 척추가 꺾여 죽었다.

“으, 으아아아! 괴, 괴물!”

소리치던 사내가 목이 꺾여 죽었다. 벨로크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망치던 놈은 화린이 집어던진 칼에 폐를 찔려서 컥컥거리다 죽었다. 죽이 척척 맞았다. 인간 사냥꾼들인 이상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도망칠 용기도, 칼을 뽑고 덤벼들 용기도, 입을 열 자신감도 없던 놈뿐이었다. 그는 바지에 오줌을 질질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벨로크는 사내의 앞에 쪼그려 앉아 뺨을 짝. 후려쳤다.

“너.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그의 손은 너무 아팠다. 정신이 돌아버리는 것을 넘어 확 깰 정도였다. 사내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억··· 허, 허어어··· 네, 네.”

“네놈들 아까 괴물로부터 도망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지? 악마인가?”

“네, 네! 한탕을 끝내고 은신처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그게 습격해왔습니다. 회, 회색 피부에 산양의 뿔. 금발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는데. 귀가 길쭉한 것이··· 마치 요정처럼 보였습니다. 하, 하지만 뭔가 이상했어요! 갑작스레 주둥이가 쭉 튀어나왔고 피부에는 검은 문신이랑 나중에는 날개까지 돋아난 것이··· 요정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었습니다!”

사내는 살기 위해 어떻게든 제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냈다. 뱉은 말은 난잡했으며, 흥분한 어조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눈을 크게 떴다.

사내가 말하고 있는 특징이 그가 알고 있던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네가 왜? 아니, 확신할 수는 없다.

“그 여자에 대해서 좀 더···”

말을 하던 벨로크가 검을 뽑아 들었다. 불꽃이 탁 튀었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검은 채찍이 뱀처럼 튕겨 나갔다. 하지만 사내는 무사하지 못했다. 채찍과 함께 뻗어 나온 피막 날개가 그의 배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컥. 커거걱···”

날개가 휙 움직이며 사내를 끌고 갔다. 이윽고 으적으적 씹어먹는 소리와 함께 피가 쪽 빨린 그의 시체가 쓰레기처럼 던져졌다. 아까 전 요정 추격자들이 쫓고 있던, 악마에게 희생당한 사람의 모습하고 똑같았다.

크르르르

짐승 소리와 함께 거대한 인영 하나가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사내가 주절거렸던 특징과 꼭 닮아 있었다. 꽁꽁 묶여 있던 요정을 풀어주던 화린이 이를 보고 소리쳤다.

“악마!”

눈이 돌아버린 그녀가 주먹을 꾸욱 쥐며 달려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앞을 벨로크가 막아섰다. 그의 표정은 이상했다. 평소처럼 악마를 보고 살의를 내비치기는커녕. 그리워했던 누군가를 다시 만난 듯 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린이 당황해서 물었다.

“벨로크씨?”

그는 고민하는 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저자는 악마가 아니오. 내 동료... 아니, 애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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