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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
대환단, 만년설삼.
이쪽 세상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온갖 문물이 존재했던 회색 도시에서는 이따금 들어봤던 얘기였다. 복용하는 것만으로 신체의 내공을 대번에 증진시켜준다는 천고의 영약. 무협지에서 퍽 하면 나오던 그거.
“이게 여기에 맞는 물건인가?”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그 뜻을 왜곡되게 들은 화린이 말했다.
“아. 벨로크 씨는 영약에 대해서 잘 모르시겠네요. 그러니까 이건···”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화린이 설명을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이곳 강철의 사원을 설립한 초대 문주는 동대륙 출신의 무술가였다. 아드리아 대륙에서 어마어마하게 떨어진 그 낯선 땅은 생활 양식이나 문화 등이 전혀 다른 별천지의 세상이었는데. 이건 그곳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보물이란 뜻이었다.
무협 세계 맞네.
처음 들었을 때부터 느낀 거긴 한데. 이제서야 확신이 들었다.
어째서 동방인들에 대한 것이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을까? 거리가 멀다고는 하나 꾸준히 항해한다면 닿을 법도 한데. 거기다가 그 귀한 약들이 왜 물 건너 이곳에 있을까? 장물일까?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굳이 풀어야 할 의문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대단한 기회를 손에 잡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희 무투관의 비전을 사용하려면 기. 또 다른 말로는 넨이라고 불리우는 힘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마치 마법사의 주문 세계나 악마의 마력 같은 거죠. 스승님이 어째서 이 물건을 가지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아요. 이것만 있다면 벨로크 씨는 넨을 모으실 필요도 없이 곧바로 수련을 시작하실 수 있어요.”
화린의 진홍색 눈동자에 일순 탐욕이 감돌았다. 돌아가신 스승과 문주를 제외한다면 그녀의 경지는 이 무투관 내에서 최강이었다. 저기 있는 책은 숨겨진 비전서로 보이니. 이 영약을 먹고 수련을 좀 더 한다면 그녀는 새로운 경지에 다다를지도 몰랐다.
강력한 힘에 대한 열망.
무인으로서는 절대 양보하기 힘든, 능력이 부족하여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그녀로서는 참아내기 힘든 탐욕이었다.
“후우.”
하지만 그녀는 슬쩍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감았다 뜬 홍채는 어느덧 맑은 기운만을 내뿜고 있었다. 스승이 남긴 유지는 벨로크에게로 향한 것이었다. 자신은 그의 것을 탐하고 싶지 않았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절제한 화린이 말했다.
“굉장히 좋은 약이지만 한 번에 다 먹었다간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죽고 말 겁니다. 시간을 두고 하나씩 복용하도록 하죠. 제가 알려드릴게요.”
벨로크는 큼직한 환약 세 개와 약초를 보다가 물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뛰어나오?”
“둘 다 대단한 영약들이지만, 대환단은 사람의 손을 빌어 한 번 가공된 약이에요. 그에 비해 만년설삼은 극한지에서만 자생한다는 전설상의 영약이죠. 효능으로만 따진다면 역시 만년설삼을 따라올 수는 없어요.”
“양식보다 자연산을 더 좋게 치는 건 이곳 역시 마찬가지군.”
무심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화린은 푸흐흐 웃었다. 그러다가 이어진 벨로크의 말에 깜짝 놀랐다.
“대환단 하나와 저 삼은 당신이 먹으시오. 두 개씩 나눕시다.”
“네?! 무슨··· 말도 안 돼요! 스승님께서는 분명 벨로크 씨에게···”
“효율적으로 생각합시다. 갓난아이에게 칼을 쥐여주는 것보다 어른이 쥐는 게 더 낫지 않겠소?”
“아니, 그게··· 저런 보물을··· 그렇게 쉽게 생각할게···”
화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갈등하는 듯했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수업료라고 생각하시오. 못 가르치면 다시 뺏을 테니 열과 성을 다해야 할 거요.”
“벨로크씨···”
화린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대륙에서 겪어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살인자에 강도, 탐욕스러운 귀족이 대부분이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꼭 착한 것도 아니었다. 다들 제 약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더 악독하게 행동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듭 호의를 받다 보니 마음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그것에는 그의 얼굴과 배경, 끝도 없는 힘, 은혜 등. 다양한 환경들이 뒤섞여 있었다.
‘포옹 밖에 못한 게 아쉽다.’
어느덧 자신의 생각이 위험한 곳까지 발전하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벨로크는 애를 달래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책 역시 살펴봅시다.”
“흡. 네.”
얼굴을 붉힌 화린이 비전서를 펼쳐 들었다. 책이 많이 삭아 있었기에 조심히 다루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비전서를 읽어내렸다. 잠시 후. 책을 덮으며 말했다.
“이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물건이에요··· 제가 전에 말씀드렸었죠? 저희 무투관의 원류는 뇌랑권이라 불리우는 동방 대륙의 한 문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렇소.”
그녀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했다.
“이건 그에 관해 적힌 비전서예요! 심법에서부터 절기까지 다 나와 있어요! 맙소사. 이것만 있다면···”
일반적으로 아류는 원류를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잘 모방하고 보강했다고는 하나. 그 깊이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벨로크가 알고 있던 무협 세계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내공 심법을 하나 배우면 다른 것을 못 배운다거나 하는 것도 있었지.
벨로크가 이에 대해서 묻자 화린은 멀뚱한 표정으로 답했다.
“마법사가 주문을 배울 때 이것저것 가리던가요? 좋은 게 보이면 갈아타고, 더 보강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이상한 지식은 또 어디서 들으셨어요?”
이런 엿 같은 세계 같으니. 뭐 하나 맞는 것 같으면서도 또 뒤틀려있군. 벨로크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술집에서 들었소.”
“저잣거리의 말은 역시나 믿을 게 못 되네요.”
고개를 저은 화린은 비전서를 상자 안에 넣었다. 이윽고 두툼한 가죽과 천으로 상자를 몇 번이나 감싼 후 조심히 가방 안에 넣었다.
“어찌 됐든 저희 둘 다 지금 바로는 이걸 먹을 수도 배울 수도 없어요. 영약을 흡수하려면 운기조식을 해야 하는데. 약에 담겼을 넨의 양으로 봐서 적어도 하루는 필요해요. 더군다나 벨로크 씨는 조식법부터 배우셔야 하구요. 비전서 역시 걸어가면서 독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더욱더 그렇죠.”
짐가방을 맨 화린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결국 부족한 건 시간이로군.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이야기가 새기는 했는데. 현재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요정과 인간의 전쟁을 막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이 사원에서 단서 하나를 잡을 수 있었지.
벨로크가 말했다.
“죽은 흑요정놈이 했던 말 기억하오?”
화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네. 분명 자신이 그 분의 첫 번째 사도라고 말했었죠.”
단련된 권법가 수 백 명을 제 뜻대로 조종한 무시무시한 괴물.
그 정도 수준의 악귀가 주인으로 모실만한 괴물은 흔치 않다. 하지만 이 땅에는 녀석을 수족으로 부릴만한 마귀가 한 번 강림했었다.
광기의 지배자이자 신성을 빼앗은 찬탈자. 지하의 다섯 옥좌 중 하나.
여기에다가 스스로 대악마를 죽였다고 밝힌 요정왕과 전염병을 빌미로 그가 일으키려 하는 전쟁까지.
머릿속 퍼즐을 맞춘 벨로크가 제 생각을 밝히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방 구석에 노트가 하나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것을 집어들어서 펼쳤다. 일기였다. 화린이 눈을 크게 떴다.
“스승님이 남긴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일지를 읽었다.
-인간과 요정의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성이 오갔을 뿐이지만 이제는 화살과 창날이 이를 대신한다. 우리 역시도 위험하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인덕 때문일까? 다른 개척 마을들은 요정들의 손에 의해 불탔지만 이곳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들은 어떻게든 이 비틀린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사원의 초대 설립자이신 다룬다라님께서는 현 요정왕과도 깊은 인연이 있으셨고, 평소 교류를 하던 마을들 또한 몇 있었으니까. 바로 그 때 그 괴물이 찾아왔다··· 우리는 격렬히 저항했···
일지의 중간에 피가 묻어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벨로크는 하는 수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우리는 결국 놈에게 굴복했다. 특히나 장로들은 문주님이 당하자 제일 먼저 놈에게 달려가 스스로의 육신과 영혼을 바쳤다. 인의라고는 없는 놈들... 나 역시도 한계다··· 점점 머릿속이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흐릿해진다. 저 목소리에 내 모든 것을 내 맡기고 싶어진다.
“스승니임···”
정리된 감정이 다시 터져 나온 화린이 울컥 눈물을 흘렸다. 일지에 물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내 생각에··· 놈은 인간과 요정의 관계를 완전히 파탄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나마 믿고 있던 인간들인 우리들을 조종해 요정들을 죽인다면, 그들의 분노는 이제 완전히 증오로 뒤바뀔테니까. 이를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내 자신이 한탄스럽다. 하지만··· 딱 하나 위안삼을 것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 딸아이가 밖에 나가있다는 것이다. 아아. 태양신이여. 달의 여신이여. 감사합니다. 내 딸. 내 보물. 화린. 사랑한···
기괴하게 꺾인 필체를 끝으로 일기가 끝났다.
“끄으으윽··· 끄흐.”
오열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일지를 접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군. 그는 화린이 진정할 때 까지 등을 두드려주었다. 화린은 한참이나 울다가 붉어진 눈가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요정왕의 손에 의해 대악마가 죽은 게 아니군요. 놈은 살아있어요.이 모든 일의 배후··· 내··· 원수!”
“요정왕이 무슨 착각을 한건지. 아니면 놈도 한패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모종의 사정이 있는건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소. 그러니까···”
“직접가서 확인해봐야 한다는 소리죠? 맡겨만 주세요. 아틸란타까지 최대한 빠르게 안내할게요.”
그녀는 비장한 각오를 내세웠다. 두 사람은 사원의 무덤가에 술을 뿌리고, 기도를 한 번 올린 뒤 길을 나섰다.
화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결의를 다지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니면 그저 이 끔찍한 공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 처럼 보였다.
저들이 정말 안식을 얻었을까? 신도 실존하는 세계이니 사후세계도 있을지 모른다. 별이 가득한 세상에서 봤던 영혼의 강과 이를 인도하는 거인신도 있었으니까.
벨로크는 멀어져 가는 사원을 힐끔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살아서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자신이 할 생각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그는 이번에도 꺾이지 않고, 이 고난을 헤쳐나갔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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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목적지를 향해서 계속 걸었다. 화린은 처음에는 우울해 했지만 곧 그 감정을 괴물들에 대한 분노로 치환 시켜버렸다. 정말이지 강철 같은 여인네였다.
떠오르는 태양이 저물고 달이 고개를 내미는 횟수가 반복될 만큼. 매일 밤 모닥불을 피우고 끓여 먹은 스튜 접시가 늘어간 만큼. 그들은 다양한 괴물들을 지나쳤다.
전에 봤던 식인종이나 덩치가 10미터는 넘어가는 멧돼지. 꿈틀거리는 촉수 수 십 개를 쏘아대는 식인식물과 자폭해서 맹독을 사방에 뿌려대는 점박이 개구리까지. 기상천외한 괴물들이 그들의 앞길을 사사건건 막아섰다.
벨로크의 십자검과 정글도가 사방으로 휘둘러졌다. 길을 막은 억센 풀이 잘려 나가고 괴물들의 머리통 역시 썰려 나갔다. 녀석들의 털은 가시처럼 날카롭고 털은 타이어처럼 두툼했지만, 그의 칼날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벨로크는 괴물들을 죽이면서도 노르드의 이야기를 계속 상기했다. 스킬과 스탯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만의 능력을 키워라.
그건 이 전율적인 근력과 아무리 휘둘러도 지치지 않는 체력에 기대지 말고 뭔가를 해보라는 이야기였다.
이 땅에 처음 떨어졌을 때. 강철도끼 버본과 양머리 악마 바호메트를 죽였을 때처럼. 사소한 적을 상대로도 목숨을 걸었을 때처럼.
살기 위해 어떻게든 생각하고 육체를 쥐어짜내라는 뜻이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찌 됐든 이 넘쳐나는 힘과 끓는 피는 지금 그의 육신에 존재하고 있었고, 이곳에서 살아갈 때부터 휘둘러왔던 흉기였다.
그녀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스탯과 스킬들은 자신의 몸에 있는 시스템 창. 절대신으로부터 온 권능이다. 그리고 자신은 놈을 죽이려 한다. 그렇다면?
녀석이 이 권능을 되돌려받을 수 있겠지. 그러면 자신은 지금껏 잘 이용해온 그 힘을 빼앗긴 채, 그 전율적인 힘을 가진 놈과 싸우게 될 것이다.
마치 양분을 빼앗긴 식물이 된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고대신의 신성, 화린으로부터 배울 새로운 힘. 동방의 비전. 마지막으로 경험일 것이다.
괴물과 살인자들을 때려잡고, 녀석들로부터 얻은 노련함. 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였다. 다행히 이곳 나스 밀림에 사는 괴물들은 흉포하고 끔찍한 만큼 좋은 상대가 될 수 있었다.
-꾸에에엑!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화린은 하늘에서 덤벼드는 모기들을 향해 손과 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파동이 펑펑 터지며 곤충들의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쿠르르 울리는 진동과 우지끈 쓰러지는 나무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후우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 들린 십자검이 끈적한 피를 흘리며 부르르 떨었다. 그는 놈의 움직임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녀석의 역동적인 역관절 다리, 날카로운 상아색 어금니, 잔뜩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붉은 눈까지.
벨로크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체 능력을 조절했다. 그가 이 땅에 처음 떨어졌을 때. 재능있는 젊은 기사의 수준으로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이걸 해냈다.
몸이 느려진다. 오감 또한 잔뜩 떨어졌다. 그는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괴물을 상대하는 전사의 심정으로 놈을 맞이했다.
벨로크는 전력을 다해 놈의 돌진을 피하고, 검을 찔러넣었다. 통하지 않았다. 힘이 부족했던 탓이다. 그렇다면··· 눈을 찌르면 어떨까?
푸욱. 칼날이 박혀 들어갔다. 멧돼지가 괴성을 질렀다. 그는 대번에 검을 휘둘러 녀석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놈은 강렬하게 저항했고, 자신은 이를 버티지 못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나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녀석의 채찍 같은 꼬리가 날아왔다. 몸을 젖혀 피했다. 발길질은 바닥을 굴러 피했다. 벨로크는 흙투성이가 된 채 생각했다.
놈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다. 한 쪽 눈을 잃어 앞을 보는 것에 지장이 생긴 것이다. 사각이 생겼다.
그 사실은 곧 놈에게는 약점이 되었고, 그에게는 비수가 되었다. 그는 그곳을 집요하게 노렸다. 기사라기보다는 사냥꾼 같은 모양새였다.
-쿠아아아악!
결국 멧돼지가 흥분해서 움직임이 커졌다. 약점은 더 노출됐다. 칼날이 번뜩였다. 가죽으로 보호되지 않는 연약한 아랫배가 내장을 주르륵 쏟았다. 진흙 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끝까지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벨로크였다.
“후우, 후우.”
땀은 비 오듯이 흘렀고,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목덜미에서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벨로크는 오랜만에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우며 살기 위해 악착같이 움직여야 했던 날들을. 이 감각을 떠올린 순간.
콰광.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그는 지금의 이 느낌을 간직하려 애썼다. 그때. 괴물을 다 처리한 화린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저런 녀석을 상대로 고전하시다니 벨로크씨 답지 않은데···”
“수련을 좀 했소.”
“네?”
벨로크는 상황을 설명했다. 화린은 당황했다. 세상에··· 자신의 신체 능력을 일부러 낮추고 괴물과 목숨을 건 생사결을 벌인다니. 말도 안 되는 짓거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납득했다.
간혹 있었다. 무에 미친 자들이 벌이는 해괴망측한 일들을. 그리고 그들의 미래는 두 가지였다. 비참하게 죽거나 보다 높은 경지에 다다르거나.
벨로크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후자가 될 것이다. 화린은 그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곧 그녀 역시 그를 따라 그 무식한 수련법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여정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괴물들을 처리하며 나아갔다. 가죽부츠가 깊은 족적을 남길 수록, 요정왕국의 수도 아틸란타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제 마을 한 개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르르륵
밤이 되고, 모닥불이 타올랐다. 그때 마다 화린은 그에게 이번에 얻게 된 비전서. 뇌랑권의 심법을 가르쳐 주었다. 영약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기초가 필요했으니까.
“무의 기본은 자연과의 합일이며··· 마음속의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조화를 행하라···”
동방의 언어와 문화로 적혀진 구결은 아리송했고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능있으며 좋은 스승이었다.
자신 역시 심법을 배우는 동시에 벨로크가 알기 쉽게 원리만 쏙쏙 빼어 설명해 주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수업으로 인해 구결들은 다 외웠다. 이제는 실전에 들어갈 차례였다.
“넨. 그러니까 기는 대자연에 흩어져 있는 신비로운 기운이에요. 제가 인도해 드릴 테니 심법을 운용하시면서 한 번 느껴보세요.”
벨로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화린은 그의 등에 손을 얹고 자신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묶어 놓은 갈색 머리가 붕 떴다. 그녀는 넨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곧바로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리 재능 넘치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한 달은 걸리니까··· 그러니까 너무 조바심 내지 말···”
“느껴지는군.”
“네?”
화린의 말을 끊은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손에 기운을 집중했다. 정말이었다. 미약하지만 벨로크의 내부에서는 넨이 들끓고 있었다. 당황한 그녀가 입을 어버버 거렸다.
“이게··· 어떻게··· 지금까지 이렇게 빨리 넨을 느낀 사람은 없는데···”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내가 좀 재능이 넘치오.”
재능 넘치는 칼잡이. 영웅의 자질을 달고 태어난 기사. 벨로크 하이네가 그였다. 이는 동방의 신비로운 비전에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물론 속사정이 있었다. 그는 신성을 다룬다. 이 세상에 거부할 만큼 강력하고, 섭리를 뒤흔드는 권능을 다룬다.
정확히는 빌려 쓴다는 개념에 가깝기는 하지만 어찌 됐든 신성은 범접 불가능한 힘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영혼과 육체의 격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드높이 올라가 있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대자연의 기를 다루는 법 따위는 손쉽게 받아들일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점점 더 절대신과의 사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깨달음과 배움에 왕도는 없는 법이지만, 그로서는 모든 수를 다 써야 했다.
“화린. 영약들을 좀 꺼내주시겠소?”
“네? 그건 갑자기 왜···”
화린은 어리둥절해했지만, 곧 가방을 열어 흑단목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귀물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동대륙에서도 보기 힘들다는 전설상의 영약들. 조금이나마 넨을 느끼게 된 벨로크는 저 속에 담긴 어마어마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뚫어져라 영약을 보자 화린이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벨로크씨. 설마하니 지금 심법 하나 배우셨다고 저걸 드실 생각을 하는 건 아니죠? 그랬다간 정말로 큰일 나요. 온 몸의 기혈이 뒤틀려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구요. 좀 더 단련을 거치시고··· 조금씩 쪼개서 섭취하셔야···”
벨로크는 화린의 말을 뒤로한 채, 팔을 뻗었다. 그의 손에 대환단이 잡혔고, 곧 그의 입으로 꿀꺽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