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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62화 (16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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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

“어떻게··· 이런 일이···”

화린은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벨로크씨!”

그가 울컥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것도 리치와의 격전 때 보다 더 강한 내상을 입은 듯 폭포수처럼 토했다. 화린의 앞섬과 바지가 순식간에 벌겋게 젖어 들어갔다.

“설마···!”

화린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기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강대한 힘에는 필히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 역시 떠올렸다.

“왜··· 왜··· 이렇게까지···”

울컥. 속에서 뭉클거리는 무언가가 올라온 그녀가 다급히 벨로크를 부축했다.

“바트릭씨! 도와···”

“괜찮소. 이 정도면 싸게 먹힌 편이지.”

벨로크는 화린을 만류하고는 피 섞인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는 혁대 뒤편에 차고 있던 포션을 꺼내 쭉 들이켰다. 트롤의 부산물, 혹은 천재적인 연금술사의 역작.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핑크색 액체가 부글부글 끓던 속을 가라앉혔다.

“후우.”

내상은 치유가 됐지만, 아직도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벨로크는 한숨을 쉬었다.

화린의 팔을 고치기 위해 이 세상의 섭리를 비틀었을 때. 어마어마한 신성이 내부에서 빠져나갔다. 주먹에 신성을 두르거나 인어와 교감을 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양이었다. 거기다가 강렬한 고통 역시 찾아왔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 세상 자체가 자신을 거부하며 짓누르려 한 듯한 느낌이었다.

벨로크는 이것이 대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동, 섭리를 비튼 만큼 강력한 반동이 나한테 온다.’

신성은 분명 전율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만능은 아니었다. 얻은 게 있다면 가져가는 것도 있었다. 그는 몰랐지만, 인간의 육체로 신성을 무리하게 다루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 세상 자체에서 튕겨 나가 육신과 영혼 자체가 소멸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나마 노르드가 그가 짊어져야 할 반동을 같이 짊어졌으니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이다.

쉽게는 안 된다 이거지? 뭐, 어차피 신성에만 기댈 생각은 없었다.

노르드가 말하지 않았던가? 절대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신성이나 스킬, 스탯에 기대는 것이 아닌, 나 자신만의 능력을 갈고닦으라고. 그리고 그에 대한 단서는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는 갈색 머리칼의 여인에게 있었다.

“괜찮으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괜찮소. 팔은 어떻소?”

화린은 피를 잔뜩 토해 조금 창백한 인상이 된 벨로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보여준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궁금증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그런 의문 따위가 아니었다.

화린은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가 혹여 그에게 들킬까 노심초사하며 말했다.

“멀쩡해요··· 아픈 곳도 없고··· 잘 움직여요. 그냥 제 팔이에요.”

“다행이오.”

흐뭇한 미소를 지은 벨로크가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은 이제 완전히 새카매져 있었다. 기온 역시 덩달아 내려가며 어서 모닥불로 가 몸을 데울 것을 명했다. 그가 말했다.

“추모는 끝났소?”

“네? 아, 덕분에요.”

“그렇다면 어서 들어갑시다. 날이 춥소.”

그가 반쯤 부서진 암자를 턱짓했다.

“네, 네.”

화린은 벨로크를 부축한 채로 암자로 가려다가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화린은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저기··· 벨로크씨.”

“왜 그러시오?”

“제가 갈아입을 옷을 못 챙겨서 그런데. 숙소로 가서 옷을 좀 챙겨올 수 있을까요? 남성용 옷도 그곳에 있을 거예요. 참. 욕탕두요.”

벨로크는 시선을 내렸다. 그가 토해낸 피로 인해 화린이나 자신이나 둘 다 피범벅이었다. 여기에 그간 정글을 헤쳐오면서 쌓여왔던 묵은 때가 더해지자 완전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태로 자면 찝찝할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두 사람은 폐허가 된 사원을 가로질러 이곳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목조건물로 들어섰다. 장로들이 기거하던 쉼터였다. 차라리 여기서 자는 게 낫겠는데. 바트릭도 부를까? 화린은 그를 혼자 내버려 둔 채, 어딘가로 부지런히 움직이다가 금세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씻고 나서 이걸로 갈아입으시겠어요?”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안고 있는 화린이 비단으로 만든 무복을 건넸다. 이윽고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이쪽으로.”

물은 언제 데워뒀데? 그녀를 따라갈수록 느껴지는 열기에 벨로크의 의문이 풀렸다. 천이 둘러져 있는 나무문을 열자 나타난 것은 온천이었다. 대리석을 조각해 인위적으로 만든 욕탕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바위 안에서 지하수가 샘솟고 있는 진짜배기였다.

“이런 곳이 다 있었군?”

벨로크는 뿌연 수증기를 손으로 휘휘 저으며 감탄했다. 정글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고려해 위쪽에 차양막까지 쳐져 있는 것이 여간 정성을 쏟은 것이 아니었다. 화린은 온천수로 다가가 한쪽 손을 담그며 온도를 체크했다.

“땅을 개간하다가 발견한 곳이에요. 운이 좋았죠.”

화린은 말을 아꼈다. 과거의 일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벨로크는 더 캐묻지 않고 바가지와 함께 목욕 도구들을 챙겼다. 재로 만든 비누와 향이 나는 풀, 초승달 모양의 쇠 긁개, 해면과 거친 재질의 천 같은 것들이었다.

“먼저 씻으시겠소?”

남녀 구분이 없는 탕이었기에 벨로크가 물었다. 화린은 고개를 저었다. 열기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벨로크씨 먼저 씻으세요. 피를 많이 흘리셔서 몸도 차가우실 텐데···”

“그럼 사양 않고.”

벨로크는 대뜸 옷을 벗고는 바가지에 물을 담아 끼얹어 몸을 헹궜다. 구정물이 질질 흘렀다. 현대인이라면 기겁했겠지만, 어느덧 이곳 사람이 다 되어버린 그에게 있어서는 퍽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 이곳은 이제 게임 속 세상도 아니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또 다른 세상일 뿐.

이곳에서 보낸 삶은 회색 도시에서 보낸 삶보다 짧았다. 하지만 강렬했다. 그의 인생에서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될 만큼··· 두 개의 삶 사이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후우.”

한숨을 쉰 벨로크가 탕에 몸을 담갔다. 바위 같은 근육이 노곤하게 풀리면서 긴장이 풀렸다. 말은 안 했어도 피로가 제법 쌓였었나 보다. 육체적인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더 강했다. 생각할 것도 많았고, 대비해야 될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이 세계의 구세주라 불리는 절대신이다.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만약에 놈을 죽이고 이 사태를 끝내면 자신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간다면? 사람과 괴물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피를 흠뻑 묻힌 전사가 다시금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까?

열심히 스펙을 쌓아 취업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일을 배우고, 비위를 맞추고··· 반겨줄 이 하나 없는 그 차가운 도시로···

벨로크는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결국 이곳이나 저곳이나 전쟁터인 것은 똑같았다. 삶 자체가 영원히 이어지는 전쟁인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만간 두 개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될 날이 올 것이란 걸.

그의 상념을 끊은 것은 손에 목욕용품을 들고 있던 화린이었다.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눈치를 보며 그에게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벨로크가 물었다.

“아직 안 가셨소? 나한테 볼일이라도?”

“저··· 그게··· 음. 등이라도 좀 밀어 드릴까요?”

한참이나 뜸 들이다가 꺼낸 말이 저거라니.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녀의 평소 행실을 생각한다면 이건 굉장히 고민하다 꺼낸 말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화린은 지금 자신에게 심적인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비의 원수를 갚아주고, 팔을 고쳐줬으니까.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처럼 보이기는 했지.

“화린.”

“네.”

“동료 아니, 친구를 돕는 건 명예로운 일이요. 그것이 복수든 치료든 말이오. 나는 내 신념에 따라 행동했고 후회는 없소. 그러니까 너무 부담가지지 마시오.”

가짜 기사였던 이방인 사내는 이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친구···”

말을 흐린 화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욱한 수증기와 풀어헤친 머리칼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벨로크는 농담삼아 말했다.

“정 부담스러우면 들어오시오. 이리 와서 말 상대나 해주시던지.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고.”

스르륵

천이 살갗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첨벙거리며 수면이 파문을 일으켰다. 벨로크는 당황했다. 그리고 이다음에 일어난 일에 더 당황했다. 등 뒤로 부드러운 감촉이 와닿고 있었다. 양팔과 함께 뜨거운 숨결 역시 닿고 있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온천수보다도 뜨거웠다.

“화린?”

“부탁하고 싶으신 게··· 뭔데요?”

벨로크는 그녀의 팔을 떼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행동을 멈췄다. 왜 내 주변에는 이렇게 상처 입은 사람들이 모이는 건지. 그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여인네의 굳은살 박힌 손을 느끼며 말했다.

“조금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난 강철의 사원의 비전을 배우고 싶소. 가능하오?”

먼 옛날 동방에서부터 전해져왔다는 강철권의 비전. 몸을 마치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들고, 보이지 않는 파동을 포탄처럼 쏘아낸다. 당장에 화린만 봐도 이 힘으로 능히 괴물의 뼈와 살을 분리시켰다. 여기에 신성을 섞는다면?

실로 전율적인 위력을 가진 비전이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벨로크는 이렇게 하나씩 이 대륙 사람들의 기술들을 배워나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노르드와 함께 절대신에 맞설 생각이었다. 물론 그사이에는 거래, 회유, 강압 등이 들어가겠지만···

“사원의 수련생이 아닌 이상. 비전의 전수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화린의 손이 사내의 바위 같은 복근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지금은 그런 법규를 들이밀 사람들이 다 죽었네요··· 게다가 스승님께서는 벨로크씨에게 사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영약과 비전서를 드린다고 약조하셨지요.”

그녀는 자꾸만 자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사내. 의지하게 만드는 사내를 끌어안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굳이 이런 사족을 달지 않아도 벨로크가 원한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비전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은혜였고,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

“부족한 몸이지만 최선을 다해 가르쳐 드릴게요. 벨로크 씨라면 분명 높은 성취를 이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한동안 그의 흉터 가득한 몸을 안은 채, 얼굴을 비볐다. 상처받은 짐승이 제 상처를 들이밀며 핥아달라고 말하는 모양새였다. 이윽고 수증기가 진해졌고, 욕탕 안은 마치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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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발정난 친구들. 걱정하는 사람 홀로 내버려두고 둘이서 즐기니까 좋든? 염병. 내 그 꼴 보기 싫어서라도 일찍 떠나야겠어. 다들 목표로 한 거 꼭 이루고 잘 먹고 잘 살길 바라네.]

“우리가 좀 늦은 모양이군.”

“바트릭씨···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난쟁이가 써놓았던 편지가 수리된 갑옷 위에 툭 올려져 있었다. 써놓은 내용이 그 다웠다. 벨로크는 편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는 한층 조잡해진 갑옷을 차려입었다. 이윽고 짐가방을 등에 멘 채, 아쉬워하는 화린에게 말했다.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지. 움직입시다.”

“···네.”

고개를 끄덕인 화린이 벨로크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산등성이를 따라 지어진 사원은 상당히 넓었다. 여명과 새벽이슬을 맞으며 산중을 걷자 마치 소풍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기는 상쾌했고 풀 냄새는 싱그러웠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 모든 감각들을 뒤로한 채, 풀잎 가득한 봉우리를 넘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집들을 몇 개 지나치자, 이와 비슷한 기와가 얹어진 작은 집 하나가 그들을 반겼다. 화린의 스승이 기거하던 장소였다.

“여기예요. 설마 이곳 지하에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는데···”

화린은 아련한 표정으로 바닥에 난 잡풀과 칠이 벗겨진 대들보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벨로크를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스승은 평소 검소한 생활이 몸에 뱄었는지. 옷장이나 동그란 식탁. 찻잔, 무복 등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가진 것이 없었다. 장로들이 기거하던 숙소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어디에 두신 거지?”

화린은 바닥을 더듬 거릴 때였다. 벨로크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마룻바닥을 잇고 있는 널빤지들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었다. 그는 허리춤의 칼을 뽑아서 그 틈 사이를 꾹 눌렀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방 아래의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가로세로 30센치 정도 되어 보이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눈도 좋으시네요··· 저걸 어떻게 찾으셨담···”

혀를 내두른 화린이 허리를 숙여 안에 있던 상자를 꺼냈다. 방안의 그 어떤 가구보다도 비싸 보이는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상자였다.

중앙에는 용의 머리를 본떠 만든 황금 색깔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거. 어마어마한 물건이 들었을 것 같은데.

화린은 열쇠를 찾아보려다가 그냥 포기하고는 자물쇠를 턱 잡았다. 이윽고 손아귀에 힘을 빡 줘서 자물쇠를 부서트렸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커졌다. 벨로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숨겨져 있던 유산. 미지의 보물 같은 것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들뜨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럼 열게요.”

끼이익 경첩 소리와 함께 마침내 상자가 열렸다. 붉은 비단 위에 올려져 있는 물건은 세 개였다.

마치 떡처럼 보이는 하얀 덩어리 세 개와 산삼처럼 보이는 뿌리 많은 식물 하나. 마지막으로 어찌나 오래됐는지 겉 부분이 삭고 누런 빛깔을 띠고 있는 책 한 권이었다.

화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벨로크가 그녀의 팔을 재생시켰을 때의 반응하고 똑같았다. 어지간히 놀란 듯했다.

“이··· 이건···!”

“좋은 거요?”

벨로크가 묻자 화린은 입을 어버버하다가 겨우 답했다.

“좋다 마다요··· 이건··· 무술을 수련하는··· 아니, 기를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탐내는 보물들이에요. 대환단과 만년설삼.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보물들이라구요.”

시발? 여기서 그게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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