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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61화 (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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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살아간다

처음 들린 것은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였다. 그 사이로 난쟁이의 욕설, 무언가를 땅땅 치거나 자르는 소리 등이 연달아서 들려왔다. 눈을 뜬 벨로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덮여 있던 모포가 벗겨지며 근육 가득한 맨몸이 드러났다. 왜 이 꼴이야?

“으아악! 형씨! 거 인기척이라도 좀 내고 일어나면 안 되나?! 간 떨어질 뻔했잖아.”

그가 고개를 돌렸다. 반파된 암자 사이로, 얼굴이 주황색으로 물든 바트릭이 보였다.

그는 붉은 넝마를 쥐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자 저건 자신이 입고 있던 레드 드레이크의 갑옷이었다. 예술 작품처럼 보이기도 했던 갑옷은 리치와의 격전 후에 폐품이 되어있었다. 그가 물었다.

“그건 왜 들고 있소?”

“왜 들고 있긴?! 고쳐주려고 그런다 왜?”

난쟁이는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쉼 없이 손을 움직여 갑옷을 분해했다. 고리와 묶은 끈, 구멍 뚫린 가죽 상판이 바닥에 어지러이 놓여졌다. 그는 손에 들린 천으로 분해한 갑옷 쪼가리를 닦으며 혀를 찼다.

“아룡이라고는 하나 용의 비늘을 부수고 가죽을 뚫다니··· 빌어먹을 주문쟁이 놈들은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단 말이야. 변덕스럽고 기괴하며 음침한 새끼들.”

저놈이 갑자기 왜 저런데? 벨로크는 바트릭의 낯선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짐가방을 뒤졌다. 갑옷도 한 벌 뿐이었는데. 고쳐준다면 그야 나쁠 것 없었다. 이윽고 그는 가방에서 깨끗한 셔츠 하나를 꺼내 입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흙먼지 가득한 마루 바닥 위에는 자신과 바트릭 둘밖에 없었다. 화린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바깥에서 여인의 흐느낌이 들리고 있었다.

-흐으으으···

풀벌레 소리와 부엉이 소리를 제외한다면 주변은 고요했기에 이는 바트릭의 귀에도 아주 잘 들렸다. 하지만 그는 이 흐느낌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죽 갑옷은 온전히 수리할 수 없는 거 알지? 지금으로서는 이걸 덧대서 뚫린 구멍을 메꾸는 것이 최선이야.”

그가 두툼하고 시커먼 가죽 몇 장을 들어서 흔들어 보였다. 벨로크가 머리통을 깨트려 죽여버린 발록의 유산이었다.

“참나. 내가 살다 살다 악마의 피륙을 다룰 줄이야··· 뭐, 한 번 삶고 기름을 발라 처치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금방 썩을 거야. 조금 쓰다가 다른 갑옷을 사는 걸 추천하고 싶군.”

바트릭은 갑옷의 구멍에 맞춰 가죽을 잘라 툭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철판을 덧대 이를 이어 붙여버렸다. 그의 손에는 시퍼런 불이 뿜어져 나오는 쇠 막대와 망치가 들려있었는데. 쇠 막대에서 나오는 열기는 철도 녹여버릴 정도로 강했다. 주문 걸린 장비로 보였다. 뭐, 미니 대장간 세트 이런 거냐?

그가 지금껏 고대 난쟁이 유물들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난쟁이의 그 꼴이 어색했던 벨로크는 실없는 소리를 던졌다.

“도굴만 할 줄 아는 게 아니었군?”

난쟁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질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 역시도 자신이 이런 짓을 한다는 게 어색한 듯 보였다.

“이래 봬도 나도 난쟁이야. 선조들의 옛 유산에 매료되기 전까지는 제법 이름 좀 날렸었다고.”

바트릭이 손을 움직일수록, 구멍이 숭숭 뚫려 흉하게만 보였던 갑옷은 금세 그럴듯한 모양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색은 알록달록에 그 형태마저도 일정하지 않은 것이 썩 조잡해 보였다. 하지만 눈먼 화살이나 손톱을 한 번 막아 주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벨로크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열기의 현장을 보고 있던 벨로크는 문득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칼집에서 검을 뽑자 이가 듬성듬성 나간 십자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날카롭고 어딘가 신비로운 기운을 풍겼지만, 예전만은 못했다.

수백 마리의 어인, 밀림의 짐승, 식인종, 종래에는 악마의 뼈와 살을 가름으로써 나타난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벨로크를 힐끔 살핀 바트릭이 냅다 말했다.

“그건 도저히 못 고쳐줘. 이 열악한 설비를 좀 보라고, 거기다가··· 그건 성력이 담긴 칼이잖나? 신의 힘이 담긴 파편은 망치와 모루로 고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말도 안 꺼냈는데 주르르 쏟아내는 바트릭을 보며 벨로크는 조용히 칼집에 검을 넣었다. 무식하게 커다랗고 튼튼하던 대검이 못내 그리웠다. 배가 출출해진 그가 빵이라도 꺼내 먹을까 생각하는 찰나 바트릭이 입을 열었다.

“몸 상태가 좀 괜찮아졌다면 그 아가씨··· 아니, 화린이나 좀 돌봐주지 그래.”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소?”

난쟁이가 혀를 쯧 찼다.

“타당한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 하지 않겠나? 그 아가씨···”

바트릭은 말끝을 흐리다가 끝내 탄식했다.

“···한쪽 팔을 잃었어. 포션을 아무리 들어부어도 재생이 안 되더군. 게다가 그 상태에서 제 몸을 돌보기는커녕 이곳 사람들의 무덤들을 파고 있어. 무모한 짓이야. 더럽게 무모하다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벨로크는 늘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했던, 동료애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난쟁이를 바라보았다.

손에 들린 막대기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인지. 모닥불에 비치고 있는 그의 수염과 눈썹은 윤기 하나 없이 뻣뻣했다.

고집스럽고 뚱해 보이는 이목구비였다. 하지만 지금 그 거죽에는 걱정만이 서려 있었다.

벨로크는 때때로 사람들이 내보이고는 하는 이러한 감정의 표출. 변화되어가는 인간관계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렇게 걱정된다면 왜 말리지 않았소?”

“말렸어! 하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군! 그저 광인처럼 중얼거리며 땅만 파댔을 뿐이라고! 거기다가 형씨 역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태니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바트릭은 감정을 담아 망치를 휘둘렀다.

“내가 간다고 해도 뭐 다를 게 있을까 싶은데.”

벨로크는 기절하기 전. 자신을 노려보던 화린의 눈초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말과는 달리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땅거리는 소리 사이로 바트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은 때때로 이성보다 감성이 앞설 때가 있는 법이잖나? 그래서 불안정하고, 그래서 사람인게지. 물론 자네보고 그녀를 달래주고 공감해달라는 말은 아니야. 그저 내가 떠나기 전에 삶을 비관한 동료가 목매달고 죽어있는 모습을 안 보게 해달라는 얘기지. 갑옷 수리비는 그걸로 퉁치자고.”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암자 바깥으로 향했다. 반쯤 작살난 문이 끼이익 비명을 질렀다. 바트릭의 모습을 보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꼭 여동생을 걱정하는 오빠의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철없이 굴다가 동생에게 무슨 일이 닥치면 불같이 화를 내는···

그가 말했다.

“거, 더럽게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군.”

“시발···”

나지막한 욕설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암자 밖으로 나갔다. 사람, 혹은 괴물들이 사라진 사원은 고요했다. 오직 잿더미가 된 바닥과 무너진 돌탑만이 이곳의 몰락을 시사해줄 뿐이었다. 비참한 현장이었다. 한순간에 가족을 잃은 여인에게는 더없이 차가운 공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은 떠 있었다.

벨로크는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를 계속해서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땅 파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산발이 된 여인네 하나가 한 쪽 소매를 덜렁거리며 삽질을 하고 있었다. 무슨 귀신처럼 보였다.

벨로크는 소리내어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저 발소리를 뚜벅뚜벅내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땅 파는 것을 도왔다.

푸스스슥

아름답게 세공된 십자검의 칼집에 흙이 우수수 묻었다. 마치 자신을 이렇게 사용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무식한 근력을 앞세워서 넓은 공터에 동그란 홈을 계속해서 파내어갔다.

“···”

화린은 벨로크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무덤 하나를 완성하면 슬쩍 옆으로 이동해 다른 무덤을 만들었다.

침묵에 잠긴 두 사람은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삽질을 계속했다. 이윽고 공터에는 수십 개의 홈이 만들어졌고, 그들이 생전 사용했던 물품들이 안치되었다. 쓸쓸히 꽂힌 위패만이 이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화린은 한동안 가만히 무덤가 앞에 서 있었다.

제일 상석의 무덤에는 남들의 그것보다 더 크고 화려한 무덤이 있었는데. 화린를 거두어준 스승이자 아비의 안식처였다.

고된 작업에 현기증이 도는지 그녀가 비틀거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다잡고 스승의 무덤 앞에 서서 양손으로 합장을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피식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한쪽 팔이 없는데 합장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이 두 눈을 감고는 남은 팔로 합장을 했다. 이윽고 망자들을 위한 기도를 읊조리며 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벨로크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조금 먼 곳에서 지켜볼 요량이었다.

“···죄송해요. 벨로크씨. 그리고 고마워요.”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오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뭐가 말이오?”

“스승님과 사형제들을 고통에서 해방 시켜준 당신에게 감사를 전하기는커녕 원망부터 한 것이 죄송해요. 그리고 그들의 원수를 갚아준 당신에게 너무나도 고마워요.”

흐느끼는 목소리에 벨로크는 고개를 돌렸다. 무릎 꿇은 화린이 그를 보며 울고 있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막아두었던 댐이 푹 터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자신의 두 번째 가족들을 떠나보냈다.

“가슴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아프면서도··· 텅 비어버린 것처럼 공허한데··· 내가··· 나한테 이런 일이 또 생길 줄은···”

끅끅거리던 그녀가 돌연 한 쪽 어깨를 붙잡았다. 상처가 터졌는지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내가 사원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 그러지 못했겠죠. 난 당신처럼 강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와 사형제들이 겪었을 고통을 외면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나도 그냥 같이 죽었어야 했어요··· 또, 또 나 혼자만 살아남아 버렸어!”

흐르는 눈물과 피가 주르륵 뒤섞여 두 개로 합쳐졌다. 피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서럽게 통곡했다. 지금도 대륙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수 없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다. 악마, 괴물, 혹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잏은 사람들이 놈들을 원망하다가 끝내 자신마저 원망할 것이다.

이 슬픔의 연쇄 고리는 남은 대악마들을 사냥하면 끝날 것이다. 하지만 벨로크의 생각은 좀 더 멀리까지 닿았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한 흑막. 위대한 의지라고 불리우는 그 이방인 신의 개짓거리. 자신이 구한 세상을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망치고 있는 그 오래 산 망령 놈.

“나···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짓을 한 악마들이 싫어요! 내 가족들을 두 번이나 앗아간 그 검은 피의 족속들이 미워죽겠어! 하지만··· 한쪽 팔을 잃은 내가 무얼···”

벨로크는 울부짖고 있는 화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비어버린 한 쪽팔. 덜렁거리는 소매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노르드가 외쳤었던 마지막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신성. 정의되지 않은 미증유의 힘. 세상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고 법칙을 뒤바꿀 수 있는 힘.

“벨로크··· 씨?”

“가만히 있어 보시오.”

벨로크는 그녀가 입고 있던 흰티의 소매를 걷었다. 포션을 들이부은 덕분에 뭉퉁한 혹처럼 재생된 어깨가 피를 주륵 흘리고 있었다.

발록의 손톱에 맹독이 있었거나 혹은 날아간 손이 완전히 짓뭉개졌기에 붙일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갖다 댔다. 화린은 움찔거렸지만 그의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손끝에 와닿는 그녀의 온기, 두근거리는 심장, 시큼하면서도 달큰한 땀 냄새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생각했다.

신성. 뒤흔든다. 뒤바꾼다. 사라진 팔은 다시 나지 않는다. 재생되지 않는다. 이것이 일반적인 세간의 시선이고 세상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뒤튼다면?

간단하다. 팔은 재생시킬 수 있다. 팔은 다시 날 수 있다. 벨로크의 머릿속에서 천둥이 쳤다. 그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이 감각에 집중하며 내면의 신성을 끌어올렸다.

푸른 빛이 화악 퍼졌다. 이윽고 그것은 화린의 몸을 타고 흐르며 그녀의 비어버린 팔에 고운 입자가 되어 모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부지깽이로 지지는 듯한 통증에 화린이 비명을 질렀다. 벨로크는 버둥거리는 그녀의 몸을 단단히 받치고는 계속해서 내면의 신성을 끌어올렸다. 선명한 푸른빛은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 어둠에 물든 사원을 환히 밝혔다.

“조금만 참으시오.”

“하아, 하아. 하아.”

잠시 후. 빛이 사라졌다. 식은땀을 흘리던 화린은 눈을 부릅떴다. 비어 있던 왼팔이 묵직했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느껴졌다. 회린이 시선을 돌려 아래를 쳐다봤다. 그녀가 나고 자랄 때부터 함께 했던, 십수 년의 경험, 정수가 녹아 있던 신체가 멀쩡히 재생되어 있었다.

“이건··· 이건···?”

지금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그는 지금 막 신성의 원리를 깨달았다. 이것은 정말이지 초월적인 힘이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벨로크의 마음속에서는 불구가 된 동료의 신체를 고쳤다는 것에서 온 만족감이 더 컸다.

“상태창보다도 더 쓸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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