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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뭐···라고?”
벨로크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가라앉아 있던 분노와 그리움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길고 길었던 방황의 이유. 고대신은 마치 차나 한잔 하자는 듯 태연한 어조로 그 비밀을 속삭였다.
“위대한 의지라··· 이 얼마나 오만하며 거창한 수식어란 말인가?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 그깟 다른 세계의 침략자 따위가··· 감히!”
노르드의 고요한 눈동자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신의로서의 권위를 차리기 위해 덤덤하게 얘기했지만, 또다시 분노가 치솟는 듯했다. 벨로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씹어먹을 새끼 때문에 내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그가 테이블을 쿵 쳤다. 사족은 집어치우고 어서 말하란 뜻이었다.
“···”
노르드는 자신 못지않게 분노를 불태우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속에 있는 것은 다른 세계에서 온 이계인이다. 정확히는 너의 동향 사람이라고 칭하는 게 더 옳겠구나. 위대한 의지 그놈 역시 모든 것이 회색으로만 들어찬 차가운 세상. 한국에서 왔으니까.”
벨로크는 눈을 부릅떴다. 상상조차 못 했던 사실이었다. 그가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노르드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람이라 표현하기는 했다만, 놈에게는 육체가 없다. 그저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사념체 하나가 너의 몸에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네 몸뚱이와 영혼을 강탈하여 자신이 왔던 세계로 돌아갈 속셈인게지.”
[불지옥 난이도를 선택하셨습니다.]
[아드리아 대륙에 다섯 대악마와 그 추종자들이 뿌리를 내립니다.]
[당신의 선택으로 인해 세상은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기사 벨로크 환영합니다. 부디 대륙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해주시기를.]
아직도 마우스를 딸칵거리며 보았던 그 문구들이 생각난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대륙과 고통받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몫마저 살아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학업을 병행하던 취준생.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 된 땅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촌부의 딸.
악마의 계략으로 인해 존경받던 마법사에서 한순간에 마녀로 몰려 나락까지 추락한 마법사.
악마들에 의해 동료들을 잃고, 끝내는 자신마저 악마가 되어버린 비운의 요정.
악마에 의해 아비와 순결, 이루었던 모든 것을 잃었었던 귀족 영애까지.
내 동료들의 고통. 그들의 삶에 일어났던 그 모든 굴곡들.
물론 그건 게임 속 선택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내면 지낼수록 이 세상이 그저 폴리곤으로 이루어진 가짜가 아니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그 선택도 지금의 대륙을 이 꼴로 만든 것에 조금이나마 일조하지는 않았을까?
벨로크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에는 어떠한 거창한 의무 혹은 사소한 이유라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불러들인 것이 신이든 그보다 더 강력한 존재든, 그저 유희를 위한 장난이든, 아니면 진심으로 도움이 필요했든 뭐든 말이다.
그런데 뭐?
내 몸과 영혼을 빼앗아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날 불러들였다고? 벨로크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다면 화가 나기보다는 웃음이 나올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였다.
“그 빌어먹을 새끼는 대체 뭐지?!”
벨로크가 테이블을 쾅 후려쳤다. 물로 이루어진 탁자가 펑 터져나가며 두 사람의 얼굴에 흠뻑 끼얹어졌다. 차가웠다. 하지만 불같은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노르드는 씩씩거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손짓해서 테이블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짧게? 길게? 놈이 이 땅에서 벌여놓은 짓거리들이 워낙 많아서 말이다.”
벨로크가 고갯짓했다.
“당신이 놈에 대해서 아는 사실 전부.”
“전부라··· 그렇다면 고대신들의 몰락과 너희 지상 종족들의 부흥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구나···”
노르드가 한쪽 손을 뻗었다. 그러자 수면 아래에서 어떠한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해신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몇만 년 전 대륙의 흔적이었다.
“약혼녀의 서재에서 읽었었지? 깊은 심연 속에 잠들어 있는 자. 천공성의 지배자. 몸 하나로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자. 이제는 잊혀진 존재들. 고대신들에 관한 얘기 말이다.”
그래, 터무니없는 과장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문이 축소된 거였지.
“나의 본체와 이시스. 기간토마키아가 활동할 무렵의 대륙은 굉장히 황폐했었다. 그럴 수밖에··· 우리 셋은 너무나도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몸을 한 번 뒤척이기라도 하면 해일, 지진, 폭풍이 일었었지.”
해수면은 창공을 날아다니며 번개를 흩뿌리는 새, 한 나라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몸뚱이를 가진 거북이, 수천 개의 머리를 가진 심해 속의 뱀을 띄워냈다. 그들은 여타 일반적인 생명체들처럼 화내거나 웃거나 울면서 이 대륙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 우린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재앙이었던게지.”
장면이 바뀌었다.
지진으로 인해 광산이 무너지자 그 속에 있던 난쟁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하늘에서 느닷없이 수백 줄기의 벼락이 떨어지자 숲은 불바다가 되고 요정들이 울부짖었다.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땀 흘려 문명을 이룩했지만 들이닥친 해일로 인해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 종족은 고통받았고, 용은 방관했다.
고대신들은 그냥 살아가는 것일 뿐이었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지상 생명체들에게는 재앙일 뿐이었다.
“그때 였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인간이 이 아드리아 대륙에 나타난 것이.”
벨로크의 눈에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양인 한 명이 나타났다. 느닷없이 이 황폐화 된 땅에 떨어진 이방인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울부짖었고, 고통스러워했으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당연했다. 문명이랄 것도 없이 천재지변만이 일어나는 세계에서 현대인이 어떻게 적응했겠는가?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그의 조상 중에 영웅의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특별했는지는 몰라도, 그는 꾸역꾸역 몇만 년 전의 대륙을 방랑하며 살아나갔다. 그리고 한 가지 목표를 세우게 된다.
“녀석은 재앙의 근원인 우리들을 죽이거나 혹은 봉인시키기 위해 자신과 뜻을 함께할 동료들을 모았다. 미친 짓이었지. 하지만 그 미친 짓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미친놈들이 넷 모였어. 각각 인간, 거인, 요정, 난쟁이. 이렇게 넷이었지.”
장면은 대륙을 방랑하는 다섯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중에서 한 명은 벨로크에게도 퍽 익숙했다. 붉은 머리칼을 치렁거리며 갑옷을 입고 있는 여기사는 태양의 여신 헬레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간토마키아가 녀석들의 손에 의해 죽어버린 것이지.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의지 그 자체가 녀석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줬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니면 모든 지상 생명체들의 의지가 합일을 이뤄 놈들에게 힘을 내려준 것일지도···”
노르드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세상 그 자체가 자신들을 거부했다고 생각하자 슬픈 모양이었다. 벨로크는 건조한 눈동자로 의문을 제기했다.
“모든 지상 생명체라는 말에는 어폐가 좀 있지 않나? 당신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어인들과 나가들의 추앙을 받던 나와는 다르게 다른 두 녀석들을 그렇게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제 내키는 대로 행동했었거든. 그러니 따르는 놈들이 있을 리가 있나. 어쨌든 이야기를 계속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