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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58화 (15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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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사원

모습을 드러낸 건 온 몸이 시뻘건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마치 해부학을 할 때 사용하는 인형 모양처럼 내부장기를 드러낸 끔찍한 모습이었다.

“하하하. 그래, 저 반토막의 말대로다. 아쉽게도 무식한 네 일행 중에 교단의 성기사는 없어보이는 군. 게다가 구슬은 내 주군의 손에 있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하며 거룩하고 또한 신성한 곳에 똬리를 트신 그분의 손아귀에 말이다!”

놈은 안구 없는 눈을 히죽거리며 웃었다. 공기가 우르르 울리고, 듣는 것 만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구토까지 나오려고 했다. 또 무슨 요상한 주문을 사용해서 자신을 강화시킨 모양이었다.

놈이 한 쪽 손을 뻗었다. 그러자 팔 주위로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을 적시더니 한쪽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것은 점점 강해지는 격류처럼 거세게 소용돌치 치기 시작했는데. 마치, 폭풍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죽지 않는 마법사라니··· 이 얼마나 불합리하며 터무니 없는 존재란 말인가?”

스스로에게 도취된 리치는 마치 팽이를 돌리듯 몸 주위로 폭풍을 일으키며 말했다. 녀석의 탁한 동공이 향하는 곳은 벨로크였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전사는 겁에 질렸다기 보다는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지만 리치는 상관하지 않았다. 손짓 한 번이면 저 필멸자의 피와 육신은 순식간에 분해될 것이니까.

“아무튼 재밌었다. 네 친구들은 내가 실험재료로 잘···”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주먹을 꾸욱 쥔 벨로크가 혼잣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쓰라고? 어떻게?”

그의 말을 끝으로, 기사의 주먹에 푸른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것은 무서운 기세로 집약되며 강맹한 힘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래 산 괴물은 두려움을 느꼈다. 저 정체불명의 힘은 무언가 이상했다. 마력도 성력도 아니다. 동방인들이 사용한다는 기나 내공 또한 아니었다. 저건 대체···

뼈만 남은 요정이 생각할 때. 느닷 없이 파도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살점 없는 코위로 비릿한 물내음이 맡아지기 시작했다. 피가 흐르지도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 몸이건만, 언데드는 어째선지 한기를 느꼈다.

“무슨 개수작이냐!”

불안함을 느낀 리치가 양팔을 뻗었다. 그의 의지에 화답한 주문이 벨로크를 향해 쇄도했다. 끼고 있던 마법반지 또한 요란하게 반짝이며 또 다시 주문을 사출했다. 사악한 저주, 몸을 태우는 원소, 눈을 멀게하는 암흑.

벨로크는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바라보다가 전신을 폭발시킬 기세로 움직였다. 마녀의 저주가 서린 단검, 용의 벼락이 주문 몇 개를 파훼시켰다. 이윽고 한계를 벗어난 전사의 움직임이 또 다시 흐릿한 잔상을 만들어내며 마법사의 시선을 현혹시켰다.

벨로크에게 필요한 건 녀석을 끝장낼 수 있는 파괴력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 그 힘이 손에 들어왔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고, 그것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꺼지지 않는 심장이 거칠게 맥동하며 그의 육신을 재생시켰다. 소용돌이가 아무리 회전하며 몸을 갉아먹어도 재생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마침 내. 주문을 뚫어낸 벨로크가 손을 뻗었다. 대포처럼 쏘아진 손아귀가 리치의 두개골을 꽈드득 잡았다.

“···”

온 몸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전사의 모습은 흡사 악귀처럼 보였다. 머리칼은 잔뜩 헤쳐져 거칠게 흩날리고 있었고, 그 속에 감춰진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오롯이 직시하고 있었다. 산자가 뿜어내고 있는 거친 분노에 죽다만 망령은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죽지 않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에 더한 공포심을 느꼈다.

“소용 없다!”

와락 소리친 괴물이 제 안의 어둠을 끌어올렸다. 놈의 공격에 몸이 망가지더라도 다시금 재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식 세계 속 주문을 끄집어내기 위한 전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치는 그러지 못했다. 늘 그에게 무한함 힘을 제공하던 지하의 마력이 어딘가에 막히기라도 한듯.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그의 온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 무슨··· 이럴 수는 없다. 성기사도 아닌, 한낱 칼잡이가 이럴 수는···”

벨로크는 당황하고 있는 놈을 보면서 목을 틀어쥔 손에 뿌득 힘을 가했다. 그럴수록 목에 걸린 인어의 펜던트가 환하게 빛나고, 푸르른 기운 또한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반발하듯 탁한 녹광이 파지직 스파크를 일으켰다. 하지만 제 아무리 지하의 마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고대신의 신격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존재를 비틀고, 섭리 자체를 뒤흔드는 힘.

“끄··· 끄아아아!”

몰아치는 파도처럼 닥친 해신의 힘은 타락한 육체와 영혼을 무자비하게 휩쓸었다. 이윽고 그 근원이 되었던 그릇조차 와르르 깨트려버렸다. 그것이 천 년을 넘게 살아온 망자의 단말마였다. 녀석은 푸른 귀화와 함께 재가 되어서 흩날렸다.

이를 빨아들인 세이렌의 목걸이가 요란하게 반짝였고, 벨로크는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꼈다. 몇 달 만에 경험하는 레벨업이었다.

“뭐, 뭐야? 형씨! 그 괴물을 죽인건가? 대체 무슨 수로··· 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형씨 살만하면 우리 좀 도와줘!”

“죽어어어!”

벨로크는 고개를 돌렸다. 피투성이가 된 화린이 발록의 손톱에 제 주먹을 맞부딪히고 있었다. 무식한 육탄적이었다. 괴물 역시 주인을 잃었다는 사실에 광분해서인지 더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재생시킨 다리가 다시 떨어져도, 바트릭의 사격에 눈 한 쪽이 날아가도 악을 쓰며 덤벼들었다.

크아아아아!

거대한 손톱과 건틀릿이 맞부딪힌 순간. 물리법칙에 의해 그녀의 왼팔이 뿌드득 찢겨나갔다. 하지만 그 대가로 화린은 남은 주먹을 놈의 명치에 박아넣을 수 있었다. 공기가 쿵 떨렸고, 진동이 일어났다. 살가죽이 움푹 들어간 발록이 울컥 피를 토했다. 단련된 주먹은 외피를 뚫지 못했지만, 파동의 힘이 내부를 진탕시켰기 때문이다.

“으아아아!”

외팔이가 된 화린은 남은 한손을 미친듯이 찔러넣었다. 남은 한 쪽 무릎. 또 다시 복부, 십자검이 박힌 옆구리까지. 그때마다 땅이 쿵쿵 울리며 발록의 뼈가 뿌득 부러졌다. 시커먼 털 사이로 피가 폭포처럼 흘렀다. 하지만 괴물의 회복력과 맷집은 인간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법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죽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아가씨! 아니, 화린! 그만! 이제 그만해! 그러다가 진짜 죽어! 죽는다고!”

바트릭이 엄호사격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을 찢어발기려면 눈이 멀면 안 된다. 발록은 분노한 상태에서도 남은 한 쪽 눈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게다가 짐승의 손발톱이 들이닥칠라 하면 바트릭이 요령껏 폭탄을 터트려서 그 궤도를 바꿨다. 하지만 그도 이제 한계였다.

화린은 날아간 팔에서 오는 쇼크가 아니더라도 과다 출혈로 죽을 듯 했다. 전위를 맡고 있는 그녀가 죽으면 바트릭 역시도 끝장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1초도 안 되는 사이. 모든 상황을 파악한 벨로크가 땅을 박찼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내부에서 자신을 끌어들이고 있는 시스템 창의 힘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 새끼가? 벨로크는 거칠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가 손쉽게 벼락과 마녀, 불의 거인의 힘을 꺼내 쓸 때 처럼. 이 미증유의 기운은 자신의 육체는 물론 영혼마저 속박해버렸다. 이대로 둔다면 꼼짝 없이 회색 도시로 끌려갈 듯 싶었다.

그 때. 목에 걸고 있던 인어의 펜던트가 푸르게 빛났다. 이윽고 시스템 창에게 저항하는 벨로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예의 그 파괴적이면서도 전율적인 기운. 신성이었다.

내면의 힘과 신성이 서로간에 맞부딪히며 파지직 스파크를 흘려댔다. 벨로크는 속이 진탕되는 느낌이었지만, 이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으득 물고는 발록에게 달려들었다. 이윽고 푸르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주먹을 벼락처럼 휘둘렀다. 그 섬찟한 기세에 괴물의 고개가 돌아갔다. 녀석은 거세게 포효하며 자신의 손톱을 휘둘렀다. 두 몸뚱이가 맞부딪쳤을 때. 꽈릉 벼락이 쳤다. 벨로크의 주먹은 괴물의 두터운 가죽을 두부처럼 갈라버렸다.

뻐억. 이에 그치지 않고 녀석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조각났다. 흩날리는 살점과 뇌수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바닥을 굴렀다. 주문을 연달아 얻어맞고, 힘을 꺼내 쓰고, 독과 저주에 중독되고.

그는 울컥 피를 토했다. 존나게 피곤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사로잡는 것은 육체의 고통이나 피로감이 아니었다. 매캐한 매연 냄새, 비릿한 바다 냄새. 어느 한 쪽에서는 회색 도시의 음울한 풍경이, 어느 한 쪽에서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어있는 바닷가가 환상처럼 아른거렸다. 무슨 약에 중독된 것 같았다.

“우하하하! 그래! 그거지! 형씨! 어? 형씨?”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화린과 소리치며 다가오는 바트릭을 뒤로한 채, 그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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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아아

물 비린내가 진해졌다. 벨로크는 발목까지 잠기는 파도 위에 서 있었다. 시야가 닿는 곳 어디에도 굴곡이나 볼록함이 없었다. 그냥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바다와 지평선이 그를 맞이했다.

회색 도시는 아니었다. 그곳에서 깨어났다면 매캐한 매연 냄새와 함께 점멸하는 모니터가 자신을 먼저 맞이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서와라. 나의 계약자야.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것은 간만이구나. 그 때 봤을 때는 시간이 촉박했지.]

발목까지 잠기는 물위로 웬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베로니카의 것보다 더 진하고 깊은 색깔의 푸른 머리칼에. 새하얀 천으로 온 몸을 빈틈없이 싸맨 여인네였다. 그녀는 산호로 만든 삼지창을 바닥에 턱 꽂은 채, 벨로크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벨로크는 조금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 때 봤을 때는 좀 더 끔찍한 꼬라지였던 것 같은데.”

“인간의 짧은 시야로 모든 것을 재단하지 말거라. 결국 너희 종족들의 기준에 맞춘 겉포장이 아니더냐?”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 괴물이 이렇게 된다는 건 좀··· 이 기이한 공간에 대한 의문과 느닷없이 나타난 고대신의 모습에 벨로크는 영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인은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본체에 대한 평가가 박하구나. 네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영혼을 담아둔 그릇에 따라 모습이 변한 것 뿐이다. 이 편이 힘의 손실을 최소화 할 수 있거든.”

그러고 보니 목에 걸고있는 펜던트의 외양과 닮기는 했군. 벨로크는 쪼그려 앉아 얼굴에 바닷물을 끼얹었다. 짭짤했다. 또한 시원했다.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날 시스템 창으로 부터 구해준 것은 알겠소. 이곳으로 끌고온 것 또한 알겠군. 얘기를 나눠보자는 거지?”

“이제 좀 그 얼빵한 표정이 사라졌구나. 그래, 맞다. 네가 신성을 취득한 것을 그 녀석이 알아냈다. 그리고 레벨···업? 격을 쌓은 행위를 빌미로 해서 너를 끌어들이려 했지. 난 그것을 막았고, 너를 이곳으로 불러냈다. 놈의 음모로부터 널 지켜내고,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지.”

노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한쪽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의지에 화답한 해수면이 용오름치듯 솟아오르더니 테이블과 의자의 형태로 바뀌었다. 벨로크가 보기에 저건 개지랄이었다. 아니, 힘자랑인가? 그녀는 그 마음을 읽었다는 듯 후후 웃으며 반투명한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그에게도 권하며 팔짱을 척 꼈다.

“공통의 적을 상대로 싸워나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대등한 힘? 믿음? 서로를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계약? 오. 물론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난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신뢰다. 얄팍한 믿음이나 주종관계에서 오는 계약 따위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것이지.”

노르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혼자서 질문하고 답했다. 벨로크는 저놈이 원래 저런 놈이었나? 생각했다. 거대한 덩치를 가졌을 때 와는 달리 아주 수다스러웠다. 또한 부드러웠다. 이게 뭔? 그는 당황했지만, 또 다시 속마음을 읽은 저 여인네가 웃자 그냥 아무 생각도 안하기로 했다. 그가 물었다.

“신뢰라··· 단순한 계약관계에서 벗어나 당신을 온전히 믿어보란 소리인가? 왜? 그리고 무슨 수로?”

“그야··· 앞으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녀석. 내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위대한 의지는 그 정도로 괴물같은 놈이니까. 서로 전력을 다해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경계하다가는 신성이고 뭐고, 나란히 죽을 것이다.”

“일이있는 말이지만 나로서도 당신을 온전히 믿기는 힘들군. 넌 강대한 옛신이고, 분명 내가 모르는 비전들을 많이 알고 있을테니까.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벨로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노르드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생각이지. 나도 하루 아침에 믿어달라는 말은 아니다. 그저 서로간에 시간을 좀 가지며 관계를 구축하자는 얘기였지.”

그녀는 실핏줄이 보일 것 처럼 투명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이윽고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마침. 우리들의 관계를 끈끈하게 구축하기에 좋은 만담거리가 있다.”

벨로크는 그녀의 의기양양한 웃음에서 호기심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오만함 혹은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이 정보를 듣지 않고는 못베길걸?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르드가 말을 이었다.

“평범하게 잘 살고 있던 너를 이 엿같은 세계에 빠트리고, 억지로 칼을 쥐여주며, 괴물과 인간들을 도살하게 한 원흉. 너의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시스템창. 위대한 의지라고도 불리우는 그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정체. 내가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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