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강철의 사원
“벼락과 저주. 트롤을 넘나드는 재생력. 거기다가 거인의 괴력과 달인의 검술이라··· 하하하. 이거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렵군. 이봐. 인간. 아니, 너 정말 인간 맞나? 발바도스나 사타나기아가 만들어낸 키메라 아니야?”
벨로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렁거리는 로브를 입은 요정 하나와 후드를 뒤집어쓴 괴인 하나가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요정은 손가락에 화려한 보석반지들 끼고, 큼지막한 귀걸이를 차고 있었는데. 요란한 옷차림이 마법사란 걸 대번에 알려주었다.
그래, 요술쟁이. 이런 음습한 일에는 언제나 한 발 걸쳐 있는 것이 그놈들이지.
거기다가···
벨로크는 요정의 겉모습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체처럼 창백한 회색 피부와 보라빛 입술이 음침하게 빛났다. 흑요정이었다. 오래 전 지상 종족과 지하 종족의 전쟁 당시. 마력을 받아들이고 지하인들의 편을 든 타락자들. 예상이 점점 맞아떨어지는 군.
벨로크는 놈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이 갔지만, 그게 저 놈과 실실 쪼개며 대화할 거리는 되지 않았다. 그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넌 뭐하는 새끼냐.”
“하하. 뭐하는 새끼? 이거 당돌한···”
중얼거리던 요정이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그의 앞에 투명한 역장이 생겨났다. 푸른 단검이 불통을 튀기며 튕겨나갔다. 그 위로 벼락마저 날아들었다. 그 충격 때문일까. 날아다니던 요정과 괴인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흑요정은 까마득한 창공에서 떨어지는 와중에도 와하하 웃었다.
“하하하. 이거 참. 성격도 급한 놈이로군. 너 인간 같지 않은 인간아.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했나?”
흑요정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옆에 있는 괴인의 후드가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다. 직후 녀석은 길게 빠진 짐승의 주둥이와 머리의 뿔. 피막 날개와 가시 꼬리를 덜렁거리는 거대한 짐승이 되었다.
크아아아아악!
저건 또 뭐야.
“바, 발록! 지옥의 파수꾼! 고서에서나 등장하는 괴물이 왜 여기에!”
바깥의 소란에 문을 연 바트릭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쿠웅. 짐승의 거대한 발이 판석을 쩌억 조각냈다. 덩치 만큼이나 무게가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흑요정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발록의 머리를 턱 밟고 서 있었다. 한 쪽 턱을 쓰다듬으며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썩 거만했다.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자부심.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오만함이었다. 녀석은 마치 품평하듯 벨로크를 보며 실실 쪼개다가 양팔을 확 펼쳤다.
“내 소개를 하지! 나는 맘몬! 광기의 침탈자이자! 그 분의 첫 번째 사도! 오른손으로는 죽음의 향취를 왼손으로는 하늘을 찢어발길···”
말을 하던 그가 다시 한 쪽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반지 중 하나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역장이 생겨났다. 룬 문자가 새겨진 단검이 퉁 튕겨나갔다. 요정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괴물같은 근력이지만 단검의 날이 영 안 좋군. 너. 무식한 전사야. 끝났다면 내 소개를 계속해도 되겠나? 마법사에게 있어 이 행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나의 존재 의의를 밝히고 타인의 삶에 오롯이 나를 관철···”
중얼거리던 요정이 흠칫 입을 다물었다. 시릴듯한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내리자 룬 문자가 새겨진 단검을 중심으로 바닥이 얼어붙고 있었다. 그 기세가 강하고 또한 빨랐다. 털이 숭숭한 발록의 발 또한 금새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하지만 요정은 오히려 흥미를 내비췄다.
“오호. 저주 뿐만이 아니라 냉기까지?”
새꺄. 언제까지 여유만만한지 보자. 놈이 감탄하든 말든 벨로크는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은 주문쟁이이자 요상한 사술의 사용자였고, 자신은 칼잡이였다.(잡다한 재주를 부리고 있다고는 하나) 개수작을 부리기 전에 침묵시키는 것. 유구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온 마법사의 상대법이었다.
물론 상대가 이를 모를리가 없었다.
요정이 한 쪽 손을 뻗었다. 주문의 전조도 없이 보이지 않는 힘이 뿜어져 나왔다. 기세로 보아 성벽도 부술법한 위력이었다. 양뿔 괴물 또한 털이 숭숭한 짐승의 손을 휘둘러왔다. 어느 것 하나라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공격이었다. 맞는 순간 아룡의 비늘로 만든 갑옷이든 단단한 피부든 피떡이 될테니까.
벨로크는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흐읍 숨을 몰아쉬고는 뜀걸음에 박차를 더했다. 그로서는 휙휙 지나가는 시야에 조금 더 힘을 끼얹은 것 뿐이었다. 하지만 발록의 붉은 눈과 흑요정의 손짓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판석에 깊은 족적 몇 개가 새겨졌고, 바람이 불었다.
잔상과 함께 사라진 벨로크가 괴물의 아래를 지나갔을 때.
끄어어어어!
털복숭이의 다리가 무참히 찢겨나갔다. 고통에 울부짖는 괴물이 기우뚱 넘어지자, 거만하게 미소 짓고 있던 흑요정 또한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흙먼지와 함께 고급스러워 보이던 로브가 한순간에 넝마가 되었다.
“무슨···”
요정은 말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거대한 망치같은 주먹이 코앞까지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맘몬은 입을 벌려 주문을 외치기 보다는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주문이 각인된 마법반지들이 요란하게 반짝였다. 역장이 제일 먼저 생겨나며 벨로크의 주먹을 일차적으로 저지했다. 물론 순식간에 깨졌다. 하지만 잠깐의 틈 정도면 반지의 다른 마법이 작렬하기에는 충분했다.
화살처럼 쏘아진 비전이 벨로크의 복부를 강타했다. 아래에서 솟구친 화염이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주변에서 일어난 바람 또한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몸을 찢어발겼다. 시발. 이새끼 대체 뭘 두른 거야? 온 몸에서 피를 뿜은 벨로크는 암자의 문을 콰앙 부수고 그 속에 처박혔다. 원치 않게 거리를 내어준 셈이었다. 피식 웃은 요정이 로브에 묻은 먼지를 털며 한 쪽 손을 뻗었다.
“정말이지 전율적인 움직임이로군. 요정왕이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준비된 마법사란건 언제나 전사들의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는 법이니까.”
그의 손끝에서 새카만 기운이 넘실거렸다. 어느 새 다리를 붙인 발록 또한 거칠게 포효하며 달려들려고 했다. 그 때. 탕 소리와 함께 요정의 머리가 뒤로 홱 젖혀졌다. 그리고는 털썩 쓰러져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돼, 됐다! 하하하! 병신같은 새끼! 네깟놈이 아무리 주문을 외워봐야 난쟁이 유물 앞에서는 소용 없는 법이지.”
저격을 끝마친 바트릭은 허리춤에서 폭탄을 몇 개 꺼내 발록에게 휙휙 던졌다. 땅이 쿠르르 울리고, 괴물은 날개를 접으며 몸을 웅크렸다. 보기와는 달리 겁이 많은 모양새였다. 잠깐의 시간을 번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형씨! 저 귀쟁이 새끼는 내가 처리했으니 어서 일어나서 저 괴물만 처리해!”
“안 끝났소.”
“뭐, 뭐?”
피섞인 침을 퉤 뱉은 그가 몸에 묻은 파편을 털었다. 이윽고 다시금 망령의 힘을 담아 단검을 휙 던졌다. 단검은 연기를 가르고 튀어나오던 검은 해골과 맞부딪쳤다. 둘은 서로간에 힘겨루기를 하듯 소름끼치는 귀곡성을 지르다가 스르르 소멸했다.
바트릭은 흩어지는 먼지를 보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연기 사이로 시커먼 인영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봐··· 농담이지? 정확히 미간을 맞췄다고···”
“보이는 대로 믿지 마시오. 이 엿같은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참 많으니까.”
벨로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린을 보다가 땅을 박찼다.
“푸흐흐··· 잘 알고 있구나. 어째 이와 같은 일을 많이 겪어본 것처럼 보이는군.”
요정이 웃음을 터트렸다. 난쟁이는 그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탁한 빛을 띠고있기는 하나 그래도 생명체의 외형은 유지중이던 요정의 얼굴이 끔찍하게 변해있었기 때문이다. 살점도 없이 썩어 문들어진 피부, 텅빈 안구 대신 번뜩이는 녹색 광망. 하얗게 샌 머리카락까지.
몸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이 녀석이 단순한 부활자가 아니란 걸 말해줬다. 고대 유적에 대한 호기심 만큼이나 괴물에 대한 책을 살피고는 했던 난쟁이가 입을 떠듬 거렸다.
“리, 리치···”
뼈만 남은 요정이 턱을 덜그럭거렸다. 녀석의 광망이 흉측하게 번들거렸다.
“이 모습을 내보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오 백년? 아니, 칠 백년 만인가?”
망령 다음은 이제 또 마법쓰는 해골이냐? 이미 별의별 괴물을 다 겪어본 벨로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놈이 변신을 했으니 경험치를 더 주겠지란 생각을 하며 달려들었다. 녀석으로서도 저 지칠 줄 모르는 전사가 덤벼드는 것이 부담 되는지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발록을 향해 소리쳤다.
“이리와라!”
크어어어어!
짐승 주둥아리의 괴물은 날개를 펄럭거리며 제 주인에게 날아가려 했다. 벨로크로서는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놈이 저걸 타고 하늘에서 주문이라도 퍼붇는다면 칼든 전사로서는 별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뜻했다. 그는 달리는 도중에 내면의 힘을 끌어올렸다. 이윽고 한 쪽 손을 뻗으며 무차별적으로 벼락을 내리쳤다.
콰르르릉 쾅. 노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몸을 뒤흔드는 전류에 발록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하지만 지하의 파수꾼은 한 발자국 씩 제 주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리치 또한 녀석을 향해 다가가면서도 벨로크 쪽으로 주문을 쏘아냈다.
꺄아아악!
보랏빛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쇠사슬들이 그의 발을 붙들었다. 체인 하나하나가 망령으로 이루어진 삿된 물품이었다. 울부짖은 망령들은 이윽고 그의 온 몸으로 스며들며 정신을 교란시켰다.
[그 분의 힘을 받아들여라.]
[거부하지 말라. 너의 육신을··· 영혼을 바쳐라···]
그 한순간에 벨로크의 정신은 모든 것이 보라색으로 가득찬 공간으로 끌려갔다. 이윽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유혹, 겁박, 달램, 공포.
광기의 저주가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며 뇌를 쿡쿡 찔러댔다. 사원의 수련자들을 정신을 파괴시킨 주문이 이것인 모양이었다. 물론 격을 쌓은 전사인 벨로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보다 더한 괴물의 중압감도 견뎌냈었으니까. 하지만 머릿속이 어지럽자 전사는 벼락을 뿜어내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마법사나 주술사가 아니었다. 이건 빌려쓰는 힘에 불과했다.
“이런 시발!”
벨로크가 멈칫하자 바트릭이 다시금 머스킷을 쐈다. 허나 납탄환은 발록의 날개를 조금 뚫었을 뿐이었다. 크기가 작았다. 발록은 무방비상태에 놓인 벨로크를 끝장낼까. 주인에게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다가오는 인영을 살피지 못했다. 강철의 색을 띤 장갑 하나가 놈의 날갯죽지를 턱 잡았다. 이윽고 한 쪽 날개를 뿌드드득 뜯어버렸다.
끄이이이익!
산채로 생살이 뜯겨나가자 비명을 지른 괴물이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등뒤에 타고있던 여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산발이 된 머리로 악을 쓰며 녀석의 상처를 후벼팔 뿐이었다.
“더러운 악마! 죽어어어어! 죽어어어!”
화린이었다. 그녀는 자기 쪽으로 기둥같은 꼬리가 날아온다는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주먹을 휘둘렀다. 그 속에는 정련된 움직임도 비전도 없었다. 그저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 증오와 분노에 모든 것을 맡기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가씨! 위험해! 염병! 피하라고!”
바르릭이 짧은 다리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역시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죽을 속셈인 듯 싶었다. 놈이 꼬리를 휘둘러서 그녀를 곤죽으로 만들기 전. 번뜩이는 섬광이 그 사이를 갈랐다. 벨로크가 던진 십자검이 발록의 남은 날개마저 뜯어냈다. 이윽고 녀석의 옆구리에 틀어박히며 깊은 치명상을 입혔다.
“이 땀내나는 년이···”
리치가 한 쪽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 그 목표를 바꿔야했다. 순식간에 접근한 벨로크가 주먹을 휘둘러왔기 때문이다. 강철도 깨부수는 주먹이 리치의 두개골을 부쉈다. 하지만 뼈만 남은 손가락은 기어코 전사의 몸에 그 족적을 새겼다. 녀석의 손길이 닿는 순간. 벨로크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저주와 주문의 여파로 인해 무겁던 몸이 한층 더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독이었다.
그것도 가슴팍이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맹독이었다. 그는 울컥 피를 토했지만 내면 속 투쟁심을 꺼트리지는 않았다. 또 다시 놈에게 시간을 준다면 무슨 주문이 나올지 몰랐다. 고통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고, 인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벨로크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휘둘렀다. 높게 올렸던 발을 강하게 내려찍었다가 다시금 회전시키며 놈을 또 후려쳤다. 그의 움직임은 무술이라고 부를 정도로 정련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야생적이고 폭발적이었다. 사악한 해골이 아무리 보호막을 둘러봤자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뼈마디가 툭 부러지고, 갈비뼈가 와르르 무너졌다. 종아리 역시 이쑤시개처럼 비산했다. 벨로크의 몸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타락요정은 제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그저 작은 뼛조각이 되어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후우우우.”
벨로크는 고통, 후련함, 의구심. 등을 한대 모아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슬쩍 눈을 감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쯤이면 떠올랐어야 할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젠장. 한술 더 뜨는 놈이었군.
“형씨! 리치는 경지에 오른 성기사의 성력이나 어딘가에 있을 생명의 주머니를 파괴할 때 까지는 영원히 죽지 않아! 그야말로 불로불사의 괴물이라고!”
상성이 안 좋다는 뜻이었다. 아델만 있었다면 어렵지 않았을 괴물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아니, 하다못해 카라라도 있었다면 상대의 주문을 차단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성기사나 마법사를 키울 걸 그랬군.
벨로크가 자기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내고, 화린을 도와 발록의 발밑을 이리저리 구르던 난쟁이가 소리친 순간. 조각났던 뼛조각들이 스르르 움직였다. 이윽고 소용돌이 치듯 파편을 회전시키면서 주변에 있던 수련생들의 살점 또한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치 촉수에 휩싸인 알을 보는 것 같았다.
"형씨! 우, 우리 그냥 도망치는 것은 어때? 상황이 너무..."
바트릭의 외침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뼈의 폭풍은 전사의 힘을 버텨내지 않고, 부드럽게 흡수했다. 이윽고 믹서기처럼 회전하며 그의 손거죽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린 벨로크가 물러난 사이. 맥동하던 알이 꿈틀거렸다. 지저분하고 불경한 의식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