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강철의 사원
“커컥···”
그는 늘 그래왔던 대로, 괴물의 목을 무심히 자르던 비정한 기사의 모습으로 중년인을 끝장내려 했다.
간단했다. 그의 근력은 거인 다섯을 합친 것보다 강했다. 이대로 손만 움직이면 끝이었다.
지금껏 수백, 수천 번을 넘게 반복해온 일. 살인 혹은 퇴치. 고급스럽게 표현하자면 집행 혹은 처단.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중년인의 상태는 구제가 불가능해 보였고, 악마에게 조종당하는 듯 보였으니까. 하지만 벨로크는 망설였다.
“안···돼, 안···돼애애애애···”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이쪽으로 기어 오려는 화린. 고통스러운 듯 눈을 부릅떴으면서도 입가 한편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 중년인.
두 사람의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감정은 아니었다. 게임 속 세상. 아니, 아드리아 대륙을 방랑하며 겪어온 그간의 삶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데이터 쪼가리가 아닌, 영혼이 실제하고 진짜 심장이 뛰고 있는 인간들. 나와 같은 존재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느새 이곳에 동화되어 버렸다.
망설임, 나약함, 고뇌.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등 필요 없는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회색 도시에서 온 이방인은 머리가 아파왔다.
“생긴 것만 보면··· 용의 목도 자를 전사처럼··· 보이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정이··· 많으시군.”
벨로크가 망설이자 중년인은 오히려 칼날을 자신의 두 손으로 꾸욱 잡았다. 이윽고 제 입을 꿰뚫고 있는 검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안심이 되는구려. 화린을··· 믿고 맡길 수 있겠어.”
“스승님! 뭐 하시는 거에요! 대체 왜!”
울부짖는 화린을 뒤로한 채, 벨로크가 말했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오. 내 동료 중에는 악마가 되었다가 정신을 차린 사람이 있소. 비록 몸은 악마지만 정신은 인간이지.”
중년인은 피거품을 뿜으며 웃었다.
“아. 그런 거··· 무리일세. 나는 아니, 우리는 말이야. 그 목소리가 들려올 때부터 이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걷,ㄴ··· 전부다 아가레스. 그··· 놈···”
중년인은 칼을 쥔 손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반쯤 잘려 나간 그의 목이 덜렁거렸다.
“···화린을 잘 부탁하네.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야··· 내 방 지하··· 영약이 있네. 비급도··· 자네가 전사라면 필히 탐낼 수밖에 없을 터···”
그는 흐릿해진 눈으로 제자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봤다. 이윽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바깥에 있는 자들은··· 이미 괴물이네. 자의식이라고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저 몸뚱이와 살인 기술만을 가진··· 인형... 망설이지 말··· 특히 장로들은··· 더러운··· 끅”
마침내 두 손이 추욱 늘어지고 그의 고개가 퍽 꺾였다. 머리 잃은 시체가 피 분수를 뿜었다.
“아··· 으, 으아아아··· 아···”
머리는 산발이 되고, 얼굴은 피 칠갑이 된 화린은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삐그덕 고개를 돌리더니 벨로크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왜··· 왜···?”
“···”
벨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중년인의 외눈을 감겨주었다.
“방법이··· 분명 방법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왜 당신이란 사람은 늘 칼부터···”
머리칼을 늘어트린 화린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비척비척 움직이다가 돌연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남의··· 소중한 가족을! 그렇게 무참히! 왜, 왜애애애애!”
“이, 이봐 화린··· 컥.”
바트릭이 그녀를 말리려 들었지만 걷어차여서 휙 날아갔다. 벨로크는 십자검을 바닥에 꽂은 채, 주먹을 꾹 쥐었다. 화린이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저번의 요정 때처럼 가볍게 뿌리칠 수는 없다. 그녀의 신체 능력은 웬만한 괴물을 능가하니까. 하지만 손바닥에 툭 닿은 그녀의 주먹은 너무나도 약했다.
“흐. 흐으으으으. 흐···”
휘둘러온 또 다른 주먹 역시 마찬가지였다. 악귀의 골통을 깨부수던 힘은 담겨있지도 않았다. 자랑하는 비전인 파동의 힘 역시 없었다. 그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탓하듯 그의 가슴을 툭툭 칠 뿐이었다.
“왜, 왜애애애···”
그녀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스승을 그리고 사형제들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을. 한시라도 빨리 안식을 내려주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방책이란 걸.
“···”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겠지.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을 죽이라는 뜻이니까.
“원망하려면 하시오. 하지만 당신은 살아야 하오.”
악역을 자처한 벨로크는 스승의 시체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윽고 미닫이문을 열기 전. 바트릭을 향해 말했다.
“화린을 돌봐주시오.”
“자네는?”
“이 짓거리를 한 놈들에게 똑같이 돌려줘야지.”
벨로크는 송곳니가 드러나게 입을 비틀었다. 창호지를 바른 문을 열자 놈들이 서 있었다. 마당, 지붕 위, 돌탑 뒤, 반대편 건물에서 나온 녀석들까지. 무투복을 입은 수련자 수십 명이 눈을 대굴대굴 굴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몇 명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용이 그려진 비단옷을 갖춰 입은 노인들이었다.
“사원을 떠나있던 수련생들인가? 운이 없는 놈들이로군. 며칠만 늦게 왔더라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말을 하던 노인네의 미간에 단검이 퍽 박혔다. 하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 몸을 강철처럼 만들어서 이를 막아낸 것이다. 그는 금속의 색깔로 반들거리는 미간을 만지작거린 후 단검을 뽑아 손에 쥐었다.
“거 성격 한번 급한 놈이로구나. 발버둥 치지 않아도 어련히 끝장을 내줄 것을···”
클클 웃는 노인네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이한 기운 때문이었다.
“이건···?! 끄···끄아아아악!”
단검이 시퍼런 룬을 불태웠다. 노인네가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성대를 타고 올라오는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 악귀가 지옥으로 끌려갈 때 내지르는 괴성에 가까웠다. 매끈하게 빛나던 금속 피부가 쭈글쭈글 생기를 잃었다. 그 잠깐 사이 미라처럼 썩어버린 노인네가 털썩 자리에 쓰러졌다. 나머지 장로들이 훌쩍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저주다! 저 근육쟁이 새끼! 마법사야!”
“시간을 주면 안 돼!”
“쳐라!”
한 장로가 손짓했다. 그러자 뒤편에 있던 수련생들, 기왓장 위나 벽 뒤, 기둥 뒤에 있던 수십 명의 인영이 벨로크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윽고 수십 년 동안 단련한 육체를 축으로 삼아 각각 주먹과 발, 손날을 휘둘러왔다.
“키아아악!”
“흐아아압!”
그 속도가 쏘아진 화살처럼 빨랐다. 또한 하나같이 벨로크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이나 신체의 급소들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저 몸짓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너를 찢어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과연 맨손으로 사람 혹은 괴물들을 도살해온 무술가들다웠다. 하지만 벨로크 역시 파괴 행각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수백, 혹은 수 천마리의 기상천외한 괴물들을 때려죽였다. 그리고 인외를 벗어난 괴물들과의 전투는 언제나 그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포위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 베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의 품을 파고들어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까? 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전사의 혼과 육신에는 이 모든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벨로크는 강하게 땅을 박차며 십자검을 휘둘렀다. 제일 앞서서 달려오던 무투가가 흡 숨을 몰아쉬었다. 입구에서 그들을 맞이했었던 진이라는 수련생 이었다. 그의 몸에 핏줄이 솟고 육체가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화린이 전에 사용했었던 비전. 철금강이었다.
“꺽.”
십자검과 만난 진의 상체는 깔끔하게 절단되어 반토막 나 버렸다. 아무리 육체를 단단하게 재구성한다고 한들 이를 압도하는 폭력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쏟아지는 피와 내장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단단한 돌 석판이 움푹 파이고 그를 주위로 소용돌이가 쳤다. 강풍과 함께 새하얀 궤적이 크게 휘몰아쳤다.
뻗어왔던 손목과 팔목이 쩍쩍 날아갔다. 길쭉한 십자검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주인들의 상체와 하체, 머리 역시 갈라버렸다. 벨로크를 주위로 토막 난 시체들이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저런···!”
“요, 요정왕?! 그가 온 건가?!”
그 파괴적인 행각에 장로들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곧 정신을 수습하고는 보법을 밟았다. 그들은 괴물이 되기 전. 광기에 함몰되기 전. 제 육신에 새겨져 있던 무술의 초식들을 떠올렸다. 이윽고 양손 혹은 발로서 그것들을 발현해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들의 머리카락이 하늘 높이 떴다. 이윽고 이 미증유의 힘은 강력한 파동이 되어 벨로크를 향해 쏟아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수련생이 허리를 퍽 꺾으며 피를 뿜었다. 돌바닥에도 손바닥 문양의 낙인이 쉴 틈 없이 새겨졌다.
쿵쿵쿵. 비산하는 파편과 흙먼지 사이로 살아남은 수련생들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쉴 틈 없이 날렸다. 붉은 비늘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것으로 보아 갑주의 주인 역시 무사하지 못할 듯 했다.
“후우우우. 아무리 대단한 전사라고 한들. 한 손으로 두 손을, 아니 열 손을 다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초식을 전개한 장로들이 제각기 자세를 취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난쟁이와 여자. 아, 그래. 화린 그 년이 살아있다. 도망치기 전에 끝장을···”
머리에 비녀를 꼽은 노파가 말을 하다 입을 헙 닫았다. 흙먼지를 뚫고 튀어나온 무언가가 발치로 굴러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른다는 듯 멍한 두 쌍의 눈동자가 혀를 헤 내밀었다. 수련생의 머리통이었다.
이윽고 절단 난 팔다리 혹은 상체와 하체가 연기 밖으로 쓰레기처럼 던져지기 시작했다. 장로들이 몸을 긴장시켰다. 잠시 후. 망가진 갑옷을 걸친 사내가 무심한 얼굴로 튀어나왔다.
그의 전신에서는 피처럼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가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밝게 빛날수록, 찢어졌던 근육과 부러진 뼈, 패인 살점 등이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꺼지지 않는 심장이 내보이고 있는 권능이었다.
"컥."
벨로크는 옆구리에 손날을 박아넣고 있는 수련생의 목을 잡아 가볍게 부러트리고는 휙 던져버렸다. 이윽고 머리칼에 묻은 피딱지를 털더니 주변을 둘러봤다.
파동의 힘을 날렸던 장로라는 놈이 다섯. 살아남은 혹은 지금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수련생이 수십 명 가량 남아있었다. 용포를 입은 노인 하나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슨··· 네놈··· 인간이 아니로군. 악마인가? 공포의 군주가 보냈나? 아니면 거짓?”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뭐라?”
“이제 그만 편해지란 소리다. 언제까지 악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테냐?”
벨로크가 중얼거리자 장로들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외부인. 네깟 놈이 무슨 상관이냐··· 그분의 하해와도 같은 은혜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답이 없군.”
쯧 혀를 찬 벨로크가 검을 휙휙 휘두르며 다가오려 했다. 그러자 장로들이 흠칫 놀라며 소리쳤다.
“노, 놈을 막아라!”
“우리끼리는 역부족이다. 맘몬 님을 불러와야 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 수련생들이 또다시 멍한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벨로크는 몰아치는 파도를 보며 생각했다. 수련생들과는 달리 저 장로라는 놈들은 비교적 정신이 온전한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차이일까? 강함의 차이? 아니면··· 저항과 순응? 스스로 죽여달라 간청한 화린의 스승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거기다가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아랫사람들을 갈아 넣는 녀석들의 행각. 떨리는 동공. 목숨줄에 대한 미련까지...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굳이 저놈들에게까지 측은함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 장로들은 땅을 박차며 이곳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광인이 된 수련생들은 인간 방패가 되어 그를 가로막으려 했다. 이대로 둔다면 놈들을 놓칠 것이다. 하지만 벨로크로서는 놈들이 알아서 떨어져 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아무 거리낌 없이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
벨로크는 검을 땅바닥에 박았다. 이윽고 내면의 힘을 끌어올리며 한 쪽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특히나 도망치던 장로들을 두 눈에 주의 깊게 새겼다.
“네놈들한테는 죽음도 사치처럼 느껴지는군.”
손가락을 튀기자 새하얗던 하늘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이윽고 쿠르르 비명을 토했다. 대자연이 일으키는 분노서린 음성이었다.
"음?"
"이건..."
섬뜩한 기세에 도망치던 장로들이 자신도 모르게 위를 쳐다봤다. 그들의 동공이 수축 되었다. 강력한 섬광이 눈을 강타한 탓이다.
삐이이이 이명이 울린다. 온 몸이 불타는 듯 뜨거워졌다.
용을 잡아먹은 벼락이 육신과 함께 영혼마저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기 시작했다.
"───!"
소리 없는 비명은 우레소리에 묻혀 금세 사라졌다. 남은 것은 매캐한 탄내와 잿더미들. 멀쩡한 것은 바트릭과 화린이 있는 별관뿐이었다. 파지직 일어나는 스파크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검을 휙 뽑았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진통에 그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시스템 창의 힘을 과도하게 사용하자 몸에 있는 신성이 강한 반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이 둘의 기운은 상극이다. 자신은 지금 몸에 폭탄 두 개를 안고 있는 셈이었다. 이걸 어떻게 한다?
그가 고민하던 순간.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맞춰 십자검의 칼날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광채를 뿜어냈다.
기준 이상의 괴물.
끔찍한 악이 다가오고 있다.
대비하라. 혹은 도망쳐라. 성검이 되다만 칼이 내보내는 경고성이었다. 벨로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저 새끼가 이 사원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무술의 달인 수백 명을 괴물로 만들고, 화린의 스승이자 아비를 죽인 악귀들의 수괴. 필시 보통 악마는 아니겠지.
물론 벨로크는 겁먹지 않았다. 그저 몸을 긴장시키며 흉흉한 미소를 내보일 뿐이었다.
“이거 얼마만의 레벨업인지 모르겠군.”
침을 퉤 뱉은 그가 십자검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