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55화 (15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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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사원

강철의 사원.

스스로를 고행자 혹은 인내하는 자라고 칭하며 맨손무투 및 정신 수양을 일삼는 요상한 집단.

오래전. 나스 밀림의 외곽에 자리 잡은 이 무예 집단은 속세와의 연을 끊은 채, 그들만의 방식과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었다.

“사원이라 부를 때부터 아시겠지만··· 저희 무술의 뿌리는 동방의 한 종교 집단에서 시작됐어요. 강철권. 그러니까 저희 유파를 최초로 창안하신 다룬다라님이 그곳 출신이셨거든요. 무술만이 아니더라도 인사법 예절, 복장 등. 많은 것에 동방의 영향을 받았죠.”

앞장서서 걷던 화린이 말했다.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이한 파동과 신체를 강철처럼 만드는 비전을 가진 무투술.’

대륙에서는 처음 보는 형태의 기술이다 싶었는데. 동방에 그 기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비전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벨로크와 난쟁이는 대나무 숲을 사르륵 걸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경청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정신도 많이 자유로워졌죠. 아니, 퇴색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이제 저희들은 굳이 율법과 규율에 얽매이지 않아요. 그저 마음의 평안과 육체의 단련만을 중점적으로 할 뿐이지요. 물론 깊은 수양을 쌓은 장로님들께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그래요. 현재의 강철의 사원은 그저 무투관일 뿐입니다. 심신을 단련시키고 무를 숭상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는 집단이죠.”

화린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집단에 대해 냉소적이게 말했다. 그건 그녀 스스로의 생각일까? 아니면 그녀의 스승이라는 사람의 가르침 때문일까. 뭐가 됐든 유파 내에서 그리 달가워할 것 같지는 않은데.

뭐 사정이 있겠지. 문파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알력다툼이 존재하는 법이니.

벨로크는 그녀의 조잘거림이 나름의 긴장 해소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대되는 한편 두려운 것이다. 분노한 요정들의 창칼, 악마 군대의 잔당이 사형제들에게 손을 썼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아니면 단순히 오랜만에 밟은 고향 땅에 대한 향수겠지.

“제가 열여섯이 되던 때였어요. 느닷없이 견문을 넓히고 오라며 스승님께서 절 대륙으로 내쫒으셨죠. 이건··· 그래, 성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사 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돌로 만들어진 불상 앞에 선 화린이 양손을 모아 합장했다. 이를 바라보는 벨로크의 머릿속에는 웬 무협지가 떠올랐다. 그건 석가모니를 닮은 듯한 저 불상과 낙엽 사이로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돌탑. 산 비탈길을 따라 깔린 계단 위. 기와를 얹은 건물들을 보고 내린 생각이었다.

“그 다룬다라라는 사람이 소림사 출신이오?”

“소···륌? 발음하기가 어렵네요. 아뇨. 처음 들어봐요. 저희 유파의 원류는 뇌랑권입니다. 문파 이름은 금강파였구요.”

예상은 빗나갔지만 떠오르는 게 있었다. 게임 속 세상에 빠지기 전. 그는 기사 캐릭터만 세 개째를 만들고 플레이했었다. 그중에서는 워낙에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 직업도 몇 개 있었는데. 온몸에서 벼락을 뿜어내며 주먹질을 해대는 권법가들이 그들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만독불침이니 금강불괴니 하는 괴물 같은 경지를 이룬다는 설명도 기억났다.

‘치파오를 입고 있는 여캐가 예뻐서 여성 격투가를 키울까 이걸 키울까 고민도 했었지.’

만약 자신이 그때 격투가를 선택했다면 화린과 동문이 되지 않았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일단 여자의 몸뚱이가 되어서 이 엿 같은 세상에 떨어졌겠지.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서러운데. 성 정체성 마저 바뀌었다면 못 버텼을지도 몰랐다.

“염병. 높기도 하구만.”

난쟁이가 앓는 소리를 내고,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끝나자 그의 상념 역시 끝났다. 드높은 돌계단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래돼 보이기는 했지만 깔끔한 것이 최근 까지도 누군가가 관리 한 것 같았다. 화린은 어느새 마음을 추슬렀는지 기대감 서린 얼굴로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 역시 뒤를 따랐다.

“저 토실한 허벅지랑 종아리를 만드는 데는 이 계단도 한몫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형씨?”

짧은 다리를 휘젓던 난쟁이가 화린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내는 게 어딘가의 변태처럼 보였다. 벨로크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었다. 화린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는 고개만 돌려 바트릭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같은 소리 하지 마요.”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자네 엉덩이가 워낙 커야···”

그녀는 걸음을 멈추더니 느닷없이 바트릭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이윽고 양손으로 그의 허리를 턱 잡았다.

“어? 어이. 아가씨. 자, 잠깐··· 이건 그냥 농담···”

불안함을 느낀 난쟁이가 양팔을 버둥거렸다. 화린은 멈추지 않았다. 흡. 기합을 내뱉은 그녀는 손에 들린 난쟁이를 짐짝처럼 휙 던져버렸다.

“우아아악!”

바트릭은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사원의 입구로 날아갔다. 이 모습을 보던 화린은 손을 털더니 싱글싱글 웃었다. 이윽고 벨로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가요. 벨로크씨.”

어째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 같은데. 이제 안 볼 사이다 이거냐?

“···그러지.”

두 사람이 계단을 타고 넘어 굳게 닫힌 문 앞에 도달했다. 고개를 처박은 바트릭이 흉한 꼴로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는 과거 발언은 잊은 채, 그녀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야이 멧돼지 같은 년아! 남자한테 허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 너 이거··· 으으윽···”

“먼저 희롱한 건 바트릭 씨잖아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팔다리를 분질러 줬을 거예요. 이 더러운 변태!”

뭐라 중얼거리는 난쟁이를 뒤로한 채, 화린이 사원의 문고리를 턱 잡았다. 황금으로 된 용이 둥근 고리를 물고 있는 것이 더럽게 화려해 보였다. 돈 좀 벌었나 본데? 그녀가 문을 퉁퉁 두드렸다. 그러자 잠시 후 옻칠한 문이 끼이익 열리며 그 틈새로 누군가가 얼굴을 내보였다. 도복을 입고 장발을 한데 묶은 사내였다.

“누구시오?”

화린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세상에! 진! 나 화린이야! 알아보겠어?”

“화린? 화-아린? 대사형의 적전제자인 파동권의 화린 말인가?”

길게 늘려지는 사내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었다. 눈동자 또한 그들을 또렷이 바라보지 않고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환자처럼 보였다. 뭔가 이상한데?

“형씨. 좀 이상하지 않나···?”

바트릭 또한 그렇게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화린은 웃는 얼굴 그대로 문을 활짝 열었다. 이윽고 조금 망설이는 듯싶더니 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진! 정말 많이 컸구나. 코찔찔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화린이 얼굴을 부비자 사내의 돌아가던 눈이 초점을 되찾았다. 이윽고 와하하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화린! 그래, 화린! 난 진이지. 강철의 사원의 수행자. 진. 기억났어.”

“뭔 소리 하는 거야? 너 치매라도 걸렸어?”

“수련이 너무 고돼서 말이지. 양해 좀 해줘. 그보다··· 성인식을 끝내고 돌아온 거지?”

“응. 장로님들께는 말하지 말고 사부님만 조용히 불러줘. 바쁜 일이 있어서 다시 가봐야 해.”

진은 화린의 등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향하는 위치는 목덜미였다. 그러다가 벨로크와 눈이 마주치고는 슬며시 손을 내렸다. 그가 화린의 등을 툭툭 치며 웃었다.

“음··· 조금 섭섭하기만 하지만, 뭐, 다 사정이 있겠지. 알았어. 손님들하고 같이 별실에 가 있어. 모시고 올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합장을 취하고는 자리를 박찼다.

“자. 그럼 저희는 별실에서 차나 한잔 하고 있을까요? 아니다. 배도 출출하니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 것도 낫겠어요.”

화린이 앞장서서 사원을 걸어갔다. 그 걸음이 아주 빨랐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거나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앞에서 흔들리는 묶음 머리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봤다.

작은 사당들과 곳곳에 세워진 고동 색깔의 기둥, 해태를 본떠 만든 듯한 돌 조각상까지. 강철의 사원 내부는 꽤나 포근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겨왔다. 떨어지는 석양빛을 받아 그늘이 지자 위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전란과 자신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 괴리감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남을 잘 못 믿는 난쟁이는 이 고요한 분위기에 불안함을 느꼈다. 벨로크는 자신의 감각을 교란시키듯 끈적하게 휘감아오는 어떠한 기운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함은 사원을 거닐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나타났다. 마당에서 빗자루질하는 사람, 허수아비를 앞에 두고 주먹을 내지르는 사람, 대청마루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까지.

그들 모두가 멍한 얼굴로 위와 같은 행동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로봇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화린이 말을 걸면 그제서야 눈을 굴리며 반응했다.

“화-린? 아! 아. 화린. 그래, 기억났다. 4년 전쯤 떠났었지.”

“오랜-만이다. 화린. 뒤의 두 사람은 누구냐? 음? 내가 뭐라고 했지? 오랜만이라 했나?”

목소리도 늘어졌고, 치매에 걸린 환자들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행이 지나가면 일제히 시선을 모은 채, 감시하듯 바라보았다. 뒤쪽에서 그들끼리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벨로크의 귓가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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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알 수 없는 언어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저 저주받을 언어체계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뜻은 모른다고 해도 많이 들어봤으니까. 그는 엄지손가락만 움직여 십자검의 칼날을 조금 뽑았다. 빛나고 있었다.

옆에서 벨로크를 바라보고 있던 바트릭 또한 십자검이 빛나는 것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하···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화린.”

“아니야.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다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쉴 틈 없이 중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마치 광인처럼 보였다. 이윽고 별실이 보이자 미닫이문을 부술 듯이 열고는 방석이 깔린 자리에 턱 앉았다.

“후우,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내뱉은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에 놓인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이윽고 주전자 채로 입을 데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녀가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린. 내가 몇 번이나 말하더냐. 그렇게 교양 없이 행동하지 말라고.”

중후한 목소리였다. 화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했다.

“스승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비단으로 된 도복을 입은 사내였다. 덩치는 우람했고, 눈동자는 강직했다. 짧게 깎은 수염이 이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녀를 거두어줬다는 사부님이자 대사형 인듯 싶었다. 그는 일행의 맞은편에 털썩 앉고는 그들을 바라봤다.

“손님들을 데려왔구나. 난쟁이에 기사인가? 이곳까지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일행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풀어야 할 것이 있었다.

“스승님··· 아니죠? 이 모든 게··· 거짓말이죠? 지금 제가 착각한 거죠?”

화린은 사원의 입구에서부터 느껴왔던 불안감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의 동공은 쉼 없이 수축과 확대를 반복하고 있었다. 맨손으로 괴물의 머리통을 부수던 주먹 역시 잔뜩 오므라져 있었다. 겁에 질린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막연한 불안감을 풀어줄 사람. 스승은 허허 웃었다. 그리고는 지금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아니, 어쩌면 딱 맞아떨어지는 요상한 말을 덤덤하게 내뱉었다.

“화린.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이미 죽었다. 이 사원 안에 더는 살아있는 사람은 없어.”

스승의 손이 탁자 위에 놓인 젓가락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손에 들린 젓가락으로 자기 눈을 푹 찔렀다. 똑똑히 보라고 외치는 듯했다.

“꺄아아아악! 스승님! 왜! 왜애애애!”

절규한 화린이 스승의 손을 붙들려 했다.

“물러서라!”

호통친 그가 한 손으로 파동을 내뿜어 그녀를 내팽개쳤다.

뚝. 뚜둑.

동공과 유리체가 으깨지며 진물이 질질 흘렀다. 외눈박이가 된 사내는 서글픈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화린을 바라봤다. 이윽고 제 손으로 뽑아낸 눈동자를 바닥으로 홱 던졌다. 그가 말했다.

“강철의 사원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파동권의 계승자 화린. 그리고 거기 계신 친구분들. 내 부탁 하나만 하겠소.”

화린을 거두어 주었던 아비가 피눈물을 흘렸다.

“이 빌어먹을 목소리가 내 한 가닥 이성마저 부러트리기 전에··· 내 손으로 저 아이를 해치기 전에, 부디, 부디 우리를 좀 죽여주시오오오오오!”

울부짖는 그의 입에 십자검이 퍽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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