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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
벨로크가 꺼낸 것은 목걸이였다. 달의 여신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초승달 목걸이. 이자벨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구해주고 받은, 요정들과의 마찰이 생기면 보여주라고 했던 징표.
역시나 효과가 있는지 요정들이 웅성거렸다. 특히나 금발 머리의 요정은 목걸이의 뒤편에 음각된 글씨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이 말했다.
“인간! 네놈이 그 목걸이를 왜 가지고 있는 거냐!”
“이자벨이라는 요정으로부터 받았소. 그녀의 목숨을 구해주었었거든.”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요정 사내는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소리쳤다.
“네가 누나를 구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시발? 어쩐지 닮았다 했더니 동생이었어? 흠칫 놀란 벨로크는 요상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 역시 악을 쓰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못 믿는 모양새였다. 죽이고 빼앗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벨로크는 후 한숨을 쉬고는 사내의 밧줄을 느슨하게 풀어주며 말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흐르는 숲에서였소. 정확히는 숲과 맞닿아있는 영지 카르벤의 한 여관에서였지.”
그는 허리춤의 포션을 하나 까서 요정 사내의 상처에 부어주며 말을 이었다.
“숲에는 악마의 하수인이 살고 있었고, 괴물들로 인해 동료들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이자벨은 우리에게 동행을 요청했었소. 그녀는 숲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함께 안 할 이유가 없었지. 그녀는 결국 언데드가 된 동족들에게 안식을 찾아주었고 동족들을 그렇게 만든 대상에게도 복수했소. 이건 그 보답으로 받은 거요.”
사내는 윽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보내왔다.
“네놈이 이자벨을 고문하고 그 목걸이를 빼앗았을 수도 있지.”
느슨해진 밧줄을 재빨리 푼 사내가 주먹을 휘둘러왔다. 벨로크는 손가락 하나로 이를 막아내고는 사내에게 딱밤을 때렸다. 형이 얼치기 동생을 나무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자벨의 엉덩이에는 커다란 점이 하나 있지. 아. 왼쪽 가슴에도. 그리고··· 해물 스튜를 기가 막히게 끓이고... 또 어릴 때 아름드리 나무를 타다가 떨어져서 웬 비밀 통로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 속에서···”
벨로크는 이자벨이 취하거나 혹은 몸을 섞을 때 조잘거리고는 했던 그녀의 비밀들을 털어놓았다. 그중에는 은밀한 것도 섞여 있지만, 심문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별거 아닌 사실들도 섞여 있었다. 그 두 가지가 섞여들자 요정들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사내가 정말로 이자벨을 구했다는 것을. 그녀가 목숨을 걸고 신원을 보증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감히 네놈이··· 우리 누나를 따먹어?! 야이! 개새끼야! 으아아아!”
부들부들 떨던 금발 요정이 불 같이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벨로크는 몇 발자국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저놈이 이자벨의 동생이라는 것. 이들이 그녀의 부족원들이라는 것을 알자 험하게 손을 쓰기가 그랬다.
“진정해라. 처남. 그리고 따먹다니 천박한 말이로군. 네 누나가 무슨 열매냐?”
“아가리 닥쳐!”
요정이 주먹을 휘둘렀다. 벨로크는 손바닥으로 이를 가볍게 잡은 후 사내를 내동댕이쳤다. 이윽고 사내가 지칠 때까지 혹은 마음의 정리를 할 때까지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벨로크를 죽일 듯이 덤벼들던 사내는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아무리 덤벼도 손가락 하나 닿을 수가 없으니 그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허억. 허억. 후, 후우. 시발. 괴물 같은 새끼···”
대자로 뻗은 사내는 거친 숨을 내쉬다가 침을 퉤 뱉었다. 이윽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인간. 이자벨은 지금 어디에··· 아니, 살아는··· 있나?”
“그녀는 현재 내 동료들과 함께 대륙에 있소. 걱정할 필요 없소.”
벨로크는 구태여 그녀가 악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양쪽 모두에게 상처만 남길 테니까. 사내는 후 한숨을 쉬었다. 그 속에는 안도, 찝찝함, 미약한 분노 여러 감정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대화를 해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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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에다 요정을 끼고 살다니 형씨는 능력도 좋군.”
바트릭이 혀를 내둘렀다.
“···”
화린은 말이 없었다. 묘하게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요정들이 강철의 사원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어서 안심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세 사람은 묶어두었던 요정들을 풀어주고,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무장도 돌려주었다. 그들이 더 이상 덤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몰아치는 폭풍 부족의 순찰대 대장이자 스스로를 이든이라 밝힌 금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다음은··· 왜 인간들이 역병을 퍼트렸을 거라 단정 짓냐고 물었었지?”
“그래요.”
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은 화린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벨로크를 보고 있었다. 물론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있었고, 이도 뿌득 갈았다. 외간 남자가 그것도 인간이 누나의 애인이라고 생각하자 머리에 피가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 마음 이해한다. 근데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 이든이 말했다.
“왕께서 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정 사회는 폐쇄적이라고 들었는데. 왕의 영향력이 대단한 모양이군.”
“엘가르님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 현왕이시지. 그분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직도 인간들과 푸닥거리며 살아가야 했을 테니까.”
요정들의 원래 터전은 아드리아 왕국의 동부에 있는 흐르는 숲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째선지 이곳 나스 밀림으로 대이주를 했는데. 그게 현왕의 업적인 모양이었다. 그게 몇백 년 전의 일인데. 왕이라는 놈 대체 몇 살을 산 거냐? 이든이 말을 이었다.
“물론 왕의 명령이라고는 하나 우리들이 이를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아틸란타 출신의 요정들이 아닌 이상. 각 부족의 법칙과 전통이 더 중요시되니까. 하지만···”
요정은 비죽 웃었다.
“네놈들의 행태를 봐라. 지옥의 다섯 권좌가 강림했음에도 자기네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짐승보다도 못한 행태를 목도하란 말이다. 그건 이곳에 사는 녀석들 역시 마찬가지지. 식량이 필요해서 혹은 돈이 필요해서 자신들의 부모나 자식, 친구, 아니면 같은 동족을 괴물들에게 팔아넘기더군. 우리 부족은 반인륜적이고 이기적인 너희들의 행동에 질려버렸다. 네놈들이라면 정말로 역병을 퍼트렸을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지. 그래서 행동했다.”
화린이 소리쳤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이곳에서도 그리고 대륙에서도 전쟁을 막기 위해! 악마들에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구요!!”
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 지하의 족속들이 아니라면, 지상 종족 모두의 마음에는 선악의 저울대가 깃들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본 것은 너희 동족들의 악한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본 대로 행동하고 결정했을 뿐이다.”
보고 들은 것이 엿 같은 행태들 뿐이니. 인간들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은 거로군. 이해는 된다. 고향이든 아니면 이쪽 세계든, 벨로크 역시도 그간 겪어왔던 인간들의 행태에는 기가 질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벨로크는 또다시 이든의 의견에 반박하려는 화린을 만류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별 소용 없는 짓이었다.
“벨로크씨···”
그는 다른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이 모든 사태가 실은 악마들의 농간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소? 인간과 요정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말이오.”
이든은 피식 웃었다. 뒤에 있던 요정들 또한 웃었다.
“그래, 등신이 아닌 이상 그런 생각을 못 하는 게 이상하지. 우리들끼리 피를 흘리면 제일 좋아할 놈들은 그놈들이니까. 하지만 네 주장에 대한 반박 겸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주마.”
금발 사내가 툭 내뱉었다.
“이 땅에 강림한 대악마. 광기의 아가레스는 죽었다. 엘가르님의 손에 의해 무참히 찢겨 성벽에 효수되었지.”
“음?”
요정왕에 의해 다섯 권좌 중 하나가 죽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소식이 들려오자 벨로크가 당황했다.
“맙소사···”
“형씨만 한 놈이 또 있었군.”
화린과 바트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든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놀랄 만도 하겠지. 천상신들과 각축전을 벌이던 그 무시무시한 괴물이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쓰러진 것이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잔당들이 조금 남아있기는 하지만··· 각 부족의 장로들이나 왕성에서 나온 기사들에 의해 곧 잡힐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전설상에서나 나오는 영웅께서 이 사태의 원인을 인간들이라고 규정 지으셨다는 뜻이다.”
“벨로크씨··· 이 말이 사실이라면···”
상황이 꼬여가자 화린이 말끝을 흐렸다. 벨로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떠오르는 건 있는데 이걸 이 요정 앞에서 말했다간 다시 싸움이 날 것 같았다. 세 사람이 가만히 있자 이든은 자신의 망토를 뒤집어썼다. 그가 손짓하자 그의 부하들 또한 망토를 썼다. 떠날 생각인 듯했다.
“너. 건방지게도 이자벨의 몸과 마음을 갈취한 사내야. 네놈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니다. 누이에 대한 우리들의 애정만 아니었다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끝장을 봐야 했을 테니까.”
사내가 출입구로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말했다.
“충고하지. 당장 이곳을 떠나 대륙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사막이나 산맥 깊은 곳으로 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살도록 해. 네가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고 해도 몰아치는 파도를 다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든과 순찰대들은 그 말만은 남긴 채, 창고를 나섰다. 떨어지는 빗소리와 숨소리, 등불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안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그 요정들.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면 정말로 엘가르라는 그 자가 대악마를 죽였다는 뜻이겠죠? 그가 한 말도 사실일까요?”
화린은 양팔로 무릎을 감싼 채, 벨로크를 힐끔 바라봤다. 바트릭은 담배를 피워물었다.
“여기 계신 대악마 사냥꾼은 역병을 퍼트린 배후가 악마라고 생각하고, 저기 왕성에 있을 또 다른 대악마 사냥꾼은 인간이 배후라고 생각하는군. 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야?”
벨로크는 창고의 구석에 모포를 깔고는 자리에 앉았다. 냄새는 좀 났지만, 시체들이 있는 집 안에서 자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배낭 속에서 빵 몇 개를 꺼내 씹으며 말했다.
“누구 말을 믿던 그건 당신들 자유요. 뭐가 됐든 난 아틸란타로 향할 생각이니까.”
바트릭 역시 그가 꺼내놓은 빵을 집었다. 아윽고 빵을 한 입 먹고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뭐, 식후떙이냐? 난쟁이가 말했다.
“계획에 변동은 없다는 말이로군. 뭐, 나야 좋지. 어찌 됐든 자네들과 같이 던전 근처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
“화린. 당신은?”
벨로크는 물 삼아 럼주를 마시며 물었다. 그녀는 벨로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바뀌는 건 없어요. 아 스승님이나 사형, 사제들한테는 이곳에서 피하라고 말을 해줘야겠네요. 뭐, 그분들이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화린이 애써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데. 역시나 휘몰아치고 있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요정들의 입장도 알아내고, 새로운 정보도 얻어낸 그들은 등불을 끄고 잠에 빠져들었다.
쿠르르르!
“염병! 잠 좀 자자. 시발!”
“하··· 싱숭생숭하네요.”
두 사람은 나지막하게 투덜거리며 뒤척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빗소리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가 살던 고향에서는 일부러 찾아 듣기도 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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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았다. 운이 좋게도 비 역시도 그쳐있었다. 세 사람은 각자의 짐가방을 매고 길을 나섰다. 밤사이 얼마나 쏟아진 건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진창이 종아리까지 푹푹 집어삼켰다. 떨어지는 태양 아래.
부풀어 오른 시체들은 인간을 어설프게 닮은 로봇처럼 기괴하기만 했다. 지금까지 총 몇 개의 마을들이 분노한 요정들의 발아래 짓밟혔을까?
뭐가 됐든 힘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이 혼란의 시대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비참하게 죽을 뿐이었다.
“당신들의 죽음을 방조한 나를··· 부디 용서하지 마세요.”
화린이 합장을 끝마치자마자 세 사람은 마을을 벗어났다. 사람 몸통만 한 모기, 집채만 한 지네, 그보다는 작지만 수백 마리가 무리를 이뤄서 덤벼들던 귀뚜라미 떼까지.
세 사람의 몸에는 괴물들의 피와 체액이 마를 날이 없었다. 동산을 타고 넘고, 작은 늪을 지나고 울창한 숲을 또 몇 개씩 지났을 때였다. 끈적하고 습하기만 하던 공기가 바뀌었다. 각양각색의 나무들과 덩굴들이 한대 뒤섞여 혼잡한 느낌을 주던 주변 역시 바뀌었다.
장대처럼 길쭉하게 솟은 얄상한 수목들의 밭. 대나무 숲이 그들을 반겼다. 날카로운 잎사귀에서 툭 떨어진 물기가 벨로크의 머리카락을 타고 뺨을 스쳤다. 앞장서서 걷던 화린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일행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러분. 강철의 사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