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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
게임 속 혹은 게임을 본떠 만든 이 요상한 세계에 빠진 후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던 법칙이 하나 있다.
괴물이든 인간이든 생명체를 죽이면 경험치가 들어온다. 그리고 이 묘령의 기운은 자신의 내부에 차츰차츰 쌓이다가 레벨업이라는 형태로 새로운 힘을 부과한다.
벨로크는 레벨이 높아질수록, 격을 쌓아갈수록 이 힘의 흐름을 똑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이상하다 느낀 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들어오는 경험치가 줄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어딘가로 새고 있었다. 눈을 감은 벨로크는 몸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어디로 향하는지 살폈다. 이윽고 자신의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해신 노르드의 영혼 파편이 담긴 펜던트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시스템 창으로 들어가야 할 경험치를 이 녀석이 나누어서 흡수한다?’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그래서 진짜 기사가 되기 전, RPG 게임의 매니아이기도 했던 이방인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워 보기로 했다. 이 목걸이는 알이다. 경험치를 양분 삼아 자라다가 종래에는 깨어나는 것이다.
‘봉인을 깨고 차원의 틈을 넘느라 소모되었던 힘을 경험치로 채우는 거다.’
그 끝에는? 노르드의 파편이 깨어나 자신에게 힘을 보태주겠지. 신성의 사용법도 더 알려 줄 테고. 종래에는 시스템 창 새끼를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낸 가설이 썩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서 벨로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경험치를 모아야 할 이유가 더 늘었군.”
그가 중얼거릴 때.
“흐아아압!”
“뒤져라!”
도망치던 피그미를 주먹으로 조각내고, 뒤통수에 도끼를 박아 넣은 두 사람이 다가왔다.
“세상에··· 벨로크씨!”
화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벨로크의 갑옷 틈새로 독침들이 잔뜩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네펜데스의 마비침을 이렇게나 많이 맞으시다니··· 괜찮으세요?! 이 정도라면 거인도 쓰러질 양이라구요!”
건틀릿을 휙 벗어 던진 그녀는 그의 몸에 박힌 독침들을 조심스레 빼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품을 뒤져 해독제까지 먹이려 했다. 벨로크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소. 대부분은 피부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소. 게다가 난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거든.”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이야? 대악마 사냥꾼쯤 되면 피부도 단단해지나?”
바트릭이 혀를 내두를 때. 화린은 그의 목이나 손등을 만지고 있었다.
“정말이네요··· 이 정도면 거의 돌덩이 수준인데요? 마치 저희 무투관의 비전인 철금강을 익힌 것 같아요···”
“나는 철금강이 무엇인지 모르오. 하지만 복장으로 봐서 화린 당신은 그 비전이란 걸 익힌 모양이군?”
벨로크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물에 흠뻑 젖어있는 민소매는 배꼽과 팔뚝을 드러냈다. 하체의 타이츠 역시 쫙 달라붙어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움직이기는 편해 보였지만 방어도는 전혀 기대할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던 비전을 익혔다면 얘기가 다르겠지. 피부 자체가 갑옷이라면 거추장스러운 쇳덩이를 달고 다닐 이유가 없으니까. 가르쳐 달라고 해볼까?
“네.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열심히 배웠죠. 제가 이래 봬도 저희 유파의 직전제자··· 자, 잠깐! 어디를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벨로크가 빤히 바라보자 얼굴이 붉어진 화린이 제 가슴을 가렸다. 이윽고 다른 한 손으로 벨로크의 팔뚝을 후려치며 후다닥 물러났다.
씁. 아니, 자기가 먼저 붙어 놓고서는, 그리고 입어 놓고서는··· 그는 억울했다. 하지만 화린의 표정을 보면 그녀가 더 억울해 보였다. 어떻게든 팔로 자신의 몸을 가리려 낑낑거리고 있었으니까.
“이봐. 아가씨. 그 얼토당토않은 행동은 집어치우지 그래? 추하다고.”
보다 못한 바트릭이 툭 쏘아붙였다. 화린은 평소 때 보다 격렬하게 반응했다.
“뭐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난쟁이는 암수의 구분도 없잖아요! 듣기로는 여자도 수염이 난다던데!”
“뭐, 뭐?!”
화린의 폭언에 바트릭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벨로크는 후 한숨을 쉬며 가방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망토를 하나 꺼내 그녀의 몸에 걸쳐주었다.
“이러면 괜찮겠소?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놈들이 오기 전에 어서 이동합시다.”
화린은 움찔거렸지만,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을 더 붉게 물들이고는 망토 자락을 꾸욱 쥐며 중얼거렸다.
“네, 네···”
“염병. 쌍으로 쇼하고 있네. 진짜···”
난쟁이의 투덜거림과 함께 일행은 다시금 움직였다. 그리고 곧 목표로 했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세 사람은 악마의 준동, 혹은 전쟁의 여파가 온 이곳 역시도 강타하고 있다는 걸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밤 까마귀 마을이라고 불리우는 개척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차가운 시체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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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침대에서 자나 싶더니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괴물들의 습격이라도 받은 건가?”
훤히 열려있는 목책을 넘어온 그들은 주변을 살폈다. 집안, 바깥, 밭 위에까지 모조리 시체로 덮여있었다. 등잔을 들고 있던 벨로크는 시체들을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폈다. 중년 남성의 목 뒤편에 화살이 박혀있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시체들의 상흔도 비슷했다. 검상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화살에 당한 상처들이었다.
그것도 한 발에 하나씩 확실하게 죽였다. 실력 좋은 놈들의 소행이었다.
“인간 사냥꾼 놈들인가?”
바트릭이 말했다.
“사냥꾼들은 이렇게 학살을 벌이지 않아요. 잡아다가 팔아야 하니까요. 제 생각에는···”
얼굴을 굳힌 화린은 시체에 꽂힌 화살 깃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요정들의 소행 같아요.”
“그렇담 이건 복수 혹은 분풀이로 벌인 짓이로군.”
벨로크는 조금 다른 점에 주목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시체들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퉁퉁 안 불었다는 뜻이다.
“사달이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오.”
‘게다가··· 이 꼬라지가 나 있다면 보통···’
벨로크는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귀를 강타하는 폭우 속에서 감각을 끌어올렸다. 통통 튀는 요란한 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것들이 몇 섞여 있었다. 나무가 끼이익 비명을 질렀고, 무언가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났다.
쐐애애액. 공기가 찢기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한 그래서 더 끔찍한 살인 무기의 소음이었다.
그는 몸을 틀어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고, 십자검을 검집 채 휘둘렀다. 화린의 미간을 노리던 화살이 툭 부러졌다. 흠칫 놀란 그녀가 흡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복근에 힘줄이 비죽 솟으며 이를 노리던 화살 역시 퉁 튕겨 나갔다. 전에 말했었던 그 비전인 듯 싶었다.
-무슨···!
-계속 쏴!
그들의 당황이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그때. 바트릭이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그는 조금 떨어져 있었기에 도와줄 수 없었다. 하지만 난쟁이제 갑옷의 위용을 자랑이라도 하듯 화살은 그의 갑옷에 막혀 튕겨 나가고 있었다.
“습격!”
등불을 휙 집어던지며 소리친 화린이 빈집의 나무 벽을 걷어차서 부쉈다. 이윽고 벨로크의 손을 잡고 그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나는 왜? 바트릭 역시 양팔로 목을 가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한순간에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지금 같은 전란의 시대에서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건만, 이는 늘 간담의 서늘함과 함께 극한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후우, 후우우우···”
곰팡이 냄새가 나는 목조 건물 안에서 화린은 흔들리려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바트릭은 수염을 부르르 털며 분노를 내비쳤다.
“허억. 허억. 시발! 머리 위를··· 스쳤어! 이거! 그 새끼들이지?! 귀쟁이 새끼들!”
쐐애애액! 그 말이 맞다는 듯. 창문을 깨고 날아든 화살들이 바닥에 퍽퍽 박혔다. 부서진 벽 사이로도 빗물과 함께 검은 선들이 쉴 틈 없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일행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미 화살이 닿지 않는 사각으로 몸을 피한 후였다.
습격자들도 이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화살들은 간격을 둔 채 날아들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멈췄다. 대신에 철퍽 거리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탁자를 방패처럼 받쳐 놓은 바트릭이 손도끼를 들어 올렸다. 들어오자마자 골통을 쪼개줄 참이었다. 그때 화린이 바트릭을 만류했다.
“바트릭씨 잠깐만요.”
“왜?”
난쟁이는 의아해 했지만 곧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네 설마 저놈들과 대화를 해보려고? 미쳤어? 상대는 대뜸 화살부터 날린 새끼들이야! 대화가 통할 리가 없다고! 게다가 우리는 목숨의 위협을 받았어!”
분노한 그가 소리쳤다. 화린은 이를 으득 물었다.
“알아요. 저도 아는데···”
그래, 거기다가 마을 사람들 역시 학살했지. 그들이 죄가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화린은 자신이 조금 비겁하다 느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 생각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이들의 죽음에서 눈 돌리고 있었으니까.
마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려면 저 요정들과 대화를 하려 들기보다는 목숨을 취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것이 내 정의가 아닌가? 화린은 고개를 저었다.
요정과의 전쟁이 일어나면 나스 밀림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당장에 자신이 속해있는 강철의 사원 역시 이에 휘말리겠지. 그럴 수는 없다. 생면부지의 남보다는 자신의 가족들이 그녀에게는 더 소중했다. 화린은 자신의 얄팍한 정의감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녀가 난쟁이의 손을 잡으며 부탁했다.
“우리는··· 아니, 벨로크씨와 저는 전쟁을 막아야 하잖아요. 여기서 저들을 죽이면 일이 더 꼬일 거에요. 그러니까 제압하는 식으로 가요. 부탁해요.”
화린의 말은 벨로크에게 하는 당부이기도 했다. 그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그녀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냅다 칼을 들이댄 놈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실천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역시나 범상치 않은 여인네다.
그녀의 간곡함에 바트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염병. 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 테니. 자네들끼리 알아서 해.”
난쟁이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벨로크는 부서진 벽의 뒤편, 화린은 출입구가 있는 현관 뒤에 자리를 잡았다. 발소리는 이제 아주 가까워져 있었다. 한 걸음 뚜벅 내딛고는 머뭇거리는 것이 요정 특유의 감각으로 그가 벽 뒤에 있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벨로크는 상대방의 망설임을 조금 덜어주기로 했다. 그가 반파된 벽을 넘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새카만 어둠 속에서 날붙이가 번뜩였다. 이윽고 그것은 양모로 휩싸인 팔에 들려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과연 요정족 답게 빨랐으며 강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그보다 더 빠르고 강했다. 그는 빗물을 가르며 덤벼드는 칼날의 궤적에 자신의 손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약간의 힘과 기술을 섞어 그 방향을 뒤틀어 버렸다.
주먹에 얻어맞은 칼날이 뚝 부러졌다. 빗소리 사이로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벨로크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손을 뻗어 습격자의 손목을 잡아끈 후 박치기를 먹여주었다.
“꺽!”
“아단!”
미약한 등불 빛이 주변에서 점멸했다. 아무리 요정이라도 이 컴컴한 장막 속에서는 빛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윽고 그 불빛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옴!”
얼굴을 일그러트린 요정 여인이 날카로운 세검을 찔러왔다. 벨로크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찌르기는 베기보다도 더 피하기 쉬웠다. 공격이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 역시 더 컸다. 여인은 그 대가를 치렀다.
희끄무레한 형체가 유령처럼 사라지더니 뺨이 불처럼 따가워졌다. 짜악 소리가 울리고 이빨이 후두둑 떨어진 것은 그 뒤였다.
등불이 또 하나 줄었다. 벨로크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단검을 찔러오는 녀석의 손목을 잡아 부서트리고, 턱을 올려 쳤다. 근거리에서 쏘아지는 화살을 손가락으로 잡고는 상대의 허벅지에 꽂아주었다.
“끄아아악!”
요정들은 멀리서 그들의 장기인 화살이나 쏴야 했다. 그랬다면 시간을 더 벌 수 있었을 테니까.
철퍽거리는 소리, 비명이 요란하게 울린 것도 잠시. 맹수처럼 날뛴 벨로크와 화린으로 인해 요정들은 순식간에 사로잡혀 창고 안에 갇히게 되었다.
“끄으으으···”
“으으···”
목숨을 취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손속에 자비를 두지는 않았다. 요정들은 다들 어디 한 군대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러나 여전히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적개심이 강한 듯했다. 이걸 어떻게 한다? 풀어주면 곧바로 다시 덤벼들 것 같은데?
벨로크는 요정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빼앗은 등불을 창고 곳곳에 놔두었다. 그러자 건초와 짚으로 가득한 창고가 삽시간에 밝아졌다.
바깥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시체들이 넘쳐나는 것과는 대비되게 이곳은 아늑해 보였다. 물론 요정들은 그렇게 느낄 수 없었다.
바트릭은 담배를 뻐끔 피워올리며 놈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화린은 출입문에 등을 기댄 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의감 넘치는 아가씨와 뭐든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난쟁이. 결국 이 일에 적합한 것은 벨로크뿐이었다. 기사의 교양에는 심문 혹은 고문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솜씨를 보여줘야 하나? 그는 걸음을 옮겨 제일 앞에 묶여있던 요정에게로 다가갔다.
금발 머리에 초록 눈을 가진 것이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재수 없게 생긴 놈이었다. 벨로크는 단검을 사용해서 포로의 입을 묶고 있던 밧줄을 끊었다. 그리고는 냅다 고개를 젖혔다.
“퉤! 이 더러운 인간 놈이!”
욕설과 함께 가래침이 애꿎은 바닥을 더럽혔다. 대화할 준비조차 되지 않았군. 벨로크는 참지 않았다. 녀석의 뺨을 후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이빨이 후드득 날아갔다. 요정의 잘생긴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벨로크는 쪼그려 앉은 상태로 그의 머리채를 턱 잡아 고개를 뒤로 꺾었다. 이윽고 녀석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냅다 화살부터 쏴 재끼다 사로잡힌 놈들이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뻣뻣한지 모르겠군.”
“···닥쳐라. 우리는 그저 복수를 했을 뿐이다. 네놈들이··· 역병을 퍼트렸으니까!”
사내가 피를 퉤 뱉으며 으르렁거렸다. 거참 기운 팔팔한 놈이었다. 그래, 너무 화나서 일단 죽이고 봤다 이거지?
벨로크가 녀석의 뺨을 한 번 더 쓸어줄까 고민할 때. 화린이 나섰다. 그녀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더니 양손을 모아 합장하면서 말했다.
“나는 강철의 사원 출신의 수행자 화린 입니다. 팔다리를 부러트리고 묶어둔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쪽이 먼저 달려들었으니 이건 넘어가죠.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왜 역병을 퍼트린 것이 인간들이라고 단정 짓는 겁니까?”
화린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름을 밝혔다.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한다라는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이 무술 집단은 나스 밀림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정상인들의 모임이었다. 덕택에 요정들과도 꽤나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내 역시 이를 알고 있던지 흠칫 놀랐다.
“강철의 사원··· 그래, 그런 놈들이 있기는 했었지. 인간답지 않게 명예와 긍지를 가지고 있던 놈들.”
하지만 곧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 녀석들도 결국에는 똑같은 인간일 뿐이지. 꺼져라. 그딴 알량한 관계를 들먹이며 내 입을 열 수 있을 거라 생각 마라.”
“음···”
침음을 삼킨 화린이 물러섰다.
아무래도 인간과의 관계가 훨씬 더 험악한 것 같았다. 그래, 역병에 가족을 잃고 친구들을 잃는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제삼자인 벨로크가 느끼는 것은 짜증이었다. 그는 이 역병이 웬 흑막에 의해 생겨난 사태란 것을 알고 있으니까.
빌어먹을 레이시스트 놈 같으니. 고문할까? 아니면 심문? 칼라를 소환해서 심령을 제압한다면···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망령이다. 삿된 힘을 사용하는 것을 요정들이 안다면 관계는 더 악화 될 것이다.
그냥 묶어둔 채, 이 자리를 떠야 하나? 적을 죽이거나 협박한 적은 많지. 잘 구슬려 관계를 재정립한 적은 없었던 기사는 머리를 싸맸다. 그는 고민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요정과의 접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거라면···
방법을 찾은 벨로크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그의 손에 잡힌 징표를 보자 요정의 눈동자가 커졌다.
“네, 네놈이 어떻게 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