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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
솨아아아
모래사장 너머로 파도가 넘실거렸다. 그곳에는 괴물도 인간도 살점도 핏물도 없었다. 그저 소금기 섞인 해수만이 제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사투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평화로운 광경.
아드리아 왕국과 요정왕국 사이의 경계선이자, 돈 많은 부호들의 관광지 역할도 겸하던 초승달 섬은 이제서야 제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았다.
뭐, 실상은 영지의 생산시설을 비롯한 주민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으며, 시체들마저 이리저리 널려있는 유령섬이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이 섬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폐허가 된 섬의 모래밭에는 모닥불이 한창 피어오르고 있었다.
타닥 튀는 불똥이 누런 모래에 제 흔적을 남겼다. 흔들거리는 불의 춤사위는 마치 ‘이곳에 생명이 살아있다.’ 라고 외치는 필사적인 몸짓처럼 보였다.
그 때. 누군가가 장작을 휙 집어넣었다. 모닥불의 기세가 한층 더 커졌다. 이윽고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이 불꽃은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어스름하게 비추었다.
강철의 색으로 반들거리는 판금 갑옷을 입고 풍성한 수염을 기른 난쟁이.
뼈 목걸이와 함께 짐승의 생가죽을 그대로 뒤집어쓴, 야생적인 풍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야만인 둘.
엉망이 된 무투복을 벗어던지고, 얇은 옷 아래 각반과 부츠만을 신고 있는 묶음 머리의 여인.
마지막으로 붉은 기가 감도는 비늘 갑옷을 입은 채, 마치 십자가처럼 보이는 검을 어깨에 척 기대어놓고 있는 사내 한 명이었다.
대악마 사냥꾼. 초승달 섬의 구원자. 천 명을 벤 검사.
휘황찬란한 별칭으로 불리고 있는 사내의 이름은 벨로크였다. 그는 오늘따라 퍽 피곤해 보였다. 눈 밑은 거뭇했고 얼굴마저 핼쑥했으니까.
‘두 번 다시는 못 해 먹겠군.’
쏟아지는 졸음을 애써 참아낸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사색에 빠져들었다. 인간과 요정, 난쟁이, 악마에 비례해도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괴물 혹은 절대자.
고대신.
대양인들 사이에서는 해신 노르드라고 불리우는 존재와의 격전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쇠락했다고는 하나 말 그대로 한낱 인간이 신에게 반기를 든 사건이니까.
벨로크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니,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쳤기 때문이다.
몇만 년의 세월 동안 육체도 없이 봉인 당해있었기에 녀석이 약해져 있었다는 것.
육체를 가지고 싸운 것이 아닌 순수한 의지와 영혼끼리 맞부딪쳤다는 것.
마지막으로...
녀석에게서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는 의지가 안 보였다는 것.
제약, 공간의 특수성, 서로 간에 상응하는 목적.
벨로크의 실력과 의지, 용기는 제쳐두고서라도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에 화답하듯 목에 걸린 펜던트가 푸르게 빛났다. 여정을 떠나기 전 베로니카가 걸어주었던 바다의 수호부였다.
내면 속 시스템 창의 힘과 상극을 불러일으키는 기운. 오직 절대자만이 가질 수 있고, 신이 되기 위한 발판이기도 한 전율적인 힘. 신성은 이 목걸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신성이 강해질수록 벨로크의 육체에서는 파지직 스파크가 일어났다. 마치 서로를 밀어내는 듯했다. 시발. 이 새끼 또 이러네.
고통을 느낀 벨로크는 목걸이를 살살 어루만졌다.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스스로 움직이던 목걸이는 빛을 잃어버리고 다시 잠잠해졌다. 그는 후 한숨을 쉬고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을 이어나갔다.
-위대한 의지는 아무래도 나를 보살피는 것 같군.
룽겐 대사막에서 데몬의 왕이 중얼거릴 때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악마들의 주신 혹은 숭배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제 내면 속 시스템 창에 대해 의문이 생겼을 때. 데비안이 말했었다.
-위대한 의지라 불리우는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라··· 그렇다면 혹시 고대신이 아닐까요?
그럴 듯하다 생각했기에 자신은 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요정왕국으로 향하고자 했다. 하지만 막상 고대신을 마주하자 상황은 또 달라졌다.
-위대한 의지···! 네놈이 감히!
고대신인 노르드는 자신을 보자마자 외쳤다. 이를 통해서 벨로크는 대충이나마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자신의 내면속에 있는 것은 고대신이 아니다. 위대한 의지와 고대신은 따로 분리된 존재. 철천지 원수의 사이였다.
위대한 의지.
이 세계의 주신인 헬레나가 쩔쩔매던 그분. 몇천 년을 살아온 대악마가 숭배하며, 이 땅의 원래 주인이던 고대신을 봉인할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 그리고 자신의 몸에 깃들어있는,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면 속 시스템이자 상태창.
벨로크는 이를 악물었다. 놈에 대해서 생각하자 또다시 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잘살고 있던 현대인을 느닷없이 모니터 속 세상으로 끌어들이고, 칼을 쥐여주고 사람, 괴물을 죽이라 강요하고, 레벨업이라는 빌미로 스텟과 스킬을 주더니 끝끝내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던 괴물. 이 모든 일의 흑막.
녀석의 진정한 정체는 뭘까. 어디서 온 놈일까. 벨로크는 십자검의 검집을 꾹 쥐다가 검이 비명을 지르자 슬며시 손에 힘을 풀었다. 대신에 그는 펜던트를 매만졌다.
거, 말이라도 해주고 잠들지 그랬냐. 대체 언제쯤 깨어나는 거야? 청금석을 안고 있는 인어의 형상을 한 목걸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차가운 기운만을 그에게 선사할 뿐이었다.
노르드의 조력을 기다리며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시간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어찌 됐든 요정왕국으로 가서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다행스러운 점은 그에게는 이제 시스템 창의 강제에 대항할 만한 수단이 생겼다는 것이다.
강대한 힘을 가진 고대신의 파편. 신성이라면 시스템 창의 손아귀에서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을 테니까. 아리아에서 느닷없이 로벤으로 순간이동 되었을 때처럼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스킬과 스텟들은? 내가 흡수한 대악마나 마녀들도 내가 시스템창에게 반기를 든다면 나를 적대할까? 차가운 밤바다 아래에서 이방인의 상념은 깊어져만 갔다.
“어렵군···”
벨로크가 한숨을 내쉴 때. 화린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보기 좋게 그을린 그녀의 얼굴과 쇄골,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이목구비에 시선이 팔린 것도 잠시. 벨로크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생선과 조개, 감자와 라임 등. 잡다한 것들이 잔뜩 들어간 수프 그릇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화린이 웃으며 그릇을 내밀었다.
“벨로크씨. 식사하세요.”
“잘 먹겠소.”
그릇을 건네받은 그는 상념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모닥불 위에는 육포와 치즈가 꽂힌 나무 꼬챙이들이 나란히 지글거리고 있었다. 난쟁이, 리쿠와 아피아 남매 또한 화린으로부터 그릇을 건네받아 막 수저를 뜨고 있었다.
그래, 밥이나 먹고 한숨 자자.
어인에게 사로잡혀있던 사람들을 구해내고, 상황을 정리하고 밖으로 빠져나오니 지금 시각이었다. 지친 그의 정신과 육체는 휴식을 필요로 했다. 그는 스프를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이윽고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때요? 간만에 솜씨를 좀 발휘해 보았는데···”
화린이 손가락을 비비며 눈동자를 빛냈다. 벨로크는 그녀의 눈에 서린 기대감을 배신할 수가 없었다. 기껏 차려줬는데 면전에 대고 맛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입에서 느껴지는 달고 짜고 신 온갖 맛들을 뒤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배만 채우면 되니까.
“먹을 만하군.”
“Damn···”
인상을 찌푸리려는 리쿠의 등을 아피아가 후려쳤다. 그녀 역시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음! 좀 자극적이기는 한데 맛있어요. 화린언니!”
“정말? 다행이다··· 난 또 오랜만에 요리를 한거라 무슨 실수라도 했을까 싶어서···”
아피아는 환자였고, 벨로크와 리쿠 바트릭은 딱 봐도 요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결국 화린이 실력 발휘를 한 것이었다. 안심한 그녀가 웃을 때. 바트릭이 먹고 있던 스프를 퉤 뱉었다. 난쟁이는 그릇을 홱 던지며 자신의 본심을 그대로 내뱉었다.
“염병··· 다들 혀가 고장이라도 낫나? 이게 무슨 스프야! 저기 있는 소금물도 이것보단 낫겠는데! 에잇! 퉤퉤!”
그래, 넌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그는 불에 그을린 육포를 스프에 찍어서 입에 가져갔다. 먹다 보니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아리안의 인간 사냥꾼 마을에서 독 섞인 음식을 먹었을 때처럼 짜릿했다.
“바트릭씨···”
아피아가 말렸지만 난쟁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거 자네는 할 줄 아는 게 맨손으로 괴물들 골통 부수는 것 말고는 없나? 정말이지 여성스러움이라는 단어하고는 거리가 멀구만!”
바트릭의 폭언에 화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녀는 바트릭에게 화를 내려다가 자신 몫의 스프를 떠먹었다.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소리쳤다.
“뭐가요! 맛있기만 하구만!”
“진심인가?”
바트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화린은 스프를 그릇째 들이켰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지금 내 혀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봐요! 다른 사람들도 다들 맛있다고 하잖아요!”
미각이 고장 난 그녀를 잠깐 바라보던 바트릭이 세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자네들이 이 괴물을 만든 거야! 아무리 입맛이란 게 개인마다 다르다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지금 말 다 했어요?!”
나무로 된 그릇과 컵이 휙 날아다니고, 두 사람의 다툼 소리가 해변가에서 울렸다. 어찌나 시끄럽던지 그들이 있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가족 잃은 미망인들의 울음, 병자들의 신음성이 잠시나마 가려질 정도였다. 어인으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아피아 또한 그 모습을 보면서 슬며시 웃을 수 있었다.
“역시 난 자네가 싫어. 저게 어떻게 여자야? 고릴라 같은 년.”
“피차일반이에요. 이 땅딸보 반토막씨.”
두 사람이 모랫바닥에 다시 앉았다. 이윽고 그들은 방금 전까지 싸웠다는 사실은 잊어둔 채 서로 술잔을 부딪쳤다.
물론 주변의 분위기야 초상집처럼 음울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사들이었다. 그것도 피땀 흘려 이 섬을 구해낸 영웅들이었다. 전쟁을 마친 전사들은 언제나 제 목마름을 채워주어야 했다. 그래야 또 싸울 수 있었다.
“형씨. 형씨가 그 포탈로 다시 들어갈 때는 정말 정신이 돌아버린 건 아닌지 생각했다니까!”
“그런 끔찍한 존재는 처음이었어요. 나도 모르게 손이 눈동자로 향하더라구요! 세상에 스스로의 눈을 자기가 파버리다니! 벨로크씨가 아니었다면 전 평생을 장님으로 살았을 거예요!”
와하하 웃은 바트릭이 럼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다리를 다소곳이 모은 화린 또한 조심스레 술잔을 홀짝였다. 그 괴물. 지금 내 목걸이 안에 있는데?
‘말해야 하나?’
그가 고민할 때. 아피아가 물었다.
“벨로크님. 대체 무슨 연유로 고대신을 쫓아 포탈로 들어가신 건가요? 내면의 괴물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니 그보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아피아의 말은 정중했고, 눈동자는 걱정을 담고 있었다. 허나 그 속에 담긴 것은 의심이었다. 벨로크가 혹여 고대신의 화신이 되어 조종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감정을 읽어내릴 수 있었다.
그는 상념에 빠졌다. 아피아는 솜씨 좋은 주술사였다. 영혼을 보고 느낄 수도 있으며, 자신이 해신을 만나러 갔을 때. 포탈이 닫히려는 걸 막아주기까지 했다. 몸도 성치 않은데 말이다.
벨로크로서는 그녀에게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아피아가 아니었다면 노르드와 함께 이계의 틈에 갇혀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리쿠가 동굴 입구의 판석을 해석하지 않았다면 그 괴물이 해신이라는 것 또한 몰랐겠지. 그랬다면 자신은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테고 신성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화린과 바트릭의 활약은 말 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시간이 지체되어 해신이 온전히 부활했을 테니까. 그럼 노르드가 자신과 거래하지는 않았겠지.
물론 자신 역시 이들을 구해주기도 했고, 서로의 목적에 의해 협력하기는 했다. 하지만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고 끝까지 도리를 지킨 이들 정도면 매우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래, 이들이라면··· 벨로크가 네 사람을 향해 입을 열려는 찰나. 리쿠가 아피아의 동그란 머리통을 퍽 후려쳤다. 이윽고 인상을 와락 찌푸리면서 말했다.
“아피. 내가 너. 그렇게 가르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