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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45화 (14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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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의 동굴

일행이 지금껏 이 해저 동굴을 살필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발을 디딜 곳이 많아서였다.

구멍이 숭숭 뚫려 바닷물이 지나는 통로가 보인다 해도, 물에 잠겨 침수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이곳은 땅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광경은 달랐다.

쏴아아아

온통 바닷물로 가득 차 발 디딜 곳 하나 안 보였다. 거기다가···

“대체 이 많은 배들이 어째서 이 안에 있는 걸까요?”

“수십 척은 가뿐히 넘어 보이는군. 옛날에 이 동굴을 항구로 이용했나?”

난쟁이는 자기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상태, 안 좋아 보인다.”

동굴 안에 들어차 있는 것은 배들이었다. 하지만 리쿠의 말대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돛대나 선수상이 부러져 있는 것은 기본에 앞머리와 측면에는 따개비부터 시작해 온갖 해양 생물들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녹슨 배 수백 척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이리저리 얽혀있었다. 마치 난파선들의 무덤을 보는 것 같았다.

눈이 좋은 벨로크는 일행들이 못 보는 광경들을 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이곳 배의 무덤의 광활함. 희끗희끗 보이는 안개 무리. 시커먼 바닷물 속에서 부글거리고 있는 물거품까지. 여기에 횃불 빛이 더해지니 분위기는 사뭇 기괴해졌다. 주변을 환하게 만들기는커녕. 그냥 미약한 주황빛으로 밝힐 뿐이었으니까.

물론 벨로크는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이런 걸로 겁먹기에는 그간 겪어온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일행은 아니었다. 어째선지 목덜미가 시큰거렸다. 솜털이 부르르 선다고 해야 하나? 입 더러운 난쟁이는 역시나 이 공포를 욕설로 승화시켰다.

“시벌···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장소야.”

“뭐, 이 동굴이 사실은 살아있어서 이 배들을 다 잡아먹은 거 아닐까요?”

화린은 우스갯소리를 내뱉어서 애써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다. 아니, 그거 플래그라니까? 그 순간. 벨로크가 던졌던 횃불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자 기괴함 혹은 광활함을 표현하던 배의 무덤이 그 모습을 감추었다. 또 다른 횃불을 꺼내 주변을 밝히던 리쿠가 벨로크에게 물었다.

“그거. 쓸 건가?”

저번에 바다 거인을 죽였을 때처럼 해수면을 얼려서 이곳을 건널 거냐는 말이었다. 음. 그게 최선이긴 한데··· 이 녀석의 힘이 충분할까? 벨로크가 지금껏 망령의 칼날을 사용하면서 느꼈던 것은 이게 사제나 성기사의 축복과도 같은 버프형 기술이라는 거다.

검날에 삿된 기운을 불러일으켜 상대의 정신을 뒤흔들거나 저주를 입히는 것이 본 목적이고, 한기는 부과 효과란 뜻이었다. 물론 마녀의 수준이 높았던 만큼 한기 역시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하기는 했지만··· 거리가 좀 멀었다.

이자벨이나 카라가 있었다면 편했을 텐데. 이번에도 역시나 동료들의 빈자리가 체감되었다. 그가 고민하자 화린이 배낭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언제까지나 벨로크 씨에게 의존할 수는 없어요. 게다가 벨로크 씨는 우리 파티에서 제일의 전력을 자랑해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힘을 아껴둘 필요가 있단 뜻이죠.”

그녀의 손에는 갈고리 달린 밧줄이 들려있었다. 화린은 밧줄을 붕붕 돌리면서 말했다.

“벨로크씨. 아까처럼 횃불들을 던져주시겠어요?”

고전적인 방법을 이용하겠다 이거지? 이건 또 언제 준비했대? 벨로크가 횃불을 휙휙 던졌다. 수면 위로 송진 바른 횃불이 둥둥 떠다녔다. 또다시 어둠이 물러나며 난파선들이 보였다.

“흐아압!”

시야가 확보되자 한 발짝 크게 내디딘 화린이 갈고리를 던졌다. 쭉 뻗어나간 갈고리는 난파선 중 한 척의 돛대에 휘리릭 감겼다. 그녀는 밧줄을 주우욱 당기며 튼튼한지 확인하더니 근처의 석순에 반대편 부분 역시 묶었다.

한순간에 로프로 된 길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녀는 탱탱한 밧줄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상체를 숙였다. 잡고 넘어갈 속셈인 것 같았다. 난쟁이가 그녀를 만류했다.

“어이, 이봐. 만약에 물속이나 저 배에서 괴물이라도 튀어나오면 어떡하게? 밧줄이 끊기면 자네는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고 만다고.”

“어머. 지금 저를 걱정 해주시는 거예요?”

“흥. 착각하지 마. 전력에 공백이 생기면 내가 살아나갈 수 있는 확률이 줄어들잖아! 그뿐이야!”

난쟁이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머스킷을 장전하고 있었다. 화린은 피식 웃으며 난쟁이를 보다가 횃불을 입에 물고 밧줄을 잡았다. 그리고는 휙 땅을 박차더니 아예 밧줄을 밟고 그 위로 올라섰다. 그녀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놈들이 나타나기 전에 내가 먼저 도착할 테니까.”

한 발짝 또 한 발짝. 천천히 걷던 화린은 곧 무서운 기세로 밧줄 위를 내달렸다. 대단한 균형 감각이었다. 또한 빨랐다. 그녀는 순식간에 맞은편의 배 위에 착지해 손을 흔들었다.

“권법가가 아니라 해적 출신 아니야?”

총을 견착하고 있던 난쟁이가 놀랐다. 벨로크 역시 그녀의 몸놀림에 감탄하며 밧줄 위에 올라탔다. 이윽고 그는 화린보다도 더 빨리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내 저 친구는 저럴 줄 알았지. 이제 놀랍지도 않아.”

난쟁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쿠를 바라보았다.

“이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러워서···”

“먼저 간다.”

리쿠는 두 사람처럼은 안 되어도 원숭이처럼 양팔로 줄을 휙휙 잡고 넘어갔다. 이윽고 끝에 다다라서는 괴성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는 난파선의 중앙을 쾅 부수며 들어가고는 먼지를 털며 갑판으로 올라와 흥 콧김을 내뿜었다.

결국 남은 것은 난쟁이뿐이었다.

“이런 염병할!!! 거, 자네들은 남의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나?!”

바트릭은 양팔과 다리를 이용해 마치 애벌레처럼 밧줄을 타고 오고 있었다. 힘은 조금 들어 보여도 어찌 됐든 넘어 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낑낑거리는 난쟁이의 아래로 부글부글 파문이 일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생겨난 것이다.

“음?”

온통 시커먼 바닷물 천지에서 난쟁이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물속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광원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물속으로 촉수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는데. 그 끌에 달린 무언가가 램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시퍼런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심연의 괴물이었다.

“시, 시발!”

등골이 오싹해진 난쟁이가 팔다리를 다급히 움직였다. 물속에 있던 존재 또한 이를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지느러미를 휙 휘저은 녀석이 수면을 콰아아 가르며 고개를 치켜올렸다. 거대 물고기였다. 허나 몸체에 비해 눈동자가 비대하게 컸으며 툭 돌출되어 있는 것이 사뭇 끔찍한 모양새였다. 심해어인가?

“으아아아! 왜, 왜 나만!”

보고 있던 화린이 기겁했다.

“바트릭씨!”

거대 물고기의 이빨이 그를 통째로 삼키기 전. 빛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벨로크가 던진 단검이 물고기의 눈알을 팍 터트려버렸다.

끄이이이익!

화린 또한 느닷없이 허공에서 발을 날렸다. 그러자 공기가 팡 터지며 무형의 기운이 괴물 물고기를 향해서 나아갔다. 예의 그 비전인 것 같았다. 이것 마저 얻어맞자 물고기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팔딱거리다가 다시금 수면으로 가라앉았다. 덕택에 난쟁이는 낡아빠진 배 위로 올라탈 수 있었다. 그는 양팔로 무릎을 짚은 채 헉헉거렸다.

“불칸이여··· 내 오늘 그대를 영접할 뻔 했수다.”

“괜찮아요?”

“괜찮냐고? 염병. 내가 지금 괜찮아 보이냐? 하마터면··· 이건 또 뭐야!”

화린의 물음에 톡 쏘아붙이려던 난쟁이가 기겁했다. 갑판 주변에 널려있는 해골들 때문이었다. 벨로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꽃밭이라도 펼쳐져 있기를 기대했나?”

바트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널려있는 뼛조각들은 음산한 배의 광경과 아주 잘 어울렸으니까. 그때 선박이 쿠우웅 울렸다.

“어, 어?”

균형을 잃고 추락하려는 난쟁이를 리쿠가 턱 잡았다.

“고, 고맙네.”

꾸어어어!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야광등 달린 촉수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몇 마리는 이미 입을 쩍 벌리며 배들로 이루어진 방벽에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저 시커먼 물속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잠들어 있을까? 이 새끼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거지? 벨로크는 잠깐 생각했지만 부질없는 물음이었다. 지금은 좀 더 생산성 있는 일을 할 때였다. 그가 고갯짓했다.

“수장되기 싫으면 어서 움직이지.”

벨로크를 선두로 한 네 사람은 선박들의 무덤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엉망이 된 이 배들은 무질서하게 한 곳에 뭉쳐져 있었다. 어떤 배는 갑판이 다 작살나 내부 구조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고, 어떤 곳은 하부가 다 날아가 갑판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일행은 암벽 등반을 하듯 배 하나를 넘고, 또다시 하나를 넘어 앞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네 사람 다 베테랑 모험가들은 찜쪄먹을 수준의 신체 능력을 겸비했기에 별 달리 어려울 일은 없었다.

게다가 난파선 안에는 시체들만 보일 뿐. 괴물들 역시 안 보였으니. 그들은 발을 헛디디는 것만 조심하면 됐다. 잘못해서 저 차가운 물 속으로 빠진다면, 지금도 파문을 일으키며 쫓아오는 심해의 괴물들이 그들을 뼈 채로 집어삼켜 버릴 테니까.

튀어나온 나뭇조각을 피하고, 썩어빠진 술통에서 나는 냄새에 코를 찌푸리고, 기우뚱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벨로크의 시야에 수면이 아닌 평평한 지면이 보였다. 그는 높게 솟아있는 감시탑 위에서 갑판으로 훌쩍 내려오며 말했다.

“중간쯤 온 것 같소.”

“저 새끼들이 이 배들을 다 갉아먹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겠지?”

난쟁이가 심해어들을 가리킬 때였다. 일행이 서있는 갑판 위로 돌연 안개가 끼었다. 어찌나 짙고 빠르게 끼는지 바로 옆에 있던 동료들의 얼굴이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이건 또 뭐야!”

“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요! 한기가!”

“움직이면, 안 된다! 길! 잃어버린다!”

당황하고 있는 일행 사이로 낯선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쇠를 긁는 듯 기괴하고 소름 끼치지는 음성이었다.

[이곳은 우리들의 바다다. 그 누가 침범하려 드는가.]

이에 동조하듯 달그락 거리는 뼈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안개를 휙 가르며 무언가가 날아왔다. 벨로크는 십자검을 뽑아 들어 이를 튕겨냈다. 녹이 슨 커틀라스였다.

삿된 것과 접촉했기 때문일까? 은장검이 환히 빛났다. 주변에 있던 안개가 꿈틀거리며 물러났다. 덕분에 칼을 휘둘렀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가 묻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훤히 드러난 갈빗대를 자랑하는 주인이 공허한 두 눈을 일그러트렸다. 미처 피하지 못했는지 화린이 피 흘리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이 곳은 그냥 난파선이 아니었어요! 유령선이에요!”

뿌우우우우

그녀의 말이 끝나자 뿔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윽고 배 곳곳에 걸려있던 램프들이 일제히 켜지며 시퍼런 귀화를 뿜어냈다.

[길길길길길!]

[피를! 나에게 육체를! 이 차가운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저주받아 죽어서까지 바다를 떠돌게 된다는 악귀. 바다의 망령들이 산자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 숫자가 일행이 있던 갑판 위를 가득 채운 것은 물론, 주변에 있던 선박들까지 까마득하게 채웠다. 족히 수천은 넘어갈 것 같았다.

우리들이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일부러 기다린 건가?

“염병! 거대 물고기 다음은 유령이냐!”

난쟁이가 탕. 머스킷을 쐈다. 해골은 머리가 날아갔다. 하지만 곧 뼛조각들이 저절로 모이더니 신체를 재생시킨 녀석이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화린이나 리쿠의 도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때리고 부숴도 놈들은 신체를 수복시키며 달려들었다. 오직 성력이 담겨있는 벨로크의 십자검만이 녀석들의 탁한 영혼을 정화시켜 부활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시발! 이거 상성이 안 좋아! 믿을 게 형씨의 칼뿐이라니!”

“어떻게 하면··· 윽!”

한 번에 수십 개의 무기가 날아온다. 순식간에 포위되어 버렸기에 피할 곳 역시 마땅치 않았다. 자연히 일행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으하하하하! 오랜만의 맛보는 온기다! 비린내 나는 물고기 놈들한테 빼앗기기 전에 모조리 취해라! 한 놈이라도 더 이 고통의 굴레를 끊어버려라!]

선수상에 턱하니 앉아 이 모습을 관람하고 있던 언데드가 소리쳤다. 선장모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두머리처럼 보였다. 몰아치는 사령들의 파도 속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난쟁이가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봐! 형씨! 벼락을 불러일으켜! 이대로 가다가는 개죽음이야!”

“그게 됐다면 진작에 사용했을 거요!”

벨로크는 손에 들린 십자검을 쉴 틈 없이 휘두를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수십 명의 유령들이 분쇄되었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난쟁이가 물었다.

“왜! 뭐가 문젠데?! 감전될까 봐?!”

“천장을 보시오. 하늘이 막혀있는데 어떻게 벼락을 내려치겠소?”

“이런 시부럴! 그렇게 자연친화적인 힘이었어?!”

설상가상으로 거대 심해어들 역시 배를 갉아 먹으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한다? 벨로크는 언데드 선원의 갈고리 손을 폼멜로 튕겨내고 녀석의 머리통을 반으로 쪼개며 고민했다.

자신 혼자라면 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다. 아니, 시간만 충분하다면 모조리 다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그가 지금껏 쌓아 올린 스탯.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은 충분히 그럴만한 역량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이 세 명은 죽고 만다.

가족 잃은 야만인, 예의 바른 격투가, 입 더러운 난쟁이. 이들 모두가 저 망령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바닷속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저 괴물들의 일행이 되어 부활할 것이다.

옛날의 자신이었다면 망설일 것도 없이 이들을 버렸겠지. 이 세계의 주민들을 단순한 데이터 덩어리로 취급할 때의 자신이라면···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델, 카라, 이자벨, 베로니카와 데비안까지. 자신과 깊은 인연이 있던 자들이 이 엿같은 세계의 따스함을 알게 해 주었다. 이곳이 단순한 폴리곤 덩어리들의 집합체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고민했다.

괴물이 아닌 사람의 마음씨를 가진 기사는 고민했다. 그리고 주인이 위기에 빠지자 내면속에 있던 힘이 꿈틀거렸다.

대악마와 손을 잡고 세상을 파괴하려 했던 마녀의 영혼. 칼라였다. 지독한 원념을 가진 그녀가 벨로크에게 속삭였다.

어둠은 더 큰 어둠으로 잠재우는 법.

벨로크는 눈을 크게 떴다. 마녀 칼라가 보여주고 있는 광경이 머릿속에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까지 가능했다고? 그는 흐읍 숨을 몰아쉬며 내면의 힘을 끌어올렸다.

틈을 노린 망령의 칼날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꺼지지 않는 심장’이 맹렬히 박동하며 그 상처를 메꿔버렸다. 벨로크는 녀석을 퍽 걷어차고는 은장검을 바닥에 꽂았다. 이윽고 한쪽 손을 뻗으며 읊조렸다.

“칼라.”

시커먼 어둠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어느 때 보다 강력한 힘을 받아들인 망령이 현세에 실체화되었다.

끼아아아아악!

칼라는 자신의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귀곡성을 흘렸다. 동굴이 쩌렁쩌렁 울리고, 전장의 소음이 대번에 가라앉을 정도였다.

“꺄아아악!”

“으으으으! 머리가!”

“삿된··· 힘.”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가올 고통을 대비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무런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슬며시 눈을 떴다.

“맙소사···”

화린의 중얼거림이었다. 난쟁이, 리쿠 또한 떨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죽일 듯이 덮쳐오던 수천의 망령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었다.

몸 전체가 시퍼렇고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인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그 로브 쓴 여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이 광경을 보다가 벨로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참으로 두려우면서도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

죽음과도 같은 침묵을 뒤로한 채,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이거 쓸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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