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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비린내
“왜, 왜 이래? 미쳤어?”
화들짝 놀란 난쟁이가 갑판장을 바라봤다. 두건을 벗고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어깨는 쉼 없이 들썩거렸고 입으로는 의미불명의 말을 연신 내뱉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바깥에 내려앉은 어둠. 불어오는 파도 소리와 합쳐져 꽤나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를보고있다그분이나를보고있다%@$#&]
“이봐요! 아저씨!”
다가간 화린이 갑판장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화린이 비명을 질렀다. 새카맣긴 했지만 나름 남자답다고 할 수 있었던 갑판장의 얼굴은 흉측하게 녹아내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융해와 응고를 반복하는 것이, 마치 기괴한 살덩이의 반죽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시발!”
뒤틀린 그 모습에 난쟁이는 옆에 세워두었던 총을 들어 올렸다. 화린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 잠깐만요! 방금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잖아요! 무턱대고 죽여버릴 셈이에요?!”
“네 눈에는 저게 지금 사람으로 보이냐? 저거 괴물이야! 비켜!”
난쟁이는 조준점을 휙휙 돌리며 갑판장을 겨누었다. 하지만 화린은 몸을 움직여 총구를 가로막았다.
“진정해요! 아직까지 덤비지 않고 있잖아요! 일단 대화를 좀 해보자구요!”
[우···우우우우.]
그녀의 말대로였다. 연체동물 같은 형태가 된 갑판장은 몸을 부르르 떨 뿐 그들에게 달려들지 않고 있었다. 대화가 통할 수도 있었다. 그런 갑판장의 미간에 단검이 퍽. 박혔다. 그가 털썩 쓰러지고 화린이 소리쳤다.
“세상에! 벨로크씨!”
“왜 그러시오?”
화린은 벌컥 화를 내려다가 그가 멀뚱하게 되묻자 오히려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가 띄엄띄엄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같이 온··· 사람이잖아요. 이렇게 막 죽이는 건···”
벨로크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들어 올렸다.
“이게 빛나고 있어서 말이오.”
“그건···?”
“근처에 괴물이 있으면 스스로 빛을 내는 검이지.”
“성검? 인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 순진한 아가씨야! 그렇게 영웅 놀이가 하고 싶다면 밖에 나가서 혼자 하라고! 우리까지 끼어 들이지 말고! 어?”
난쟁이가 타박했다. 화린은 난데없이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을 잠깐 바라보다가 한층 더 우울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에잉. 쯧.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처자가 이렇게 물러서야··· 이러다가 저 물고기 놈들한테 따먹히고 팔다리가 잘리면 그때서야 후회할 텐가?”
난쟁이는 아까전 화린에게 한 소리 들었던 것을 갚기 위해서인지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릴 때. 벨로크가 말했다.
“바트릭.”
“왜?”
“닥치시오.”
바트릭은 발끈했는지 벨로크를 노려봤다. 하지만 석벽에 기대앉아있는 그의 모습. 떡 벌어진 어깨에 바위마저 부술 것 같은 두툼한 주먹. 결정적으로 깊게 가라앉아있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난쟁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아, 알겠네.”
난쟁이가 입을 다물자 벨로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죽어버린 갑판장의 시신을 살폈다. 목덜미에 날카로운 무언가에 물린 자국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위로 시퍼런 비늘들이 돋아나 있었다.
“상태로 봐서 입은 지 얼마 안 된 상처 같아요. 어인한테 물린 것 아닐까요?”
옆으로 다가왔던 화린이 말했다. 입 다물고 있던 난쟁이 또한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놈들한테 물린다면 우리도 저 꼴이 난다는 말인가?”
뭐, 좀비냐? 벨로크는 계속해서 시신을 살폈지만 더 이상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시체를 내버려 둔 채, 다시금 자리에 앉아 육포를 뜯었다. 어떻게 한다?
그들을 요정왕국까지 데려다줘야 할 배는 배신을 때리다 박살 났고, 선원들은 다 죽었다. 아까 전 거인이 내뱉은 말과 마을의 광경으로 봐서 이 섬도 이미 초토화된 듯 싶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새로운 배를 구한다 해도 운행할 사람이 없다는 건데··· 염병. 진짜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지? 이건 괴물 죽이는 거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가 고민할 때 바트릭 역시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그가 물었다.
“그보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난쟁이는 총을 품에 꼬옥 안고는 창문을 살피고 있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불안한 모양이었다. 당장에 저 문을 부수고 괴물이 습격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니까. 화린 역시 시선을 보낼 때 벨로크가 말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고 내일 날이 밝으면 섬을 뒤져봅시다.”
“뭐, 뭐? 괴물들을 피하기는커녕 섬을 뒤지자고?”
“생존자를 찾든 아니면 쪽배를 찾든 일단 움직여보자는 소리요. 가만히 앉아서 말라죽을 수는 없지 않소?”
벨로크는 그 말과 함께 먹고 있던 육포를 불가에 던졌다. 이윽고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베른하트의 은장검이라 이름 붙여진 십자가 형태의 검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아름답게 세공되어있는 이 은 색깔의 검은 현재 휘황찬란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불침번은 번갈아 가면서 서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 친구들은 그렇게 놔두기를 싫어하는 것 같군.”
고개를 저은 벨로크는 뚜벅뚜벅 걸어서 난쟁이와 화린을 지나쳤다. 이윽고 낡아빠진 방문을 쾅 걷어찼다. 불어오는 바람에 모닥불이 파르르 흔들렸다. 그 사이로 비릿한 냄새가 코를 마비시킬 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크르르르
어둠에 잠긴 거실 너머로 샛노란 눈 수십 쌍이 보였다. 미약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 돋아난 지느러미가 사뭇 역겨웠다. 하지만 그는 산책이라도 나가듯 손에 들린 검을 휙휙 휘두르며 말했다.
“무기를 드시오. 아무래도 오늘 밤 편히 쉬긴 그른 것 같소.”
“젠장···”
“하아···”
난쟁이는 제 총기를 들어 올렸고, 화린은 벗어두었던 건틀릿과 각반을 다시금 찼다. 잠시 후. 폐허가 된 어촌마을에서는 꽈르릉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
잔뜩 쏟아지는 햇빛에 벨로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평범한 것을 넘어 비정상적으로 좋은 그의 시력이 너무나도 많은 빛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저건 또 무슨 색이지? 가만··· 빛에는 색이 없지 않나? 현대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생선 대가리, 해마 대가리, 박살 난 게의 등껍질, 문어의 촉수까지. 별의별 해양 생물체들의 흔적이 이 좁디좁은 집안에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산처럼 쌓인 시신들 사이로 온몸이 피범벅이 된 난쟁이와 여인네 하나가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코를 골고 있었다.
벨로크는 그들의 피로가 조금 풀릴 때까지 경계를 서다가 두 사람을 깨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통이 넓은 가죽 반바지에 짐승의 생가죽을 통째로 두른 듯한 갑옷. 허리춤의 도끼에는 흐르다 만 피가 굳어있었고, 이는 얼굴에 새겨져 있는 문신에까지 튀어있었다. 그 역시 간밤에 습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벨로크가 말했다.
“무사했군.”
“···처음, 따라죽으려했다. 그런데 살았다··· 아직도,원망스럽다.”
동생과 함께 고향을 벗어난 것? 이 배를 탄 것?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줘야 한다며 배에 남아있겠다는 동생을 설득하지 못한 것?
“그 아이, 지키지 못한. 나. 약해빠진 나. 원통하다.”
리쿠는 제 가슴을 쿵쿵 치다가 벨로크를 쳐다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벗겨내지 못한 슬픔들이 가득했다. 야만인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동생. 원수. 갚아줬다. 고맙다.”
“리쿠씨···”
화린이 말끝을 흐렸다. 밸로크는 괜스레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오?”
“비린내 나는 놈들, 잡으러 가나?”
“탈출을 위해서 섬을 뒤져볼 생각이오. 놈들하고도 마주치게 되겠지.”
리쿠는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말했다.
“나도 간다. 아직 아피아의 영혼, 달래지 못했다.”
“그렇게 하시오.”
고개를 끄덕인 벨로크는 가방을 뒤져 그에게 물과 식량을 던져줬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배도 안 채우고 싸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였다. 리쿠는 손에 들린 음식을 게걸스레 먹었다. 그리고는 입가를 쩝쩝거리며 언제라도 싸울 수 있게 허리춤의 도끼를 뽑아 들었다.
“이봐. 진짜 괜찮은 거야? 저 친구가 갑자기 흥분해서 날뛰기라도 한다면···”
난쟁이가 우려의 말을 꺼냈다. 이성을 잃은 아군은 때때로 적군보다 위험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당신의 그 무식한 무기들보다는 리쿠씨의 도끼가 훨씬 더 안전하고 믿음직스럽지 않을까요?”
폭탄의 폭발범위, 총알의 도탄 때문에 피해를 입은 화린이 꺼낸 얘기였다. 난쟁이가 울컥했다.
“이봐. 그건 내가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건 내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당신이 그 무기를 휘두를 때부터 그에 대한 책임은 당신한테 있어요. 어디서 시덥잖은 변명질이에요? 여기, 내 머리카락 잘려 나간 거 안 보여요?! 만약 내가 피하지 못했으면 머리가 깨졌겠구만!”
“아니, 그러니까!”
“그만.”
벨로크가 제지하자 난쟁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화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다툴 기운이 있으면 괴물들한테나 써먹으시오. 움직입시다.”
벨로크를 선두로 난쟁이가 좌측, 화린이 우측을 맡았다. 리쿠는 후방을 경계했다. 네 사람은 그렇게 폐허가 된 어촌마을을 지나 돌길과 언덕을 넘어 섬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어인들이 습격을 해왔지만 예의 바다 거인 정도가 아니라면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죽이고, 또 죽이고. 죽어버린 시체를 마주하고, 부서져 버린 건축물들을 살피고. 종래에는 폐허가 된 영주성마저 뒤진 일행은 섬의 정중앙. 솟아오른 산 정상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주변이 훤히 보였다.
매를 넘나드는 벨로크의 시력이 저 아래. 해변이나 모랫가에 우글거리고 있는 검은 점들을 포착해냈다. 수백은 넘어 보였다. 그리고 그건 전부다 어인이라 일컬어지는 바다의 괴물들이었다.
그냥 저 비린내 나는 놈들이 이 해역의 일대를 장악해버린 것 같았다. 이 섬은 그 전초기지 혹은 본거지고 말이다. 바퀴벌레 같군. 보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숫자가 바닷속에 있겠지? 아무래도 잘 못 걸린 것 같은데.
중간에 들린 배에서 망원경을 챙겨온 난쟁이 역시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젠장. 배를 찾으면 뭐 해. 쪽배를 타고 갔다가는 저 괴물에게 조각날 테고 범선을 몰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 뒤졌는데.”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걸까요?”
이제 나타날 때가 됐는데. 벨로크를 제외한 세 사람이 두리번거릴 때. 뒤편에 있던 수풀이 부스럭거렸다. 왔군. 난쟁이는 총기를 들어 올렸고, 화린은 양 주먹을 꾸욱 쥐었다. 리쿠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냅다 도끼를 던졌다. 그리고 그 도끼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턱 잡혔다. 벨로크였다. 리쿠가 물었다.
“왜?”
“사람이다.”
벨로크의 말대로였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건 사람이었다. 양 볼은 움푹 들어가 있고 옷은 이리저리 찢겨져 있었지만,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은 일행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달려든다거나 신을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저 양팔을 들어 올린 채, 침착하게 말했다.
“무기를 넣어주십시오. 저는 아가미 달린 괴물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생존자가 느닷없이 여기서 나타난다고?”
묘하게 침착한 사내의 태도가 오히려 난쟁이에게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내는 허리춤의 망원경을 꺼내 보였다.
“해변가 근처에는 괴물들이 쫙 깔려있거든요. 그렇기에 저는 이곳 근처에 있는 은신처에 숨어 여러분들이 올 때까지 살피다가 나타난 겁니다.”
“못 믿겠는데? 혹시 놈들한테 물린 거 아닌가? 옷 한 번 벗어봐.”
난쟁이의 요구에도 사내는 순순히 응했다. 물린 자국 같은 것은 안 보였다. 화린은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사내가 옷을 다 입자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여기 주민이신가요?”
“베릭트. 소금성 휘하의 서기관이었습니다.”
귀족 혹은 그에 준하는 자였다. 그렇다면 현재 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도 아는 것이 많을 것이다. 저 괴물들이 나타난 원인, 다른 사람들의 행방 등 물어볼 것은 많았다. 하지만 벨로크는 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물었다.
“그래, 소금성의 베릭트. 우리 앞에 나타난 이유는 뭐요? 도움이 필요하오?”
베릭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조를 청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여러분들한테 도움이 되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들한테?”
베릭트는 목이 마른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벨로크가 물병을 던져줬다. 그는 물을 받아먹고는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