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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39화 (13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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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비린내

이번에는 또 어떤 놈들이냐? 술잔을 내려놓은 벨로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의 검집으로 손을 가져가니 십자가 형태의 검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더 안 부럽군. 갑작스레 일어난 그를 보며 아피아가 물었다.

“벨로크님? 왜···?”

“아피. 조용.”

리쿠또한 낌새를 느낀 것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탕하게 웃어 재끼던 표정을 갈무리하자 한 마리의 야수가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아마 저 모습이 평상시 내보이지 않았던 그의 진면목일 테지. 모든 것이 척박한 대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전사. 대설산의 북부 야만인.

“···”

아피아는 늘 하던 것처럼 그를 타박하거나 딴지를 걸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전투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에 있어서는 오라비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모양이었다.

“소리. 달라졌다. 많이.”

리쿠는 허리춤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조금 낡아 보이기는 했지만, 표면에 바위 문양이 새겨져 있는 날이 넓적한 전투도끼였다. 리쿠의 눈이 배의 난간 너머. 넘실거리는 파도를 주시했다. 벨로크는 답하는 대신 난간으로 다가갔다. 때맞춰 범선이 끼이익 요동쳤지만, 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걸었다.

아래를 쳐다보자 어둠에 휩싸인 해수면이 보였다. 그 위로 희미하게 반사되고 있는 달빛과 보글거리고 있는 물거품 역시 보였다. 그냥 밤바다였다. 하지만 벨로크의 두 눈은 조금 다른 것들을 포착해냈다. 모든 것이 흐릿한 물속. 아가미를 뻐끔거리고 있는 이형의 존재들.

녀석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고개를 휙 젖혔다. 풍덩 소리와 함께 물속에서 작살이 뻗어져 나왔다. 뒤에서 본다면 무언가에 얻어맞은 모양새였기에 아피아가 소리쳤다.

“뭐, 뭐야! 괜찮아요!?”

“피했다.”

리쿠의 말대로였다. 벨로크는 느닷없이 물속에서 튀어나온 작살을 고개만 까닥거린 것으로 피해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 개구리처럼 덤벼들던 녀석의 상체를 쪼개주었다.

녀석은 단말마도 남기지 못한 채, 피와 내장을 쏟으며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두 토막이 난 상태로 다시금 수면위로 떠올라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벨로크는 검을 휙 털면서 놈의 시체를 바라봤다. 비늘 돋은 왜소한 몸체에 맹한 눈동자. 톱니 같은 이빨과 물갈퀴를 가진 생물. 본 적 있는 놈이었다.

심해에서 기어 올라와 조난당한 선원들을 끌고 간다는 괴물. 어인이었다. 그리고 붉은 피가 번지고 있는 바다 아래. 수십 쌍의 노란 눈동자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너무 평화롭다 했지. 괴물들의 시선에도 주눅 들지 않은 그는 툭 내뱉었다.

“어인들이군.”

“Fiŝo! 저주받을 심해의 족속들!”

놀란 아피아가 허리춤의 가시곤봉을 들어 올렸다. 리쿠는 흐읍 심호흡하고는 배가 떠나가라 소리 질렀다.

“스읍-격이다-아!”

“뭐, 뭐야?”

그 웅장한 울림에 난쟁이가 뻐끔뻐끔 피우던 파이프 담배를 떨어트렸다. 명상을 하던 묶음 머리의 여성 또한 눈을 가늘게 떴다. 카드나 주사위 도박을 하던 선원들. 럼주를 꿀꺽거리고 있던 용병들 역시 화들짝 놀라 무기를 꼬나쥐었다.

그들은 소리 지른 야만인을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직후 풍덩 소리가 수없이 들리더니 수십 개의 거뭇한 그림자들이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뿌우우우우

배의 감시탑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용병들 역시 손에 쥔 무기로 방패를 퉁퉁 치며 적들의 습격을 알렸다. 시발. 염병. 같은 욕설과 함께 우르르 발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선실의 문이 쾅 열렸다.

부츠 한쪽을 신지 않은 모험가, 머리가 까치집이 된 선원, 맨몸에 투구만 뒤집어쓴 용병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곧 그들은 돈값을 하기 위해 혹은 살기 위해 괴물들에게 덤벼들었고, 갑판 위에서는 인간과 괴물이 내지르는 악다구니가 한대 뒤섞이기 시작했다.

대처가 빠르군. 아주 개판은 아닌데. 그 모습을 슬며시 살피던 벨로크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작살을 턱 잡았다.

끼-루루룩?

잡힐 줄은 몰랐는지. 물고기 인간의 투명한 각막이 한층 더 동그래졌다. 녀석이 작살을 끌어당겼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벨로크는 당황하고 있는 어인을 작살 채로 들어 올려 냅다 던져버렸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날아오던 작살 몇 개가 오히려 동포의 몸을 꿰뚫어버렸다. 주변에 득시글거리는, 지금도 바닷속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어인들이 내던진 것이었다.

바람 빠지는 아가미 소리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개구리처럼 덮쳐오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내팽개치고, 자세를 뱀처럼 낮춰 덤벼드는 놈의 배를 걷어찼다. 검을 아래로 내려찍어 두 마리의 머리통을 동시에 쪼개기도 했다.

반짝이는 십자검이 비늘에 닿으면 어김없이 어인의 뼈와 살이 잘려 나갔다.

압도적인 체급과 근력이 만들어낸 물리력 앞에서 숫자가 주는 무시무시한 폭력도 통하지 않았다. 물론 혼란한 틈을 타. 그의 배후를 노리고 접근하는 괴물들이 있기는 했다. 허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salti sur!”

알 수 없는 고함을 내지른 리쿠가 벨로크의 후방을 노리던 어인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화들짝 놀란 어인이 몸을 돌려 작살을 방패처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날이 넓적한 이 전투도끼는 창대를 가볍게 부러트리고 주인의 골통 역시 퍽. 쪼개버렸다.

“비린내, 나는 것들!”

이에 그치지 않고 리쿠는 한 발 크게 내디디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폭풍이 휘몰아치며 괴물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무자비한 학살을 이어나갔다. 칼날과 도끼가 쉴 틈 없이 몰아치니 괴물들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밧줄과 오크통, 술병이 굴러다니던 갑판이 인간과 괴물들의 시신으로 가득 차던 순간. 그 중심에 서 있던 벨로크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목덜미를 스산하게 물들이는 살기와는 조금 다른··· 끈적하면서도 불쾌한 이 기분.

오감이 아닌 육감으로 이 감각의 교란을 느낀 벨로크가 시선을 돌렸다. 파란색 물고기 때 사이로 조금 다른 녀석 하나가 보였다. 머리에 산호로 된 관을 쓰고 있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갈색 물고기였다.

청력이 좋은 벨로크였기에 전장의 소음 속에서도 녀석의 뻐끔거리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기괴한 음성. 주문이었다. 벨로크는 허리춤의 단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허나 놈의 주문이 사출되는 것이 더 빨랐다.

“*%$#%!”

지팡이 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곧 시퍼런 물줄기를 송곳처럼 뿜어냈다. 벨 수 있나? 아니면··· 그의 몸 주위로 치지직 스파크가 일어날 때.

“Vento!”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었다. 이윽고 이 돌풍은 그의 주위를 맴돌며 날아들던 물줄기를 분쇄시켜버렸다. 보호막인가? 손에 들린 단검을 휙 던져 어인 마법사의 미간을 꿰뚫어버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피아가 그에게 윙크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에게 달려들던 어인들을 보고는 근처에 있던 오크통을 걷어찼다.

나무통이 데구르르 구르고, 그녀를 노리고 덤벼들던 어인 몇이 이를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게다가 안에서 쏟아져 나온 독주를 뒤집어쓴 녀석들은 눈을 뜨지 못했다.

끼이이. 소리 지르는 놈들의 머리 위로 가시 곤봉이 쏟아졌다. 퍽퍽. 소리가 연달아 울리더니 어김없이 생선 인간들의 대가리가 박살 났다. 오빠만큼은 안 되어도 무시무시한 근력이었다.

“후우우.”

아피아는 얼굴에 묻은 체액을 손으로 훔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전의 마법사를 끝으로 벨로크와 리쿠가 싸우던 배의 후미 쪽은 정리가 끝났다. 그녀의 시선이 배의 선수상이 있는 곳. 뱃머리 쪽으로 향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저쪽도 얼추 정리가 끝나가는 듯했다. 그 이면에는 두 명의 활약이 있었다.

“흐아아압!”

도복을 입은 묶음 머리의 여성이 손발을 사용해 어인들의 머리를 뚝뚝 부러트리고 있었다.

“염병할. 이 개 같은 물고기 새끼들 덕분에 내 유물들이! 선장! 이거 물려줄 거요!?”

갑옷을 입은 난쟁이 역시 손에 들린 뭔가를 어인들에게 휙휙 던졌다. 그러자 조그마한 쇳덩이들이 펑펑 터지면서 어인들의 신체 일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매캐한 냄새 역시 났다.

저게 대체 뭐지? 마법이나 주술은 아닌데··· 아피아가 그렇게 생각할 때. 리쿠와 벨로크가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ĉu en ordo?”

“ĝi estas en ordo”

리쿠가 굳은살 박힌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쓱쓱 매만졌다. 아피아는 익숙한 듯 그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벨로크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리쿠의 등을 툭 쳤다.

“저쪽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몇이라도 더 살려야지.”

“옳다. 생명, 소중한 것.”

다시금 고함을 내지른 야만 전사가 도끼를 휘두르며 전장에 난입했다. 아피아 또한 방울과 깃털이 달린 지팡이를 흔들며 주술을 사용했다. 그러자 갑판이 진흙처럼 솟아오르며 남아있던 어인들을 꿰뚫었다. 뒤를 이어 벨로크가 휙 던진 단검이 어인의 뒤통수에 박혀 들었다.

끄르르륵!

눈동자를 까뒤집으며 쓰러진 녀석이 마지막이었다. 막 녀석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던 묶음 머리의 여인이 벨로크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합장을 해 보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갈색 머리칼의 여인은 치파오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양팔에는 건틀릿, 다리에는 각반과 강철 부츠를 신고 있었다. 무투술을 사용하는 격투가로 보였다.

이 세계에 와서 맨손 격투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벨로크가 그녀를 흥미롭게 쳐다볼 때. 옆에 있던 난쟁이 또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야만인 친구들, 그리고 귀족처럼 보이지만 어찌 됐든 존나게 강한 친구. 도와줘서 고맙네.”

갑옷 입은 난쟁이는 자기 수염만큼이나 두툼한 가방을 옆에 매고 있었는데. 안에는 심지가 달려있는 쇠구슬들이 가득했다. 이건 또 뭐야··· 마치 폭탄을 연상시키는 듯한 그 모습이 역시나 벨로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맨손무투가에 이어서 오버테크놀러지를 사용하는 난쟁이라...

그는 이 특이한 친구들에 대해 조금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이는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절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지러운 주변을 먼저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부상병들의 처치와 시체들부터 치워야 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때. 살아남은 용병과 선원들이 이제 막 정신을 수습하고는 소리쳤다.

“어, 없어! 데, 데비!”

“마르쿠! 어디 갔냐! 마르쿠!”

벨로크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닥에 널려있는 살점과 시체 중에 인간의 것은 하나도 안 보였다. 모조리 물고기 괴물들의 것뿐이었다. 의아함을 느낀 그는 오감을 확장시켰다. 이윽고 배의 난간으로 다가갔다.

끼-이이익

“끄으으으···”

도망친 어인들이 시체들 혹은 다 죽어가는 인간들을 끌어안은 채,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벨로크와 샛노란 눈동자들이 마주쳤다. 그러자 놈들은 벨로크를 비웃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킥킥거리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지느러미가 쏙 사라지고, 물거품이 뽀글 일었다. 시커먼 밤바다는 다시금 침묵에 휩싸였다. 그저, 희생자들의 둥둥 떠다니는 살점과 목걸이, 옷가지 등이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겼을 뿐이었다. 물론 놈들이 개지랄을 떨어봤자 벨로크는 겁먹지 않았다.

습격의 이유가 이거였나? 식량 조달? 이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버텨줄 수 있을까? 그가 생각할 때. 마찬가지로 그 꼴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까 전의 격투가였다.

“어인에게 붙들려 심연 속으로 끌려간 자들은··· 죽어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다고 하죠. 남성은 그들이 모시는 신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로··· 여성은 번식 도구로. 여러모로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된다더군요.”

비린내 나는 괴물들의 전승을 얘기해준 여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맨손으로 괴물을 박살 내고 다니는 전사라고 해도 악귀들의 기괴한 습성에는 공포심을 느낀 모양이다. 벨로크는 그녀에게 뭐라 말을 하려다 주변을 둘러봤다.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부상자! 이리, 온다.”

“중상자가 먼저입니다! 부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주세요!”

한쪽에서는 리쿠가 중상자들을 옮기고 있었고 아피아가 주술을 부려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었다. 낮에 그런 꼴을 당했는데도 먼저 나서서 사람들을 돕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남매였다. 거들어줘야 하나?

“어이, 선장! 언제까지 방안에 틀어박혀 있을 거야?! 사태는 끝났다니깐?! 어서 나와서 이 수라장을 정리해야 할 것 아니야?! 아니, 정리는 됐고! 당장에 배를 출발시키라고! 놈들이 또 습격해오면 어떡할 거야?! 엉?!”

난쟁이는 닫혀있는 선실의 문을 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벨로크는 그 광경을 잠깐 살피고는 다시금 여인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복장만이 아니라 얼굴 또한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조금 낮으면서도 끝이 올라간 코끝, 쌍꺼풀이 없지만 큰 눈. 동양인처럼 보였다. 어디 출신이야? 그는 여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는 한편 바닷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놈들에 대해 뭐 더 아는 것들이 있소?”

여인은 음 턱을 쓰다듬었다.

“저도 띄엄띄엄 들은 것들을 얘기한 거에요. 바다 사나이들간에 떠도는 소문들 있잖아요? 뭐, 깊은 바닷속에는 해신이 잠들어있다든지.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이지를 상실하고 물속으로 빠진다든지···”

말을 하는 와중 덜컥 불안감이 치민 모양이다.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당신이 뱉었던 말이 클리셰라는 건 잘 알고 있군. 오래 살겠어. 듣고 있던 벨로크가 말했다.

“방금 같은 난리를 겪었으니 꼭 헛소문이라고도 치부할 수도 없겠군.”

“그럴 수도 있겠네요··· 부디 녀석들을 다시 마주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래야겠어요.”

입가만 당겨 억지로 웃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 인사도 못 했네요. 난 화린이에요. 그냥 별 볼 일 없는 무투가중에 한 명이죠.”

글쎄, 건틀릿을 꼈다고는 하나 주먹만 사용해서 괴물들을 부서트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은 아닌데. 게다가 그 난전 속에서도 여인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무투가는 절대 아니었다.

벨로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화린에게 겸손 떨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들 제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벨로크 하이네. 기사요. 그냥 벨로크라 부르시오.”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벤의 지배자 베로니카공의 약혼자. 수천 명을 벤 검사. 왕의 부하들을 손짓 한 번으로 물리쳤다는 전설적인 기사.”

그 낯간지러운 수식어에 벨로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요란하게도 붙었군.”

화린은 청량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호탕하게 웃었다. 허나 격투가에게는 어울리는 정도였다.

“벨로크씨는 이런 수식어들을 싫어하시나 봐요? 하긴 위대한 업적은 가끔씩 그 무게감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주죠. 부담을 느끼는 것도 당연해요.”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순간이었다. 어둠에 잠겨있는 바다 저편에서 느닷없이 여인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아아아아

특이하게도 이 목소리는 부상병들의 신음과 울부짖음, 살아남은 사람들의 욕설 등을 대번에 집어삼켰다. 게다가 무척이나 감미로우면서도 심장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이건 또 뭐야?

하지만 벨로크의 오감은 그 속에 담겨있는 끈적한 악의를 감지해냈다. 벨로크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고개를 내렸다. 가슴께가 차가웠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베로니카가 걸어주었던 청금석 목걸이. 바다의 수호부라는 장신구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치 노랫소리에 저항하는 듯 보였다. 그가 낌새를 느낀 순간. 풍덩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렸다.

배 위에 올라타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입을 헤 벌린 채,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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