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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38화 (13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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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벨로크가 타고 있는 선박의 주인은 베릭우드라 불리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젊을 때는 항구의 짐꾼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어딘가의 말단 선원이 되어 배를 탔다. 그리고 거기서 배운 지식과 가진 돈을 결합해 끝끝내 자신의 무역선을 소유한 선장님이 되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높은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베릭우드 역시 황혼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정 넘치는 사내였다.

로벤에서부터 시작해 저 먼 나스 밀림에 있는 요정왕국까지 무역을 하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한 과정에서 대단한 기사라고 소문난 영주의 약혼자를 모신 것. 용병과 모험가를 고용한 것.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특이한 사람들을 승객으로 받아들인 것 역시 그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악마들의 범람은 이 근방 해역의 치안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머릿수는 많을수록 좋았으니까. 그리고 현재 벨로크의 눈앞에 있는 야만인 역시 그러한 이유로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 중 하나였다. 그는 곰처럼 두툼한 손과 그것을 내밀고 있는 야만인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키가 190이 넘어가는 벨로크보다 조금 더 큰. 2미터는 되어보이는 덩치의 사내. 아는 사이일 리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선장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처음 갑판으로 나왔으니까. 하지만 야만인은 개의치 않다는 듯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자신을 소개했다.

“얼굴 봤다. 드디어, 천 명 벤 전사. 나 리쿠. 얼음 사자 부족. 첫 번째 손가락. 반갑다.”

어눌한 대륙 공통어였다. 하이랜드인들이 무시받는 이유 중 하나는 언어의 차이도 있었다. 난쟁이와 요정들도 사용하는 공용어를 그들은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뭐, 이 친구 정도면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닌데. 또 신박한 별명이 하나 붙었군. 벨로크는 여전히 야만인의 손을 맞잡지 않은 채 말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 별다른 용건이 없다면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벨로크는 저 야만인이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 생각에 잠겨있었다. 동료 혹은 미래에 대한 걱정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고민들의 연장선이었다. 쓸모없는 상념일 수도 있었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야만인과 대화하는 것보다는 유익했다.

그렇지만 그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야만인은 물러날 기세가 없어 보였다. 여전히 손을 쭉 뻗은 상태로 제 할 말만 했다.

“위대한 전사. 인사 신성한 것. 날 무안 한다.”

벨로크는 잠깐 자신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선장을 불러서 이 친구를 치워버릴까 생각했다. 허나 그건 너무 권위적인 귀족처럼 보일 것 같았다. 거기다가 저 친구는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냥 악수를 청해왔을 뿐이니까.

“하이네 가문의 벨로크요.”

벨로크는 자신을 소개하며 야만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야만인이 씨익 웃었다. 눈동자 역시 숨길 수 없는 호승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꽈아악. 어쭈? 벨로크는 제 손아귀를 조여오는 강력한 악력에 눈을 가늘게 떴다.

굳은살 너머로 전해져오는 완력이 웬만한 거인을 능가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골격만큼이나 힘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벨로크의 표정은 침착했다. 그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전적인 수법이군. 그때도 이렇게 힘자랑하던 녀석의 손을 부숴줬었지. 지금 이 친구도 그렇게 만들면 어떻게 될까? 저기서 달려오고 있는 동료로 보이는 여인이 비명을 지를까? 아니면 덤벼들까?

“끄으으응!”

태연한 벨로크의 얼굴과는 반대로 이제 야만인의 얼굴은 시뻘게져 있었다. 맨들한 머리에는 삐죽 힘줄까지 섰다. 거인상 한 번 더럽네. 벨로크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래서 힘을 살짝 줬다.

“리쿠! 또 힘자랑 질이야?! 이번에는 어떤 사람의 손을 분지르려고! 그만···”

“우어어어어! 져···졌다!”

선실에서 뛰어오던 여인이 두 사람에게 당도했을 무렵. 리쿠라 불린 야만인은 손에 힘을 풀었다. 벨로크 역시 힘을 빼고 그의 손을 풀어주었다. 리쿠는 떨리고 있는 제 손을 바라보다가 벨로크를 바라봤다. 경악스러운 눈빛이었다. 다가왔던 여인 역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맙소사. 리쿠가 힘 싸움에서 지다니··· 거인조차도 한 수 접어주는 녀석인데···”

이 새끼들이? 아까부터 지들 하고 싶은 말만 하네. 벨로크는 손을 휙 털고는 말했다.

“이 친구의 동료처럼 보이는데. 당신은 또 누구요?”

벨로크가 하이랜드인들을 바로 알아본 것은 그들의 특징 때문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덩치가 곰처럼 컸으며, 몸에는 특이한 문신을, 강철 갑옷 보다는 짐승의 가죽을, 마지막으로 그들 특유의 주술 도구. 깃털 모자나 뼈로 된 장신구 등을 끼고 다녔으니까. 눈앞에 있는 주황 머리의 여인 역시 리쿠와 똑같은 특징을 가진 것으로 보아 북부 야만인이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 멍청한 오라버니가 또 사고를 쳤어요! 저는 아피아. 얼음 사자 부족 출신의 주술사이며 지금은 이 녀석과 함께 대륙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방랑자입니다.”

다행이도 동생 쪽은 말이 통했다. 대화의 기법이든 유창한 대륙어든 뭐든 말이다.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제 오빠의 등을 쳤다.

“리쿠! 어서 사과드려! 내가 몇 번이나 말해?! 대륙은 우리들이 살던 곳이랑은 달라. 그 누구도 초면에 악수하고 힘자랑 하지 않는다고! 거기다가 저분은··· 귀족처럼 보이잖아!”

하지만 리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벨로크를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싫다. 나. 사나이 대화 했을 뿐. 이거 숭고한 것. 명예로운 것. 대륙법. 관습. 얽매이지 않는다.”

“야 이 미친놈아!”

아피아가 왁 소리쳤다. 진짜 남매지간을 보는 것 같았다. 허나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배에 있던 다른 인원들의 주의를 끌고 말았다. 모험가나 용병들은 그냥 재미있는 구경거리 보듯 지켜볼 뿐이었지만 이 여정의 책임자는 아니었다. 베릭우드가 선원 몇을 끌고 나타났다.

“벨로크경! 무슨 일이십니까?!”

벨로크가 뭐라 하기도 전에 주변에 있던 선원들이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베릭우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리쿠처럼 힘을 많이 써서 그런 게 아니었다. 분노였다. 그리고 그 분노는 눈앞의 귀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왕국인 특유의 야만인에 대한 무시가 결합되어 생겨난 것이었다. 그가 리쿠와 아피아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너! 이 더러운 야만인들아! 감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이런 무례를 범한 것이냐!”

“저··· 그게···”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지자 아피아가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리쿠는 묵묵한 얼굴로 말했다.

“안다. 벨크 하네! 천 명 벤 검사! 힘세다!”

“존칭을 붙여라! 야만인! 벨로크님은 너희들과는 태생부터가 다르시다. 몸 속에 푸른 피가 흐르고 계시는 귀족이시란 말이다. 거기다가 로벤의 지배자이신 베로니카님의 약혼자이시기도 하지. 네까짓 놈들이 함부로 말을 걸고 손을 댈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베릭우드가 호통쳤다. 미친.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네. 벨로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때. 리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위대한 자연 아래. 우리 모두 미물. 높고 낮음. 없다. 나 스스로 존중. 내보일 수 있어도, 강압. 듣지 않는다.”

“야 이··· 멍청아! 죄, 죄송합니다. 선장님! 우리 오빠가 좀···”

아피아가 리쿠를 치며 사과했지만, 선장은 듣지 않았다. 그는 왕국의 신분제도를 무시한 야만인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잘 보이고 싶은 귀족 혹은 아랫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아까 전보다 더 분노했다. 그래서 선원들에게 손짓하며 스산하게 말했다.

“너. 야만인. 배 위에서 선장의 말을 듣지 않는 승객이나 선원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 있나? 갑판 위의 규율을 해치기 전. 꽁꽁 묶어 물고기 밥으로 던져준다. 내가 선원이던 시절에도 그러했고 선장이 된 지금도 그러하다. 자. 다시 한번 말하겠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벨로크경과 나한테 사과해라. 그렇다면 용서해 주겠다.”

리쿠의 덩치는 2미터가 넘어갔다. 허나 그보다 작다고는 해도 선원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뱃일로 단련된 구릿빛의 근육에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허리춤의 단검과 커틀러스를 빼 들었으니까. 아무래도 정상적인 무역으로만 부를 쌓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도 리쿠는 코웃음을 쳤다.

“싫다! 나! 잘못 없다!”

아피아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새하얘졌다. 허나 그 한편에는 익숙함이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많이 겪어온 듯싶었다.

“이런 개새끼가! 조져!”

“그만.”

선장이 소리치고 선원들이 달려들려던 그때. 벨로크가 말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사내의 낮은 목소리는 사람들의 귀에 쏙쏙 박혀들어갔다. 선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허리춤의 도끼와 가시박힌 곤봉을 꺼내던 리쿠와 아피아 또한 우뚝 멈췄다.

“벨로크경?”

“선장. 여기까지 하지.”

“하지만 경. 저 야만인 놈들은 경과 저를 무시했습니다. 이러고도 가만히 넘어간다면 저희들의 위신뿐만 아니라 왕국. 아니, 로벤은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거. 전직 해적처럼 보이는 놈이 자존심은 더럽게 세네. 아니, 그래서 더 악착같이 위계를 다잡으려는 건가? 벨로크는 내가 괜찮으니 그냥 닥치고 있어라. 라고 말하려다가 요정왕국까지의 거리가 아직 많이 남았단 것을 깨달았다. 망망대해 위에서 괜히 선장과 얼굴을 붉히기는 껄끄러웠다. 저자가 자신을 잘 모시는 것도 있었고. 그래서 그는 선장을 진정시켰다.

“저 야만인이 무례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허나 무지에 의해 비롯된 일 아닌가? 자고로 왕국인이자 교양인이라면 죄인을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잘 교화시키고 이끄는 것 또한 책무라고 할 수 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선장은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내였다. 그렇기에 귀족인 벨로크가 자신의 위신을 세워주자 선장은 음. 고개를 숙이다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선원들이 무기를 집어넣었다. 선장은 고개를 꾸벅 숙여 벨로크를 찬양하는 한편. 리쿠와 아피아에게 으르렁거렸다.

“너희들 야만인! 내 벨로크님의 얼굴을 봐서 이번 한 번만 넘어가겠다. 하지만 너희들은 앞으로 이 배에서 생활하는 동안 왕국법을 비롯하여 예절에 대해서도 숙지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싫···읍.”

“네! 네! 물론이고 말고요. 선장님. 그리고 벨로크경.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까치발을 들어 리쿠의 입을 틀어막은 아피아가 냅다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선장은 침을 퉤 뱉고는 선원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벨로크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야만인 남매를 바라봤다. 그들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아피아가 말했다.

“벨로크경.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덕분에 물고기 밥이 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당신들? 아니면 선원들?”

“당연히 선원들이죠.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저희들은 틀림없이 곤경에 처했겠죠.”

아피아는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목에 걸린 뼈 목걸이가 어째선지 섬뜩하게 빛났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남매임은 분명했다. 오빠 쪽이 거인의 완력을 가진 전사였으니. 동생도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겠지. 주술사라고 했나? 그가 말했다.

“자신감이 대단하시군. 그래서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는 뭐요?”

“그게··· 저희 얼음 사자 부족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반드시 갚아야 해요. 낡은 전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저희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율법이거든요. 그러니까···”

아피아는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렸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경을 대접할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벨로크는 그녀가 꺼내든 가죽 부대에서 무언가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시큼하면서도 달달한··· 이건? 웬 야만인들로부터 그리운 고향의 향취를 느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

먹처럼 뚜렷한 밤바다는 유리 조각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어떤 때는 천천히 어떤 때는 빨리, 제멋대로 꿀렁거리고 있는 물살 위에는 동그란 광명체 하나가 떡 하니 떠 있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여신의 눈동자라 칭하는 그것.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는 그냥 우주를 떠도는 위성 중 하나인 돌덩어리.

시리도록 차가운 보름달은 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을 너나 할 것 없이 비추었다. 난쟁이제 갑옷을 입고 입가에는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난쟁이. 가부좌를 취한 채, 눈을 감고 있는 묶음 머리의 여인. 주사위 도박을 하는 선원들, 굴러다니는 오크통에 앉아 럼주를 홀짝이고 있는 용병들까지.

벨로크와 리쿠 아피아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평평한 나무 바닥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 모두는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벨로크님이 마유주를 이렇게나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원체 가진 것이 없어서 혹시나 하고 꺼내 보았던 것인데.”

아피아가 싱긋 웃으며 가죽 부대를 기울였다. 그러자 나무를 맨들하게 깎아 만든 잔 안에 새하얀 액체가 들어찼다. 벨로크는 잔을 들어 그것을 한입에 들이켰다. 약간 시큼하면서도 텁텁한 데 달기도 했다. 진짜 막걸리를 먹는 것 같았다.

그는 안주 삼아 베로니카가 챙겨주었던 건조 식량. 훈제된 햄을 몇 개 집어먹었다. 그 잠깐 사이에 리쿠가 얼마나 먹은 것인지 한 봉지나 되던 것이 거의 다 사라져 있었다.

“맛있다. 건빵, 벌레, 소금기 가득 육포, 보다 맛있다.”

“리쿠! 네가 그렇게 다 처먹으면 은혜를 갚겠다고 말한 내 체면이 뭐가 돼? 대접을 하기는커녕 우리가 얻어먹고 있잖아!”

아피아가 말했던 은혜 갚기는 간단했다. 술 한 잔 대접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부족에서부터 가져온 전통 술을 꺼내들었고, 벨로크는 안주를 내밀었다. 그렇게 지금과 같은 술판이 벌어졌다. 행복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리는 리쿠를 타박하는 아피아. 그리고 그런 그녀를 벨로크가 만류했다.

“괜찮소. 오랜만에 막걸리를 맛볼 수 있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하니까.”

“막걸···? 뭐요?”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를 보며 벨로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 고향에 있던 술이 당신이 내민 마유주라는 술하고 비슷한 맛을 냈거든.”

“아하. 그렇군요! 뭐가 됐든 잘 드셔주시니 기분 좋네요!”

“위대한 전사. 역시 입맛. 남다르다. 술맛. 안다.”

리쿠가 껄껄 웃으며 술잔을 입에 댔다. 아피아는 야만인답지 않게 두 다리를 공손히 모은 채,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복장을 뺀다면 덩치나 하는 행동이나 모든 것이 정반대인 남매였다.

그들은 그렇게 선상 위에서 먹고 마셨다. 그 과정에서 벨로크는 천 명을 벤 검사라는 자신의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로벤에서 교단의 병사들과 영주연합의 병사들을 학살함으로써 나온 별칭이었다. 그리고 리쿠는 이에 호승심 및 궁금증이 생겨서 그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한동안 세 사람이 술잔을 주고받는 소리. 웃음소리, 파도소리 등이 귓가를 간지럽히던 때였다.

“왜 저희를 도와주셨나요?"

술이 올랐는지 얼굴이 조금 빨개진 아피아가 입을 열었다.

"왜 도와줬냐고?"

"네. 저희들과 경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신건지 궁금해서요."

그녀의 탐색하는 듯한 눈동자에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은혜 갚기보다는 이 쪽이 본 목적인 것 같은데. 그가 말했다.

"당신들이 배 위에서 난동을 부린다면 이 여정이 그만큼 늦어질 것 아니오? 난 그게 싫었소. 그래서 중재했을 뿐이오."

선원들이 다 죽으면 이 배를 누가 운전한단 말인가? 물론 그 전에 자신이 저 남매를 제압했겠지만... 좋게 풀 수 있다면 좋게 푸는 게 좋았다.

"아..."

아피아는 가늘게 뜬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물었다.

"음... 그러면 다른 질문을 해보죠. 벨로크님은 저희들에게 뭐 궁금한 것 없으세요?”

“궁금한 것?”

“네. 평생을 북부 대설산 안에서 살아가며 대륙으로는 잘 나오지도 않는 야만인들이 왜 남쪽 끝자락에 있는 요정왕국까지 가려고 하겠어요? 이상하지 않아요?”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는 여자치고는 큰 키를 자랑하는 주황 머리의 여자아이와 험상궂은 대머리의 전사를 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들의 사정을 좀 봐주었다고 해서 당신들에게 그걸 캐물을 수 있는 권리는 없소. 관심도 없고. 우리는 오늘 낮에 처음 만났을 뿐이고, 딱 한 번 술잔을 나누었을 뿐이니까.”

남남보다는 약간 나은 사이. 세 사람의 관계는 딱 그 정도였다. 아피아는 멍하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오히려 안심이 되네요. 솔직히 말해서 경이 저희들을 처음 구해주셨을 때는 무슨 꿍꿍이속이 있나 싶었어요. 뭐, 지금도 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피아는 얼굴에 새겨져 있는 부족의 전통 문신(바람 모양)을 슬쩍 매만지며 말했다.

“아까 선장이 말했다시피 저희들은 야만인이잖아요? 그리고 대륙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야만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해요. 우리와 다르다. 낙후된 문명을 가지고 있다. 미개하다. 등등을 이유로요. 평민들도 이렇게 생각할진대 지배계층인 귀족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죠. 저희들은 이 대륙을 여행하는 동안 그러한 꼴을 수도 없이 당해왔고 늘 예외는 없었어요. 경. 한 사람을 빼면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피아의 얼굴에는 일견 상처와 짜증,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어쩌면 리쿠가 힘자랑을 하고 다니는 이유 역시 전사로서의 호승심도 있었을 테지만,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만약에 내가 이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야만 전사를 골랐으면 나도 저 꼴을 당했을까? 엿 같은 중세시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넘쳐나는 세계 같으니. 그랬다면 자신은 이 세계를 더 싫어하게 됐을 것 같았다.

벨로크는 피식 웃으면서 뭐라 말하려고 했다. 위로든 혹은 대화의 주제를 돌리든 뭐든 말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갑작스레 석상처럼 굳었다. 그의 초월적인 오감. 인간을 아득히 벗어난 예리한 감각들이 경종을 울려댄 탓이다.

코끝으로 들어오던 물 비린내가 한층 더 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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