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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35화 (13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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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성기사, 마녀, 악마

아델은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전쟁터를 전전하고 마침내 괴물과 악마들을 사냥하면서 쌓인 경험들이 그녀의 심신을 단련시켰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들은 그녀로 하여금 상스러운 말을 꺼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루텐베르크의 이단 심문관.

대륙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이 종교재판관들의 모습은 실로 기괴했다. 입을 실로 꿰매고 눈에 가죽 띠를 두른 팔이 원숭이처럼 긴 작은 인간, 홀딱 벗은 상체 곳곳에 십자가 문신을 새기고 머리에는 사자탈을 쓴 거인, 발끝까지 오는 시커먼 드레스를 입고 얼굴 역시도 그와 비슷한 보자기로 둘둘 만 여인, 마지막으로 머리에는 원뿔형 모자, 그 아래에는 히죽 웃고 있는 쇠가면을 쓴 갑주의 사내가 철봉과 경전을 들고 있었다.

악귀나 악마 같은 지하의 괴물들이 인간의 형태를 크게 벗어난 것에서 공포심을 주었다면, 저들은 인간을 닮기는 하되 어딘가 비틀리게 빚어낸 듯한 모습으로 공포심을 주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닮은 것 같아서 더 기분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아델은 그들의 모습에서 꺼림칙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이 행하고 있는 짓거리에서 더한 불쾌감을 느꼈다.

“끄아아아악!”

“제, 제발! 자비를! 자비르으으을!”

저 기괴한 사 인조는 태양이 오롯이 떨어지고 있는 대낮의 대로변에서 사람들을 고문하고 있었다.

“마을이 악마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째서 교단에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겁니까? 거기다가 지금 당신들의 모습은 마치··· 도망을 치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쇠가면을 쓴 사내가 양팔로 무릎을 짚으며 물었다. 거인에는 비할 수 없지만 역시나 거대한 덩치를 가진 사내가 제 몸으로 음영을 만들어내자 그 아래에 있던 중년인은 벌벌 떨었다. 그는 쇠가면에 튄 친구들의 피와 그 아래에 있는 사내의 눈동자. 인자하게 웃고 있는 그 모습에서 더한 공포심을 느꼈다. 그가 말했다.

“도, 도망이라뇨. 오해입니다. 그리고··· 교단에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은··· 사, 사제님들을 이런 촌구석까지 모시는 것이 큰 불경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호? 불경? 계속 말해보세요.”

쇠가면 사내와 말이 통하는 것 같자 중년인의 눈에 언뜻 희망이 비췄다. 그는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지인들, 살아있는 채로 눈알이 뽑히거나 거대한 바퀴에 팔다리가 짓이겨지거나 가위에 손가락 발가락이 하나씩 잘려 나가는 광경을 힐끔 보고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는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짜낼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는 다 꺼내면서 눈앞의 광신도들을 찬양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왕국은 고통받는 백성들로 인해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분명 저희 마을보다도 사정이 안 좋은 곳이 주변에는 넘쳐나겠지요. 이러한 어지러운 때에 저희가 교단에 구명 요청을 한다면 저희들로 인해 필히 그 도움을 못 받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그렇기에···”

공포심 때문에 머리가 마비되었는지 중년인이 맡 끝을 흐렸다. 허나 쇠가면 사내는 그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철커덩. 쇠봉과 두터운 경전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년인은 히이익 소리를 내다가 힐끔 시선을 올렸다. 사내는 진정 감복한 듯 양 주먹을 꾹 쥐며 성호를 긋고 있었다.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오오! 훌륭! 훌륭합니다! 형제여! 나 자신보다도 주변에 산재해 있는 이웃. 나아가서는 이 나라의 미래까지 생각하다니! 이 에녹! 진심으로 감복하였습니다!”

“그, 그렇다면!”

중년인의 얼굴에 희망이 차올랐다. 삶에 대한 갈망이었다. 쇠가면 사내가 중년인의 어때를 턱 잡았다. 이윽고 질질 짜고 있는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대며 환호하듯 소리쳤다.

“허나! 이웃과 나라를 생각하는 그대들의 마음이 갸륵하다고는 하나! 죄는 죄! 그대들이 교리를 어긴 것은 사실! 아아! 나는··· 나 역시도 이러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 한탄스럽습니다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가장 엄격해야 할 저희들마저 느슨해진다면 이 세상은 혼돈에 빠져들고 말 테니까요!”

기대를 무참히 부숴버리는 말에 중년인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철가면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당신이 속세에서 행한 선들은 저 하늘에 계신 천상신들마저도 알고 계실 겁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삶은 순간의 반짝임일 뿐. 당신의 고결한 영혼은 영적인 세상에서 영원히 구원 받을 터이니!”

질질 짜던 철가면 사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판결! 이 자는 차륜형에 처한다!”

“어? 어, 어어어어.”

철가면의 사내가 리더였던 듯 남은 세 명의 이단심문관들이 움직였다. 피 묻은 가위를 드레스 자락에 숨긴 여인, 고리 손톱을 집어넣은 곱추가 사내를 결박했다. 그리고 얼굴에 사자탈을 쓴 5미터 거인이 등에 메고 있던 바퀴를 꺼내 들었다.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묻어있고 이리저리 녹이 쓴 무참한 살인부속품이었다.

거인은 무겁지도 않다는 듯 차륜바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이를 올려다보고 있던 중년인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그늘아래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 안 돼! 안 돼! 끄아아악!”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짓뭉개졌다. 총 네 번이었다. 중년인은 눈을 부릅뜬 채 고함을 내지르다가 끝내 피거품을 물며 움직임을 멈췄다. 지독한 고통으로 인한 쇼크사였다.

네 사람의 주변은 참혹했다.

걸레짝이 된 시체가 바퀴 위에 둘둘 말려 올라가 있고, 눈알이 빠진 시체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이 없는 시체와 정수리가 뭉개진 시신 역시 쓰레기처럼 주변을 굴러다녔다.

“대낮부터 길거리에서 고문이라니... 생각보다 더 미친 놈들이잖아. 우욱.”

비위가 상한다는 듯 이를 보고 있던 카라가 약하게 헛구역질했다. 이자벨은 아무 말이 없었다. 충격을 받았는지 그저 멍한 눈으로 피와 살점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시신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델은 카라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아니, 속에서는 뭔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아델은 가짜 성기사였다. 교단에서 정식으로 교육받고 서임을 받은 진짜 성기사가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자신의 주인. 벨로크가 가는 대로 뒤를 따르며 악마들을 쳐 죽였을 뿐이다. 목적은 모호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행한 일들은 선이었으며 정의의 집행이었다. 악귀들로 인해 고통받았을 수천, 혹은 수만의 생명을 구한 셈이니까. 그러나 저들을 보라.

그저 빛에 취하고 광명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사람들을 불태우고 고문하는 저들을 보란 말이다. 저들은 지금 신의 뜻을 행한다는 숭고한 목적 아래 그저 무차별한 살인만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의 모습으로 보아 정말 저 행위가 옳다고 믿는 것 같았다. 교단의 위상을 다잡기 위한 조직이라 했으니. 교단 역시 이를 묵인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시발. 저게 어떻게 사람들에게 평안과 구원을 주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지. 저건 그냥 권력과 돈에 미친 또 다른 살인마 집단이었다. 이에 반발하듯 아델의 내면 속에 있는 성력이 거칠게 맥동했다. 헬레나가 속삭이는 듯했다. 저건 내 가르침이 아니라고. 어서 저들을 단죄하고 정의를 집행하라고.

허나 아델은 제 가슴을 쾅쾅 치며 불처럼 타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꼬라지가 보기 싫었다면 진작에 무슨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계시를 내리든 혹은 성력을 거두든 뭐든 말입니다. 당신이 한 게 무엇입니까? 그저 바라만 보고 힘만 내려준 다음 한 것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아델이 불경한 말들을 속으로 내뱉자 들끓던 성력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후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갈무리했다. 저들의 행태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한시바삐 벨로크님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저들과 충돌을 일으킨다면 목표까지의 여정이 또다시 지체되는 것을 말했다. 신성 왕국 전체가 그들을 쫓게 될 테니까.

그녀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성력의 인도보다 그의 가르침이나 목소리 하나하나가 그녀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결심한 아델이 말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가 어떻게든 잘 얘기 해보겠다. 가급적이면 부딪치지 말고 지나가도록 하지.”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그냥 우회해서 가는 건 어때? 거리가 있으니. 아직까지 우리를 못 봤을 수도 있잖아.”

대로변 주변에는 수풀과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잘만 하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허나 카라의 말에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예리한 감각이 저 미치광이들의 음습한 시선을 포착해내고 있었다.

“우리가 놈들을 발견했을 때. 놈들 역시 우리를 발견했다. 지금 등을 보인다는 건 곧 놈들이 의심할 빌미를 주는 거야. 차라리 네가 처음에 말했던 대로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 낫다.”

“알겠어.”

굳은 얼굴로 아델이 발걸음을 옮겼다. 카라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멍하니 서 있던 이자벨을 잡아끌었다. 아델을 선두로 한 세 사람은 금새 루텐베르크의 이단 심문관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몸을 돌리며 세 사람에게로 힐끔 시선을 향했다. 예의 그 철가면 사내 에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발걸음을 멈춰주십시오. 형제님들.”

“무슨 일입니까?”

아델은 방금전의 광경을 못 봤다는 듯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다가 주변에 참혹한 광경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꽤나 괜찮은 연기였다. 에녹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들은 교리를 어기고 위법을 저질렀기에 벌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갑옷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아가씨께서도 빛의 길을 따르는 전사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교리를 어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중죄인지는 잘 아시겠지요?”

아델은 쓰고 있던 후드마저 벗고는 성호를 그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지상 아래에 발 뻗고 살아가는 존재라면 누구나 천상신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이 법도이며 옳은 행위니까요.”

“역시 빛의 길을 따르는 자매님답게 말이 잘 통하는군요. 그렇다면 현재 저희들이 수행 중인 임무에도 협력해주실 수 있겠지요?”

아델은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칼집을 거머쥐었다. 경계는 하되 적대는 하지 않겠다는 몸짓이었다. 오히려 그 일반적인 모습이 에녹의 경계심을 조금은 누그러트린 듯했다. 그는 손사래를 저으며 말했다.

“아, 너무 경계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이단 심문관으로서 맡은 바 직무를 다할 뿐이니까요. 그러니까. 아가씨를 포함한 일행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그냥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태양신과 달의 여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아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소개를 했다.

“나는 아델. 아드리아 왕국의 성기사 입니다. 붉은 머리 여인은 마법사인 카라. 마지막으로 저기 있는 여인은 이자벨··· 내 여동생입니다. 그냥 평범한 마을 처녀죠.”

“으음··· 마법사···”

철가면 아래의 눈동자가 휙 커졌다. 등이 굽은 곱추 심문관 또한 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얼굴 전체에 시커먼 천을 뒤집어써 눈동자 역시 보이지 않았지만,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거인 역시 그들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카라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잠깐! 나는 동굴이나 깊은 산 속에서 은거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그런 미치광이가 아니에요! 요 앞에 있는 라-틸트 학파의 구성원이 납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패를 보여줄 수도 있어요!”

카라가 로브 자락을 뒤져 제 패를 내보였다. 황금 색깔의 바탕에 육각형의 보석과 지팡이가 교차하는 문양이었다. 철가면 사내가 제 턱을 쓰다듬었다.

“정말 라-틸트의 문양이 맞군요. 음. 아가씨가 웬 정신 나간 주문쟁이가 아니란 것은 잘 알겠습니다.”

성기사인 아델의 체면을 생각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카라가 속해있는 마탑이 신성 왕국과 꽤나 괜찮은 사이를 유지 중인 덕분인지. 철가면 사내는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시선은 이자벨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후드를 벗지 않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서서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충격이라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심문관이 물었다.

“저 아가씨는 왜 후드를 벗지 않는 겁니까? 분명 협조를 요청했을 텐데요.”

이자벨은 말이 없었다. 당연했다. 후드 아래의 그녀는 창백한 피부와 뿔이 자라나 있는 악마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녀 대신 아델이 나섰다.

“내 여동생은··· 어릴 때 입었던 화상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합니다. 거기다가 몸 전체에 새겨진 지독한 흉터로 인해 남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죽는 것만큼이나 싫어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침중한 아델의 어투에 철가면 아래의 강렬한 시선이 한결 약해졌다.

“지독한 흉터··· 그렇다면 어지러운 이 시국에 저희 나라까지 오신 이유도 여동생분 때문이겠군요.”

“맞습니다. 신의 말씀을 제일 먼저 받아들였던 이곳이라면 여동생의 병도 치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 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심문관이기는 하지만 이래 봬도 치유술은 왕국 내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솜씨를 자랑합니다.”

철가면 사내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가왔다. 허나 그 속내는 저 여인의 정체를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질긴 새끼. 시발. 정신병자 놈.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아델이 그의 앞을 턱 막았다. 그러자 의심을 풀어가고 있던 베일 쓴 여인, 거인, 곱추 등의 시선이 다시금 예리해졌다. 철가면 사내가 미심쩍은 어조로 말했다.

“아델경?”

“치유술이라··· 얼마나 대단하신지 몰라도 저보다 뛰어나실지는 의문이군요. 저 역시 빛의 세례를 한 몸에 받았거든요.”

“그게 무슨···”

이쯤 되면 이판사판이었다. 아델은 제품에서 여신이 내려준 성서를 꺼내 들었다. 이윽고 헬레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제 성력을 뿜어냈다. 샛노란 광채가 주변을 뒤덮었고 그녀의 주위로 불꽃이 휘몰아쳤다. 심문관들은 눈을 부릅뜨며 뒷걸음질 쳤다.

“이···이 빛은! 이것은!”

아델은 재빨리 뿜어내던 성력을 가라앉혔다. 신성력은 악마인 이자벨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카라가 제 몸을 날려서 빛의 일부를 가려주기는 했지만 역시나 타격을 받은 것인지 이자벨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탁한 안광이 피 흘리는 시신들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델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놈들이 개지랄을 떨어댄다면 그땐 칼을 뽑고 싸울 셈이었다. 허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오. 오오오오! 이토록 강대한 빛이라니! 아델경! 당신은 그야말로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으셨군요! 이 에녹이 장담컨대 감히 신성 왕국 내에서도 이토록 강력한 힘을 지닌 분들은 마스터 팔라딘들을 제외하고는 없을 겁니다. 맙소사! 오! 신이시여!”

에녹이 양팔을 펼치며 부르짖었고, 베일 쓴 여인과 곱추, 거인 역시 무릎을 꿇고 성호를 긋고 있었다. 아델은 떨떠름한 어투로 물었다.

“이제 저희들에 대한 의심이 좀 풀리셨습니까?”

에녹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물론입니다. 감히 신의 사도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아드리아 왕국에도 당신 같은 분이 계시다니! 이 에녹. 안심입니다!”

그토록 까다롭게 굴던 녀석들이건만 성력을 한 번 보여주니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실로 광신적인 모습이었다.

미친놈들이라 그런가? 아니면··· 이것도 속임수? 아델은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면 수고하세요. 이자벨. 가자.”

카라 또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이자벨을 이끌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피와 살, 내장과 안구 등이 너저분하게 뿌려져 있는 대지를 짓밟고 나아갔다. 악명높은 이단 심문관들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킨 상태였다.

이 정도면··· 좋게 끝난 건가? 이제 마탑으로 가기만 하면··· 아델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카라의 손을 잡고 뒤를 따르던 이자벨이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이자벨?”

카라가 손을 잡아당겼지만, 타락 요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카라는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화들짝 놀랐다. 로브 아래 그녀의 녹색 안광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벨! 잠···!”

“못 참겠어.”

툭 내뱉은 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후드를 찢고 나온 피막 날개가 철가면 사내의 배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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