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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성기사, 마녀, 악마
“카라. 어떻지?”
“틀렸어. 여전히 아무것도 안 보여. 아아. 대체 어디까지 가버린 거야? 나쁜 남자 같으니.”
아델이 묻자 카라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푸념했다. 그러자 아델 역시 후우 한숨을 내쉬고는 제 망토 자락을 여미었다. 이자벨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참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의 얼굴은 붕대와 망토로 꽁꽁 가려져 있었기에 그 누구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냥 탁한 녹색의 안광만 번뜩거릴 뿐이었다.
“정말로 북부 대설산 너머 하이랜드나 나스 밀림에라도 떨어진 걸까? 아무래도··· 내가 얘기했던 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침 위치도 이 근방이고 말이야. 다들 어때?”
아델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허나 정처 없이 걷기만 하는 것은 여전히 답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카라. 네 말대로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자벨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두 사람의 의견을 따를게요.”
이자벨의 목소리가 불편해 보이자 카라가 물었다.
“이자벨. 너 괜찮아?”
“여기까지 오느라 조금 무리했나 봐요. 몸 상태가 좋지는 않네요.”
이자벨이 애써 웃어 보였다. 아델은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봤지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악마와 상극의 성질을 지닌 성기사였으므로. 그 대신 카라가 이자벨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마탑으로 가면 편하게 쉴 수 있을 거야. 이래 봬도 나. 그곳에서 나름 한 자리 차지했었거든.”
“네.”
이자벨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금 목표를 잡은 세 사람은 이국의 땅을 계속해서 걸었다.
벨로크가 사라지고 난 후. 세 사람은 그를 찾기 위해 온 대륙을 돌아다녔었다. 우선 그들이 있던 동부 아리안 땅을 뒤졌고, 다음에는 북부 야만인들의 땅. 대설산으로 향했다. 허나 카라가 아무리 눈 폭풍을 뚫으며 추적주문을 사용해도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를 찾기도 전에 얼어 죽을 판이었다. 설상가상 이자벨의 마력이 바닥나며 시체들로 만들어낸 괴조들까지 그 형태를 잃어버리려 하자. 세 사람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으으으··· 어떻게 할까? 지금 상태로는 설산 너머 하이랜드까지 향하는 건 무리야. 우선은 이곳에서 내려가야 해. 북부랑 동부는 다 뒤졌다고 치고, 남은 곳은 신성 왕국과 아드리아 왕국이야.
-아드리아 왕국··· 벨로크님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셨단 말인가?
-설마하니 우리를 두고 자의로 돌아가지는 않았겠지.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래서 어디를 먼저 가볼 셈이야?
-들리는 얘기로는 아드리아 왕국은 현재 게오르그 공작과 교회, 귀족들에 의해 내전에 휩싸여 있다면서요? 제가 공작이라면 분명 우리들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이제 괴조를 탈 수도 없으니 도보로 이동해야 할 텐데. 그곳부터 간다면 너무 번거롭지 않겠어요?
-신성 왕국부터 뒤져보자는 얘기지? 그렇다면 나한테 수가 있어.
-뭐냐?
-내가 수학했던 마탑이 그곳에 있어. 그곳에서 도움을 받아 내 주문력을 강화한다면 추적 마법의 범위를 좀 더 늘릴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벨로크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겠지. 어때?
세 사람은 그렇게 신성 왕국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신성 왕국.
대륙 곳곳에 퍼져있는 교회, 수도원들의 총본산이자 오직 신을 믿고 따르는 교단원들에 의해 나라의 국운이 결정되는 곳.
하인리히 3세라 불리우는 세속의 왕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도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나라의 국정을 운영할 통치권도 왕을 임명할 서임권도 모두 다 교회가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교회 집단의 머리는 라이티르 의회라 불리우며 대교회의 마스터 팔라딘이나 대주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죽음의 신 샤트라를 믿고 따르는 아리안, 문명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북부 설산 너머의 하이랜드, 그들만의 독자적인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는 요정왕국을 제외한다면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종교집단들은 전부 다 이 신성 왕국으로부터 파생된 거야. 정확히 말하면 그들로 인해 그 세가 커졌다고 봐야겠지.”
카라의 설명에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드리아 왕국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원류가 이곳이라는 말 아니냐?”
“맞아. 게오르그 공작이 교회와 손을 잡고 왕관을 차지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드리아 왕국의 귀족들과 왕은 대대손손 교회들을 견제해왔어. 그건 그들이 이 신성 왕국의 옛 지배자들과 같은 꼴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속된 말로 제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카라는 울퉁불퉁한 바닥을 요령 좋게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이곳도 본래는 신성 왕국이라 불리우는 곳이 아니었어. 몇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 고유의 특색과 문화 이름이 있었지. 허나 당시의 지배계층들은 늘어나는 괴물들의 범람을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이때 나선 것이 바로 교회들이야.”
그녀의 가죽신이 발자국을 남길수록, 지면 또한 그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 가기 시작했다. 짐승이나 괴물들의 발자취 대신 사람들의 흔적이 눈에 띄인 것이다. 오지에서 점점 더 빛이 드는 문명 길로 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고통받던 사람들은 구원 받았고, 종래에는 열광했지. 수많은 십자가 건물들이 망국 안에 세워졌어. 그리고 교단원들 중에 세속에 관심이 깊은 자들은 이를 이용하기 시작했어. 점점 푸른 피가 흐르는 귀족들 대신 하얀 모자를 쓴 주교들이 영지를 다스리기 시작한거야. 그렇게 몇백 년의 세월이 흐르고 종교인들에 의한 종교인들을 위한 나라가 하나 탄생한 거지.”
“그래서··· 갑자기 이 나라의 역사를 읊는 이유가 뭐냐? 뭐, 미치광이 광신도들이 많을 테니 조심하라고?”
아델이 거친 말투로 묻자 카라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후드 아래 새하얀 판금 갑옷을 입고 있는 저 여인도 그 광신도들 중에 한 명 이었으니까. 뭐, 자의로 된 것도 아니고, 사고방식도 다르긴 하지. 납득한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마탑이 가깝다고는 해도 가는 동안에 무슨 일에 휘말릴지 아무도 몰라. 하멜른에서 있었던 종교재판 기억나? 사람들이 악마에게 홀렸다고 해서 산채로 불태우던 그 광경들 말이야. 물론 형을 집행하던 주교의 실체가 진짜 악마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곳에는 그보다 손속이 더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곳이야. 하물며 나라의 상황이 어지러우니 더더욱 강하게 검문하거나 진압하고 다닐 거야. 조심하는 게 좋아.”
“정체가 탄로 나기라도 한다면 저 역시도 불태워지겠네요.”
이자벨이 피식 웃었다. 카라는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차마 저 말에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신에 이자벨이 쓰고 있는 후드나 몸을 감고 있는 붕대를 다시 한번 더 점검해주면서 말했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야. 예로부터 교단은 기상천외한 짓거리들을 벌이는 마법사들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거든. 우리가 행하는 주문의 여파가 이계의 존재들을 불러일으킨다는 둥. 이 세상의 법칙을 기만하는 행위라는 둥. 쫑알쫑알 말들이 많았지.”
마법의 쓸모성 덕분에 탄압이나 핍박까지는 아니어도 세간의 시선은 그렇게 좋지 않다는 얘기였다. 아드리아 왕국보다 더 심해 보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신성 왕국 근처에 마탑이 있는 건데? 아델은 자신의 의문을 풀고 싶었지만, 그보다 현재 그들에게 더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네 말대로면 아드리아 왕국이나 이곳이나 비슷하게 위험해 보인다만···”
아델의 말에 카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지. 우리한테는 훌륭한 신원 보증인이 있다는 사실이야.”
“나? 말인가?”
카라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아델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태양신의 사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강력한 성력을 지닌 성기사야. 만약 교단원들이 우리를 검문하려 한다? 네가 나서서 성력 좀 보여주고 입 좀 털어주면 돼. 네가 가진 힘은 그 정도의 힘이야. 모든 의문을 불식시킬 정도로 강력하다는 말이지.”
물론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아델은 정식으로 교단에서 수련하고 서품을 받은 성기사가 아니었으니까. 허나 사악한 마녀 일당으로 오해받는 것보다는 나았다.
“음···”
노골적으로 자신을 띄워주는 말에 아델은 헛기침을 했다. 멋쩍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세 사람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반대편에서 접근해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두툼한 짐가방을 등에 메고 손에는 냄비나 무언가를 꽁꽁 싸맨 보따리 등을 쥐고 있었다. 중년 남녀, 소녀와 소년,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까지. 그 구성요소도 다양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추레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피난민들이군. 아무래도 무슨 사달이 난 모양인데.”
“괴물들의 습격이라도 받은걸까?”
신성 왕국의 국경을 넘고 나서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아델은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피난민들에게로 다가갔다. 철그럭 거리는 갑옷의 소음과 후드 자락 아래로 나 있는 매끈한 강철 부츠. 피난민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여인의 정체를 쉽사리 가늠할 수가 있었다. 그중에서 한 명이 말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다.
“비, 빛의 영광이 함께하시길. 나리. 무슨 일이신지요?”
신성 왕국의 주민답게 노인이 성호를 그리며 물었다. 물론 아델은 성호를 긋지 않았다. 그저 삐딱한 자세로 서서 고압적으로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이동하고 있는 거냐? 습격이라도 받았나?”
노인은 잠깐 말이 없었다. 아주 짧은 망설임이었지만 아델은 그가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늘 해왔던 대로 진실을 캐내고자 했다. 아델은 로브 자락을 펼치며 제 검집을 드러내 보였다.
지난 번의 격전에서 도끼가 부서졌기에 새롭게 구해낸 무기였다. 얼치기 도적에게서 강탈한 것이라 품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날붙이는 날붙이였다. 베이면 죽는 것은 똑같았다. 그녀는 한 손에 검을 든 채 말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이러한 시국에 왜 마을을 떠나 이동하고 있는 거냐? 부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도록.”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를 바라보던 피난민들은 분주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망치는 듯했다. 노인은 아델의 갑옷에 새겨진 성기사 문양을 보고 눈을 질끈 감다가 힘겹게 말했다.
“···마을에 악마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새로운 터전을 찾아 방황하고 있는 겁니다.”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나 보군.”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아닙니다. 악마라고는 하나 고블린이나 오크보다 조금 더 강한 녀석들이었을 뿐입니다. 피해는 있었지만 마을 내 자경단과 고용한 용병들로 잡아낼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떠나는 것이냐? 괴물들도 죽였다면서?”
안전한 목책과 삶의 터전을 두고 왜? 아델이 의문을 드러냈다.
"그, 그게..."
그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여전히 말하는 것을 망설이는 듯했다. 허나 아델이 칼을 빼 들자 당장 눈앞까지 닥친 위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루, 루텐베르크의 이단 심문관님들이 이곳 근처를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루텐베르크라면 벨로크님이 나고 자라신 곳이 아닌가? 그보다 이단 심문관?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자 노인네는 눈을 끔뻑 떴다. 이윽고 노인은 알겠다는 듯 아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리는 이 나라 출신이 아니시군요. 그렇지요?”
“그렇다만···”
노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약간 안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루텐베르크의 이단 심문관님들은 조금··· 성미가 다급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헌납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죄를 물으시는 분들이죠. 그리고 그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감히 교회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며 그 생각에 의구심을 품는 것입니다. 즉 머리에 뿔 달린 괴물들이야말로 이 조건들에 부합하는 놈들입죠.”
악마가 나타난 마을. 광신적인 심문관들. 그리고 힘없는 백성들. 아델은 노인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괜한 화에 휩쓸리는 것이 싫어 마을을 버리고 도망친다 이거로군. 당신들의 반응으로 보아 목숨이 걸려있는 모양인데.”
대체 뭐 하는 미친놈들이길래? 아델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분들의 손에서 자행되는 ‘세례’는 세상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고 합니다. 나리. 저는 나리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제가 도망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시종일관 이단 심문관들에 대해 예의를 지키던 노인은 끝에 가서 제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의 표정이 너무도 다급해 보였기에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손에 들린 지팡이 탁탁 짚으며 후다닥 피난 행렬을 뒤따랐고 아델은 일행에게 돌아가 들은 얘기를 해주었다.
“루텐베르크의 이단 심문관··· 들어 본 적 있어. 교단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권위를 다잡기 위한 선전도구. 가진 지위만큼이나 끔찍한 비전들을 지녔다는 인간 말종들. 좋지 않은데··· 거기다가 피난민들이 왔던 길을 보면 마탑이 있는 방향이야. 어째선지 놈들과 마주치게 될 거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어. 하... 어서 빨리 벨로크를 찾아야 하는데···”
카라가 골치아프게 됐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벨로크가 들었다면 해치웠나?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타박했을 것이다. 세 사람은 불안한 심리를 감추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탑까지의 거리가 1시간 도 채 남지 않았을 때. 그들은 신성 왕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다는 이단 심문관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저건 뭐 하는 괴물 새끼들이지? 좆같이도 생겼군.”
그들의 면면을 본 아델이 얼굴을 굳히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