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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33화 (13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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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성기사, 마녀, 악마

선박이 물살을 헤치고 지나갔다. 이 거대한 나무토막은 부글부글 포말을 일으키며 금세 점처럼 작아졌다. 망부석 마냥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베로니카는 문득 제 얼굴을 쓸었다.

바닷물이 튄 것 같았다. 아니, 지금도 계속해서 튀고 있었다. 화장이 엉망이 됐잖아... 둑을 좀 더 놓게 쌓아야 하나?

“아가씨··· 울지 마세요.”

데비안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심히 건넸다. 베로니카는 손수건을 받았으나 그냥 꾸욱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계속해서 떠나가는 배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악마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 몸뚱이가 더럽혀지고 주변으로부터 손가락질받던 나날.

모든 것을 다 체념하려던 그때. 원망했던 그가 다시 나타났던 날.

못다 한 의무라도 지겠다는 듯. 주변에 산재해 있던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하던 그의 모습.

마지막으로··· 얼핏 냉정해 보이지만 따스함을 담고 있던 검은 눈동자. 제 가슴을 감싸 안던 바위 같은 팔뚝과 상체. 거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입맞춤.

아아···

나의 영웅. 나의 구원자. 나의··· 남편.

양팔로 어깨를 감싼 베로니카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요 1년간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여인의 마음은 지난 몇 주 동안 불처럼 녹아내렸더랬다. 그녀는 이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늠름한 수컷에게 빠져들게 되는 건 암컷으로서의 기본욕구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혼약을 맺을 때 흔히 말하고는 하는 영혼의 동반자가 그이기 때문?

그가 자신을 구해줘서? 잘생겨서? 아버지의 유지를 잇기 위해? 어찌 됐든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녀는 이제 벨로크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는 미망인처럼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닌가? 콩깍지가 씐 거다. 쉽게 달아오른 사랑은 쉽게 꺼진다. 라고 누군가가 조언 아닌 조언을 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그자의 목을 잘라 성벽에 효수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을 맴돌고 있는 이 붉은빛의 열기는 그 정도의 크기였다.

“하아···”

베로니카는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심호흡 했다.

이제 배는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또 다른 상선이나 조각배, 갈매기 몇 마리만 보일 뿐이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때였다.

그녀를 걱정스레 보고 있던 데비안이 뭐라 말을 건네려는 찰나. 베로니카는 구겨져 있던 손수건을 홱 펼치더니 제 눈을 벅벅 닦았다. 이윽고 코까지 흥 풀었다.

“으아악! 아가씨! 교양 없게 그게 무슨 짓입니까?!”

아끼던 손수건이 더럽혀져서인지 아니면 정말 모시는 자의 체통 때문인지 데비안이 기겁했다. 그녀는 물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흠뻑 젖은 손수건을 데비안에게 툭 던지며 말했다.

“돌아간다.”

실컷 울 때는 언제고 이제는 무정하게 등 돌리는 주군을 보며 데비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베로니카의 뒤를 따르며 자신이 나고 자랐던 로벤의 거리를 살폈다.

좌판을 깔고 하는 장사, 짐을 내리는 하역, 채집이나 생산까지. 무역도시의 시민들답게 사람들은 여전히 바빠 보였다. 허나 그 분위기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시민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엿보였다.

그것에는 철 투구를 쓰고 도끼창을 든 채, 쉴 틈 없이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는 경비들의 탓도 있을 것이고, 광장 곳곳에 효수되어 썩어가고 있는 반역자들의 시체 탓도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성벽의 보수를 위해 강제 노역에 동원되고 있는 죄수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탓도 있을 것이다.

-끄으으으으!

-네놈이 아직 채찍 맞을 덜 봤나 보구나! 어서 그 빌어먹을 엉덩이를 높이 들어 올리란 말이다!

-끄아아악!

이제 로벤에서는 더 이상 항구도시 특유의 활발함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고여서 썩어버린 물처럼 그 특유의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데비안은 조금 음울한 눈으로 그 광경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턱을 치켜들며 오만하게 걸어가고 있는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살아남고 이 전쟁에서 버텨내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은 안다. 허나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것이 정녕 최선이었을까? 꼭 이렇게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다 잡아 죽이고 공포로 그들을 굴종시켜야 하나? 좀 더 원만하게 서로 간에 합의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았을까?

아가씨는··· 점점 내가 알고 있던 아가씨가 아니게 되는 것 같다. 틱틱 대기는 해도 마음 한편 따스함을 가지고 있던 그분이 사라지면··· 피의 여백작이라는 위명대로 그저 괴물 한 명이 저 옥좌위에 앉아있는 것이라면 자신은 굉장히 슬플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데비안! 왜 넋 놓고 있나?! 한시가 바쁘다! 어서 따라오도록!”

“예, 예! 아가씨!”

데비안은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자신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벨로크 덕분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저 장대에 매달려있는 것은 자신과 아가씨였겠지.

관대함은 곧 여유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가 떠난 이상 남은 두 사람은 철저한 약자였다.

어떻게든 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약자를 보호하며 자비와 미덕을 실행하라. 데비안은 제 기사도의 한 구절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리고는 한 가지만을 되새겼다. 주군을 지키고 명을 이행하라! 결심한 데비안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어리숙했던 기사는 점점 현실에 치여가며 그 모습을 바꿔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베로니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곧장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병영에 찾아가 병사들을 위무하거나 도시의 성벽을 쭉 돌며 그 상태를 점검했다. 로벤내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지주나 상인들을 만나 만담 내지는 협상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창밖으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조금은 쉴 법도 하건만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번에 새로 뽑거나 복귀시킨 가신들을 소집했다.

“후우.”

가신들이 오는 동안. 광택이 도는 갈색 의자에 몸을 눕다시피 한 베로니카가 제 발을 휙 움직였다. 그러자 신고 있던 구두가 바닥을 구르며 퉁퉁 부어있는 맨발이 나타났다. 살갗이 찢어져 피가 나는 것은 덤이었다.

“으으음...”

못내 고통스러운지 그녀는 턱을 괸 상태로 인상을 찌푸렸다. 습관처럼 이를 주물러주고 약을 발라주려던 데비안이 멈칫했다. 그녀는 이제 홀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식만 안 올렸다뿐이지 사실상 뭐··· 그는 손에 들린 약통만 그녀에게 건네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세상에 어떤 영주가 드레스랑 구두 차림으로 영지를 시찰한답니까?”

“···벨로크가 떠나던 날이 아니더냐.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능숙한 손길로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베로니카가 제 발을 주물럭거렸다. 나중에 그가 돌아오면 주물러 달라고 해볼까?

“하다못해 다음 날로 미루시거나 옷이라도 갈아입고 하시지···”

“쫑알쫑알 시끄럽다. 그보다···”

그녀가 말하려고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호출을 받은 가신들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각각 행정관, 집사, 선임하사, 외교관, 서기관, 등이었다. 여기서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선임하사 벤과 악마에게 아버지가 죽어 젊은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게 된 집사 제리코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 새롭게 뽑은 인원들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가신들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자리에 착석했다. 선임하사는 현재 로벤의 모든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 데비안에게 따로 눈인사를 건넸다. 얼굴에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제리코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들 왔는가.”

베로니카는 흐트러졌던 제 모습을 이미 정돈한 뒤였다. 머리카락은 하나로 땋아 묶어 올렸으며 구두 역시 다시금 신고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꼰 채,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만한 지배자의 자세였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것은 다름 아닌, 현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함이다. 다들 의견이 있다면 가감 없이 얘기하라.”

현재 로벤은 베이츠와 칸티오 두 영지의 연합군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었다. 이를 위한 해결방안이 시급했다. 가신들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뭐든지 상사 앞에서 말을 꺼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사안이 워낙 중대하기도 했다. 허나 오랫동안 그녀의 가문을 모셔왔던 선임하사는 달랐다. 그가 말했다.

“이번에 새롭게 충원한 병사들이 200명. 그리고 기존에 있던 병사들이 187명입니다. 이를 합치면 약400여 명의 병사들이 현재 시내를 순찰하며 성벽을 지키고 있습니다. 병력이 많이 늘기는 했지만 아직도 부족합니다. 거기다가 반수 이상이 신병이기에 실전경험 역시 부족합니다. 방법이 필요합니다.”

“병사들의 임금을 올리고 모병관들을 독려하도록 해라. 그리하면 먹고 살길이 막막한 녀석들이 지원해올 것이야.”

베로니카의 말에 선임하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난색을 표했다.

“임시방편은 되겠지만 영내에서 끌어다 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모병관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현재 육로는 두 영지 군에 의해 꽉 막혀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이와 관련해서 손을 써둔 것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던 데비안이 나섰다. 그는 평소의 웃음기 가득한 표정을 지운 채, 얼굴을 잔뜩 굳히고 있었다. 영주의 최측근이자 영내 유일의 기사로서 주인의 위엄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다. 선임하사의 고개가 돌아가고 데비안이 말했다.

“영내의 노예상들과 선주들에게 말해서 이국의 노예 및 용병들을 좀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뱃길을 오고가는 수고만큼의 금화만 더 쳐준다면 그들은 기꺼이 우리들을 위해서 칼을 들어 올릴 테니까요. 그렇다면 병력의 숫자는 얼추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겁니다.”

“···병력의 질은 제쳐두고서라도 연합을 맺은 두 영지에 비해 저희들은 그들을 지휘할 지휘관이나 기사 혹은 마법사조차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영주님의 약혼자이신 벨로크 경도 떠나셨지 않습니까? 이대로 나갔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무언가 다른 수가 필요합니다.”

하사관의 말에 가신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이 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된 이유는 벨로크의 무력 덕분이었다. 허나 그가 떠나갔다니.

선임하사는 제 군사적인 식견을 내비추었을 뿐이었지만 다른 가신들은 달랐다. 그들은 지레 겁먹고는 한시바삐 입을 열었다.

“성주님. 연이은 군비의 확장으로 인해 영지의 기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저희들 스스로가 자멸하고 말 것입니다. 부디 영지의 미래를 생각하시어 조금 더 균형을 잡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성벽을 믿고 조금만 더 버텨보시지요.”

행정관이 베로니카를 설득했다. 사실 예산은 아직도 충분했다. 교회로부터 몰수한 재산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갑작스럽게 벼락출세하게 된 그는 지금의 지위를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해서 꺼낸 말이었다.

로벤 땅의 지주이자 셈을 잘해서 임명된 상인 출신의 이 늙은이는 사실 자신의 주군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베로니카가 행했던 모든 행동이나 명령들이 지금은 자리를 비운 벨로크의 수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영주좌에 오르기 전 퍼져있던 소문을 취합해보아도 그랬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데비안과 베로니카의 외향만 봐도 그랬다.

“가란과 교회 모두 대표적인 왕당파 세력들이었습니다. 허나 영주님이 다시금 권좌에 오르셨으니 그들 또한 마음을 고쳐먹을지도 모릅니다. 간악한 게오르그와 교회에 맞서 싸우기도 벅찬 판국에 같은 귀족파 세력들끼리 싸울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서신을 보내서 화친을 맺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굳이 창칼만이 해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이 로드.”

옆에 있던 외교관 또한 잽싸게 거들었다. 그 역시도 로벤 내에서 땅을 가지고 떵떵거리고 살던 지주 출신이었다.

“아니, 이 자들이···!”

선임하사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벨로크가 있을 때에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충실하게 일하던 자들이. 이제는 안면 몰수하고 이렇게 행동하다니. 그는 당장에 호통치고 싶었지만, 영주의 앞이라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혼자서 분을 삭였다. 거기에는 저들에게 얽혀있는 영내 세력들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다.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또다시 같은 편끼리 피를 흘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이 사실을 알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음···”

옆에 있던 서기관 또한 눈치를 보며 어디에 편승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오호. 그래? 그대들은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베로니카가 싱긋 웃으며 반응하자 두 사람은 신이 나서 더 입을 열었다. 종래에는 영지의 치안이 너무도 좋지 않으니 시민들을 좀 다독거리고 광장에 효수되어 있던 시체들도 치워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몰랐다. 그녀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입을 연다는 것도 까먹은 채 그녀의 미모를 감상하고 있던 서기관만이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헙 소리를 낸 그가 행정관과 외교관을 설득하려는 찰나. 그녀가 홱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발걸음을 옮겨 가신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슬며시 다가왔다.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를 뒤로한 채, 그녀는 한 손을 내밀었다. 데비안이 있는 방향이었다.

“영주님! 안됩···!”

뒤늦게 이를 눈치챈 선임하사가 그녀를 제지하기도 전. 데비안으로부터 검을 받아든 베로니카가 무정한 칼날을 휘둘렀다.

퍽. 행정관의 목이 달아났다. 노인네의 얼굴이 바닥을 구르고, 주인 잃은 몸뚱이가 기우뚱 쓰러졌다.

치솟는 선혈로 인해 의자에 앉아있던 다른 가신들 전부는 시뻘건 피를 뒤집어썼다. 얼굴이 뜨뜻했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역시나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선임하사였다. 그는 제 얼굴을 쓸면서 탄식했다.

“영주님···”

“으, 으아아아악!”

서기관과 어린 집사 외교관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내질렀다. 베로니카가 눈짓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데비안이 움직였다. 데비안은 외교관의 팔과 다리를 단단히 붙들고는 그의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완연한 굴종의 자세였다. 그는 융단에 얼굴을 파묻은 채, 겁에 질린 어조로 웅얼거렸다.

“왜, 왜 이러십니까. 영주님··· 갑자기 왜···”

베로니카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검을 들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왜? 네놈들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지금 나한테 그 이유를 묻는 것이냐? 뭐? 협상? 균형? 화친? 머릿속에 영지를 팔아먹을 생각밖에 없는 변절자 놈들이 왜라고? ”

그녀는 피 묻은 검을 외교관의 얼굴에 비비적거렸다. 머리 벗겨진 중년인의 얼굴에 끈적한 문신이 아로새겨졌다. 마치 죽음의 선고처럼 보였다.

“성벽 안에서 배부르고 등 따시게 지내다 보니 현실감각이 좀 떨어졌느냐? 놈들은 우리 영지를 잡아먹기 위해 작정하고 연합했다. 그런 녀석들이 말 몇 마디에 잘도 물러나겠구나. 게다가··· 우리가 먼저 얻어맞았는데 왜 놈들한테 화친을 청해야 한단 말이냐? 왜 우리가 놈들한테 벌벌 기어야 되느냔 말이다. 내 약혼자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과연 네놈들이 이딴 망발을 지껄일 수나 있었을까?”

외교관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벌벌 떨면서 빌었다.

“시, 실언을 했습니다. 영주님. 부디··· 자비를···”

그녀의 눈에는 산자의 필사적인 몸짓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검은 머리칼의 전사만이 머릿속을 채울 뿐이었다. 베로니카는 슬쩍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그가 떠나기 전. 제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느릿하게 검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약속했다. 절대 비참하게 살지 않겠다고, 언제나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겠다고, 반드시 그의 옆자리에 어울리는 배필이 되겠다고.”

베로니카는 눈을 부릅떴다. 그 안에는 사랑에 빠진 여인의 뭉글거리는 감정도 담겨있었고, 무정한 지배자의 냉혹함도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감정들이 혼재되어 하나의 이글거리는 불꽃이 되었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동반자에게 기꺼이 그 왕관을 바칠 것이다.”

칼날이 떨어졌다. 겁 많던 가신의 목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피 묻은 검을 챙그랑 던지며 고개를 돌렸다. 창밖에서는 어둠이 지고 있었다. 방안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느닷없이 벌인 잔인한 짓거리에 얼어붙은 자들도 있었고, 그녀가 내뱉었던 한 마디에 놀란 자들도 있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푸른 머리칼의 지배자가 말했다.

“데비안.”

“네. 영주님.”

“감옥에 갇혀있는 성당 기사들과 용병들을 회유해라.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다면 죄를 사해준다고도 전해. 그리고 선임하사!”

“네! 영주님!”

베로니카는 목 없는 시체 두 구를 가리켰다.

“너는 지금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이 반역도들과 관계되어있는 자들을 색출하고 처단하라. 혈육은 필히 제거하되 나머지 저항하지 않는 자들은 살려두어도 좋다. 그리고 놈들의 재산 역시 압류해오도록.”

“···명을 따르겠습니다!”

데비안과 선임하사가 집무실을 나섰다. 베로니카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커먼 밤하늘이 아름다웠다. 마치 그의 머리칼을 연상케 했다. 그녀가 말했다.

“서기관.”

“히이익. 네, 네. 영주님!”

“행정관과 외교관의 자리가 비었으니 이를 다시 채워 넣어야 할 듯 싶구나. 너는 이에 쓸만한 인재들을 알아보도록 해라. 그리고 제리코.”

“네··· 영주님.”

“집무실을 치우고 목욕물을 준비해라. 남편을 배웅하고 왔더니 피곤하구나.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두 사람이 후다닥 도망치듯 떠나고 집무실에는 베로니카만이 남아있었다. 창틀 너머로 새하얀 달빛이 쏟아졌다. 이윽고 그 빛은 온몸이 피범벅이 된 그녀를 여과 없이 비추었다.

괴물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저 가련한 여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창문을 매만지며 혼잣말했다.

“벨로크. 내 사랑... 부디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다오. 너의 원수. 게오르그 그 씹어먹을 녀석은 내 반드시 죽여 보이겠다. 그리고 놈의 수급과 함께 이 나라의 온 영광을 너한테 바치겠노라.”

여인의 다짐과 함께 밤이 무르익어갔다.

몇 주 후.

황금 곡괭이가 그려진 깃발이 두 영지의 성 꼭대기에서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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