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32화 (132/222)

132

작별

창문을 투과해서 들어오는 햇살이 눈 부셨다. 밖에서는 새들의 지저귐, 일찍이 거리로 나온 상인들의 호객 소리가 들려왔다. 존나게 시끄럽군. 저들의 생존 욕구, 삶에 대한 갈망을 욕설 하나로 일축해버린 벨로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본 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적어도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부터는 경험해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압도적인 감각과 지치지 않는 체력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몇 발자국 앞에 있는 사람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게 어디 인간이냐? 잠깐 눈만 감았다가 뜨면 쌩쌩해지는 건 또 어떻고? 적어도 12시간 정도는 자 줘야 피로가 풀리지. 생각하던 그는 이내 피식 웃었다.

역시 사람이 배가 부르면 잡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었다. 이제 진짜 떠날 때가 됐군. 기다리고 있어라. 어떻게든 족쳐줄 테니까.

생각을 마친 벨로크는 손을 움직였다. 옆에 누워있던 베로니카의 허벅지를 만지기 위함이다. 말랑말랑했다. 이곳은 단련이 덜 된 건가? 그렇게 한참을 만지고 있자 푸흐흣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새하얀 팔 하나가 그의 가슴을 끌어안더니 목을 촉촉하게 물들였다. 베로니카는 그에게 키스하며 말했다.

“잘 잤느냐?”

“언제나 잠은 잘 자고 있소. 허나 오늘은 좀 특별하군. 어쩐지 몸이 무거운 느낌이야.”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또 욕심을 부리고 싶어지지 않느냐.”

그녀는 한참 동안 그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입맞춤하다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짝 쳤다. 미련을 끊어내는 행동처럼 보였다.

“지금쯤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났을 것 같구나. 어서 가자. 밥은 먹여서 보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베로니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자신이 알몸상태인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확 붉혔다. 그녀는 다시 한번 벨로크의 등을 치면서 소리쳤다.

“머, 먼저 가 있도록 해라! 내 금방 뒤따라갈 터이니.”

아무리 봐도 귀여운 면이 있다니깐.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옷을 차려입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식탁 위에는 베이컨을 넣은 스프에 삶은 양배추. 하얀 밀빵과 잼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우물거리고 있는 선객이 한 명 있었다.

과로로 인해 눈 밑이 한층 더 꺼메진 젊은 기사. 갈색 머리칼의 잘생긴 사내. 데비안이었다. 하지만 파리한 그의 안색과는 달리 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니, 이제보니 음흉한 웃음이었다. 이놈이? 데비안은 스프를 떠먹으며 킬킬거렸다.

“경. 좋은 시간 보내셨나요? 하하. 소리가 온 성안에 다 울려 퍼지는 게··· 저한테까지 들리더군요.”

벨로크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길다란 귀를 가진 여인과 푸른 머리의 여인을 비교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베로니카의 목청이 더 좋기는 했지. 그는 빵에 잼을 바르며 답했다.

“데비안. 그거 성희롱이요. 알고 있소?”

“으잉? 제가 듣고 싶어서 들은 것도 아닌데. 희롱이라니··· 그건 너무 가혹한 것 아닙니까?”

“듣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 허나 그걸 입 밖에 내는 순간. 희롱이 될 수 있다는 뜻이오. 이곳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살던 곳이었다면 당신은 감옥에 갔을 거요.”

데비안은 혀를 내둘렀다.

“신성 왕국보다도 더 보수적인 곳이네요.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묻지를 못했는데. 경은 어디서 나고 자라셨습니까? 떠나시기 전에 경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데요.”

잠깐 회색 도시라고 대답하려던 벨로크는 이 몸뚱이의 원주인. 하이네 가문의 내력을 떠올렸다. 신성 왕국 출신의 몰락 귀족. 쇠락한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혹은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방랑을 시작한 젊은 기사. 이 새끼 뭐지? 왜 이렇게 촉이 좋아?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왕국 출신이오. 루텐베르크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

“악명높은 이단 심문관들을 많이 배출한다는 그 흉흉한 땅 말이군요. 아. 이런. 죄송합니다. 경의 고향을 모욕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관하지 않소. 이제는 고향 땅에 대한 기억도 희미할 지경이니까.”

데비안은 웃었다. 아까처럼 조금 띠꺼운 미소였다.

“음.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역시 아드리아 왕국이 살기는 더 괜찮죠? 거기다가 로벤 정도면 그 어떤 영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으니까요. 또한 아리따운 미모의 부인까지···억!”

쫑알거리던 그의 고개가 수프 접시에 처박혔다. 어느새 나타난 베로니카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그 잠깐 사이에 화장도 하고 얇은 드레스도 차려입은 그녀는 데비안을 보며 씩씩거렸다.

“너. 기사 데비안. 감히 제 주인을 희롱하는 게냐? 요새 조금 풀어줬더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영주님!”

“네, 네. 영주님.”

베로니카는 한참 동안 데비안을 구박하다가 벨로크의 눈치를 보고는 화들짝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흠, 흠. 벨로크. 난··· 원래 이런 여자가 아니다. 전부다 데비안 이놈 탓이다. 이 멍청이가 나를 폭력적으로 만든게야.”

글쎄. 그런 변명을 하기에는 우리의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검을 뽑아 들었었지 아마? 벨로크는 그렇게 말을 해보려다가 코에 수프가 들어갔는지 재채기를 하는 데비안. 조신한 얼굴로 양배추를 우물거리는 베로니카를 보며 그냥 웃었다.

이 세계가 꼭 엿 같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름 화기애애하다고 할 수 있는 식사가 끝나고 차까지 한 모금 마셨을 무렵. 베로니카가 말했다.

“내가 어젯밤에 얘기했었지? 그대가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무구를 챙기고 병사들을 데려가라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전시상황에 병사들을 데려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혹여 있다고 해도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병사들은 됐소. 무구만 고맙게 받으리다.”

그는 아직도 도적단 두목에게 뺏었던 검과 갑옷을 그대로 차고 있었다. 정신이 없어 새로운 장비를 구하지 못한 것이다. 칼날은 이가 나가고 갑옷은 금이 갔기에 이것들은 바꿔야 할 듯싶었다.

“너의 뜻이 그러하다면···”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품. 그러니까 가슴을 뒤적거렸다. 곧 그 살덩이 속에서 화려하게 치장된 열쇠 하나가 나왔다. 신박하군. 이를 보고 있던 데비안은 다른 곳에 관점을 두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보물고의 열쇠잖아요?”

보물? 벨로크가 호기심을 보이자 베로니카가 열쇠를 흔들며 설명했다.

“그래, 내 선조들의 낭비벽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들이 몇 대에 걸쳐 모아놓은 수집품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지. 잡다한 것도 많으나 진귀한 것도 많다. 그중에서 틀림없이 너한테 도움이 되는 것들도 있을 것이야. 가자.”

그녀가 앞장섰다. 벨로크는 당연히 따라붙었고 데비안 또한 끼어들었다. 넌 또 왜 오냐? 그가 슬쩍 바라보자 데비안이 머쓱하게 웃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저 또한 아가씨로부터 보물고가 존재한다는 얘기만 들었지. 직접 가본 적은 없거든요.”

이렇게까지 얘기를 들으니 벨로크 역시 기대가 되었다. 전에 사용했었던 대검이나 갑옷 정도는 못 되어도 주문 걸린 장비 정도만 구해도 크게 만족할 것 같았다. 세 사람은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웬 창고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어디보자.”

그리고 베로니카는 벽면을 더듬거려 무슨 홈 같은 것을 찾아냈다. 들고 있는 열쇠와 딱 맞아떨어지는 구멍이었다. 그녀는 열쇠를 홈에 끼워 넣었다. 끼리릭 소리와 함께 전의 기계음들이 들려왔다. 집무실에 있던 비밀방과 마찬가지고 이번 방 역시 고대 난쟁이가 만든 모양이었다.

거참. 비밀 한번 많은 성일세. 잠시 후. 쿠르르 문이 열리고 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데비안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아아. 엄청나네요.”

방안은 온갖 물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기름 냄새가 절절 흐르는 무구들이었다. 도끼, 검, 창, 채찍, 전쟁 망치, 단검 같은 무기들은 물론이고 가죽과 강철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갑옷이나 방패, 보석으로 치장된 허리띠 같은 것들이 진열대에 걸려있었다. 그야말로 대장간을 방불케 했다. 벨로크는 시선을 돌렸다.

진열대의 다른 쪽에는 요상한 모양의 조각상이나 장신구, 유리병과 스크롤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무슨 전시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안의 상태로 봐서 관리를 잘한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베로니카는 아련한 표정으로 갑옷에 묻은 먼지를 쓸었다.

“이곳 역시도 오랜만이구나. 내 아버지조차도 비밀 엄수를 위해 이 방에 잘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렇기에 나 역시 어릴 때 한 번 와봤을 뿐이다.”

그는 전대 로벤 영주를 떠올렸다. 확실히 사람을 잘 믿는 자는 아니었다. 이해득실을 늘 따지며 자신의 권위를 짓누른 자는 필히 처벌할 정도로 귀족적인 자였다.

음. 둘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군. 벨로크가 생각할 때. 베로니카는 창고의 선반에 놓여져 있던 책자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책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창고에는 평범한 무구나 장신구들도 있지만, 주문이나 저주가 걸린 물품 또한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편람을 보고 필요한 물품들을 고르도록 하여라.”

“으엑.”

막 보석으로 장식된 검 한 자루에 손을 대려던 데비안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벨로크는 그녀가 책자를 건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지 않았다. 대신에 질문을 던졌다.

“꽤나 체계적으로 되어있구려?”

베로니카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면서도 질문에 답했다.

“물품의 유래와 기원에 대해 선조들이 기재해놓았던 것을 베껴서 정리했다. 그리고··· 도저히 그 효능을 알 수 없는 것들은 사람들을 써서 밝혀냈지. 아, 내가 했다는 것은 아니다.”

벨로크와 데비안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이 창고는 비밀 창고다. 물품을 감정했던 사람들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 참. 일 처리 방식이 꼭 어딘가의 건달들 같군. 베로니카는 그를 보면서 웃었다.

“허나 걱정말라. 이제부터 내가 이 창고를 채우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나는 이곳에 있는 무구들을 사용해 병사들을 무장시킬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지켜보이겠다.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어서 골라보거라.”

그녀가 책자를 건넸다. 벨로크는 이번에도 그것을 밀어내며 말했다.

“당신이 골라주시오. 많은 것은 필요 없소. 잘 드는 무기와 갑옷. 이 두 개면 충분하오.”

“나, 나보고 말이냐? 나는 전사가 아니다. 어찌 아녀자의 판단을 믿을 수 있단 말이냐.”

벨로크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괜찮으니 골라주시오. 영지의 주인은 당신이요. 내가 멋대로 당신 선조들의 물품을 집어 가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소.”

“남편 된 자가 아내의 물건을 가지는 것이 뭐 어떻다고···”

“으윽.”

데비안이 고개를 돌렸고, 베로니카는 얼굴을 붉히며 작게 속삭이다가 책자를 살피며 분주히 창고를 뒤졌다. 이윽고 그녀는 데비안의 도움을 받아 붉은 기가 감도는 가죽 갑옷 한 벌과 폼멜이 십자가 형태로 되어있는 널따란 검 한 자루, 두툼한 허리띠 하나를 가져왔다.

벨로크는 우선 갑옷을 살폈다. 갑옷은 마치 물고기의 것처럼 표면에 비늘이 나 있었으며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법 물품이었다. 그녀는 갑옷의 띠를 느슨하게 풀어 그에게 입혀주며 말했다.

“아룡의 가죽을 벗겨서 만든 것이다. 웬만한 철 갑옷보다 튼튼하며 또한 가볍지. 게다가 경량화의 주문이 걸려있으니, 마치 천 옷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떠냐?”

“정말이군. 입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벨로크는 제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잘 만든 풀 플레이트 아머도 무게를 고루 분산시켜주어 매우 가벼웠지만 이건 그것보다 더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얇은 옷 하나만 걸친 것 같았다.

“요정왕국이 있는 나스 밀림은 굉장히 가혹한 환경을 자랑한다. 독사나 호랑이를 비롯한 위험한 짐승들과 괴물들이 도사리는 것은 물론, 사방 곳곳이 늪지대며 진흙투성이의 땅이다. 이동하는 것만으로 급격히 체력이 소모되는 것은 물론, 발을 잘못 헛디디면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단 말이지. 그러니까 몸은 최대한 가볍게 해야 한다.”

벨로크의 신체 능력을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허나 베로니카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만약에 늪이나 물에 빠진다면 그의 움직임은 제한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칼 든 전사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는 얘기였다. 섬세하군. 역시나 내가 고르는 것보다 나은 것 같은데.

“명심하겠소.”

갑옷을 입는 것이 끝나자 그녀는 데비안으로부터 검을 받아서 건넸다. 손가락 너비만 한 칼집에 꽂혀있는 검의 모습이 꼭 십자가를 연상케 했다. 거기다가 풍겨져 나오는 이 기운은···

“베른하트의 은장검이라 불리우는 검이다. 성검까지는 못 되어도 그에 준하는 물건이지. 사악한 마물이 다가오면 빛을 뿜어내며 역시나 녀석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인간보다는 악마나 마물을 상대하는 것에 치중되어있는 무구였다. 벨로크는 이번 물건 역시 마음에 들었다. 육신의 한계가 있는 인간보다야 악마 쪽이 훨씬 더 튼튼하다. 이 검은 그런 놈들을 상대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가 널따란 검을 허리에 척 차는 동안. 베로니카는 허리에 허리띠를 매어주었다. 그러고는 붉은빛, 검은빛이 감도는 유리병들과 칼날막이가 없는 비도 몇 자루를 주렁주렁 채워 넣었다.

“이건 상처 치료 물약, 이건 해독제, 이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챙겨가거라. 검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또··· 뭘 더 주어야···”

“그만, 이 정도면 충분하오. 이러다가 내가 영지의 기둥뿌리를 뽑을 것만 같은데.”

그가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책자를 살피며 선반을 뒤지더니 기어이 목걸이 하나를 더 챙겨왔다. 헐벗고 있는 여인의 조각상이 푸른 보석을 안고있는 모양의 펜던트였다. 이건 또 뭐야? 베로니카는 목걸이를 벨로크의 목에 걸어주며 말했다.

“예로부터 청금석에는 해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다고들 하지. 단순한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으나. 내 선조 중에 한 분은 바닷가로 나갈 때마다 이 수호부의 효능을 톡톡히 봤던 모양이다. 가져가거라. 바다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려우며 미지로 둘러 쌓여있으니까.”

그녀는 벨로크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그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벨로크 역시 그녀를 바라봤다.

베로니카의 넘쳐흐르는 사랑이 부담스럽다가도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이 여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고 있었다. 함께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세 명의 여인들의 틈바구니로 그녀 역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자 데비안이 딴지를 걸어왔다.

“저··· 아가씨?”

“···”

“제 껀요?”

분위기가 깨졌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베로니카는 눈을 확 치켜뜨며 그를 노려봤다. 결국 데비안은 주문 걸린 검과 방패 하나를 챙긴 대신.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에게 잔소리를 듣거나 정강이를 걷어차여야 했다.

녹이 슬고 누런 때가 묻어있는 판석들 위로 구릿빛 피부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쏘다녔다. 술과 과일이 담긴 둥근 통을 이리저리 옮기고 무언 포장했는지도 모를 교역품 역시 가득 실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출항이다! 닻을 올려라!”

그러자 두건을 뒤집어쓴 선원들이 재빨리 배에 승선했다. 따개비가 붙은 쇠사슬과 함께 강철 닻이 수면에서 솟구쳤다.

끙끙거리며 작업을 하는 선원들을 제외하고 일부는 항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선원들의 맞은편에는 마찬가지로 그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평범한 항구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 모든 광경을 두 눈에 감았다. 1년 만에 방문한 로벤은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잠시 후. 벨로크 역시 배에 올랐다. 바닷바람 특유의 짠대음이 코를 울리고 내리쬐는 햇빛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표면을 물들였다. 눈이 아팠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베로니카와 데비안 또한 손을 흔들었다. 아니, 푸른 머리칼의 여인은 울면서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___!”

벨로크는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또 다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