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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
교단 사람들이 안톤을 주시했다. 저 사내의 말에 따르면 둘은 안면이 있어 보였으니까. 허나 안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사내를 손가락질했다.
“너! 이 학살자 놈! 대체 네놈은 누군데 나를 안다고 하는 것이냐?!”
“그렇지? 알아본 게 신기하다니까.”
“뭐라?”
혼자서 중얼거린 벨로크가 한 손으로 제 앞머리를 쓸었다. 수려한 이목구비가 드러났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머리칼에 묻은 피딱지를 툭툭 털면서 말했다.
“1년 전. 신께 맹세코 나와 약조를 하지 않았나.”
“약조? 내가 네놈 같은 살인귀하고 무슨···”
새끼. 입 한번 가벼운 놈이었군. 안톤이 말끝을 흐릴 때. 벨로크가 말했다.
“노망이라도 나셨나? 불과 1년 전의 그날도 떠올리지 못하다니.”
“1년 전이라고···?”
안톤은 미간을 찌푸리며 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헉 소리를 냈다.
“설마···?! 바호메트를 물리쳤던 그때 그 기사?!”
이름조차 모르는 모양이었다. 허나 벨로크 역시 안톤이 자신의 이름을 떠올려주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나 보군. 그렇다면 그때 했던 약조 또한 기억이 나겠지?”
“···”
안톤은 침묵했다. 교단원들은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 이면에는 저 괴물 같은 전사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망설임이 혼재되어 있었다. 안톤 역시 그러했다. 그는 흔들리던 눈동자를 다시금 가라앉히며 큼 헛기침을 했다. 그가 말했다.
“경.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나는 베로니카공을 헤치려는 게 아니라···”
“좀 더 괜찮은 변명을 해봐라.”
벨로크는 검을 휙 돌리며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안톤과 교단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가 웬 악마에게 홀렸다는 밀고를 받았소. 이 병력들은 그 악마를 제압하기 위해···”
“다른 것.”
“나도 원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오. 이건··· 게오르그 그놈과 수도 대교회가 사주한···”
“다른 것.”
안톤은 입을 우물거리면서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지만, 벨로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집무실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인 돌로 된 복도. 그곳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시체들 그리고 이 모든 재앙을 만들어낸 장본인. 피투성이의 검사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핏방울과 이가 조금 나갔지만 그렇기에 더 섬뜩해 보이는 칼날.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검은 눈동자. 무심한 살육자의 눈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견하는 듯했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교단원들은 반사적으로 제 무기를 들어 올렸다.
“이, 이···”
안톤 역시 다급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편에 있던 병사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교단의 권위를 상징하던 새하얀 법복이 엉망이 되었다. 안톤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병사를 째려보다가 다시금 고개를 홱 돌렸다. 그가 벨로크를 손가락질했다.
“네놈! 네놈이야말로 같잖은 위선자가 아니냐! 베로니카 그년을 돌보는 것이 싫어서! 기사로서의 명예나 충성심 보다 너 자신의 안위를 더 생각해서! 그년을 내버려 둔 채 떠난 것이 아닌가!”
벨로크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안톤은 자신을 부축한 병사의 팔을 거칠게 밀어내고는 씩씩거리면서 다시금 소리쳤다.
“주인 잃은 땅! 세상 물정 모르는 후계자! 멀리 있는 친인척들! 갖춰져 있는 명분까지! 누가 손만 빨고 있겠나? 조금만 내디디면 수없이 많은 재산이 손에 들어온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내 명을 듣게 된다.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오지에 숨어서 수행을 쌓는 수도사들? 스스로를 청렴결백하다 주장하며 신과의 연결고리를 강하게 하기 위해 속세와의 연을 끊은 그 치들?! 녀석들은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노인은 코웃음을 쳤다.
“신께 사랑받는다 해도 뭐하겠는가. 지금은 난세다! 굶주린 빈민들과 강도떼, 정신 나간 마법사,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세금을 높이거나 전쟁을 일으킬 궁리만 하고 있는 귀족들까지! 고결한 척하는 자칭 신의 사자들! 그 멍청이들은 이 어지러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 나갈 뿐이다. 아무리 대단한 성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 모든 악의에 맞서 제 한 몸 지키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게 뭐겠나? 신을 믿고 따르기에 앞서 나 자신한테 가장 먼저 필요한 게 뭐겠냔 말이야!”
안톤은 핏발선 눈으로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연설을 이어나갔다.
“바로 힘과 권력이다. 그 두 가지만 있다면 아니, 그것들이 있어야 비로소 이 왕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다. 나는 스스로의 본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지하의 족속이건 지상의 생물체건 그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새끼. 권력이 가지고 싶었다는 말을 장황하게도 하는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안톤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어째서 네놈이 돌아왔는지는 모른다. 베로니카 그년이 불쌍해서인가? 아니면 유랑생활에 지쳐 정착할 땅이 필요해서인가? 뭐가 됐든 단념하고 우리에게 붙어라. 악마들은 계속해서 활개를 치고 있고 교단의 권위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는 교회들의 본산이 있는 신성 왕국 또한 마찬가지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제 왕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다. 악마 사태가 수습되는 대로 왕국 대 왕국이 맞붙는 거대한 대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제일 유리할 것 같은가? 바로 교회다! 삶이 고단해지고 피폐해질수록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을 원하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거절하겠다.”
“뭐라?”
벨로크의 담담한 말투에 안톤이 당황했다. 그는 주변에 빽빽하게 들어찬 교단의 병사들을 힐끔 보고는 다시금 노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네놈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약속을 어긴 네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이! 더러운 위선자가!”
욕설을 내뱉은 안톤이 옆에 있던 병사를 강하게 쳤다. 그러자 병사는 손에 들린 석궁의 방아쇠를 반사적으로 당겼다.
퉁. 어둠을 가르고 또 다른 어둠의 선 하나가 날아들었다. 철갑옷 따위는 가볍게 뚫어버리는, 문명의 집합체가 모여 만들어낸 살상 병기였다. 그리고 그 화살은 벨로크의 손가락에 허무하게 잡혀 들었다.
“어?”
병사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두 개의 손가락만 슬쩍 움직여 활대를 부러트리고는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이제 한 사람과 집단과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벨로크는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위선자면 또 어떤가? 이 세상에서는 곧 힘을 가진 자가 법인 것을. 목숨이 아까운 자들은 도망쳐라. 뒤쫓지는 않겠다.”
“으아아아!”
휘둘러오는 전투 망치를 향해 그는 양손검을 휘둘렀다. 검광이 번뜩였고 생기 잃은 눈동자가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우르르 도망치고, 신을 믿지 않는 노인이 바닥에 주저앉아 목숨을 구걸할 때까지.
잠시 후.
“경! 아가씨! 제가 왔습니다!”
데비안이 로벤의 정규군을 이끌고 성에 도착했을 무렵. 전투는 이미 끝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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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도시 로벤에 사는 시민들은 매우 바빴다. 바닷가와 인접해있는 만큼. 어부들은 쉴 틈 없이 그물을 손보는 동시에 물고기를 잡아야 했다. 제 배를 가진 선장들은 다른 도시나 나라를 오가며 교역을 일삼았다.
그것들을 재가공해서 다시 파는 장인, 그 물품들을 사는 상인, 물건을 하역하는 일꾼들이나 도시를 관광하러 온 관광객까지. 도시의 규모가 크고 유동 인구가 많은 만큼, 사람들은 제각기 필사적인 이유로 아등바등 살아갔다. 그건 내전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식료품의 가격이 올랐으니 더 열심히 그물을 쳐야 했다. 주린 배를 채우려면 더 열심히 일감을 받아야 했다. 이는 무역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물자를 가져다가 팔면 짭짤했다. 모피나 세공품 등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귀족들은 전쟁통인 와중에도 사치와 향락을 즐겼기 때문이다.
물론 악화된 치안으로 인해 들끓는 해적, 해적의 탈을 쓴 다른 영주의 사략선,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권력자들 등. 다양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다른 영지들에 비해서 로벤은 그 강도가 덜한 편이었다.
그런 로벤의 항구가 오늘따라 한산했다. 다른 나라나 영지에서 온 배 일부만 빼면 항구는 텅 비어 있었다. 대신에 평소라면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나 지나다니는 시민들을 제외하고는 썰렁했어야 할 광장이 지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도시에 사는 시민들 전부가 모인 것처럼 보였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영주가 소집령을 내려서였고, 둘째는 꽤나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셋째는 전란으로 지친 그들의 삶을 달래줄 유흥거리가 필요해서였다.
그렇다. 로벤 광장에서는 처형식이 한창이었다.
“죄인! 디알마는 들어라! 네놈은 감히 영주님을 모시는 아랫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었다. 타락 사제 안톤과의 밀약을 맺어 영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것도 모자라 끝끝내 영주님을 독살해 이 도시에 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 죄목이 너무나도 크기에 이에 선고한다. 사형!”
“아닙니다! 오, 오해입니다! 저는··· 영주님을 감시한 것은 맞지만 결단코 독을 타지는···”
“시끄럽다! 변명은 천상신들의 발아래에서 하도록!”
포고문을 들고 있던 청지기가 한쪽 팔을 홱 휘저었다. 그러자 고깔 모양의 시커먼 두건을 쓰고 상체를 드러낸 사형집행자들이 그를 끌고 갔다. 단두대가 철커덩 움직였다. 내통 죄를 쓴 하인의 목이 그렇게 잘려나갔다.
그다음은 하녀, 요리사, 성당 기사와 사제, 그리고 교단의 문양을 달고 있던 병사들까지. 단두대와 집행인들의 참수검에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죽음을 선물했다.
그렇게 잘려 나간 머리들, 머리 잃은 몸뚱이들이 구석에 차곡차곡 쌓였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하얀색 판석이 뻘겋게 물들 정도였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이를 본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교회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입을 헙 다물었다. 그들의 행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자들은 시체들에 침을 뱉으며 환호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워하거나 혹은 간만에 생긴 구경거리를 내심 즐겼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를 지시한 사람이자 정당한 이 땅의 지배자. 베로니카는 이 모든 광경들은 오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땋아올 린 것은 물론, 예식용 드레스를 입고 화려하게 치장된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는 햇빛을 막기 위해 위에는 하얀색 천막이 처져 있었으며 옆에는 벨로크와 데비안이 시립해 있었다. 베로니카는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다음.”
그녀가 손을 휘젓자 청지기는 다시금 손에 들린 포고문을 읽어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번에는 거물이었다.
“죄인! 안톤을 끌고 와라!”
“아, 안 돼! 안 돼에!”
무장병들이 거칠게 저항하는 노인네 하나를 끌고 왔다. 새하얀 법복은 까맣게 때가 타 완전히 넝마가 되어있었으며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고통과 피로감이 가득했다. 로벤 교회를 대표하던 인물의 모습이라고는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역시나 머리에 고깔을 쓴 집행인들이 그의 상체를 짓눌러 단두대의 틀에 고정시켰다.
청지기는 온갖 욕설과 함께 안톤이 저지르지 않았던 죄목 또한 추가시켜서 그를 희대의 악인으로 낙인찍었다. 그는 어느 순간 어지간한 대악마보다 끔찍한 짓거리를 자행한 살인마가 되어 있었다.
청지기는 맡은 바 일을 다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카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
베로니카의 덤덤한 얼굴에 균열이 갔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녀는 처음부터 덤덤한 척 연기한 것이었다. 드레스 자락에 가려져 있었지만 사형식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그녀의 다리와 팔은 시종일관 떨리고 있었다. 벨로크는 이 모든 것을 알아챘다. 허나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제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퍼포먼스. 그녀를 적대하는 자들에게는 공포와 굴종을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안도감을. 이 시대의 권력 다툼의 끝은 항상 이렇게 무자비했으며 가혹했다. 뭐가 됐든 그녀의 선택이었으며. 그녀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였다.
“아가씨···”
아까부터 저자는 그래도 죄질이 좀 가벼운 자다. 몇몇은 살려주는 것이 낫지 않겠냐? 라며 용서와 관용의 말을 내뱉던 데비안이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상대 역시 이를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었다. 엎드려 있던 안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는 잔뜩 쉰 목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베로니카! 내가, 내가 다 잘못했다. 너에게 모욕을 주고 더러운 소문을 퍼트린 것. 너를 이용한 것 모두 말이다! 그러니까··· 제발 제발··· 살려만 다오! 우리들의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벨로크는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의 떨림이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 역시 바라보았다. 높은 감각 수치 덕분일까. 그 안에 담겨있는 감정이 어째서인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것은··· 희열이었다. 지금까지 죄수들을 볼 때마다 그녀가 내비치던 감정과는 정반대인 감정이 그녀의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히죽 웃었고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제 손을 휘저었다.
“형을 집행하라!”
“베로니카아! 이 악마 같은 년! 산양에게 따먹힌 더러운 년! 이 지옥의 창부 같으니! 네년이 얼마나 웃을 수 있는지 보겠다. 저 드높은 천상신들의 발아래에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보겠다! 이 학살-끅!”
단두대의 칼날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고래고래 소리치던 안톤의 목이 댕겅 잘려 나갔다. 그렇게 로벤에서 벌어지던 권력다툼이 마침내 끝을 맺었다.
-와아아아아!
환호하는 시민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사체를 치우는 집행인들. 그들을 통제하는 병사들. 포고문을 접으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청지기와 자신을 걱정스레 혹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바라보는 데비안까지. 그 복잡한 주변 상황속에서 베로니카는 작게 속삭였다.
“성인들은 말한다. 복수는 허무할 뿐이라고, 끊이지 않는 피의 연결고리일 뿐이라고. 아니, 그들은 틀렸다. 놈들은 제 살이 깎여 나가도 허허 웃기만 할 뿐인 머저리들일 뿐이야. 이렇게 달콤할 수가 없다··· 이렇게 통쾌할 수도···”
말끝을 흐린 그녀가 제 눈동자를 굴렸다. 그 눈동자 속에는 기이한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벨로크는 이를 알고 있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귀족들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거만함. 지배자의 눈이었다. 검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가 마주했다. 그러자 베로니카는 제 눈을 조심스레 접었다. 이윽고 벨로크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그의 발등에 키스했다.
“나의 모든 것은 이제 그대의 것이다. 나의 은인. 나의 영웅. 나의··· 약혼자여.”
피의 숙청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