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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28화 (12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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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물론 나도 좋기는 하다만··· 아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리야!”

베로니카가 확 쏘아붙이자. 벨로크는 요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군. 내 말은 당신만이 아는 비밀통로나 비밀의 방 같은 것이 없냐는 뜻이었소. 만약 놈들이 쳐들어온다면 당신까지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좀 더 안전한 장소로 가자는 뜻이었지.”

“···집무실에 숨겨진 방이 하나 있다. 튼튼한 것은 물론 식량과 숨구멍 역시 뚫려있지. 사람 몇은 거뜬히 들어가고도 남는다.”

베로니카는 홱 몸을 돌려서 앞장섰다. 뒤따라가던 벨로크는 그녀의 귓가가 빨갛게 물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군.

그녀의 인도 아래 두 사람은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베로니카는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 중 몇 개를 휙휙 빼고는 그것의 순서를 바꿔서 꽂아 넣었다. 그러자 구구궁 소리와 함께 책장이 반으로 갈라지며 안에 있던 비밀방이 드러났다.

한쪽 구석에는 식량 꾸러미들이 쌓여있고 사방은 돌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방 안의 광경보다는 문이 열릴 때의 방식에 집중했다.

끼긱 거리는 톱니바퀴 소리. 미세한 기름 냄새. 그가 보기에 저것은 기계장치였다. 그리고 과학 대신 마법이 존재하는 이곳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건지 베로니카가 말했다.

“오래전. 고대 난쟁이들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들었다. 무슨 원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마법이 아니라는 것만 알 뿐.”

고대 난쟁이들은 기계를 다뤘나? 지금은 안 보이는 걸로 봐서 쇠락한 것 같은데. 수백 년 전의 기계장치가 지금까지 돌아간다니. 그 시절의 문명 수준이 궁금해지는군.

그의 머릿속으로 로봇을 타고 어딘가로 쏘다니는 난쟁이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서며 벽에 걸려있는 양초 불을 켰다. 허나 벨로크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비밀방의 입구에 떡하니 기댄 채, 제 칼집을 매만졌다.

“벨로크? 안 들어오느냐?”

“말하지 않았소. 당신에게 이 장소의 안내를 바란 것은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눈먼 화살에 죽는 것은 너무 허무하니까.”

자신만 여기에 숨겨둔 채, 놈들이 오면 그는 밖에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입술을 악문 베로니카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면서 외쳤다.

“나도! 나도 싸우겠다! 난 이 땅의 영주다! 너한테만 맡겨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벨로크는 그녀를 훌쩍 들어 안아 방안에 다시금 밀어 넣었다. 그녀는 이익 소리를 내며 저항했지만, 자신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팔뚝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당신의 검 솜씨는 분명 쓸만했소. 허나 그 뿐이지. 얼치기 몇은 처리할 수 있어도 제대로 배운 놈들. 그리고 그런 놈들 수백 명이 몰려온다면 죽을 것이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지. 그리고 당신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기에 일어나는 참사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소?”

팔뚝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길이 강해졌다.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 역시 들렸다. 분한 듯했다. 어이쿠. 벨로크는 한 손으로 베로니카의 등을 토닥이면서 한층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꼭 칼질만이 능사는 아니오. 다들 자기가 맡은 위치에 걸맞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오. 데비안은 기사로서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떠났소. 나 역시 레이디를 지키는 직무를 수행 중이지. 그렇다면 그 보호의 대상이자 군주인 당신은 이에 걸맞은 일을 해야지.”

손길이 약해졌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엇인데?”

“이 전쟁이 끝나고 교회를 몰아냈을 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성벽 밖에 있는 베이츠와 칸티오는 어떻게 몰아내야 할지. 더 나아간다면 앞으로도 계속될 이 전란의 폭풍 속에서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생각을 해보시오. 그게 사람들을 이끄는 자로서의 책무 아니오?”

“···”

벨로크는 말이 없는 베로니카를 조심스레 내려다 주고는 문을 닫으라 말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뭐, 이 모든 것들이 아직 벅차다면 안톤. 그 영감탱이를 어떻게 조질지나 생각해두시오. 사지 멀쩡하게 살려다가 당신 앞에다 대령해줄 테니까.”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기계음과 함께 열려있던 책장이 다시금 닫히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자신의 앞에 굳건하게 서 있는 그의 넓은 등과 어깨. 그리고 목덜미까지 넘실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보면서 말했다.

“벨로크.”

“왜 그러시오?”

“꼭, 꼭 살아다오. 살아서··· 부디 내가 진 빚을 갚게 해다오.”

벨로크는 아무 말 않고 그냥 한 쪽 손을 들어 올렸다. 문이 닫혔다. 방음마저 잘 되는지 아니면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청각은 다른 소음들을 감지했다.

갑옷이 철그럭 거리는 소리, 뿔피리 소리, 누군가 연설, 이에 환호하는 사람들. 우상화. 맹목적인 광신도들. 혹은 그런 척하는 놈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수 백 개의 울림들이 그의 귓가를 찔러대고 있었다.

바깥에는 이미 난리가 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느닷없이 잠에서 깨어나 지금의 상황을 살피려 노력하겠지.

벨로크는 손을 슬쩍 움직여 책장을 만졌다. 튼튼했다. 거기다가 위장이 아주 감쪽같았다. 누군가 이 장소에 대해서 아는 사람만 없다면 베로니카는 무사할 듯싶었다. 그래, 네놈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거지. 데비안은··· 뭐, 알아서 하겠지. 살아만 있어라.

어차피 그는 로벤 정규군의 도움 따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충성심이나 정. 혹은 이익 등. 마음가짐에 기대는 것보다야 손에 들린 이 날붙이 하나를 믿는 것이 더 나았다.

이 녀석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니까. 그리고 벨로크가 가진 능력이라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결과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수백 명 인간의 피를 묻히고, 그들의 삶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그는 방을 나섰다. 집무실의 문을 닫고 검을 뽑아 들었다. 스산한 검명이 스르릉 울렸다. 어둠이 녹진하게 깔린 돌무덤의 틈바구니로 발자국 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땅이 울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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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갑옷과 투구를 쓰고 그 위에 신들의 문양이 새겨진 서코트를 입은 기사들, 그보다는 못하지만 역시나 통일된 정복을 갖춰 입은 병사들과 법복을 입은 사제들. 교단의 이름 아래 집결한 수백 명의 군세는 음영에 휩싸인 항구도시를 씩씩하게 걸어 나가고 있었다.

용병, 부랑자, 무뢰배들에게 금화와 교회의 보증서를 쥐여주고 만들어낸 군대. 종교적 믿음, 신앙, 계율 등에 얽매인 혹은 그 가면 아래 다분히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간군상들.

“성전에 참여하라!”

“악마에게 영혼을 판 영주를 끌어내려라!”

“끔찍한 실험을 자행하고 빛의 사도들을 살해한 죄목을 물어라!”

“로벤의 형제자매들이여! 일어나라! 성주의 악행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그대들에게 남는 것은 파멸뿐이다!”

그들은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다. 뿔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고 목놓아 소리치는 등. 요란스런 행진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그들이 부르짖는 성전의 열기에 감화되어 그렇게 행동하는 자들도 있었고, 자신들의 정당성 혹은 명분을 챙기기 위해, 시민들을 선동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자들도 있었다.

불안한 눈빛을 짓는 시민들, 잠을 방해받아 욕설을 내뱉는 시민들,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는 자들. 옳다구나 외치며 군대의 뒤를 따르는 자들까지. 고요했던 항구도시는 순식간에 어수선해졌다.

그들이 몰고 다니는 불꽃의 점들. 지글거리는 횃불들이 온 사방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그 아래에 있는 신도들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있거나 흥분으로 꿈틀거렸다. 이윽고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자. 노사제 안톤이 발걸음을 멈췄다. 눈앞의 성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한쪽 손을 척 들어 올렸다. 병사들의 움직임을 멈췄다. 물론 그 과정에서 지휘관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음은 분명했다. 노사제가 말했다.

“오늘 참으로 암담한 일이 있었소. 바로 이 땅의 지배자. 베로니카 공이 그만 악마에게 홀려 타락해 버리고 만 것이오!”

그 후로 안톤은 베로니카가 타락하게 된 계기. 성에 있던 하인과 하녀들의 죽음, 종래에는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의 눈물마저 흘리며 열변을 토해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 하오! 악에 물든 베로니카 공이 더 이상 부정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저 지하의 족속들이 이 땅에 마수를 뻗어오기 전에! 이 인과율의 고리를 끊어내야 할 것이오!”

사람들이 무기를 치켜올리며 환호했다. 안톤은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주먹을 꾸욱 움켜쥐며 앞장섰다.

“불손한 자들은 모두 우리의 신념 앞에 쓰러지리라! 가자! 형제자매들이여!”

안톤과 교회의 병사들은 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걸음을 조금 옮기다가 슬쩍 멈춰서고는 눈짓했다. 그러자 사제의 축복을 받은 기사들과 병사들만이 성 내부를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했다. 안톤은 옆에 있는 보조 사제를 보며 물었다.

“얼마나 걸리겠나?”

“바르투경과 다른 기사들을 어떻게 막아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곳에 모인 병력은 그 수십 배 입니다. 절대 당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년이 설령 숨어있다고 해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신다면···”

보조 사제가 머리를 굴릴 때. 성의 위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끄아아악!

-꺄아아아악!

돌로 된 통로 너머로 들려와서 그럴까? 저 고통스러운 울림은 한층 더 끔찍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비명이 들렸다는 건 저항하는 놈이 저곳에 있다는 뜻이고, 그 말은 곧 베로니카 역시 이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안톤을 위시로 한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병사들을 독려하여 위층으로 올려보냈다. 언제까지 버티나 볼 셈이었다.

석궁을 든 병사, 창과 검을 든 병사, T자형 헬름을 쓰고 거대한 사각 방패와 대검을 소지한 기사까지. 피와 살육으로 단련된 신앙의 추종자들이 계속해서 돌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하나같이 꽥 비명을 질러댈 뿐 누구 하나 성과를 내보이는 녀석이 없었다. 칼부림 소리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쯤 되자 지휘관들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안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진짜 베로니카 그년이 악마랑 계약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보조 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저 위에서 들려오고 있는 날붙이들의 소음과 비명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덕분에 거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가란이 떠나기 전 내뱉었던, 그가 돌아왔다는 말에 더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그가 누구지? 보조 사제가 식은땀을 흘리고 내성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병사들의 숫자가 띄엄띄엄 보일 때쯤. 안톤이 수염을 부들부들 떨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되어가는 거지?! 저 얼간이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게야!”

그가 크게 소리친 순간. 수십 명 정도의 인원들이 우아아 소리를 내면서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전부 다 얼굴에 피나 살점, 내장 조각 등을 한가득 묻히고 있었다. 그들의 것은 아니었다. 안톤이 말했다.

“형제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 무슨···”

“제길! 비켜!”

“저런 괴물이 있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신앙의 탈을 쓴 채, 교단의 병사가 되어가던 건달들은 거대한 공포 앞에 본래의 성정을 드러냈다. 이제는 그냥 칼 든 무뢰배가 된 사람들은 앞을 막아서는 지휘관들을 냅다 밀치고는 성 밖으로 우루루 떠나버렸다.

그들로부터 들은 정보라고는 웬 칼잡이 하나가 집무실의 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검이 너무나도 강하고 빨라 한 합을 받아낼 수가 없다는 것. 녀석에게 이미 수십 명이 도륙당하고 지금도 죽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교단의 이름을 팔아 제 사리사욕을 채울 때는 언제고 이제는 도망을 친다고? 이런 등신 같은 새끼들이!”

이제 남은 인원은 안톤을 위시로 한 수십 명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었던 병사들과는 다르게 이 땅의 이권을 약속받은 미래의 지주들이었다. 그래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영주만 몰아내고 나면 이 노른자위의 땅이 그들의 것이었다.

산호나 진주 같은 항구도시에서 나오는 진귀한 물품들, 그들에게서 거두어지는 세금, 바다의 전경이 보이는 저택 등. 이 모든 것들이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움직였다. 한 번 불붙은 탐욕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욕망이나 약속받은 이권만큼 이들은 정예였다.

성당 기사들은 제 나름의 각오를 다지며 선두에 나섰고, 뒤에서는 사제들이 축복을 내렸다. 용병대장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며 주변의 흔적들을 살폈다. 집무실로 향하는 통로는 엉망이었다.

툭 부러진 무기들과 방패, 깨어진 갑옷 조각 등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파편의 주인들 역시 한 줌 육편이 되어 바닥을 흩뿌리고 있었다. 무슨 피로 된 벽을 보는 것 같았다. 한 용병대장은 생각했다.

무기나 갑옷째로 사람을 토막 내려면 대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등골이 시린 그가 또 다른 생각을 이어나가려고 할 때. 살점 찢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시선을 돌리자 어둠 속에서 검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 망치를 든 병사 하나가 자루째로 토막 나고 있었다.

“끄르륵.”

목이 절반쯤 베여나간 그가 울컥 피거품을 뿜으며 쓰러졌다. 스르르 시체가 넘어가자 안톤 일행은 정체불명의 전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철판과 사슬이 혼재된 갑옷에 양손 검을 쥐고 있는 검사였다. 온통 피범벅이라 얼굴은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허나 그 눈동자만큼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시커먼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꼿꼿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그 서슬 퍼런 기세에 교단원들이 흠칫 놀랐을 때. 사내는 손에 들린 검을 툭툭 털어 피와 살점을 걷어냈다. 이윽고 인사라도 하듯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오랜만이군. 안톤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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