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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27화 (12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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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벤

돌바닥을 사르르 짓밟는 소음이었다. 허나 그 소리가 무척이나 작았다. 아주 은밀한 발소리였다.

성내를 돌아다니는 하녀나 하인일까? 벨로크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이 생각이 틀려먹었단 것을 깨달았다. 이 야심한 밤에 시종이나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 다닐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녀석들일세. 그는 양초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어깨를 휙휙 돌리고는 벗어두었던 갑옷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찼다. 그 순간. 뒤편에 있던 창문이 끼이익 열렸다.

“이중 침입이라. 머리 좀 썼는데.”

벨로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자 거센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그의 감각은 창틀에 서 있는 암살자의 모습을 샅샅이 그려내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뜨고 있는 복면 쓴 괴한. 허리춤으로 움직이는 녀석의 손과 뽑혀 든 단검. 그리고 그것이 휙 날아오는 궤적까지.

스르릉. 벨로크는 검을 뽑아듬과 동시에 뒤편으로 휘둘렀다. 불꽃이 튀며 방안의 광경이 잠시 밝아졌다. 힘을 잃은 비수가 바닥을 굴렀다.

“뭣!?”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무기를 쳐낸다니. 벨로크의 기행에 암살자는 한 번 더 당황했다. 하지만 벨로크가 느낀 것은 저 암살자의 수준이 뒤떨어진다는 것뿐이었다.

말을 내뱉을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는 것이 좀 더 성공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녀석 또한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녀석이 검을 뽑아 든 그 순간. 또 다른 칼날이 번뜩였다.

“끄아악!”

어둠에 휩싸인 방안에 비릿한 향이 퍼져나갔다. 얼굴에 뜨끈한 무언가가 끼얹어졌다. 벨로크는 잘려나간 팔을 부여잡으며 끅끅거리고 있는 음영의 턱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녀석은 몸을 축 늘어트리며 기절했다.

그가 이 사내를 안 죽인 이유는 별거 없었다. 사로잡아서 심문해볼 생각이었다. 벨로크는 사내를 힐끔 살피고는 재빨리 방을 박차고 나왔다. 암살자들이 노리는 것은 베로니카의 목숨 일터. 그녀가 위험했다.

방이 어디지? 예전 위치 그대로인가? 아무나 한 놈 붙잡아서 물어볼까? 그가 생각할 때. 칼부림 소리들과 함께 여인의 비명이 들려왔다. 집무실 쪽이었다. 벨로크는 냅다 달렸다.

돌바닥이 거친 마찰음을 일으켰고 어둠의 파도가 쉭쉭 물러났다. 눈동자를 힐끔 굴리며 성안을 감시하고 있던 하인이나 하녀들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속도였다.

흔들리는 횃불 아래 그는 순식간에 집무실의 앞에 도착했다. 냅다 발길질을 했다. 문이 콰앙 열리고 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허억, 허억, 허억.”

검을 뽑아 든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베로니카가 보였다. 그녀의 가죽옷은 이리저리 찢겨나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채, 칼을 들고 있는 괴한이 다섯 보였다.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한 명의 덩치는 유난히 컸다.

덩치 큰 놈이 벨로크를 보더니 말했다.

“뭐냐. 네놈은?”

“리빙턴 형제가 말했었던 그 자유기사인 모양입니다.”

“기사? 데비안 그놈과 함께 먼저 처리해두기로 하지 않았나?”

“분명 손을 써두었는데···”

복면인은 말끝을 흐렸다. 그들이 나서기 전. 몸이 날래고 단도를 잘 다루는 출신의 형제를 성벽 쪽으로 몰래 침투시켰었다. 헌대 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당해버린 모양이군. 소문만큼은 못 되어도 대단한 전사인가 본데. 거 재주도 좋구나. 베로니카. 어떻게 저런 전사를 꾀었지? 악마에게 따먹혔던 그 천박한 몸뚱이로?”

덩치 큰 사내는 여유롭게 웃었다. 사내의 모욕에도 베로니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복면인들에게서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벨로크! 괜찮으냐!”

“문제없소. 다행히 늦지는 않은 모양이군.”

“저 바보들이 어물쩡거려준 덕분이다. 날 가지고 놀려고 했거든.”

“성직자 새끼들이 단체로 발정이라도 낫나? 이런 짓을 하고도 네놈들이 모시는 신들이 뭐라 안 하든?”

벨로크가 검을 들어 올리며 슬금슬금 다가오자 한 명의 복면인을 뺀 나머지가 그를 주시했다. 역시나 덩치 큰 사내가 말했다.

“성직자? 무슨 개소리냐? 우리는 의뢰를 받았을 뿐이다.”

오. 끝까지 잡아떼시겠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런 그를 향해 네 개의 날붙이가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들고 있는 것이 대검이었다면 무기 째로 날려버렸을 거다. 허나 이건 평범한 양손검이었다. 그래서 벨로크는 무식한 칼질 대신 힘 조절을 해야 했다.

간단했다. 튕겨내고 피하는 동시에 휘두르면 끝이었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해냈다. 제일 먼저 닥쳐오는 칼 하나를 막아내고 그 주인의 머리통을 쪼갰다. 이윽고 슬쩍 움직여 가슴께로 들어오는 칼 한 자루를 피하고는 역시나 되갚아주었다.

“꺼어억.”

찌르기의 주인은 상대의 피를 보는 대신 제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털썩. 두 녀석이 쓰러지고 둘이 남았다. 벨로크가 선점할 수 있는 공간이 더 넓어졌다. 그는 더 사납게 움직일 수 있었다.

벨로크의 시선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세 명의 복면인들을 빈틈없이 훑었다. 남은 둘은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제일 덩치가 큰 놈은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꼈는지. 베로니카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흘러가면서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나머지 복면인들의 손목이 잘려 나간 것 역시 한순간이었다.

섬광이 번뜩였고 신체의 일부가 허전해졌음을 느꼈을 뿐이니까.

“끄으으으으!”

“이런 시발! 헬레나여!”

부하들이 바닥을 구를 때. 덩치 큰 복면인은 제 검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그 검으로부터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태양신의 광채였다. 저놈 저거 급하니까 일단 지르고 보는 거 보소.

“나를 살피시옵고, 나를 오롯이 비추는 여신이시여. 부디 나에게 힘을!”

제 정체를 드러낸 복면인. 성당기사단장은 검을 가슴께로 들어 올린 채, 끝없이 기도문을 외웠다. 몸 주위로 빛이 스며들며 힘줄이 비죽 솟았고, 샛노란 역장이 그를 감쌌다. 검 역시도 은빛으로 빛났다. 축복이란 축복은 다 때려 박은 것 같았다.

방안이 요란스럽게 반짝거렸다. 베로니카의 얼굴이 알록달록하게 보였고, 벨로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빛의 당사자인 기사단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내면에서 넘실거리는 힘을 느끼며 소리쳤다.

“네놈들! 이 더러운 배교자들아! 여신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단죄···!”

말하고 있는 그의 앞으로 검 한 자루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벨로크의 양손검이었다. 검 안에 담긴 힘은 대단히 빠르고 강력했다. 하지만 곧 파지직 스파크를 일으키며 보호막에 가로막혔다. 단장은 코웃음을 치고는 제 검을 찌르려고 했다.

“멍청한!”

벨로크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부녀자를 희롱하고 재산을 강탈하는 등. 교리를 무차별로 어기면서도 신들의 힘을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저 기만적인 행위 자체가 싫었다.

모든 것이 차가웠던 회색 도시. 신이란 것이 실재하는지도 확신할 수도 없었던 세상이라면 모를까. 이곳의 신들은 드높은 천상이라 불리우는 저 하늘 위에서 버젓이 눈을 뜨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존재 또한 그 빌어먹을 신들 중에 하나겠지. 혹은 그 이상이거나.

벨로크는 이 짜증스러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쥐고 있는 검에 힘을 더 주었다.

검신이 기기긱 비명을 지르고, 샛노란 역장이 와장창 깨졌다. 기사단장의 검이 가슴을 찌르기 전. 벨로크의 검이 어? 소리를 내고 있는 단장의 어깨뼈를 박살 냈다.

“끄아아아악!”

“닥쳐!”

남들보다 귀가 배는 좋은 벨로크는 비명을 듣는 것 역시 고역이었다. 그래서 단장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짝 후려쳐버렸다.

“컥.”

녀석은 피 섞인 이빨을 컥 뱉더니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죽이지는 않았다. 역시나 교회의 타락을 고발하는 데 도움이 될 훌륭한 증인이었으니까. 베로니카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쭈그려 앉아 단장의 복면을 벗겼다.

금색 머리칼에 턱수염. 중후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 눈이 풀린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베르투라는자다. 로벤 소속 교회들의 성당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실질적인 지휘관이지.”

“생각보다 거물을 잡았군.”

“그래, 이놈이 입을 열기만 한다면 아주 크나큰 파장이 도시를 뒤덮을 거다. 그동안 나를 앞세우고 뒤에서 수작질을 부린 교회의 민낯을 낱낱이 밝혀낼 수 있겠지. 물론 이 자가 입을 연다는 가정이 필요하기는 하다만···”

베로니카는 말을 하다 말고 헉. 소리를 냈다. 그녀는 엉망이 된 제 꼴을 추스를 생각도 못 한 채, 문밖으로 향했다.

“데비안! 데비안이 위험하다!”

두 사람은 다급히 그가 기거하는 방으로 향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한 명은 목 부근에 자상을 다른 한 명은 검날이 복부를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격렬한 싸움이 있었던 것 같았다.

목 근처에 상처가 나 있는 사내가 말했다.

“···아가씨. 벨로크경. 괜찮으십니까?”

“데비안! 너야말로 괜찮으냐”

그는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자신을 덮고 있던 시체를 치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늦게까지 생각에 잠겨있기를 잘했어요. 덕분에 암습을 알아차릴 수 있었거든요.”

데비안이 갑옷을 퉁퉁 두드리며 말했다. 베로니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벨로크 또한 저놈이 완전히 얼치기는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인과 하녀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성문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 또한 들어오지 않았다.

고요했다.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눈치를 까고 튀었다 이거지? 그럼에도 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시체는 대충 바닥에 던져놓고, 일단 포로들부터 손 봤다. 상처를 지혈하고 밧줄로 그들을 꽁꽁 묶었다. 바르투가 꽥 소리 질렀다.

“끄윽. 이··· 빌어먹을 년이···”

“닥쳐라! 이 더러운 비겁자!”

베로니카가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손길이 얼마나 매서웠는지 그는 끽소리 못하고 다시금 기절했다. 세 사람은 묶어놓은 포로들은 각각 다른 방에 구금시켰다. 그리고 방문을 지키며 대화를 나누었다.

“바르투를 사로잡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자는 안톤의 심복 중에 한 사람입니다. 실질적인 행동대장이라 볼 수 있죠.”

“베로니카에게 들었소. 놈의 입을 열게 할 수만 있다면 교회를 고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던데.”

“마법사가 있었더라면 편했을 텐데 말이죠··· 그보다 성내에 있던 교회의 끄나풀들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녀석들 역시 일이 잘 못 되어가는 것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벨로크는 데비안을 슬쩍 바라보며 떠보듯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데비안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눈동자를 굳혔다. 그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저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베로니카가 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디를 간단 말이냐? 암살 시도가 실패한 것을 알았으니 놈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 어쩌면 군대를 이끌고 그냥 덤벼들 수도 있어.”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적들이 군대를 이끌고 덤벼온다면 이쪽 역시 군대가 필요하니까요.”

그는 방문을 열더니 끙끙거리고 있는 포로 한 명을 끌고 왔다. 데비안은 목줄을 잡은 채, 말했다.

“이 자는 찰스입니다. 교회의 정문 경비를 맡고 있던 기사로 주민들에게 얼굴이 잘 알려진 자 이기도 하죠. 이 자를 데려가겠습니다. 데리고 가서 교회와 공작 놈들이 해체시켰던 로벤의 군인들에게 보여주겠습니다. 이들이 뒤에서 부린 수작질을 듣는다면, 그리고 상황이 저희한테 유리하단 것을 안다면 그들은 다시금 베로니카님에게로 모여들 겁니다. 억압받아왔던 분노를 풀기 위해 오랫동안 모셔왔던 정당한 지배자를 위해 기꺼이 무기를 들 겁니다.”

정말 데비안의 말대로 될 수도 있었다. 혹은 개소리하지 말라며 쫓겨날 수도 있었다. 도박이었다. 베로니카가 걱정스런 시선을 던졌다.

“바깥은 위험할 거다. 흩어졌던 교회의 눈들이 이 성을 감시하고 있을 터. 게다가··· 놈들이 먼저 수를 쓴다면 넌 죽은 목숨이다.”

“안톤의 아래에 모여있기는 하지만 놈들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세력이 모여서 결성된 연합입니다. 틀림없이 의견 다툼이 있을 겁니다. 그 틈을 노려 재빨리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이제야 좀 기사답군. 벨로크는 베로니카의 어깨를 감싸며 피식 웃었다.

“베로니카는 내가 지킬 테니 당신은 꼭 당신의 임무를 완수하기를 바라오. 무운을 빌겠소. 데비안.”

“맡겨만 주십시오.”

갈색 머리의 젊은 기사는 눈동자를 결연하게 빛냈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포로를 끌고 성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벨로크가 아직까지 제 품에 안겨있는 베로니카를 보았다. 그가 물었다.

“베로니카.”

“으, 응? 왜 그러느냐?”

“이 성에서 제일 은밀한 방이 어디요? 그 누구의 눈도 닿지 않는, 우리 둘만이 있을 수 있는 그런 공간 말이요.”

전투를 앞두고 데비안이 떠난 지가 불과 조금 전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베로니카는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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