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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26화 (12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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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벤

“다들 머리가 굳은 것이오? 생각을 좀 해보시오. 내가 여기서 가란을 죽였다면 바깥에 있는 교회와 놈의 부하들이 어떻게 반응했겠소? 우리 셋은 분노한 병사들 수백 명의 칼날을 받았을 것이오. 게다가···”

벨로크가 말을 이으려고 할 때. 곰곰이 생각하던 베로니카가 손뼉을 짝 쳤다.

“바깥의 숲속에는 베이츠와 칸티오의 군대가 있다. 가란의 군대가 밖으로 나갔으니 필히 녀석들하고 마주치겠구나. 내부의 간자를 없애는 동시에 영주들의 세력 역시 줄일 수 있어.”

데비안 또한 머리를 흔들더니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가란이 저렇게 떠났으니 교회와의 관계 역시 틀어지겠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경!”

감탄한 데비안이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볼 때. 베로니카는 미안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벨로크. 너한테 있어서 게오르그는 철천지 원수가 아니더냐? 그리고 가란은 그의 심복이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응당 그를 죽이고 싶었을 텐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다가 말했다.

“우리를 위해서 네가 너무 희생한 것이 아니냐?”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첫째는 지금 제 코가 석 자인데도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가 우스워서였고, 둘째는 그녀의 착각 때문이었다. 독기가 가득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순둥해서야. 그가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내가 가란을 살려서 공작에게 보낸 것은 비단 당신들을 위해서만이 아니요. 공작의 정신을 헤집기 위해서요.”

“정신을?”

벨로크는 조금 뜸을 들였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아서 멋쩍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실력을 가진 암살자가 한 명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베로니카 당신은 한순간에 그 암살자의 표적이 되었소. 당신은 그자의 솜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실제로 겪어봤거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경비를 강화하든 신비한 힘을 지닌 마법사를 초빙하든 담벼락을 더 높게 쌓든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렇소. 수를 짜내야지. 하지만 주변 상황은 따라주지를 않소.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승냥이 떼들이 당신을 정신없이 물어뜯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한 상황에서 암살자에 대한 걱정까지 더해진다고 생각해보시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머리가 터지지 않겠소? 게다가 대책을 마련한다 해도 문제요. 그 암살자가 정말로 찾아오든 찾아오지 않든 당신은 전쟁에 사용하기도 벅찬 인력과 자금을 쓸데없이 소모하게 되는 것이오.”

듣고 있던 베로니카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크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너와 게오르그 간의 얘기구나. 헌대 마지막 그 말은···?”

벨로크는 다시 한번 더 웃었다. 마치 계략을 짜내고 뿌듯해하는 악동 같은 미소였다.

“나는 당장에 공작을 치러 갈 생각이 없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수도까지 가는 것도 오래 걸릴뿐더러··· 녀석에 대해 신경 쓰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기 때문이오.”

자신이 내면속에 있는 정체불명의 힘. 시스템 창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현재 벨로크에게 있어서는 제일 시급한 문제였다. 놈은 그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재난 같은 존재였으니까. 어떻게든 녀석에 대해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동료들. 마지막이 공작에 대한 복수였다.

벨로크에게 있어 현재 공작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딱 그 정도였다. 어쩌면 자신이 이 일을 해결하고 놈한테 가는 동안 다른 영주들에 의해 목이 매달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쯤 찾아올지 모를 암살자에 끙끙 앓다가 병이 날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가란 하나와 수백 명의 병사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지였다.

“그렇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너의 말을 믿든 믿지 않든 대비를 할 수밖에 없어.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벨로크 너는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어왔던 것이냐···”

베로니카는 한 수 배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비안의 눈동자는 이제 빛나는 것을 넘어 광선이 나올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뒤로한 채, 벨로크가 말했다.

“몸을 움직였더니 배가 고프군. 요깃거리는 없소?”

“기, 기다리거라! 내 금방 차려줄 터이니.”

“아가씨! 제가 할게요!”

“영주님이다! 이 멍청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베로니카와 데비안을 보며 벨로크는 생각했다. 가란의 군대가 떠났으니 이제 영내에 남은 것은 교회뿐이다. 놈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

#

해가 지평선 너머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분주하던 항구가 서서히 정지하고, 등대에 불이 켜졌다. 벽돌집의 굴뚝에서도 모락모락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스름한 땅거미가 안개 퍼지듯 내려앉은 도시 안. 미약하게 떨어지는 붉은 빛들이 올곧이 솟아있는 신의 증표들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런 십자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건물들 중에 한 곳. 걸려있는 상징의 크기가 제일 컸으며 건물의 높이 역시 가장 큰, 증축에 증축을 거쳐 완공된 건물. 그곳에 사는 자들끼리는 속된 말로 로벤 대교회라고 부르는 예배당에서는 새하얀 법복을 입은 자들끼리의 대화가 한창 이었다.

“어떻게 일을 이렇게 처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가란. 그자가 단단히 미친게지요. 단원들에게 듣기로 베로니카 그년 역시 멀쩡히 살아있답니다.”

“이건 약조하고 틀리지 않습니까? 함께 외적에 맞서 도시를 수호하고 악에 물든 더러운 창부를 끌어내려야 하건만···”

“수도 대교회에 연락을 취해야겠습니다. 게오르그 그자가 우리들과의 동맹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면 무슨 답변을 내놓겠지요.”

태양과 정의의 여신 헬레나, 달과 믿음의 여신 셀레네, 그 밖에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는 각양각색의 신들을 믿는 사제들이 하나같이 열변을 토했다. 그들은 이 로벤 땅의 지주들이었다. 정확히는 지주가 될 자들이었다. 일단 어린 영주를 끌어내리고 이 땅을 완전히 통제해야 그들의 목표를 이룰 수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는 수도 대교회와 게오르그 공작 간의 약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몇 달 전. 아드리아 왕국에 강림한 대악마와의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이 각자의 목표를 위해서 움직일 때. 세력이 가장 컸던 것은 역시나 공작과 대교회들이었다. 대교회들로서는 공작과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웠고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둘은 손을 잡았다.

공작은 자신의 권위와 명예, 권력을 드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왕관을 원했고, 교회는 그로부터 파생되어 오는 갖은 이권들을 탐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중앙과 지방 영주들 간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종교쟁이들은 수를 썼다.

평소라면 인정하지도 않았을 작은 종파들을 끌어들이고 땅을 준다는 약조와 함께 교회의 영향력이 큰 도시들로 파견한 것이다. 어떻게든 그 지역의 토착 영주들을 끌어내리고 한창 내전을 이어나가고 있는 귀족파의 세력에 혼란을 야기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떨어져 나간 종파들도 있었지만 받아들인 종파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평범한 종교집단이 아니게 되었다. 금화를 써서 용병들을 고용하고 그들에게 십자가 문양이 찍힌 옷과 면죄부를 사하자 교단의 군대가 탄생했다. 여기에 신성 주문을 다루는 성기사와 사제들까지 더해지자 자못 위험한 세력이 되었다.

신의 말씀을 설파하고 약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할 자들이 탐욕스러운 무장집단이 된 것이다. 그리도 현재 로벤에서 이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수염이 성성한 백발의 노인네였다.

안톤.

벨로크가 산양 머리의 악마를 무찔렀을 때. 모습을 나타냈었던 로벤 땅의 토박이이자 수석 사제.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어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가란. 그자는 그만한 대가를 치를 것이오.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상석에 앉아있는 안톤의 말에 사제들의 웅성거림이 줄어들었다. 그의 권력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성기사 갑옷을 입고 있는 사내가 답했다. 교회 소속 성당 기사들의 우두머리였다.

“가란의 군대가 빠져나갔기에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베이츠와 칸티오는 아직 습격을 가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낮에 있었던 가란의 탈주에 그들 역시 큰 동요를 받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계획했던 대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안톤이 주름진 눈을 빛냈다. 눈동자마저 유리알처럼 번뜩이는 게 마치 뱀처럼 보였다.

“거사를 일으키자 그 말이군.”

성당 기사는 군사적인 식견을 내었다.

“베이츠와 칸티오는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습격을 해올 것입니다. 가란의 군대가 빠졌으니 어쩌면 성문이 뚫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끝이지요. 그러니까 하루빨리 영주를 끌어내리고 저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성주의 명으로 소집령을 내리고 시민들을 무장 시켜 중앙으로부터 지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안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의 말이 맞소. 지금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곱씹으며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요. 미래를 대비하고 움직여야 할 때지. 지금 바로 병사들을 준비시켜야겠군.”

성당 기사가 만류했다.

“수석 사제. 병사들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상대는 단둘 입니다. 그것도 정식기사라고 부르기도 힘든 크다만 놈 하나에 독기 품은 여인 한 명이죠. 괜히 군사를 일으켜 시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하거나 베로니카 그년의 추종자들을 자극할 필요 없습니다. 조용히 처리하시죠. 솜씨 좋은 애들을 몇 보내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제 한 명이 의견을 냈다.

“단장. 단둘이 아니오. 내 듣기로 그년에게 웬 자유기사 한 놈이 들러붙었다고 하오. 맨손으로 바깥 영주들의 군대를 박살 낸 괴물 같은 전사라고 하던데.”

성기사단장은 허허 웃었다. 그는 칼잡이들의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보나마나 와전 되었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안톤의 뱀 같은 눈과 마주했다. 평소에는 인자한 척 웃고는 있지만 음흉한 속내를 한가득 품고 있는 노인네. 기사단장은 목 뒤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단원들을 데리고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밤이 깊는 대로 출발할 터이니. 여러분들은 입담이 좋은 자들을 준비해 주십시오. 내일 날이 밝으면 여론을 잠재워야 할 테니까요.”

기사단장이 칼집을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안톤은 차갑게 웃었다. 그는 슬쩍 손을 움직여 탁자 위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렸다.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잔 안에 향기로운 술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모두 다 그가 이뤄낸 것이었다. 낡은 주석 잔에서 이런 사치품을 손에 쥐게 된 것. 이 땅을 뒤에서 조종하는 우두머리가 된 것. 그리고··· 이제는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의 머릿속으로 푸른 머리에 눈 밑의 점을 가진 여인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1년 전 웬 검은 머리칼의 기사와 했던 약조까지도. 하지만 안톤은 그런 하찮은 기억 따위 진작에 날려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권력을 원했다. 더 강한 힘을 원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 발아래 무릎 꿇기를 바랬다. 그의 마음속에서 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베로니카. 이제 그만. 편해지는 것이 어떠냐?”

차가운 미소를 노인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달빛마저 집어삼킨 야밤의 날씨가 그를 축복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클클 웃고 있는 바로 그 시각. 벨로크는 여전히 집무실에 앉아 하얀 밀빵과 스프를 떠먹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베로니카도 스프를 먹었고 데비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청년기사는 입가를 우물거리며 야채를 씹다가 벨로크를 보며 물었다.

“저. 경.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벨로크는 수저를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데비안을 바라보았다. 구불거리는 짧은 갈색 머리에 젖살조차 안 빠진 얼굴. 몸은 그럭저럭 단련되어있기는 한대 그가 보기에는 어린아이였다. 그렇다고 해도···

“데비안.”

그가 부르자 데비안은 눈을 빛내며 외쳤다.

“네! 경!”

“당신은 기사요. 그렇지 않소?”

데비안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수십 척의 범선과 황금 곡괭이의 주인.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 베로니카님으로부터 기사서임을 받았지요.”

“맞소. 당신은 기사요. 주인을 위해 기꺼이 검을 들 수 있어야 하며 전장의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지휘관이오. 그렇다면 묻겠소.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이 행동이 정녕 기사에게 어울리는 행동이라 보시오?”

“그건···”

데비안이 말끝을 흐리자 벨로크의 검은 두 눈이 그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마치 꾸짖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말했다.

“물론 당신은 어리지. 게다가 종자 생활을 하는 도중 모시던 주인이 죽었다고 들었소. 많은 것이 부족하겠지. 못 배운 것도 많을 테고. 허나 그것은 변명거리가 되지 못하오. 당신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적군들은 그걸 신경 써줄 리가 없거든. 오히려 좋아할 뿐이지.”

고개를 푹 숙이며 귓바퀴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데비안을 향해 벨로크가 말을 이었다.

“베로니카를 지킨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게 스스로에게 맹세함으로써 검을 뽑아 든 것 아니냐는 말이요.”

“···”

“그렇다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오. 계속해서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으시오. 당신 자신의 삶을 남한테 의지하려 들지 말라는 말이오. 내가 오기 전까지 그렇게 살아왔지 않소.”

“죄송합니다. 경.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데비안은 변명을 내뱉는 대신 자리에서 턱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베로니카는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벨로크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입을 열 수 없었다.

전부 다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남한테 의지하기만 해서는 절대로 발전할 수가 없다. 뭐가 됐든 자신 스스로가 헤쳐나가야 했다. 그래야 그 이상의 것을 해낼 수 있다.

그녀 역시 고개를 숙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 들 때. 벨로크는 수저를 내려놓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하녀의 안내를 받아 침실로 들어갔다.

이제 귀찮게 안 하겠지?

그는 갑옷을 벗고 검을 벽에 기대어두었다. 곧이어 양초 불을 끄고 두툼한 솜이불이 깔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 순간이었다.

벨로크의 오감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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