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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25화 (12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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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벤

가란은 피 흘리는 손을 부여잡을 생각도 못 한 채,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에 분노나 고통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허탈함만이 가득했다.

첫째는 저 괴물 같은 사내와의 격차를 다시 한번 느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저자가 돌아왔으니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대해서 예견했기 때문이다.

가란은 목에 칼이 드리워진 상태로 허허 웃었다. 목덜미가 베이며 피가 주륵 흘러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불충한 말이기는 하나 나의 왕께서는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하셨어.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용의 역린을 건드려 버리다니 말이야. 하하··· 언제까지나 창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거늘···”

허탈하게 웃은 그는 벨로크를 향해 물었다.

“아직까지 내 목을 치지 않은 이유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것과 연관된 것이겠지. 그게 뭔가?”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겠소.”

가란은 고개를 내저으며 결연한 눈빛을 보내었다.

“첩자 노릇이라면 사양하겠네. 나의 주군이 자네들한테 몹쓸 짓을 한 것도 맞고, 내가 그 명령을 따른 것 또한 사실이네. 충실한 개새끼지. 하지만 그 개새끼한테도 나름의 신념이 있지. 주인을 물 수는 없네.”

줏대 있는 개새끼로군.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 역시 가란한테서 뭔가 대단한 정보를 얻어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손아귀가 찢겨나갔음에도 비명 하나 안 지른 사내다. 육체적인 고문은 힘들 터. 혹여 그렇게 해서 얻어낸 정보라도 그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마법사인 카라가 곁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벨로크는 원래 계획했던 대로 생각해두었던 말을 던졌다.

“공작은 잘 살아있소?”

“···느닷없이 안부를 여쭙는 건가?”

가란은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벨로크의 표정이 진지했기에 그는 곧 입술을 달싹였다.

“살아는 계시지. 다만 자네들이 포탈주문으로 도망치기 전. 자네의 동료. 성기사가 일으킨 폭발에 의해 몸에 화상을 좀 입으셨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리 치료해도 그 흉터가 지워지지가 않더군. 게다가··· 동맹인 대교회들을 달래거나 견제해야 하는 것은 물론, 중앙과 지방 귀족들과 동시에 싸워나가야 해서 골머리를 썩고 계시지. 요 몇 달 사이 한 10년은 늙으셨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별다른 비밀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왕좌를 차지하지 않고 북부 관문에 그대로 계셨더라면··· 주군에게는 그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 거야.”

가란은 일견 불충해 보였으나 진정으로 상관을 아끼기에 나오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람···”

“벨로크?”

난데없이 칼부림이 일어나고 이제는 또 두 사람끼리 대화를 나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안면이 있는 듯싶었다. 데비안과 베로니카는 의문을 표시했지만 두 사람은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살아는 있는데.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거로군. 삼킬 수 없는 먹잇감을 집어먹고 탈이 난 구렁이처럼. 조금 더 괴롭혀 볼까?

잠깐의 생각을 마친 그는 가란의 목에 겨누었던 검을 척 거두었다. 그러자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중에서 제일 당황한 사람. 가란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이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에 대해서 말하겠소. 말을 좀 전하시오.”

가란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있던 그의 혀는 재빨리 움직였다.

“누구에게?”

“공작. 구원자이자 왕. 혹은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고 있을 뿐인 다 죽어가는 늙은이.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고 등 뒤에서 칼을 꽂으려 든 비겁자에게 나의 전언을 전하란 말이오.”

벨로크의 모욕적인 언사에 가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표정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는 나의 주군을 모욕하지 말라! 라고 외치며 덤벼들 정도로 머리가 뜨겁지도 않았다.

어릴 때부터 교육받고 지켜온 그 나름의 기사도와 신념 역시 이렇게 외쳤다. 첩자 노릇은 주군을 배신하며 기만하는 행위니 못한다 쳐도 전언 정도야 전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이면에는 저 전사에 대한 공포심과 생에 대한 집착이 깔려있었다.

가란의 심장 고동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초월적인 오감으로 이를 듣고 있던 벨로크는 자신의 전언을 밝혔다.

“당신이 선물해준 비수는 잘 받았소. 이에 대한 보답으로 나 역시 같은 선물을 준비해주겠소. 부디 거부하지 마시고 침실에 누워 다가올 그 날을 기다려 주길 바라오.”

높낮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가 귓가로 쏘아져 왔다. 가란은 흠칫 몸을 떨었다. 담겨있는 내용이 명확했으니까.

“게오르그님을 죽이겠다는 선포로군. 암살 선언인가?”

얼어붙어 있는 기사를 보며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가란의 앞에 휙 쪼그려 앉고는 데비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뭔가를 달라는 제스처였다.

어?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순진한 청년 기사가 어버버 거릴 때. 옆에 있던 베로니카가 나섰다.

그녀는 데비안을 확 밀치고는 제품에서 칼 한 자루를 꺼내 벨로크에게 건네주었다. 단도였다. 새꺄. 넌 어디 가서 기사라고 하지 마라.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아···”

멀뚱하게 얼굴을 긁적이는 데비안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단검을 매만졌다. 시퍼런 날이 서 있기는 했지만, 칼날이 아주 짧았다.

자세히 보니 은장도였다. 아마도 베로니카가 그녀 자신을 위해서 준비한 물건일 것이다. 은장도는 귀족가의 여식이 호신 및 자결용으로 하나씩 구비해두고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뭐, 날만 있으면 되지. 벨로크는 손에 들린 단도를 휙휙 돌리면서 가란에게 말했다.

“암살선언?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허나 무얼 선택하든 그것은 내 마음이오. 복수에 대한 권리는 그 당사자에게 있는 법이니까. 나는 당신 상관의 침실에 몰래 침입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도 있소. 아니면 당신들과 대착점에 있는 귀족의 밑으로 들어가 전장의 선봉에 설 수도 있겠지. 무얼 선택하든 대악마의 본거지로 쳐들어가서 녀석의 목을 베어내는 것보다는 쉬운 일인 것 같은데.”

수천 마리의 괴물 군세를 뚫고 웬 요상한 세계로 들어가 용과 드잡이질을 했다. 그다음에는 마녀들의 소굴로 쳐들어가 인간 전사 수십은 단신으로 격파하는 악마들과 싸우고, 불을 뿜어내는 거인마저 죽였다.

이에 비한다면 왕이라고 꺼드럭대고 있는 권력자. 주변과의 전쟁으로 인해 정신없어 보이는 인간 하나를 죽이는 것은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지막하게 웃었다.

물론, 가란이나 베로니카 데비안이 느끼기에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매서운 위협이었다. 가란은 십수년간 전쟁을 겪으며 단련되어온 자신의 손끝이 벌벌 떨리는 것을 발견했다.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던 본능적인 공포였다. 그는 그것을 숨기려 애쓰면서 말했다.

“···말만 전해주면 되는 건가?”

“여기에 있는 당신 부하들. 전부 다 데리고 가시오. 뭐, 내 손에 죽기를 바란다면 남겨두고 가도 좋소.”

본래 가란의 목적은 끌고 온 수백 명의 정병을 이용해 교회를 도와 이 로벤 땅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우선 바깥에서 침략해온 베이츠와 칸티오의 군대를 섬멸하고 그들의 땅을 점령한다. 그리고 반항적인 영주 베로니카를 끌어내리고 괜찮은 대리자를 위에 앉힌 뒤. 항구도시이자 왕국의 최남단인 로벤의 이점을 살려 귀족파 군대의 후방을 교란할 생각이었다.

중요한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공작의 측근이자 기사단 고문인 그가 직접 왔다. 어쩌면 이번 작전으로 인해 전세를 확 뒤집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사내가 나타남으로써 인해 이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교회와 자신의 부하들이 전부 다 덤벼든다? 시체 수백이 쌓일 뿐이었다. 그는 충분히 그 정도의 역량을 가진 전사이자 단신으로 전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사내였다. 여기에서 가란이 할 수 있는 것 또한 정해져 있었다. 어서 이 사실을 주군에게 알려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이 땅에 뿌리내린 교회들은 크게 반발할 것이다. 어쩌면 이번 일로 애써 맺어놓은 동맹의 근간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을 따져보아도 저 기사가 주군의 침실로 드나드는 것이 더 위험해 보였다. 대비해야 한다. 가란의 머릿속에는 지금 이 생각뿐이었다. 그는 쓰디쓴 입맛을 삼키며 말했다.

“그리하리다··· 당장에 떠나겠소.”

“말이 통해서 좋군. 다만 그 전에··· 정산은 해야겠지.”

벨로크는 은장도를 들어 올리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칼라.”

끄에에에엑!

그러자 유령의 귀곡성 함께 단도의 시퍼런 칼날에 지독한 한기가 서렸다. 그 정체불명의 광경에 가란이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데비안과 베로니카 또한 뒷걸음질 쳤다. 벨로크는 망령의 원한이 서린 은장도를 잠깐 바라보다가 그것을 가란의 허벅지에 냅다 꽂았다. 푹.

“끅! 끄아아아악!”

가란은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상처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냥 작은 생채기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기가 지독했다. 가란의 머릿속은 망령이 중얼거리고 있는 저주의 말로 가득 찼으며 이는 곧 그의 정신력을 순식간에 깎아내렸다. 위풍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던 기사는 그 잠깐 사이에 썩은 고목처럼 폭삭 말라비틀어졌다.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가란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단도를 거두었다. 망령의 힘 또한 거두어들였다. 그가 말했다.

“내 친구들에게 칼을 휘두른 핏값은 이걸로 대신하겠소. 가시오. 어서 떠나서 공작에게 내 전언을 전하시오. 침실에서 잘려있는 공작의 목을 발견하고 싶지 않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거요.”

여전히 시큰둥한 어조였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가란은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곧 성이 우당탕 흔들리고 당황 섞인 목소리, 욕설, 누군가의 항의 등. 각양각색의 소음이 들려왔다. 벨로크의 귓가에는 그것이 들렸다. 잠시 후. 커튼이 쳐져 있는 집무실의 창문 사이로 말을 타고 있는 가란과 그 뒤를 따르는 수백 명의 기수들이 보였다. 많이도 왔네. 아주 작정을 했었군.

-가란경!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오? 베이츠와 칸티오를 치러 가는 것이오? 베로니카는?

-비키시오.

-그게 무슨 말이요? 무언가 설명을 해줘야 할 거 아니요?

-그가 돌아왔소. 당신도 살고 싶다면 어서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이오.

-뭐? 그게 무슨···

-난 할 말 다 했소. 이럇!

히히히히힝

당황하는 노인의 목소리와 전투마의 우렁찬 포효, 말발굽 소리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커튼을 쳤다. 두터운 모직으로 된 장막이 스르르 움직이며 집무실을 어둡게 물들였다. 그러나 촘촘히 짜여있는 모직포 너머로도 빛은 투과해왔으며 그 아래에 서 있는 벨로크를 희미하게 비추었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카였다. 그녀의 심장은 어쩐지 거칠게 맥동하고 있었다. 얼굴 역시 조금 빨간 듯 했다. 가문의 원수 하나를 처리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벨로크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베로니카는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잘 썼소.”

벨로크는 그녀에게 은장도를 건네었다. 저주가 잠깐 서리긴 했었지만, 힘을 거두어들이니 다시 멀쩡한 단도로 돌아왔다. 괜찮을 것이다.

“그, 그래···”

베로니카는 양손으로 그의 손을 느릿하게 쓰다듬으며 조심히 단도를 빼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이 벌어져서 당황한 듯했다. 벨로크의 무력에 대해서 찬양하고 그를 칭송하기에도 조금 애매했다.

그가 휘두른 요상한 사술을 눈으로 목격한 탓이다. 마지막으로 창가 아래에 서 있던 그의 모습에 베로니카는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그래서 데비안이 대신 나섰다. 그래도 칼밥 좀 먹었다고 정신을 차리는 게 빨랐다. 그는 입을 헤 벌리며 말했다.

“제가 대체 뭘 본 건지 모르겠군요. 그래도 가란은 왕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한 명인데··· 몸놀림은 짐승처럼 날래고 그 힘은 곰을 웃돈다고들 하죠. 그런 대단한 전사를 단 한 방에···”

노골적으로 자신을 칭찬하자 벨로크는 어쩐지 멋쩍어졌다. 그래서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데비안은 쉴 틈 업이 질문을 던졌다.

“벨로크경. 가란과는 아는 사이셨습니까?”

“옛날에 그의 상관하고 일이 좀 있었소. 악연이었지.”

“경. 방금 사용하신 그 사술··· 아니, 그 힘은 대체··· 참 소름 끼치지만 굉장한 능력입니다. 무슨 주문을 사용하신 건가요? 마검사 십니까?”

“참. 경. 정신이 없어서 묻지는 못했습니다만, 1년 전. 경의 옆에 계시던 여자 기사분. 아델경? 인가요? 그분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아까 전의 대화로 생각건대 게오르그 공작에게 큰 화를 당하신 것 같은데요.”

“경. 가란이 정말 떠났을까요? 야음을 틈타 밤에 기습을 해오지는 않을까요?”

“경. 이제 교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리고 칸티오와 베이츠 또한 걱정이네요.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놈들도 분명 가란과 그 부하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봤을 텐데요.”

“경. 정말 게오르그 공작을 죽이러 가시는 겁니까? 혼자서요? 아. 경의 실력에 대해서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놀라워서요.”

말 개 많네. 이놈 이거 입에 모터가 달렸나. 점점 이 청년기사에 대한 첫인상이 안 좋게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어서 대충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데비안의 마지막 의문점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눈이 진지해지기도 했고, 베로니카 또한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경. 마지막으로··· 가란은 대체 왜 살려서 보내신 겁니까? 물론, 결투의 승자는 경이기에 주제넘은 참견일 수도 있습니다만··· 후환을 생각하신다면 여기서 처리해버리시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이 사실이 공작의 귀에 들어간다면 놈 역시 대비를 할 텐데요.”

그래, 왜 안 물어보나 했다.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갔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귀족 군대에 의해 정신이 없는 게오르그 공작. 이제는 자신과 연관 점이 생겨버린 데비안과 베로니카. 가란과 그의 부하들. 벨로크가 말했다.

“죽여서 입을 틀어막는 것보다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을 뿐이오.”

“네?”

의아해하는 두 사람을 향해 벨로크가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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