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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벤
가란. 게오르그 공작의 친위대. 여명 기사단의 고문을 맡고있는 기사. 마귀왕의 성. 사방이 불타고 있던 거인들의 마을에서 처음으로 마주했고, 공작과의 만남을 위해 안내를 자처했었던 사내. 벨로크의 머릿속에서 가란에 대해 떠오르는 기억은 딱 이 정도였다.
그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베로니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벨로크를 슬쩍 바라보고는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기다리시오!”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이오? 베로니카공. 아니, 로벤 영주. 내 누누이 말했지만 이대로 있다가 당신한테 남는 것은 파멸뿐이오. 갖은 조롱과 모욕을 받으며 죽느니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지 않겠소? 부디 미래를 생각하시오. 당신의 명예 또한.”
가란은 ‘그럼 응접실에서 기다리겠소. 난 오늘 꼭 답변을 들어야겠으니 준비가 되면 불러주시구려.’라고 말하고는 뚜벅 발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베로니카는 굳었던 표정 그대로 입가만 움직였다.
“명예? 미래? 나한테서 그 모든 것들을 뺏어간 새끼들이 잘도 지껄여대는군···”
그녀가 쿵 의자를 칠 때. 데비안은 문가에 귀를 대고 바깥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기사놈이 취할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요정을 넘나드는 청력으로 하인과 가란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벨로크가 고갯짓했다. 설명을 해보라는 뜻이었다. 데비안은 여전히 문가에 기대어 있었고 베로니카는 후 한숨을 내쉬고는 얼굴을 쓸었다.
“이 땅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녀석들이 나를 허수아비 영주로 세워두었었다고 말했었지?”
“그렇소.”
“놈들은 이제 한 발 더 내딛기를 원하고 있다. 세워둔 허수아비마저 끌어내리고 온전히 이 땅을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어.”
“굳이 당신을 살려두는 번거로운 짓까지 해가며 이 난리를 피웠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바꾸려 드는군.”
벨로크의 차가운 말에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반항적인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거나 중앙에서 싸우고 있는 공작과 교회들의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거겠지. 게다가···”
그녀는 말끝을 흐리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사방에서 괴물들이 넘쳐나다 보니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반면에 악마에 의해 더럽혀졌던··· 현재는 성에 틀어박혀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는 영주에 대한 민심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지. 이러한 상황이 몇 달만 지속된다면 굳이 교회나 공작이 나설 것도 없이 시민들의 봉기에 의해 나는 교수대로 끌려갈 것이다. 가란. 그자가 나를 찾아오는 이유 또한 그것이다.”
“더러운 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면 제 발로 내려오라 이거로군.”
베로니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뭉개진 자존심과 더불어 한 때 약혼자였던, 여전히 사랑하는 사내에게 이 사실이 적나라하게 밝혀지는 것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 녀석들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이 영지를 상속받기를 원한다. 나 스스로가 영주좌에서 내려와 나 자신의 의지로 이 땅을 교회에 환원한다면 놈들로서는 그것만큼 바라는 게 없을 터.”
듣고 있던 데비안 또한 조용히 말했다.
“무장을 해제당한 병사나 하사관, 배를 가지고 있는 선장들이나 그냥 시민 등. 로벤에는 아직까지 영주님을 지지하는 보수적인 자들이 많이 남아있거든요. 이들과의 마찰을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명분 또한 저쪽에서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그 대신 목숨을 살려주고 낯선 땅에서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여비를 주겠다는 거죠. 물론, 그 돈들은 전부 다 이 로벤에서 나온 겁니다.”
빼앗았을 땐 언제고 이제는 선심 쓴다는 듯이 일부만 돌려준다라. 빡칠 만 하군. 벨로크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에게 따먹힌 년.
-악마에게 영혼을 판 창부.
-나라가 어지럽고, 영지마저 혼란스러운데. 아무것도 안 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 년.
더러운 소문을 퍼트려 그녀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행동을 강제하고, 이제는 그 자리마저 찬탈하려 하고 있었다. 공작은 충분히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내였다.
일행의 뒷통수를 친 것도 그렇고 이쪽 세계의 귀족에게 있어서 권모술수는 필수 덕목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교회마저 이럴 줄은.
이 새끼들. 게오르그와 손을 잡고 세속적인 일에 끼어들 때부터 느낀 것이기는 한데. 썩어빠져도 너무 썩어빠졌다.
이렇게 행동해도 정말 그들이 믿고 있는 신들로부터 아무런 제재가 없다는 말인가? 여전히 빛의 힘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축복하고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되어 먹은 시스템이지? 네놈들은 대체 하는 게 뭐냐?
그냥 무관심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 세상에 힘을 끼칠 수 없는 어떠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신들에 대한 부정과 의심을 품고 있던 벨로크의 생각은 곧 다른 곳으로 이어졌다. 그가 악마 바호메트를 처리했을 때. 성기사들과 사제들을 끌고 지원을 왔었던 이 땅의 수석 사제 안톤.
흰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던 이 영감은 자신이 영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분명 베로니카를 잘 돌보아 주겠다고 맹세했었다. 헌대 이건 돌보아준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좋은 옷과 음식. 자리를 주면 무엇하겠는가. 실속도 없이 텅 비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데.
아니, 쓸모는 있지. 적어도 길거리에 나앉아 비참한 생활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신을 부르짖은 사제가 상처받은 여인을 마음대로 이용한 것에 대한 면죄부는 되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벨로크가 결심을 굳혀갈 때. 앉아있던 베로니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 그를 힐끔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푸른 눈을 슬며시 감았다.
“아무튼 벨로크···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들어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너한테 검을 휘두른 것. 모진 소리를 내뱉은 것. 모두 말이다. 따지고 본다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도 더 지독한 꼴을 당하지 않은 것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준 것도 이 모든 것들이 네 덕분인데 말이다.”
그녀는 피곤한 얼굴을 애써 펴 보이며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안에 담겨있는 뜻은 명확했다. 침몰하는 배 안에 같이 타고 있다가 익사하지 말고, 떠나라는 뜻이었다.
데비안은 그런 영주를 바라보며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눈짓하자 입을 꾹 닫았다. 결심이 섰다. 벨로크는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군.”
“북? 장구? 뭐, 뭐라고요? 아니, 그보다 벨로크경! 그 말씀은!”
“데비안! 그 입 다물라!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가란. 그자가 얼마나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지! 벨로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놈 또한 왕국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이다!”
데비안이 반색하자 베로니카가 호통쳤다. 그녀는 이제 어지럽던 마음을 다 정리한 후였다. 벨로크가 괜히 개죽음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데비안이 말했다.
“하지만 아가, 아니, 영주님! 저희는 지금 바람 앞에 놓인 촛불 신세입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다 이용하고 어떻게든 살 방도를 마련해야지요. 제가 도망치자고 건의해도 영주님은 듣지도 않으실 거잖아요!”
베로니카가 포기하자 이제는 데비안이 난리였다. 그 말을 듣고 울컥한 베로니카가 또 소리 지르고 집무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바깥으로는 베이츠와 칸티오. 내부에서는 교회와 공작의 부하들이 이 영지를 노리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우선 숫자를 하나 줄여야겠군.”
“예?”
“응?”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벨로크가 고갯짓했다.
“가란을 부르시오. 놈하고 담판을 짓겠소.”
“그게 무슨···”
베로니카가 말끝을 흐렸다.
무슨 담판을 짓겠다는 말인가? 그것도 휘하에 수백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있는 왕국 최고의 기사하고 말이다. 물론, 벨로크 역시 체구가 강대하고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자유 기사처럼 보였다.
종자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떠돌이. 1년 전의 그 실력과 상단의 증언이 있었다고 해도··· 데비안 또한 이를 느낀 것인지 만류의 말을 내뱉었다.
“어, 경. 저는 절대 경의 실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요··· 경이 도와주신다니 감사하기는 한대 그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이 좁은 집무실에서 결투라도 할 생각은 아닐 텐데? 두 사람이 꾸물거리고만 있자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들이 들은 것은 맨손으로 도적단을 분쇄했네, 1년 전에 악마를 죽였네 같은 이야기뿐이었다. 그냥 내가 나가서 처리할까? 그렇게 생각할 때. 다시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가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인의 목소리에 이어 가란의 목소리 또한 울려 퍼졌다.
“영주. 내 응접실에 있는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소. 자유기사 한 명을 성으로 초대하셨다지? 설마하니 지금 그자를 믿고 이리 뻗대고 있는 것이오?”
기가차다는 듯한 웃음소리 덕분에 문밖에 있을 가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절로 상상이 되었다. 베로니카는 다시 한번 시간을 끌려고 했지만 가란은 이번에 참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고명한 기사이기에 그러는 것이오? 한 사람의 무인이자 전사로서 호기심이 동하는군. 어디 낯짝이나 한 번 구경해봅시다.”
문이 열리고 가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칼에 턱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 기사였다.
“무엄하오! 어찌 이런 행패질이요!”
“영주님의 허락도 없이 집무실까지 들어오시다니. 이건 엄연한 월권행위입니다. 가란경. 그게 당신의 기사도입니까?”
가란은 피식 웃었다.
“난 충분히 시간을 줬소. 지난 몇 주 동안이나 말이오. 게다가 기사도라··· 그 고리타분한 규범을 나만큼이나 잘 따르고 신봉하는 기사가 또 있을까? 당장에 나는 베로니카공의 목을 매달자는 안톤 사제도 설득했으며, 성밖에서 덤벼오고 있는 베이츠와 칸티오의 군대에 맞서 도시를 지켜냈소. 위기에 빠진 아녀자와 시민들을 동시에 구해낸 셈이지. 이 정도면 충분히 양심적인 사람이요. 나는.”
가란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이를 갈고 있는 베로니카와 검집에 손을 올리고 있는 데비안을 힐끔 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머리칼이 목덜미를 덮고 있는 사내를 향해서였다.
검은 머리? 게다가 저 체구는·· 거칠 것 없던 가란의 발걸음이 슬쩍 멈췄다. 하지만 그는 이내 차오르는 불안감을 털어버리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 사태가 벌어진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동안 아드리아 왕국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시에 없는 여력을 짜네 은밀히 사람들을 풀었다. 벨로크 일행의 생사를 찾기 위해서. 하지만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정말 어딘가 차원의 틈에 떨어져 몸이 조각났거나 동떨어진 장소에서 눈을 떴을 것이다. 혹여 시간이 지나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자신의 주군은 온전한 왕이 되어있을 테고, 그 권력을 이용해 그 괴물 같은 전사에 대한 대처법을 생각해낼 것이다.
그래, 게다가 그자는 시커먼 흑갑주에 사람 몸통만 한 대검을 소지하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던 가란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무슨 석상에 살색깔칠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왕국 제일가는 기사를 얼어붙게 한 당사자. 타락용 아스타로트를 물리친 대악마 사냥꾼. 벨로크가 고개를 돌린 상태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
가란은 입을 여는 것에 힘을 소모하는 대신, 좀 더 그럴듯한 행동을 취했다. 왼손으로는 허리춤에 달린 검을 검집을 꾹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그 손잡이를 잡았다. 허리는 앞으로 굽었으며 이를 지탱하고 있는 허벅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윽고 스르릉 쇳소리와 함께 그는 검을 뽑아 들어서 휘둘렀다.
이 모든 일이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괴물과의 수라장으로 단련된 일류 칼잡이다웠다. 하지만 그 상대가 너무 나빴다.
벨로크는 눈앞에서 번쩍이고 있는 흐릿한 궤적을 고개만 까닥거리는 것으로 피했다. 그리고 집무실의 의자를 쾅 걷어차며 대번에 달려들었다. 가란은 바쁘게 움직였다.
한 발로 의자를 걷어내는 동시에 휘둘렀던 검을 재빨리 회수에 다시금 내려찍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뽑혀 나온 벨로크의 양날검이 그의 검신을 쾅 후려쳤다.
쩡. 청명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내가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크으으!”
무지막지한 힘이 손아귀를 강타하자 양손이 찢겨나갔기 때문이다. 챙그랑. 십자막이를 가진 검 한 자루가 바닥을 굴렀다. 벨로크의 검격을 받아낸 것으로 보아 대단한 명검으로 보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검이라도 주인 잃은 검 혼자서는 뭘 할 수가 없는 법이었다.
꿀꺽. 가란은 눈동자를 부르르 떨며 침을 삼켰다. 턱수염 가득한 그의 목덜미에 시퍼런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데비안과 베로니카 또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입을 어어 거리고 있었다.
이를 해낸 전사. 왕국 제일의 칼잡이를 순식간에 제압한 벨로크는 가란을 오연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