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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23화 (12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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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벤

권력. 상대방이 원치 않는 행동을 강제 할 수 있는 능력. 수백. 혹은 수천의 사람들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능력.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마성 적인 힘은 게임의 탈을 쓰고 있는 이 세계든, 그가 나고 자란 회색 도시든 남녀불문 누구나 원하는 보물이었다. 그리고 권력다툼이란 것은 늘 수많은 피와 암투를 동반했다.

이걸 따라가? 말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이다. 얄팍한 옛정으로 한 손 거들어 주는 순간. 수많은 인과관계들이 자신을 사로잡으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꼬리표가 되어 뒤를 졸졸 따라다니겠지. 음. 벨로크는 고민했다.

베로니카와의 인연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료들만큼의 유대는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베로니카의 눈물 젖은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배신감을 느낀 듯했다. 그녀는 벨로크의 가슴을 강하게 치더니 홱 뒤돌아섰다. 이윽고 손수건으로 코를 흥 풀고는 젖혀졌던 후드를 뒤집어썼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사라져라. 그때 처럼 또 떠나버리란 말이다! 네가 날 버렸듯이···”

“어? 영주님? 벨로크경?”

그녀가 여관의 입구로 뚜벅뚜벅 걸어가자 청년기사는 당황했다. 영주는 벨로크를 증오하기는 했지만, 사랑하기도 했다. 배신감이라는 감정 한편에는 애틋함이 깔려있었으니까. 서로 간에 껴안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해묵은 감정이 풀리고 잘 해결된 줄 알았는데?

아까 전 사람들을 능숙하게 통솔하던 때와는 달리 데비안은 어어?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품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곡괭이 문양이 새겨져 있는 황금색으로 된 패 하나를 꺼내더니 벨로크에게 건넸다.

“경.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영주성에 들러주십시오. 아. 혹여 경비들이 시비를 걸 수도 있습니다만 모쪼록 참아주신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데비안은 제 혼자서 주절거리다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베로니카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 아니, 영··· 아니! 같이 가요!”

처음의 이미지가 깨지는군. 벨로크는 어리숙한 젊은이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먹다 남은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탁자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짜보려는데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관주인이었다.

“크흠.”

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눈짓했다. 이 난리를 피운 네 정체가 의심된다. 하지만 영주와의 끈이 있는 것 같으니 묻지는 않겠다. 나가 달라. 벨로크가 읽기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시발.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그는 결국 여관을 나섰다. 돈도 많으니 다른 곳에 가면 된단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잠깐 사이에 소문이라도 퍼진 것인지 지나가는 행인들 혹은 병사들이 그를 보면서 수군거렸다. 누군가는 어딘가로 뛰어가기도 했다. 매를 넘나드는 시력으로 슬쩍 관찰하자 교회 방향이었다. 염병. 이미 얽힌 것 같은데?

벨로크는 한숨을 내쉬고는 영주성쪽으로 몸을 틀었다. 베로니카를 도와 이 영지를 노리는 놈들과 맞설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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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의 손님이시라고?”

“그렇소.”

패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짝다리를 짚은 경비는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였다. 물론 벨로크의 무장이 빈약해지기는 했다. 판금 갑옷과 대검이 부서졌으니. 그냥 덩치가 큰 어딘가의 자유 기사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경비의 냉대는 그곳에서 기인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벨로크는 경비의 가죽 갑옷에 새겨진 문양을 살폈다. 로벤의 문장은 교차하는 곡괭이다. 그러나 새겨져 있는 문장은 늑대였다. 베이츠와 칸티오는 아닌데? 이제 보니 옆에 다른 놈은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교회 소속 병사인 것 같았다.

벨로크는 상념을 이어나갔다.

영지 내에서 가장 방비가 철저해야 할 내성을 왜 외부세력들이 지키고 있을까? 답은 금방 나왔다. 영내에 침투한 외부세력이 심장까지 파고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베로니카의 상황이 그만큼 안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회야 그렇다 쳐도··· 늑대는 대체 뭐지? 그가 의아하게 생각할 때. 병사가 패를 던지듯이 돌려주며 말했다.

“뭐, 가지고 계신 패는 진짜 같으니 의심할 필요는 없겠군. 들어가 보시오.”

이놈 봐라? 창대가 치워지고 벨로크는 내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안내를 자처하는 하인에게 손을 휘저으며 물러가라고 했다. 그가 이 영지를 떠난 것도 고작 1년 전이었다. 길이야 아직까지 머릿속에 훤했다.

그렇게 돌로 된 계단을 걷고 있을 때쯤. 그의 괴물 같은 청각이 무슨 소리 들을 포착해냈다. 아까 전 성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의 목소리였다.

-하다 하다 이제는 자유 기사까지 끌어들이다니 애쓰는군.

-재산도 실권도 다 빼앗긴 년이 어떻게 저런 놈을 데리고 왔지? 칼깨나 쓰게 생겼던데.

-흐흐흐. 악마에게 따먹혔을 때처럼. 아랫도리라도 벌렸나 보지. 얼굴은 반반하니까.

-하하하하.

천박한 웃음소리들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성을 올랐다. 여전히 경계 어린 시선을 한 병사들을 마주하고 하인들과 하녀들을 지나치자 영주의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노크를 했다. 그러자 히스테릭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나요. 벨로크.”

“···들어오라.”

화려하게 치장된 의자 위에 퉁퉁 부은 얼굴의 베로니카가 앉아있었다. 여전히 표독스러운 시선이었지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예의 그 청년기사 데비안이 칼을 찬 채 시립해 있었다. 데비안은 반색하며 말했다.

“경! 와주셨군요!”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데비안은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움직여 차를 끓이고 그의 앞에 내어주었다. 뜨거웠기에 벨로크는 손에 대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이 정도는 하녀를 시켜도 될 텐데?”

데비안은 애매하게 웃었다.

“독을 탈지도 모르거든요.”

병사들에 이어 성내의 거주 인원 대부분이 적이라는 건가? 그가 미간을 찌푸릴 때. 데비안이 말했다.

“어찌 됐든 경. 여기까지 와주셨다는 것은 베로니카 아가씨 아니, 영주님을 도와주시기 위해 온 것이라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확답은 못 해주겠소. 일단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얘기부터 해주시오. 들어보고 결정하겠소.”

피식 웃음소리가 들렸다. 벨로크는 시선을 돌렸다. 상석에 앉은 베로니카가 자조적인 웃음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잠깐의 세월 동안 손에는 굳은살이 박혔으며 드레스 대신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1년 전. 아버지가 비참하게 돌아가셨을 때를 기억하겠지. 벨로크.”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뜨문뜨문 떠오르는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어둠에 잠긴 성. 산산조각나 벽에 박제되어 있던 로벤 영주와 그 아래에 있던 산양머리의 악마. 홀딱 벗겨진 채, 놈에게 강간당하고 있던 베로니카까지.

그 일이 터지고, 계승권자인 베로니카의 상태가 심히 안 좋았다. 영내의 다른 가신들 또한 산양 머리 악마 혹은 베이츠와의 전쟁에서 죽었기에 교회가 나섰었다.

“당신이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성인이 될 때까지. 교회가 이 영지를 대신 관리하겠다는 말을 들었소. 안톤 사제가 그리 말했었지.”

베로니카는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끔찍했던 그 때의 기억이 물 밀듯이 밀려오는 듯 했다. 그러다가 이내 의자의 팔걸이를 쾅 내려쳤다.

“안톤! 그 빌어먹을 음흉한 노인네! 당신은···! 그 말을 정말로 믿은 것이냐?! 세속에 찌들 때로 찌든 그 돼지들이 정말로 나한테 영지를 돌려줄 거라고 생각했냐고?!”

아니, 그럴 리가. 다만 그때는 자신 또한 제 한 몸 건사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버려두고 떠난 것이다.

매정하다고도 말 할 수 있었고 나름 현실적인 판단이라고도 말 할 수 있었다. 그가 로벤에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그곳을 노리고 있던 승냥이 같던 다른 영주들이나 교회를 상대로 싸워야 했을 것이다. 능력치가 낮았던 당시의 자신으로서는 죽을 수도 있었다.

베로니카는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아. 돌려주긴 돌려줬네. 시민들의 민심과 지지를 고려해서 나를 영주좌에 올려놓기는 했지. 그리고 허울뿐인 허수아비를 세워둔 채 야금야금 이 성안의 사람들을 갈아치우기 시작했어. 병사들과 하사관, 문장관, 집사, 성내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모든 인원들을 말이지.”

그녀의 눈 밑 점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주위의 모든 사람들 전부가 새하얀 법복을 입은 녀석들밖에 안 남아있더군. 여기 있는 데비안 이 얼빵한 녀석을 뺀다면 말이야.”

듣고 있던 얼빵한 녀석이 말했다.

“아가씨의 표현이 좀 과격하기는 했지만 들으신 대롭니다. 경.”

“영주님!”

베로니카가 빽 소리 지르자 찔끔한 그가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정정했다.

“네, 네! 영주님! 아무튼··· 영지는 현재 교회의 인원들에게 점령당했고 바깥으로는 베이츠와 칸티오가 이 로벤 땅을 넘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틈바구니에 끼여서 압사당하기 일보직전이죠. 영내에서든 외에서든 시시각각으로 그 강도가 강해지고 있거든요.”

데비안이 힘없이 웃었다. 그래서 교회 건물들이 그렇게 많이 지어져 있던 거로군. 일종의 과시용. 혹은 시민들의 교화용이었나? 궁금한 점은 더 있었다. 벨로크가 물었다.

“베이츠와 칸티오는 왜 이 로벤 땅을 넘보는 것이오? 1년 전의 설욕전인가? 그리고··· 경비를 서는 병사들 중에 교회의 문양이 아닌, 다른 소속의 병사들 또한 또 보이던데.”

데비안이 말했다.

“게오르그 공작. 아니, 왕이라 불러야 하나? 아무튼 전 그자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냥 게오르그라 부르겠습니다. 놈 휘하의 영주 중 한 명. 가란의 부하들일 겁니다.”

가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 뜻을 잘못 알아들은 데비안이 자세히 설명했다.

“현재 왕국이 내전에 휩싸여 있다는 것은 아시죠? 교회를 등에 업은 게오르그 대 나머지 귀족들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이 로벤 땅은 현재 교회가 지배하고 있죠. 그렇다 보니 자연히 공작의 손길 또한 닿아있는 겁니다. 가란은 공작의 친위대. 여명기사단의 고문으로서 교회를 도와 이 로벤 땅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자입니다. 바깥에서 공격해오고 있는 베이츠와 칸티오는 귀족파 소속의 영주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영지는 교회와 게오르그 공작에게 뺏기기 일보 직전이고, 바깥에서는 또 다른 적들이 덤벼들고 있다. 이거로군. 스케일이 장난 아닌데?

벨로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슬쩍 베로니카를 쳐다보자 그녀 또한 상황의 암담함을 다시금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을 바르르 떨다가 제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네가 대단한 전사라는 건 안다. 상인들에게 듣기로 도적단으로 위장한 베이츠와 칸티오의 병사들을 맨손으로 무찔렀다지? 게다가 방금 전 여관에서 보여줬던 그 기행까지··· 네가 도와준다면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내 진짜 목적은 그게 아니야.”

베로니카는 고개를 팍 치켜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벨로크를 오롯이 직시했다. 그녀는 힘없이 미소지었다.

“그냥 너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었다. 왜 나를 버려두고 떠난 것이냐? 나는 너를··· 비록 아버지께서 강제로 정하셨던 약혼이라고 해도··· 사랑했었는데. 너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냐?”

지배자의 흉내를 내고 있던 아가씨의 가면이 무너졌다. 이윽고 본래의 나이에 맞는 모습이 드러났다. 춤과 무도회를 좋아하고 잘생긴 기사와의 로맨스를 꿈꾸던 순진한 아가씨. 벨로크와 보냈던 몇 주간의 기억을 말미 삼아 지금까지 버텨온 가련한 여인.

그녀의 열렬한 구애에 벨로크는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벨로크는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내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하려고 했소? 두 사람이서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냐는 말이오.”

베로니카는 화제를 돌리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벽면에 걸려있던 검 한 자루를 휙 꺼내 들었다. 이윽고 흔들렸던 눈동자를 다시금 굳히며 말했다.

“끝까지 저항했을 것이다. 비록 허수아비뿐인 신세로 전락했다고는 하나.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한 놈들의 계획에 약간의 걸림돌은 될 테니까. 그게 돌아가신 아버지와 선조들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니까.”

죽음을 불사하고 있는 베로니카와는 달리 데비안은 뺨을 긁적이면서 말했다.

“어··· 저는 아가씨의 목이 날아가기 전에 아가씨를 모시고 도망치지 않았을까요? 배를 타고 요정들의 왕국으로 몸을 피한다면 교회나 게오르그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테니까요.”

“이 겁쟁이 놈이! 너! 기사! 데비안! 그딴 식으로 행동하라고 내가 기사 작위를 내린 줄 아는 것이냐! 게다가 아가씨가 아니라 영주님이라 부르라고 했다!"

“죄, 죄송합니다!”

미치겠군. 이 꼬라지로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온 거야? 물론, 그 정통성과 상징성 때문에 교회가 대놓고 헤칠 수는 없었다고 해도··· 분명 많은 고초를 겪어왔을 것이다. 각자 나름의 생존방식이 있었겠지.

어떻게 한다? 잠깐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으로 곧 괜찮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과 일행의 뒤통수를 친 게오르그 공작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가란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뒤를 이어 중후한 목소리 하나도 울려 퍼졌다.

“영주. 나 가란이오. 일전에 드렸던 제안에 대한 답변을 지금 받고 싶소.”

평소에는 잠들어 있을 그의 지능수치가 어째선지 움직였다. 이윽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머릿속의 깊은 곳에서 꺼내들기 시작했다.

벨로크는 곧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너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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