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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22화 (12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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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벤

배신자? 뭐 하는 년이야? 벨로크는 마시던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탁자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 옆에 세워둔 검집으로는 향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여인의 분노를 훨씬 더 키운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으드득 이를 악물며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크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벨로크-으! 이 명예도 모르는-비겁자아! 죽어!”

벨로크는 눈을 크게 떴다. 여인이 내지른 칼날이 눈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뭐야?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떨어지던 칼날은 벨로크의 손가락 사이에 턱 하니 잡혀버렸다.

“이··· 이게 무슨···”

믿을 수 없는 기행에 여인이 당황했다. 여관주인과 얼마 안 되던 손님들 또한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이익 소리를 내면서 쥐고 있는 검에 몸의 체중을 전부 실었다. 하지만 칼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몸뚱이만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었다.

“주문?! 으으윽! 이, 이거 놓지 못해?! 이 개 같은 새끼야! 시발! 파렴치한!”

거 입 한 번 존나게 더럽네. 아델하고 붙여놓으면 볼만하겠는데. 벨로크는 연신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안간힘을 써대는 여인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휙 꺾었다. 칼날이 뚝 부러지고 여인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쓰고 있던 로브 자락 역시 홱 젖혀지며 그녀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하늘거리는 푸른 머리칼과 눈 밑에 찍혀있는 눈물점. 무도회장에서 봤을 때는 순했던 그 얼굴이 지금은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전대 로벤 영주의 딸이자, 현 로벤 영주. 그리고 자신과 혼인을 치를 뻔했던 여인. 벨로크는 당혹감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베로니카?”

#

벨로크가 로벤 땅에 떨어진 그 시각. 룽겐 대사막.

대악마의 피와 살점을 섭취함으로써 몸 상태를 회복한 이자벨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녀는 갑작스레 사라진 벨로크와 느닷없이 느껴졌던 끔찍한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카라와 아델부터 살폈다.

별다른 외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피부색만큼이나 창백해진 두 사람의 낯빛. 미세하게 쌕쌕거리는 숨소리는 당장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 사달이 날 것임을 암시했다.

“그게···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이자벨은 다급히 카라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손가방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그 안에서 붉은색 액체가 가득 담겨있는 유리병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카라가 만들어둔 포션이었다.

그녀는 포션 하나는 땅에 두고 다른 하나는 손에 쥔 채, 망설였다. 누구한테 먼저 먹여야 하지? 두 사람 다 한시가 급해. 약간의 시간 차이로 누구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이런 멍청이!”

이자벨은 고개를 휙 저으며 포션의 코르크 마개를 뽕 땄다. 이윽고 카라의 입을 벌려 포션을 반쯤 흘려넘기고는 아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손을 썼다. 그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자 두 사람의 숨소리가 커졌다. 창백했던 안색 또한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후우.”

이자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두 사람의 몸을 정성스레 주물러주었다. 그녀의 재빠른 응급처치 덕분에 두 사람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자벨의 입을 통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가 있었다.

“벨로크님이 사라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이자벨! 똑바로 말해라!”

아델이 욱신거리는 몸을 부여잡고는 빽 소리쳤다. 카라 역시 말은 안 했지만 잔뜩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아델.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혀요. 잘못하다간 상처가 덧나···”

“말해라!”

아델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던 이자벨의 말을 모질게 끊었다. 그녀의 고양이 눈매가 하늘 높이 치켜떠 져 있었다.

이자벨은 씩씩거리고 있는 아델을 바라보다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손을 뻗어 그 잠깐 사이 모래 속에 파묻혀버린 쇳덩이들을 꺼내 들었다.

파형 무늬가 새겨져 있는 창 한 자루와 손잡이만 남은 대검, 부서진 갑옷 조각 등 이었다.

“이건··· 벨로크님의···”

이를 받아든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불길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건 아니야···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아델이 중얼거릴 때. 이자벨이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그녀 역시 혼란스럽다는 눈치였다.

“제가 아는 거라고는 그 불의 거인은 벨로크의 손에 의해 쓰러졌고, 벨로크는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것뿐이에요. 마치 증발한 것만 같아요.”

“사라지셨다고? 우리를 내버려 두고? 아니, 일단··· 놈한테 당한 것은 아니란 얘기군.”

아델은 다급히 카라를 바라봤다. 카라는 그 눈짓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추적주문을 사용해서 벨로크의 위치를 가늠해보라 이거였다. 그녀 역시 정상적인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벨로크가 걱정되었기에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맡겨둬.”

눈을 빛낸 카라가 벨로크가 남겨두고 간 검조각을 손에 쥐었다. 이윽고 그것을 흙바닥에 내려놓고는 조각을 중심삼아 지팡이로 그림을 그렸다. 복잡한 도형들과 룬어가 새겨진 주문진이 그 빛을 발했다. 카라는 눈을 감고는 알 수 없는 주문들을 연신 중얼거렸다.

물건에 남겨져있던 주인의 흔적을 쫒아 그 이미지를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내는 일이었다.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잠시 후. 카라는 눈을 뜨면서 중얼거렸다.

“애매하네···”

“뭐, 뭐가 말이냐?!”

아델이 고개를 팍 들이대자 카라는 검지로 그녀의 이마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벨로크는 살아있어. 기운이 느껴져. 하지만 위치는··· 가늠이 되지 않아. 아마도 우리가 있는 곳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 것 같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포탈주문이라도 사용한 건가?”

호선을 그렸던 카라의 눈동자가 의문을 띄웠다. 아델은 그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것은 알았으니 한시름 놓은 셈이다. 그녀는 성기사 갑옷에 묻은 흙을 털 생각도 안 한 채, 양손을 모으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다행···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벨로크가 이대로 죽을 사람이 아니긴 하죠.”

옆에서 듣고 있던 이자벨 또한 굳었던 얼굴을 풀면서 슬쩍 미소 지었다. 세 사람은 무너진 폐허 건물의 그늘아래에서 잠시 쉬면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얘기했다. 곧 무식하지만 효과 좋은 방법 하나가 제시되었다.

카라의 추적주문이 제대로 먹혀들어 벨로크의 위치가 잡힐 때까지 온 대륙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세 명이 나란히 움직인다니 꽤나 비정상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다들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델에게 있어 어릴 때부터 자신을 거두어준 벨로크는 곧, 시궁창 같은 삶을 빛으로 인도해 준 구원자였다. 일종의 집착증이었다.

이는 악마가 된 이자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제 괴물이었지만, 괴물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오롯이 인간으로 봐줄 수 있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카라는 마법사로서의 호기심 반과 여인으로서의 마음가짐 반이었다. 정체불명의 용력을 가지고 있는 사내에 대한 궁금증. 고문받던 자신을 구해준 사내에 대한 의리. 그러다가 점차 변질되어버린 마음.

그의 곁에 있는다면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마법서 같은 대단한 물건들이 또 들어올까 하는 세속적인 욕심 등. 꽤나 복잡했다.

세 여인은 각자의 욕망을 가진 채, 움직이고자 했다. 이자벨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끼에에에엑

그러자 숨겨두었던 안면괴조들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아델과 카라가 한 마리. 이자벨이 한 마리. 세 사람은 각각 괴물들의 등위에 올라타고는 땅을 박찼다.

떨어지는 태양 아래 거대한 그림자 두 개가 제 날개를 오롯이 펼쳤다. 얼마가 걸릴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냥 움직여볼 생각이었다. 목적지가 있는 여행길은 언젠가 그 끝에 다다르기 마련이었으니까.

여행길은 순조로웠다. 앞서가는 아델과 카라의 목덜미를 보면서 이자벨이 입맛을 다신 것만 빼면 말이다. 그녀는 날카로운 손톱을 제 목덜미에 박아넣으며 치밀어오르는 욕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때 부터였다. 몸의 회복을 위해 대악마의 살점과 피를 섭취하고 난 후, 마음속에 뒤틀린 욕망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씨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악귀의 증오심이 피어나는 것이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이자벨은 위태위태한 제 자신을 한껏 채찍질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새겨져 있는 검은 문신들은 불길하게 빛났다.

#

여인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못내 역겹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툭 부러진 검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반쪽이 된 검을 휘두르며 재차 덤벼왔다.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이 비겁자!”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진짜 베로니카가 맞는 모양이었다. 잔뜩 당황한 듯한 손님들의 반응이 이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그래, 난데없이 자신들의 영주가 여관에서 칼부림을 하고 있으면 놀랄 수밖에 없지. 벨로크는 발걸음만 슬쩍 움직여 베로니카의 검격을 피하면서 생각했다.

원래라면 자신에게 칼을 휘두른 놈들은 대번에 머리통을 깨줬을 것이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영주였고 이곳은 그녀의 땅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온 도시의 병력들이 자신을 쫓을 것이다.

물론 싸울 수는 있었다. 비록 잘 사용하던 검과 갑옷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그의 능력치는 여전했다. 평범한 인간 병사들이야 수백 명 정도는 가뿐히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벨로크는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단순했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고, 그녀한테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이 이렇게 단단하지 않던 시절. 막 이 세상에 적응 중일 때 느꼈던 감정이었기에 그 잔재는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결심한 벨로크가 양손을 뻗었다. 두툼한 주먹이 폼멜을 후려치자 부러진 검은 붕 하늘을 날더니 천장에 턱 박혔다. 이에 대한 반발력으로 베로니카의 손아귀가 찢겨나갔다.

“끄으으.”

비틀거리는 그녀의 상체를 벨로크의 나머지 손이 단단히 감쌌다.

“놔! 이··· 놔라!”

포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로니카는 거세게 저항했다. 부츠 발로 정강이를 차는 것은 예사였으며, 손톱으로 그의 팔뚝을 할퀴거나 이빨로 물어뜯기도 했다.

도저히 1년 전의 그 조신한 아가씨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지독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검술 또한 제법 날카로웠지.

아버지가 죽은 것이 그렇게 충격이 컸나? 물론 그랬을 것이다. 병마도 아닌, 악마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제일 힘들었을 때. 약혼자라 믿었던 사내가 홀연히 떠나버리자 또 한 번 강력한 충격을 받았겠지.

음··· 벨로크는 손목에 힘을 슬쩍 풀었다.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나쁜 놈이었다. 적어도 베로니카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그랬다. 그러자 그녀는 발광하던 것을 멈추고 이번에는 몸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네놈! 영주님을 놔줘라!”

“경비! 경비!”

여관주인부터 시작해서 손님들이 난리를 칠 때. 가슴께가 촉촉해졌다. 그가 시선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악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베로니카가 이제는 또 울면서 그의 가슴을 퍽퍽 치고 있었다.

“벨로크-으··· 이··· 나쁜 새끼야아···! 왜··· 왜, 이제야 돌아온 건데? 왜애! 내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오열하는 그녀를 보면서 벨로크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차지했던 비율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그 순간. 닫혀있던 여관의 문이 다시금 열렸다.

이번에 등장한 것은 판금 갑옷을 걸치고 있는 젊은 기사였다. 투구를 안 쓰고 있었기에 그의 잘생긴 얼굴과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이 잘 보였다. 베로니카를 구하러 온 건가?

“데비안경! 영주님이 저 무뢰배에게 붙잡혔···”

“다들 진정하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분은 제가 아는 분입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요.”

내가? 너를? 넌 또 뭔데 아는 척이냐? 데비안이라 불린 젊은 기사는 능숙한 얼굴로 사람들을 통솔하더니 여관 밖으로 내보냈다. 이윽고 아직도 벨로크의 품에 안겨 훌쩍이고 있는 영주를 걱정스레 바라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돌아오셨군요. 벨로크경.”

“나를 아시오?”

“경은 저를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일개 종자였거든요. 물론, 거스트와 말콤. 그 치들의 부하는 아니었습니다. 코엘님이 죽기 전까지 그분을 모셨었죠.”

청년기사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베로니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데비안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베로니카님의 수석 기사이자. 정당한 계승자의 유일한 방패이며 폭거에 대항하고 있는 올곧은 검입니다.”

그래, 네가 벼락출세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정당한 계승자의 방패며, 폭거에 대항하고 있다는 건 또 뭔데? 벨로크의 표정이 표상하게 변하자 데비안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이윽고 그는 벨로크의 귓가에 입을 대고는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영주성으로 가시죠. 지금 이곳에는 교회의 눈이 도처에 깔려있으니까요.”

벨로크는 머릿속의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결국 또 권력 다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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