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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21화 (121/222)

121로벤

사실상 반쯤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상단에 먼저 접근해온 것은 벨로크였으니까. 하지만 플라티니는 넙죽 고개를 숙이며 ‘당연합니다. 경.’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권위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어찌 됐든 플라티니는 목숨을 건졌고 벨로크는 금화 주머니를 만지게 되었으니 두 사람 다 괜찮은 거래였다.

“자. 다시 출발한다.”

길을 막고 있는 시체를 치우고 죽어버린 짐말들을 교체한 상단은 사로잡은 포로들을 짐칸에 실은 후 재빨리 움직였다. 말이 푸히히힝 거리며 다그닥 말발굽 소리를 냈다. 그 사이로 용병들의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때로 마차의 바퀴가 덜커덩거리고 그의 몸 역시 흔들리기도 했다.

그 번잡함 속에서 벨로크는 하인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비워둔 짐칸에 턱 앉고는 들고 있던 검 자루를 매만졌다.

보통의 롱소드보다 검날이 조금 더 넓고 길쭉한 양손검. 도적단의 수괴가 쓰던 클레이모어였다. 무게 중심도 잘 잡혀있었고 칼날의 관리 또한 괜찮았다. 나쁘지 않은 물품이었다. 역시나 두목에게서 뺏은 사슬과 철판으로 이루어진 흉갑 역시 냄새가 좀 난다는 것만 뺀다면 쓸만했다.

물론, 그가 전에 사용하던 룬검이나 풀 플레이트 메일에 비한다면 쓰레기라고 불릴법한 장비였다. 하지만 주문 걸린 장비들은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지금으로서는 이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 일단 급한 불은 끈 셈이다. 이제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였다. 시발. 벨로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이 매우 엿 같았기 때문이다.

요상한 빛에 휩싸여 정신을 잃고 웬 숲에서 깨어났던 그는 플라티니로부터 현재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들었다. 아드리아 왕국이었다. 한술 더 떠서 일행을 이용하고 죽이려고 했던 게오르그 공작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데 문제는 더 있었다.

[페널티 부과 완료.]

[메인퀘스트 역병의 진상을 파헤쳐라!가 강제로 부과됩니다.]

[플레이어의 편의를 위해 포탈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아직도 그 문자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벨로크는 이를 으득 물었다. 녀석은 자신이 말을 듣지 않자 마치 게임 속 캐릭터를 조종하듯이 그냥 다른 곳으로 워프시켜버렸다. 마치 너는 내 손아귀에 있다고 선전하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그 정체불명의 존재에 대한 정체였다. 빛에 휩싸였을 때. 벨로크는 알 수 있었다. 심상 세계의 모니터. 그 녀석은··· 자신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상태 창과 유사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는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는 것은 곧 놈이 제 몸속에 깃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불현듯. 벨로크의 머릿속에 옛 광경들이 지나갔다. 하멜른에서 아델이 막 성기사로 각성했을 때였다.

처음에 여신의 성력이 담긴 구슬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튕겨 나갔었다. 그때 당시에는 그냥 넘어갔었지만 이제야 그 이유가 이해가 갔다.

이 세계의 주신이라 일컬어지는 여신 헬레나. 그녀보다 명백한 상위의 신이 제 몸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 혹은 어떠한 존재는 자신을 멋대로 조종하려고 하고 있다. 강력한 스탯과 스킬들을 미끼로 점점 어딘가로 몰아가고 있었다.

놈의 목적은 뭐지? 정체는? 놈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하면 놈을 족칠 수 있을까? 벨로크는 고민했다. 이럴 때 카라라도 있었다면 그녀의 지식에 기대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생각은 곧 룽겐 대사막에 남겨져 있을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그녀들은 무사할까? 분명 시스템의 농간으로 커다란 고통을 받았을 텐데. 설마 누구 한 명 죽기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자신에게 깃들어 있는 어떠한 초월적인 존재. 떨어진 동료들의 생사여부. 게오르그 공작과 놈에 대한 복수. 인간들이 역병을 퍼트린 것이라 믿고 전쟁을 준비 중인 요정들까지. 벨로크는 머리가 아파왔다. 대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것도 자신 혼자서 말이다.

“존나게 보고 싶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쫄래쫄래 따라붙던 여기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성기사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도 은근히 팔짱을 껴오던 붉은 머리의 여인 역시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흩날리는 금색 머리칼과 엉덩이에 찍힌 점 하나가 매력적이던 뾰족 귀의 요정 역시 떠올렸다. 생동감 넘치는 그 모습들을 보고 어떻게 데이터 덩어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벨로크가 생각에 잠겨있던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이네경. 바쁘시지 않다면 긴히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각한 것이··· 아무래도 경도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염병. 또 뭔데?

“들어오시오.”

마차의 천막이 확 젖혀졌다. 플라티니의 경호 대장 한스였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여 벨로크에게 인사하고는 짐칸에 훌쩍 올라탔다. 벨로크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자 한스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포로로 잡았던 도적들을 심문했더니 놀라운 사실들이 나왔습니다. 경의 말씀대로였습니다. 놈들은 일개 도적단이나 탈영병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어떤 도적단이 마법사를 데리고 다니겠어? 그것도 제대로 된 주문을 구사할 줄 아는 녀석을. 한스가 다시금 말했다.

“이에 대해서 말씀드리기에 앞서 하이네경 혹시 저희 상단의 목적지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모르오. 그냥 반나절 안에 다음 도시에 도착할 거라는 것만 알고 있소.”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플라티니로부터 왕국이 어지럽다는 말은 들었지만, 자세한 것은 듣지 못했다. 그가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한스는 잠깐 입맛을 다시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현재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십니까?”

“정통성이 없는 왕. 그를 지지하는 교회. 그리고 그 둘을 싫어하는 귀족들에 의해서 내전이 한창이라고 들었소.”

“이번 일도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연관되어 있습니다만···”

한스는 잠깐 말끝을 흐리면서 벨로크의 눈치를 봤다. 그의 가문이 누구의 편에 서서 싸우고 있는지 몰랐기에 말을 가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알아차린 벨로크가 말했다.

“내 가문은 기사 가문이기는 하나 시골 땅에 작은 장원을 하나 가진 것이 전부요. 게다가 중립을 표방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말해보시오.”

굳이 자신의 가문을 낮춰내리는 벨로크를 한스는 조금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 입을 열었다.

“저희 상단은 현재 로벤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 영주님이 곡물들의 가격을 잘 쳐준다고 하셔서 말이죠.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현재 로벤은 전란에 휩싸인 것 같습니다. 인접해있는 두 영지. 칸티오와 베이츠가 연합해서 로벤을 압박하고 있다는군요. 이번 습격도 두 영지의 군대가 도적단으로 위장해··· 로벤을 말라죽이려고···”

벨로크는 항구도시의 보급을 육로를 통해 끊는다는 요상한 발상에 대한 생각보다도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로벤··· 잊을 리가 없었다.

자신이 게임 속 세상에 빠졌을 때. 21세기에서 살아가던 현대인이 떠돌이 기사가 되었을 때. 처음 마주했던 광경은 전쟁터였다. 그리고 그 배경은 로벤과 베이츠 사이의 영지전이었다.

강철도끼 버본, 사교도 무리, 자신을 습격해온 두 기사, 처음 마주했던 악마, 마지막으로··· 죽은 로벤 영주와 그의 홀로 남은 딸 베로니카까지.

벨로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다시금 그곳으로 가게 된다고?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이 엿 같은 시스템 새끼가 나를 이렇게 이끄는가?

“마법사는 칸티오 남작. 도적단의 두목은 베이츠 자작가 소속의 기사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로벤, 베이츠, 칸티오. 이 세 곳의 사이가 안 좋기는 해도 그들은 교회와 현왕인 게오르그 공작을 더 싫어할 텐데? 세 영지 중 한 곳. 아니면 두 곳이 귀족파에서 왕당파로 돌아선 걸까요?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주변의 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단의 경호원답게 한스는 제 생각을 쏟아내고 있었다. 듣고 있던 벨로크가 한 마디 던졌다.

“현재 로벤 땅을 다스리는 자가 누구요?”

“로벤의 영주 말씀이십니까? 그야···”

말끝을 흐린 한스가 답했다.

“베로니카님입니다. 1년 전. 산양 머리를 한 끔찍한 흉물. 바호메트에게 전대 로벤 영주가 살해당한 후. 그분의 어린 딸이 온갖 핍박과 교회의 건재를 이겨내고 권좌를 손에 넣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베로니카··· 자신을 보고 눈동자를 빛내던 푸른 머리칼의 소녀. 그가 여행을 떠나지 않고 로벤 땅에 남아있었더라면 그의 약혼녀가 되었을 여인. 하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거스트로 인해 아비가 살해당하고 제 육신마저 더럽혀진 비운의 여인.

그녀가 영주가 되었다고? 그리고 지금 그 로벤 땅이 다른 영주들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 도와줘야 하나? 나도 한때나마 로벤의 가신이 되어 녹봉을 받고 싸웠었으니까. 잠깐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지만,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주군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고 자신의 책무를 성실히 이행한다는 기사의 충성서약은 전대 로벤 영주. 지금은 무덤가에 있을 그에게로 향했던 것이었다. 그의 딸 베로니카 한테까지 맹세를 한 것은 아니었다. 벨로크로서는 거슬릴 게 없었다.

그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도시로 가서 쉴 참이다. 마침 플라티니로부터 얻은 금화 주머니도 있으니 우선 제일 좋은 여관을 잡은 다음. 술을 마시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짜볼 참이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경. 도망친 놈들 중에 경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놈들이 있을 겁니다. 자신들의 계획을 무너트린 것도 모자라 기사와 마법사까지 죽였으니 아마 베이츠 자작과 칸티오 남작이 이를 갈고 있을 겁니다.”

한스는 우려의 말을 남긴 채, 마차를 벗어났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마차는 아드리아 왕국의 최남단. 대륙의 물류가 모여드는 무역도시이자 항구도시 로벤에 도착했다. 한스의 말대로 전란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이 맞는지 성문은 철통과도 같았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은 창대를 높이든 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으며, 회색빛의 성벽 위에도 장전된 석궁들이 그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무기를 든 자들은 하나같이 철저한 검문을 받고 있었다.

이거 좀 엿 된 것 같은데. 벨로크로서는 퍽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플라티니가 벨로크를 보고 자신의 상단소속 경호원이라고 신분을 증명해주었기에 그는 무사히 성문을 지나올 수 있었다.

“신세를 졌군. 고맙소.”

벨로크가 말했다. 플라티니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마음이 조금 진정된 것인지. 그는 다시금 대범한 상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경께서는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셨지 않습니까? 이 정도는 당연합니다.”

플라티니는 제 모자를 쓱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하이네경 같은 위대한 기사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는 것 또한 상인인 저한테는 크나큰 이득이라 볼 수 있죠.”

미래를 보겠다는 건가? 이거 가명인데?

“뭐 바라는 거라도 있소?”

플라티니는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숙였다.

“베니스에서 온 플라티니. 제 이름 네 글자만 기억해 주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한스 또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윽고 다섯 대의 짐마차가 잘 닦여 있는 로벤의 대로를 따라 움직였다. 영주성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가지고 온 식량을 팔아치우는 것은 물론, 포로로 잡은 다른 영주들의 병사들마저 넘길 생각인 것 같았다.

벨로크는 플라티니가 왜 자신에게 그렇게 많은 금화를 줬는지 알 것 같았다. 목숨도 건지고 로벤 영주의 신임도 얻었으니 그는 정말 큰 횡재를 한 셈이었다. 세금감면이라든지 많은 혜택을 받겠지.

뭐, 자신도 여기까지 편하게 왔으니까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는 마차를 슬쩍 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여관부터 잡을 셈이었다.

잠깐 얼굴을 가려야 하나 생각도 해보았지만, 요 1년 사이 그의 얼굴도 좀 바뀌었다. 게다가 머리칼이 길어서 그런가? 그를 알아보는 병사들은 없었다. 그래서 벨로크는 그냥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들어온 성문은 해안가와 인접해있는 부둣가 쪽이 아니었기에 번잡하지는 않았다. 그냥 수선 중인 그물과 밧줄이 집집마다 걸려있고 나무판자 위에 말린 생선 따위가 올라가 있었다. 그 사이로 구릿빛 피부의 선원들이 돌아다니고, 난쟁이들도 몇 움직이고 있었다.

요 1년 사이 그렇게 크게 바뀐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벨로크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다른 점이 두 가지 보였다. 요정들이 안 보였다. 게다가 원래라면 한두 개 정도만 있었을 교회의 건물들이 지금은 도시 곳곳에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래, 뭔가 일어나고 있기는 하군.

벨로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칭 로벤에서 제일 좋다는 고급여관에 발을 들였다. 흉흉한 전사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를 주인은 반기지 않았지만, 그가 금화를 튕기자 군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의자에 턱 하니 걸쳐 앉았다. 그리고 주인이 내어준 식사로 배를 채운 후. 포도주로 입가를 적시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니, 빠져들려고 했다.

누군가가 여관의 문을 부서질 듯이 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여관주인의 시선이 돌아갔다. 벨로크 또한 고개를 돌렸다.

떨어지는 태양 아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영 하나가 보였다. 체구가 가녀린 것으로 보아 여인인 것 같았다. 그녀는 한 손에 검을 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벨로크를 보더니 스르릉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이··· 더러운 배신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온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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