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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20화 (1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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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전사

사내의 쩍 갈라진 근육과 솟아있는 핏줄들. 큼직한 주먹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흉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적들은 겁먹지 않았다.

자신들의 손에는 진짜 흉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 만으로 몸에 구멍을 뚫고, 슬쩍 휘두르기만 해도 팔 하나를 절단내버릴 수 있는 흉기가.

“이 새끼 뭐야?”

도적 두목이 셋을 외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다른 도적이 실실 웃으며 제 손을 움직였다. 날카로운 창끝이 벨로크에게로 쇄도했다. 용병들을 상대하기 전. 이 녀석을 본보기로 삼아 기세를 꺾을 생각이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어어? 끅.”

도적은 멍청한 소리를 내다가 머리가 터져 죽었다. 창대를 틀어쥐고 훅 집어 당긴 벨로크가 그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기 때문이다. 머리 잃은 시체가 털썩 쓰러지고 벨로크의 손에서는 피와 이빨 뇌수조각들이 주르륵 흘렀다.

그의 청각에는 뚝뚝 거리는 그 소리가 잘 들렸다. 도적들과 용병들이 헛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까지도 아주 잘 들렸다. 그는 그 시간을 잠깐 음미했다.

내면 속에 넘실거리는 분노가 약간은 해소된 것 같았다. 시발. 내가 무슨 싸이코패스도 아니고. 엿 같은 세계 같으니. 머릿속 한편으로 벨로크가 이런 생각들을 할 때.

“쳐! 쳐! 공격해!”

벼락처럼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가 슬쩍 시선을 올렸다. 잔뜩 굳어있는 도적 두목의 모습이 보였다. 두목은 더 이상 숫자를 세지 않았다. 상단 소속 용병들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벨로크를 진하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자였다. 맨손으로 사람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행인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죽여!”

“쏴!”

죽이라는 건지 일단 쏘고 보라는 건지. 시퍼런 단검, 길쭉한 창, 도끼 등. 도적들의 수많은 무기들이 벨로크에게로 향했다. 그중에서 제일 빨랐던 건 역시나 쇠뇌의 화살이었다.

도적들의 머리 위나 옆구리 틈 사이. 검은 선 몇 개가 공기를 일그러트리며 날아왔다. 꽤나 일사불란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도적단은 아닌 것 같았다.

몰아치는 화살 비. 보통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벨로크는 아니었다. 그는 땅을 박차는 것만으로 그 죽음의 세례를 피했다. 도적들의 입장에서는 흐릿한 잔상과 함께 사내가 사라진 것이었다.

“씹. 이게 무슨··· 억!”

눈을 부릅뜬 도적의 가슴에 창날이 퍽 꽂혔다.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 사내의 두툼한 가죽 갑옷을 뚫고 등 뒤의 동료 역시 꼬챙이 신세가 되었다. 옆에 있던 다른 녀석이 재빨리 반응했다. 다급히 손도끼를 휘둘러왔다. 도끼날이 어깨에 닿기 전. 벨로크의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윽고 와그작 우그러트렸다.

“끄으으으!”

비명을 지르는 그의 입에 주먹이 꽂혔다. 도적은 목이 홱 꺾이며 절명했다. 벨로크는 쓰러지려는 그의 손가락마저 뿌득 꺾으며 손에 들린 도끼를 가로챘다. 그리고 홱 집어던졌다. 막 그의 후방을 노리고 화살을 쏘려는 도적의 머리에 도끼가 틀어박혔다.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싸워나갔다.

맨몸으로 도적들의 품에 파고들어 큼직한 주먹으로 도적들의 얼굴 내지 목을 박살 냈다. 무기가 필요하다면 녀석들의 것을 강탈해서 휘둘렀다. 손잡이가 부러지지 않게 힘 조절을 해야 했으며 날은 뭉툭했지만 그런대로 머리통을 쪼개줄 수는 있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피와 살점 내장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전부 다 단 한 명의 사내가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저게 대체 뭐야···”

“사람인가? 아니, 악마의 하수인 아니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광경에 용병들이 멍하니 있을 때. 한스가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어! 공격해!”

그가 도적 한 놈의 등판에 장검을 꽂아 넣었다. 이윽고 발로 녀석을 걷어차며 검을 뽑아내고는 다시금 휘둘렀다. 그 짧은 순간 사내가 죽인 도적들만 해도 스물이 넘어갔다. 하지만 적은 여전히 많았다. 게다가···

한스의 시선이 로브를 쓰고 있는 마법사와 그의 앞을 지키고 있는 도적 두목에게로 향했다. 놈들 역시 저 괴물 같은 사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 전에 최대한 이 상황을 뒤집어야 했다.

“으아아아!”

“뒤져!”

용병들마저 전투에 가세하자 상황은 지독한 난전이 되었다. 말발굽에 짓밟힌 한 용병이 비명을 질렀다. 도적 기수의 도끼창이 그의 무참히 머리를 내려찍었다. 눈동자를 번들거리는 기수의 목에 한 용병이 쏜 화살이 퍽 박혔다.

“병신··· 껙.”

다음 순간 용병의 머리에 도적의 철퇴 역시 박혔다. 그러한 전투들이 사방에서 이루어졌다. 어떤 용병은 휘둘러지는 도끼를 방패로 막고 짧은 칼날로 목젖을 베어냈다. 또 어떠한 자는 오히려 방패가 박살 나서 머리가 깨졌다.

두 사람이서 나란히 바닥을 구르다가 단검을 뽑아 들고 서로의 배를 찔러대기도 했다.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방적인 학살극과는 달리 이쪽은 꽤나 현실적이면서도 진득했다. 진흙탕 싸움이었다.

히히히히힝

아군과 적군이 한대 뒤엉키니 수풀 속에 있던 쇠뇌수들은 더 이상 화살을 쏠 수 없었다. 그저 동떨어진 먹잇감을 노리거나 애꿎은 짐말들을 노렸다. 잘린 손목과 내장이 흙바닥을 잔뜩 수놓고, 아귀 같은 비명소리가 여러 번 울렸을까. 용병들의 반이 죽어 나갔고 도적들의 숫자 역시 반절이 줄어들었을 때였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지옥의 겁화여-!”

소름 끼치는 목소리 하나가 벨로크의 귓가에 들려왔다. 비명이나 저주의 말. 눈앞에서 들이닥치는 창칼과는 달리 그에게 좀 더 위협이 될만한 음성이었다. 그는 손에 들린 메이스로 도적 한 놈의 골통을 쪼개면서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곳. 말을 타고 있는 도적 두목과 그 옆에 로브 쓴 마법사 하나가 보였다. 게다가 안광을 시퍼렇게 반짝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는 게 그가 익히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엿 된 것 같은데. 이를 알고 있는지 도적 두목 역시 까칠한 수염 입가를 조금 당기고 있었다. 게다가 부하들에게 피하라고 지시를 내리지 않는 거로 봐서 이놈들로 그를 묶어두고 마법을 퍼부을 생각인 것 같았다.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애석하게도 벨로크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훌쩍 점프해서 용병들의 머리를 밟고 지나간다고 해도 저 마법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메이스를 휘둘러 몇 놈의 골통을 쪼개주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터져라-!”

벨로크의 발밑에 불꽃으로 된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그와 뒤엉켜있던 도적 몇 녀석도 이에 걸려들었다. 아래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이 주문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마귀왕의 성에서 예전에 카라가 썼던 주문이었다. 발 밑에서 불덩이가 솟아나는 악의적인 주문. 그렇다면···

그의 시선이 자신의 목에 걸린 사슬 목걸이로 향했다. 그 중간에는 금이 간 루비 반지 하나가 걸려있었다. 생각은 짧았다. 대악마의 화염도 막아낸 반지가 저 주문쟁이의 주문을 못 막아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그 짧은 사이 두목. 혹은 코벤님! 이라고 소리치는 병사들의 머리통을 몇 더 쪼겠다. 마법진이 점멸했고 화염이 펑 터졌다.

“악마의 하수인이 죽었다! 얘들아! 모조리 죽여라!”

크게 소리친 두목이 말을 박찼다. 그는 손에 들린 양손검. 세간에서는 클레이모어라 불리우는 날붙이를 마구 휘둘렀다. 전투마의 가속력. 십 수년간 단련해온 그의 근력이 합쳐져 이 길쭉한 장검은 강력한 파괴력을 자아냈다. 궤적에 걸릴 때마다 용병들의 어깨가 박살 나거나 목이 날아갔다.

두목은 웃었다. 원래라면 이번 작전에서 입지 말았어야 할 피해를 입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차오른 전투의 열기로 이를 애써 날려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생각이 끊겼다.

히히히힝

말 위에 있던 그의 시신이 털썩 쓰러졌다. 그의 얼굴은 뭉개져 있었다. 안면에 틀어박힌 메이스 때문이었다. 기세를 올리고 있던 도적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잿더미가 된 시신 사이에서 맨몸뚱이의 사내가 멀쩡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누가 악마의 하수인이래?

그는 완전히 깨어진 반지를 아쉽다는 듯 슬쩍 만지다가 재빨리 움직였다. 목표는 마법사였다. 구심점을 잃은 도적들은 그를 막지 못했다. 그냥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유물! 이런 미친!”

마법사는 말을 타고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다급히 다시 돌아서 주문을 외웠다. 벨로크의 주먹이 얼굴에 닿기 직전. 마법사의 지팡이가 빛을 뿜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벨로크를 강타했다. 어떻게든 이걸로 떨쳐내고 다시 도망칠 속셈이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괴물 같은 사내는 두 다리를 굳건하게 땅에 받쳐 주문을 견뎌냈다. 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퍽. 말이 게거품을 물며 절명하고 마법사가 낙마했다. 로브 자락이 젖혀지며 잘생긴 얼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이윽고 그 얼굴 역시 쩍 박살 나버렸다.

지휘관이 죽고 마법사마저 죽자 도적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또 다른 패잔병이 되어 도망치거나 그냥 시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시뻘건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는 벨로크가 있었다. 한 바탕 몸을 사용하고 나니 가슴속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물론 맨몸으로 싸웠던 만큼 그의 온몸에도 자잘한 생채기들이 많았다. 하지만 곧 가슴께의 문신이 반짝이더니 상처들이 꾸물거리며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포션이 필요 없네. 그가 감탄할 때.

주변에서 속닥거리는 소리들이 들렸다. 도저히 개인이 낼 수 없는 용력을 눈앞에서 목도한 탓이다. 경외심보다는 압도적인 두려움이 살아남은 용병들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당연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맨손에 같은 동족이 찢겨나가거나 터져나가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그래, 이게 평범한 반응들이지. 어째선지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진한 외로움을 느꼈다. 세 명의 여인들이 보고 싶었다. 미간을 찌푸린 벨로크가 침을 퉤 뱉을 때. 플라티니의 상처를 치료하고 다가온 한스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하이네경. 그···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벨로크는 꾸벅 고개를 숙이는 한스를 잠깐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제 내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겠소?”

“물론, 물론입니다. 경!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경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이곳에서 뼈를 묻었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겠습니다!”

공포를 몰아내기 위해서인지 큰소리로 외치고 있는 한스를 보며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시선이 플라티니에게로 잠깐 향했다. 엿 같은 시스템 때문에 난데없이 아리안 땅에서 아드리아 왕국으로 떨어졌다. 돌아가는 상황을 좀 알아야 했다.

“내가 보기에 이놈들은 평범한 도적단이 아니라 군대요. 이런 놈들이 왜 당신들을 습격한 것 같소?”

“음···”

한스가 말을 흐릴 때. 정신을 다잡은 플라티니가 다가왔다. 그는 붕대 감긴 어깨를 부여잡은 채 말했다.

“하이네경.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상단의 책임자 플라티니입니다. 일단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벨로크는 손을 휘저었다.

“감사 인사는 됐고, 놈들이 당신들을 습격한 연유가 짐작되시오?”

“가지고 있는 짐이라고 해봐야 밀이나 보리, 염장 고기 같은 식량들이 전부입니다.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는 했지만 그래도 은화 수준입니다. 아마 보급이 필요했던 패잔병이나 탈영병들이 아니겠습니까?”

벨로크는 습격이 일어나기 전 한스와 플라티니가 나누던 잡담을 떠올렸다. 게오르그 공작과 교회, 귀족 세력 간의 내전으로 인해 개판이 된 현재 왕국의 상황을.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비정상적인 청력이 제멋대로 감지해낸 것이다. 뭐, 덕분에 그는 플라티니가 했던 말을 얼추 이해할 수가 있었다.

“탈영병이라···”

그렇다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한데? 규율도 잘 잡혀있었고 숫자도 너무 많았다. 한스 역시 그와 같은 의문이 든 것인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포로가 몇 있으니 녀석들을 심문해보겠습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몇 안 되는 용병들이 살아남은 도적들을 거칠게 포박하고 있었다. 벨로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궁금한 점을 몇 개 더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 플라티니가 조금 찝찝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보다도 하이네경.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어떨런지요?”

그는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올 괴물들이나 또 다른 습격자들을 염려하고 있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이제는 용병들의 숫자도 스물이 채 되지 않았다. 아까 전과 비슷한 규모의 적들이 습격해온다면 벨로크야 살 수 있어도 그들은 죽을 것이다.

시간은 남아있으니 천천히 물어보도록 할까.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반색한 플라티니가 다시금 상단을 출발시키려고 했다. 그런 그를 벨로크가 불러세웠다.

“그 전에 나하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소?”

“예···?”

벨로크는 대악마와 싸우느라 엉망이 된 제 몰골과 주변에 널린 도적들의 시신들. 딱 봐도 돈이 많아 보이는 플라티니를 잠깐 바라보더니 툭 내뱉었다.

“당신들 덕분에 나는 이 소요에 휘말렸소. 게다가 나는 당신들의 목숨마저 구해주었지.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겠소?”

상황이 더럽게 흘러 갈수록 벌 수 있을 때 벌어둬야 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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