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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19화 (11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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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전사

지하에 도사리고 있던 악의 강림은 중간계의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대표적인 문제는 치안의 악화였다.

머리에 뿔 달린 괴물들. 고블린이나 놀, 트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흉포함과 악의를 가진 놈들이 주변 땅을 짓밟기 시작한 것이다.

미늘 갑옷과 석궁, 기사와 마법사들로 무장한 도시의 경비들은 어떻게든 버텨냈지만, 얼치기 용병들이나 몇 상대할 줄 알았던 자경단들은 맥을 못 췄다.

당연히 이들밖에 무력의 수단이 없었던 촌락들은 순식간에 몰락해버렸다. 그러자 마물들은 폐허가 된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먹고 한층 더 흉포해져서 거리를 쏘다녔다. 물류의 운송지 역할을 해야 할 잘 닦인 대로들이 한순간에 꽝꽝 막혀버린 것이다.

엿 같은 상황이었다.

상인들은 이제 돈을 벌려면 진짜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굶주린 도적들이나 어떻게든 관세를 높이려는 영주. 등에 칼을 찌르려 드는 신의 없는 용병들은 적어도 말이라도 통했다. 하지만 사람고기 맛을 알아버린 괴물들과 오직 증오심만을 불태우는 지하의 존재들은 말도 안 통했기 때문이다.

목숨 소중한 줄 아는 자들은 몸을 사렸다. 한 몫 벌고 싶어서 혹은 말라죽기 싫어서 상행을 나선 자들은 거리에서 죽었다. 자연스레 식량의 가격이 폭등하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거기다가 사태를 해결해야 할 왕과 영주들 역시 타락하거나 빗장을 꼭꼭 걸어 잠가버렸으니. 이대로라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인간 왕국들의 중심지. 아드리아 왕국은 멸망의 길을 걸을 것만 같았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정말이지 구원자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군.”

선두에서 짐 마차를 끌고 가던 상인 플라티니가 말했다. 그는 본래 아가씨들이 탐내는 보석이나 장신구 등을 주로 다루다가 이번에 식량 상인으로 직종을 바꾸게 된 자였다. 현재 왕국에서는 같은 무게의 밀이나 보리가 은보다도 더 비싸게 팔렸기 때문이다.

이번의 식량 꾸러미 역시 항구도시이자 무역도시 로벤으로 가서 팔아치우면 꽤나 짭짤할 것이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칼 찬 사내. 플라티니의 경호원 한스가 말했다.

“플라티니 씨.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뭐가 말인가?”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단추로 장식한 조끼를 입고 있던 플라티니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한스는 피식 웃었다.

“구원자니, 뭐니. 이명은 거창하지만, 어차피 놈도 권력을 탐하는 귀족 중 하나일 뿐입니다. 현재 가진 세력이 가장 강성하다는 것만 빼면요.”

삐뚤어진 그 웃음에 플라티니 역시 마주 웃었다. 그가 자신의 통통한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 말이 맞네. 푸른 피가 흐르는 귀족에게 구원자라니. 그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별칭이 어디 있겠나. 교단의 성녀나 성자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게오르그 공작과 그의 기사단 덕분에 이 나라의 혼란이 조금이나마 수습된 것은 사실이지 않나? 나는 그들의 업적은 존중하고 싶군. 덕분에 우리들의 주머니가 나날이 커져가고 있으니까.”

상인 플라티니의 말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것도 귀족들과 교회의 입을 통해서 들려오는 꽤나 신빙성 높은 소문.

몇 달 전. 아드리아 왕국의 수도. 아스크라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사자왕이라고 불리며 만인의 존경을 받던 이 나라의 왕이 갑자기 미쳐서는 왕성의 사람들을 제물로 바쳐 악귀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거기다 그치지 않고 이 미친 왕은 자신을 홀린 대악마와 손을 잡고 나라 전체를 광기와 유혈이 넘나드는 땅으로 뒤바꾸려고 했다.

제 백성들을 돌보고 지켜야 할 자가 그 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이를 막아낸 것이 바로 북부의 철옹성이라 불리는 게오르그 공작과 그의 칼날. 여명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그 공작은 현재 폐허가 된 왕성에서 왕관을 쓴 채, 스스로를 구원자라 칭하고 있었다.

물론 콧대 높은 중앙 귀족들이나 다른 지방 귀족들이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대악마와 마귀왕을 죽이느라 세력이 소진된 공작 역시 처단하기 위해 대번에 칼을 뽑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공작의 뒤편에는 교회가 있었다. 거기다가 대악마가 죽고 지하의 악귀들 또한 이 나라에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니 시민들의 지지 또한 공작에게로 향했다. 공작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시간을 번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아드리아 왕국에서는 내전이 한창이었다. 교회와 시민들을 등에 업고 스스로를 왕이자 구원자라 칭하는 자. 게오르그와 남부, 서부, 북부, 동부, 중앙 귀족들 간의 전쟁이 말이다. 이들은 힘을 합쳐서 게오르그나 교회의 군대와 싸우기도 했고, 서로 물어뜯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패잔병과 탈영병, 보급이 필요한 귀족, 도적놈들, 악마들이 사라지자 다시금 나타난 고블린이나 오크까지. 아드리아 왕국은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하지만 대범한 상인인 플라티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놈의 전쟁이야 세상이 이 꼴이 되기 전부터 늘 있었던 일이었다. 그에게는 익숙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악마들만 없다면 그는 덩치를 불린 제 상단과 금화를 주고 고용한 용병들의 힘으로 얼마든지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는 경험 많은 상인이었으니까.

플라티니가 히죽 웃을 때. 옆에서 말을 몰고 가고 있던 한스가 다시금 말했다.

“이런 소문도 있더군요.”

“뭐가 말인가?”

“사실은 대악마를 죽인 것이 교회나 공작. 영주들의 군대가 아니라 웬 기사와 성기사 마법사와 요정으로 이루어진 네 명의 파티라는 소문이요.”

“아아. 나도 알고 있네. 마귀왕과의 전쟁을 겪고 살아 돌아온 떠돌이 용병이나 자유 기사. 귀환병들이 말하고 다니던 그 소문 말이군. 자네는 그걸 진짜로 믿나?”

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칼밥을 먹고산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동안 괴물 같은 기사들도 여럿을 만나봤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개인이 낼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개개인이 아무리 특별한 비전을 지닌 전사들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교회나 공작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제 삼의 세력들이 퍼트린 헛소문 아니겠습니까?”

“나도 동의하네. 아무래도 그 의견이 제일 타당하지. 물론 정말로 단 넷이서 아니, 고명한 용사 혼자서 그 대악마를 죽였을 수도 있겠지. 그러다가 권모술수에 빠져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말끝을 흐린 플라티니가 피식 웃었다. 그는 이 지루한 상행을 달래주고 있는 잡담이 재밌었다.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던 것은 공작이었네. 대악마의 목을 성벽에 효수한 것 역시 공작이었고 말이야. 진실을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특권이지.”

듣고 있던 한스가 고용주의 기분을 맞춰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던 와중. 히히힝 소리와 함께 선두에서 움직이던 마차가 멈췄다. 이윽고 용병들의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너 누구야!”

“멈춰라! 더 이상 다가온다면 배때기에 구멍을 뚫어 내장을 구경시켜주겠다!”

불청객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한스는 칼집에 손을 가져다 대는 한편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도적들이나 탈영병이라면 용병들은 대번에 고함을 지르며 전투태세를 갖췄을 것이다. 길을 지나가는 행인이나 모험가라면 그냥 인사를 하거나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로 봐서 저건 경계하는 것 같았다.

플라티니와 함께 앞으로 다가간 그는 곧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상단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맨몸뚱이의 상체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덩치가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근육질 가득한 온몸에 흉터를 잔뜩 달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내였다. 특히나 소름 끼치는 것은 시커멓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이었다. 그 안에는 이글거리는 분노가 가득 담겨있었다.

용병들이 과민반응을 할 법도 하군. 한스는 침을 꿀꺽 삼키는 한편. 검을 뽑아 들고 플라티니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멈추시오!”

상단주와 함께 경호대장인 한스가 나타나자 용병들이 반색했다. 한스는 그들에게 무기를 내리지 말라고 지시하는 한편.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소리쳤다.

“나는 베니스에서 온 대상인. 플라티니 님을 모시는 한스요! 당신은 누구신데 우리 상단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오!”

한스가 용병들처럼 냅다 욕설을 날리거나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눈앞에 있는 사내의 신분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분명 상반신은 벌거벗고 있었지만, 하반신은 아니었다.

피가 잔뜩 굳어있는 가죽바지 아래로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시커먼 강철 부츠가 보였다. 찌그러지고 때가 타기는 했지만 저건 분명히 고급품이었다. 판금 갑옷의 일부처럼 보였다. 거기다가 잘 단련된 몸뚱이를 더한다면? 칼잡이로 십 수년간 밥을 빌어 먹어온 한스는 확신했다.

‘기사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영지 전에서 패배하고 추격자들을 피해서 산을 타고 온 모양이군.’

눈을 뱀처럼 찢은 채, 사내를 살피고 있던 플라티니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용병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때. 사내가 답했다.

“벨로그 가문의 하이네요. 사정이 있어 이 꼴이 되었는데. 다음 도시나 마을까지 동행을 요청해도 되겠소?”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듯한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는 사내의 위압감에 딱 맞아떨어졌다.

“사정은 무슨 얼어 죽을 사정이냐! 네놈! 필시 도적이나 탈영병 무리의 앞잡이가 아니렷다!”

“입 닥쳐! 케빈!”

한스가 케빈이라 불리우던 젊은 용병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가죽 투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케빈이 비틀거렸다. 그는 뭐라 불만을 표시하려 했지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한스와 다른 나이 든 용병들을 보고는 목을 쏙 빼며 뒤로 물러났다.

한스가 몇 걸음 앞으로 나서서 사내를 살폈다.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자신의 사정이 안 좋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기본적인 머리는 있는 놈이군. 한스는 주위의 용병들이나 짐꾼들도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억양으로 보아하니 진짜 기사 나리가 맞으셨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수행을 위해 동료들과 여행을 하던 도중 악마들의 습격을 받았소. 어떻게든 싸워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지. 결국 버티다 못해 동료 마법사가 포탈주문을 외웠고, 눈을 뜨니 나 혼자만 여기 근처에 떨어져 있더군.”

“오. 헬레나여. 정말이지 끔찍한 일을 당하셨군요.”

한스는 구태여 저 말의 진위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순례자의 탈을 쓴 채, 거짓을 일삼는 강도들이나 도적기사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대신에 플라티니를 보며 어떻게 할 건지 물었다.

다음 도시까지의 동행이라고는 해도 받아들이기에는 찜찜했다.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거슬렸다. 억양과 행동거지로 보아 상대는 진짜 귀족이었으니까. 혹여 저자가 살아남는다면 앙심을 품고 복수할 수도 있었다.

“음··· 어떻게 한다···”

플라티니 또한 고심할 때. 느닷없이 하이네의 고개가 움직였다. 용병들과 한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상단원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에 대로의 옆으로 난 우거진 수풀 쪽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저게 뭐 하는 짓거리야? 설마··· 한스가 눈을 가늘게 뜰 때. 느닷없이 수풀 쪽에서 화살들이 날아왔다.

“꺽.”

“끄르륵.”

그 수가 제법 많았기에 퍼억 소리와 함께 용병 몇이 고꾸라졌다. 플라티니 역시 두툼한 팔뚝에 화살 한 발을 맞았다. 그의 팔에 깃털이 돋아나고 쓰고 있던 깃털 모자가 하늘을 날았다.

“끄아아악!”

한스는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 플라티니를 마차 바닥으로 숨기는 한편. 하이네를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

“이 비열한··· 지금 우리를 속인 것이오?! 당신 도적 기사였나?!”

하이네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수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정황을 본다면 누가 봐도··· 이익! 다들 전투준비! 습격! 습격이다!”

한스는 그에게 뭐라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고는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들고 검으로 방패를 땅땅 쳐댔다. 용병들은 이미 준비가 된 상태였다. 그들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두 눈으로 주시하는 한편. 등을 짐 마차에 기대고는 무기를 꼬나쥐었다.

훈련이 잘된 자들이었다. 그 숫자가 상단 소속의 경호병들을 포함해 오십이 넘어갔으니 자신할 만도 했다. 하지만 곧 그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스스스슥

수풀을 헤치며 나타나고 있는 도적들의 숫자가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로브를 쓰고 있는 자까지 나타나자 그 숫자가 백여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이는 지금껏 상행을 하는 동안 만나본 적도 없는 대군이었다.

“어디서 이만한 숫자가···”

“시발. 저 로브 쓴 놈. 지팡이를 들고 있어. 마법사다! 그냥 도적단이 아니야!”

“차라리 짐을 조금 내어주는 게···”

용병들의 눈동자가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이는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짐꾼들이나 상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행의 전의가 꺾이기 전에 경비대장인 한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는 그렇게 해야 했다. 여기서 도적들에게 죽든 상단의 신뢰를 잃고 종래에는 말라죽든 다 같은 죽음이었다. 한스가 소리쳤다.

“웬 놈들이냐! 우리는···”

“아가리 닥치고 칼 버려.”

한 사내가 한스의 말을 끊었다. 한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사내가 전투마 위에 올라탄 채, 제 키만 한 검을 어깨에 턱 하니 걸쳐놓고 있었다. 게다가 철판으로 가슴을 가리고 나머지 부분이 사슬로 이루어진 제대로 된 갑옷 역시 갖추고 있었다.

훌륭한 무장상태와 위압감. 수 많은 구성원들 사이에서 먼저 앞으로 나서는 대범함까지. 상단원들은 알 수 있었다. 저놈이 이 살인자 집단의 대가리였다.

“네 이놈들! 우리가 무엇을 호송하고 있는지 아느냐? 이 근방의 지배자. 로벤 성주님의···”

“로벤이든 베이츠든 칸티오든 우리는 관심 없다. 셋을 세겠다. 그 안에 무기를 버리지 않는 놈들은 폐에 바람구멍을 만들어주지.”

한스가 나서서 이 근방 지배자의 이름을 팔아봤지만, 도적 두목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감에 기이한 웃음이었다. 압도적인 병력 차는 물론 수풀 속에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동그란 점들 덕분이었다. 장전된 쇠뇌들이었다.

상인들 사이에서 큰 소리가 오가고 상단 주인 플라티니가 몸을 더 웅크렸다. 용병들 역시 조금 있으면 몰아칠 쇠붙이들의 파도에 저항하고자 했다.

“하나. 둘”

도적 두목 혹은 그렇게 보이기를 원하는 자가 그 덩치만큼이나 흉흉한 목소리를 내뱉을 때.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기에 도적들도 신경을 쓰지 않던 자였다. 두목의 시선이 돌아갔다. 부하 도적들 또한 한 마디씩 내뱉었다.

“뭐냐. 저 병신은.”

“홀딱 벗은 채, 상단의 앞길을 가로막던 놈이야. 덕분에 일이 손쉬워졌지.”

수백 명의 무장병이 시선을 보내왔음에도 사내는 태연해 보였다. 얼핏 본다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속내는 조금 달랐다. 사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이 분노를. 길을 잃은 이방인의 증오심을 마음껏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내. 벨로크가 한쪽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시커먼 눈동자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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