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18화 (118/222)

118

회색도시

상태창이다. 그것도 느낀다고 표현 해야 할 내면 속 세계와는 달리 알아보기 쉽게 되어있는 매우 직관적인 창이었다.

17레벨, 16레벨, 22레벨···

아델과 카라. 악마가 된 이자벨까지. 일행이 지금껏 사용해왔던 능력들은 물론, 새로 얻은 힘과 직업. 그 모든 것들이 이 창안에 다 나와 있었다. 음. 그는 잠깐 모니터를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공이 잘못되어 우둘투둘 올라와 있는 하늘색 벽지와 굴러다니는 비타민제. 해충 스프레이, 지갑. 전공책 몇 권이 꽂혀있는 서재까지. 익숙한 공간이었다. 게임 속 세계에 빠지기 전. 20대 청년이었던 자신의 보금자리였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현실로 돌아온 건가?

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으면서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그러자 시커멓게 변한 패널 너머로 얼굴의 윤곽이 자세히 보였다.

귓가를 덮고 목을 넘실거리고 있는 검은 머리. 동양인 특유의 끝이 둥근 코가 아니라 송곳처럼 날카로운 콧날. 쫙 찢어진 동시에 깊게 가라앉아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먹먹한 눈동자까지. 고귀한 피를 타고난 영웅. 손에 흠뻑 피를 묻힌 전사이자 대악마 사냥꾼. 이건 벨로크였다.

“후우.”

벨로크는 어째선지 아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경계의 통로? 이상한 장소를 지나쳐 익숙한 장소로 오기는 했는데. 현실로 돌아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잠깐의 생각을 마친 그는 곧 이곳이 타락용과의 격전이 이루어졌던 장소. 제 내면 속에 존재하는 심상 세계라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머리칼을 휘저었다.

시발.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세상이고 어떻게 되어 먹은 장소야? 진실을 알려준다는 여신은 날 왜 여기로 보낸 거지? 괴상한 공간들의 집합만큼이나 벨로크는 혼란을 느꼈다. 그때. 꺼져있던 모니터의 화면이 스스로 켜지며 여러 가지 창들이 떠올랐다.

[아드리아의 재림 팁 : 표기되어 있는 스탯은 그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능력치에서 + 되는 수치임을 감안하십시오.]

[아드리아의 재림 팁 : 게임 내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각자의 사고방식과 나름의 신념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 여정 도중 큰 부상을 입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다면 플레이어의 파티를 떠나갈 수도 있습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세상은 넓고 동료들은 많으니까요.

[아드리아의 재림 팁 : 썩어빠진 왕과 귀족들을 몰아내고 전란에 빠진 대륙을 일통하라! 새로운 확장팩. 다섯 대악마의 강림. 불지목 모드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의지를 두고 신들과 경합했다가 패배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악마 군주들의 야욕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지하에 유배당한 뒤에도 그 안에서 군대를 키우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거든요. 악마들을 도와 대륙을 불태울지 혹은 천상신들을 도와 그들은 완전히 박멸할지 플레이어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만나보세요. 단돈 29800.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니터는 시키지도 않았건만 계속해서 게임에 관련된 정보들을 쏟아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게임을 켜놨으니 그 게임에 관한 내용들을 알리는 건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어째선지 벨로크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화면은 마치, 내가 겪었던 세상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라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대한 의문은 접어둔 채 그냥 게임을 하듯이, 퀘스트를 깨듯이 묵묵히 괴물들과 악마들을 죽이라는 것처럼 보였다.

환히 켜져 있는 형광등과 그 아래에서 하얗게 점멸하고 있는 모니터를 보며 벨로크는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 번 느껴진 이질감은 곧 강력한 괴리감이 되어 그의 온몸을 사로잡았다.

요정의 것을 가볍게 상회하는 그의 감각. 짙게 깔린 어둠을 낮처럼 꿰뚫어 보는 두 눈과 수백 미터 밖의 소리조차 감지해내는 귀. 음식에 섞여 들어간 미세한 독조차 감별해내는 혀. 그밖에 모든 것을 포함한 오감들과 그것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또 하나의 감각. 육감이 이 공간에 대한 정보들을 시시각각 뇌 속으로 전달했다.

옆집에서 떠들어대는 잡담. 문을 두드리고 있는 배달원. 팔짱을 낀 채 돌아다니는 연인. 옥상에 앉아 담배를 머금고 있는 배 나온 아저씨 등 평화로운 21세기 도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자 또 다른 광경들이 보였다.

울부짖고 있는 망령과 입에서 벼락을 뿜고 있는 검은 용, 뻥 뚫린 가슴을 매만지며 고개를 처박고 있는 불의 거인. 그리고 저 높은 하늘에서 그들을 오롯이 내려다보고 있는 어떠한 시선. 지금껏 그가 만났던 악마들이나 신들의 위압감을 가뿐히 뛰어넘는 초월적인 무언가.

팔뚝 위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벨로크는 이를 만질 생각도 안 한 채, 슬쩍 시선을 내렸다. 도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의 파동의 중심지가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굳게 다물어지려고만 하는 턱과 애써 움직이지 않는 혀를 굴려 가며 말했다.

“네놈은 뭐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형광등이 파지직 스파크를 튀었다. 삽시간에 방안이 어둠에 휩싸였다. 정전이었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만은 밝게 점멸하고 있었다. 모니터는 곧이어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화면이 잔뜩 흐려지며 거친 노이즈를 토해냈다.

기기기기기긱

어느 순간. 주변에서 들려오던 잡음 또한 싹 사라져 있었다. 여기에 뚜뚜뚜 거리는 비프음까지 귓가로 섞여들자 그 소리가 사뭇 기괴했다. 벨로크는 어째선지 놈이 웃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먹을 꾸욱 움켜쥐며 전사의 분노를 이끌어냈다. 그러자 몸을 옥죄던 위압감이 조금은 옅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으득 물며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대체 네놈은 누구냐.”

일그러졌던 모니터의 화면이 제 자리를 찾았다. 그 위로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 올랐다.

[메인 퀘스트!]

[역병의 진상을 파헤쳐라!]

아드리아 왕국의 남쪽. 바다 건너 나스 밀림의 한복판에 있는 요정왕국. 유구한 세월을 자랑하고 있는 그들의 보금자리에 정체불명의 역병이 퍼진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습니다. 요정들은 역병의 진상 혹은 그 치료제를 찾기 위해 대륙 곳곳으로 동족들을 파견했지만, 그 실마리조차 잡히지가 않습니다. 요정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현재 인간들의 왕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전운이 감돕니다. 대륙에 한바탕 피보라가 불기 전. 플레이어는 요정왕국으로 가 역병의 진상을 조사하고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흑막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 : ???

뜬구름 잡는 소리에 머리 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이 새끼가!”

벨로크는 주먹을 휘둘렀다. 거인 다섯을 합친 것보다 강력한, 대악마의 머리통마저 깨버린 압도적인 폭력이 기계장치 위로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울분을 풀어낼 수 없었다.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건지 얄상한 모니터가 그의 주먹을 퉁 튕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거센 반발감에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건 그의 심상 세계에 존재하는 단순한 정보의 샘 같은 게 아니었다. 조력자의 탈을 쓴 채, 자신의 내면 속에 똬리를 튼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무언가였다.

여신이 말했었던 그분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게 이놈을 지칭하는 거였나? 그녀가 존칭을 사용한 거로 봐서 눈앞의 이 녀석은 신이거나 그보다 격이 높은 존재처럼 보이는데. 말해줄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아니,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군. 이놈은 지금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 미간을 와락 찌푸린 벨로크가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양발은 어깨넓이로 벌리고 허벅지에는 꾸욱 힘을 주는 동시에 무릎을 굽혔다. 왼발을 앞으로 오른발은 그 뒤편에 위치시키며 바깥쪽으로 슬쩍 꺾었다. 몸의 중심을 단단히 잡은 그는 큼직한 주먹 두 개를 들어 올렸다. 검이 없는 게 아쉽긴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기사이자 전사였으니까.

그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 그가 게임 속 세상에 빠진 것은 눈앞에 있는 이 존재의 농간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시발. 정신을 차리자마자 처음 보는 몸뚱이에 들어가 난생처음 사람을 죽이고, 손에 피를 묻히고 괴물들을 족치고. 내가 왜 그렇게 살았어야 됐는데? 대체 왜?

게다가 이제는 그 몸속에서 발버둥 쳐왔던 자신의 의지. 빌어먹을 중세랜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왔던 그의 발자취마저 멋대로 가지고 놀려고 하고 있다.

벨로크는 그게 엿 같았다. 자신의 이 모든 노력을. 그가 지금까지 버텨왔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것 같았으니까. 멍하니 당해줄 수는 없었다. 끝까지 투쟁할 셈이다. 설령 죽더라도 말이다.

이건 타고난 영웅이자 전사인 벨로크의 생각임과 동시에 회색도시에서 살아가던 젊은 청년의 각오이기도 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으로 한 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전투를 앞둔 심장 역시 거칠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니터가 깜빡이며 다시금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플레이어 벨로크. 메인 퀘스트는 대륙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큼 중요한 임무입니다. 퀘스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닥쳐.”

그는 주먹을 휘둘렀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연속적인 공격이었다. 악귀의 피와 살을 가르고 바위도 부술만한 힘이었지만 모니터는 미동도 없었다. 대신에 녀석의 화면이 바뀌었다. 폐허가 된 피라미드 위. 쓰러져 있는 아델과 카라 이자벨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벨로크가 움찔 주먹질을 멈췄을 때. 세 개의 창이 떴다. 시뻘건 액체가 가득 담긴 모래시계. 그는 저걸 알고 있었다. 캐릭터들의 라이프 게이지였다.

[아델 : 생명력 55%]

[카라 : 생명력 72%]

[이자벨 : 생명력 32%]

모니터가 기기긱 소리를 냈다.

[페널티를 부여합니다.]

이윽고 메시지 창이 뜨더니 붉은빛 액체가 넘실거리던 모래시계 세 개가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아델 : 생명력 1%]

[카라 : 생명력 1%]

[이자벨 : 생명력 1%]

[경고! 아델. 카라. 이자벨의 생명력이 위험수치까지 떨어졌습니다. 빈사 상태! 빈사 상태!]

패널 너머로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벨로크는 뭐라 알아듣기도 힘든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금 주먹을 휘둘렀다. 소용없었다. 모니터는 그냥 비프음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메시지 창을 띄웠다.

[페널티 부과 완료.]

[메인퀘스트 역병의 진상을 파헤쳐라! 가 강제로 부과됩니다.]

[플레이어의 편의를 위해 포탈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야이, 개새···”

분노로 눈이 돌아가 버린 벨로크가 피를 뚝뚝 흘리며 주먹질을 할 때. 모니터에서 새하얀 섬광이 쏟아져나왔다. 낮설면서도 익숙한 기운. 그 빛에 휩싸인 순간 벨로크는 깨달았다. 이 놈은... 제 내면 속에 존재하고 있는 시스템창 이었다. 이윽고 그 빛은 전사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사내가 사라지고 난 후. 고장 났던 형광등이 다시금 켜졌다. 이상한 기계음을 내던 컴퓨터 또한 미약한 쿨러음만 낼 뿐이었다. 모니터에 창 하나가 떠올랐다.

하나는 건조한 사막의 공기와 내리쬐는 태양 빛 아래에 있는 세 명의 여인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혈색이 파리한 것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그중에서 한 명이 꿈틀거렸다.

몸에 기묘한 문신이 새겨져 있고 뿔이 달린 금발여자였다. 그녀는 울컥 검은 피를 토하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가 이내 주위에 있는 동료들과 제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몸을 꿈틀거려 어딘가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세 사람이 누워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막의 한복판에 있는 웬 시신의 앞이었다. 팔이 잘리고 머리가 없어진 괴물의 시신이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시체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윽고 이빨과 손톱을 이용해 그것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모래시계 하나가 슬금슬금 차올랐다. 그러자 모니터는 그 창을 휙 꺼버렸다. 이번에는 다른 창 하나가 떠올랐다.

햇빛을 받아 온통 은색으로 반짝이고 있는 바닷가가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잘 닦여진 회색 돌바닥 위로 거친 수염과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선원들이 짐들을 실어날랐다.

항구였다. 그것도 온갖 이종족들과 닻이 내려진 수십 개의 범선들. 불이 꺼진 등대까지 있는 거로 보아 꽤나 규모가 있는 도시처럼 보였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과 수많은 짐들 중 하나에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무역도시 로벤’ 그리고 그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산속. 온몸에 흉터가 가득 새겨진 맨몸뚱이의 사내가 막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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