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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16화 (116/222)

116

두 번째

[이 빛은! 헬레나! 이 걸레 같은 년이!]

불로 된 얼굴이 와르르 일그러졌다. 문장검이 머리를 꿰뚫기 직전. 불의 거인은 들고 있던 망치를 휙 집어 던졌다. 이윽고 양손을 하늘로 뻗어 문장검을 턱 붙들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부들부들 떨리고 녀석의 양손에서는 치이이 연기가 피어났다. 그 반발력으로 인해 집채만 한 다리 역시 사막의 모래를 파고들며 깊은 고랑을 만들어냈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벨로크와 이자벨이 아니었다. 그는 녀석의 발치에 검을 내려찍었다. 이자벨 또한 성력의 빛에 눈을 찡그리면서도 제 손톱을 마구 휘둘렀다.

약간의 타격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안간힘을 쓰고 있던 녀석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놈은 비틀거렸고, 여신의 문장검이 거인의 가슴을 관통했다.

[크아아아아악!]

가슴에 검을 매단 불의 거인은 그저 고통스럽다는 듯 비명을 내질렀다. 녀석의 몸뚱이. 타오르고 있는 지옥불이 성력에 맞서 거세게 점화했다. 하지만 문장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밀려 불길은 점차 약해지기만 했다. 절호의 기회였다.

바닥에 처박혀 꿈틀거리고 있는 거인을 보며 벨로크는 몸을 날렸다. 이자벨 또한 그렇게 느꼈는지 갈고리 같은 자신의 손톱에 시커먼 마력을 집중시켰다. 죽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베어볼 볼 참이었다.

“이자벨! 잘못하면 너까지 휘말린다! 뒤로 빠져 있어!”

“끄으으으!”

벨로크가 만류했지만, 그녀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성력의 빛과 유황불에 제 피부가 타오르든 말든 놈의 몸체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세모꼴의 가시가 달린 꼬리 역시 채찍처럼 휘둘러댔다.

놈의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리며 불똥이 이리저리 튀었다. 이자벨의 창백한 피부 또한 끈적하게 녹아내리며 뼈를 드러냈다가 다시금 살이 차올랐다.

[이···놈들! 크으으.]

노왕은 거친 쇳소리를 내며 불구덩이로 된 눈동자를 빛냈다. 하지만 눈만 굴릴 뿐이었다. 천상에서 내려온 저 신성한 빛이, 역겨운 죽음의 칼날이 자신을 거칠게 속박하는 동시에 힘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칼날이라면 하나가 더 있었다. 거인의 눈동자가 태양을 등지고 서 있는 기사에게로 향했다.

아니, 광전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잔뜩 풀어헤쳐 진 머리칼과 송곳니를 드러내는 입가, 흉터투성이의 상체를 오롯이 드러낸 채. 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내는 더 이상 기사라고 봐주기 힘들었다. 저건 그냥 죽음을 불사하지 않는 광인이었다. 그리고 맹목적인 광인이 휘두르는 칼날은 여신의 신성한 빛에 힘입어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토막 내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

금이 가고 이가 빠진 대검이 궤적을 그릴수록 오래 산 악마는 비명을 질렀다. 처음에는 고요했던 사막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컸지만, 그 소리는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가서는 칼날이 땅을 헤집고 바위를 깨부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그으으··· 으으으]

벨로크는 그렇게 무아지경의 상태로 제 송곳을 휘두르고 찔렀다. 팅 소리와 함께 부러진 칼끝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렀다.

상처 입은 대악마나 전사만큼이나 칼 또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타오르던 룬 문자는 흐릿했으며 언제나 예리함만을 자랑하던 칼날은 뭉툭했다. 검신에는 쩌저적 금이 가 있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땅에 떨어지고 나서 수많은 악마들의 피와 살을 머금었던 제 분신, 언제나 적들의 목을 취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켜주던 방패가 이제는 그 생명력이 다 한 것을.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손에 익은 검이란 건 곧 최고의 무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날붙이를 계속해서 휘둘렀다. 검이란 게, 갑옷이란 게 원래 그랬다. 소모품이었다. 그 어떤 명검이나 주문 걸린 물품도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새로 하나 구해야겠네. 갑옷도.

“으윽···”

뒤편에서 아델의 신음성이 들려왔다. 곧이어 무언가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자 하늘로 뻗어 나가던 샛노란 빛이 그 힘을 다했다. 노왕의 몸체에 꽂혀있던 문장검 또한 스스로를 불태우며 작은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벨로크는 한계를 맞이한 아델이 기절했단 것을 알아차렸다. 마력을 폭주시켜서 한층 더 악마의 형상이 되었던 이자벨 또한 어느새. 꼬리와 날개가 쏙 들어간 그냥 뿔 달린 여인이 되어있었다.

“허억, 허억···”

그녀는 제 몸을 감싸던 지하의 마력이 옅어지자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 들었다. 이윽고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불의 거인. 아니, 이제는 인간의 형체 정도 되어 보이는 뿔 달린 데몬을 휘어진 검들로 찌르려고 했다.

“으으으···”

하지만 이자벨은 이내 끈 풀린 인형처럼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주인 잃은 쌍검 또한 툭 바닥에 박혔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재생과 수복을 수없이 반복하며 녀석의 불덩이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게다가 일행을 지키느라 몸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아무리 악마의 신체가 되었다 한들 감당할 수 있는 선이란 게 있었다. 결국 이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건 벨로크뿐이었다.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깃털처럼 가볍던 것이 지금은 한없이 무거웠다. 엉망이 된 육체 역시 이제 그만 쉬라며 뇌 속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다 잡은 경험치를 놔두고 내가 어딜가? 그는 침을 퉤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놈은 이제 한계다. 앞으로 몇 번만 더 찌르면 죽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건 노왕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생명이 경각에 달리자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녀석은 푸컥 피를 토하면서도 잽싸게 몸을 굴렀다.

그의 검이 애꿎은 모래를 헤집었다. 비산하는 알갱이 아래로 엉망이 된 악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은 더 이상 불길을 토해내지 않았다. 시선만으로도 몸을 옥죄던 압박감 또한 더 이상 뿜어내지 못했다. 그냥 온몸을 비틀거리면서 흙투성이가 된 제 손톱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수천 년 세월이 무상하군. 마침내. 복수의 날이 다가왔는데. 이렇게 죽는다고?]

오래 산 괴물은 눈을 끔뻑거렸다. 흔들리는 시야를 다잡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헬레나. 샤트라. 셀레네. 이 개 같은 년놈들아. 전쟁에서 승리한 것만으로··· 너희들이 뭐라도 되는 양··· 우리들을 내려다보는···]

놈이 중얼거리든 말든 벨로크는 슬쩍 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다쳤기에 평소보다 훨씬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기에 더 위협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는 손에 들린 대검이 바닥을 긁으며 기기긱 소리를 내자 절정으로 치달았다.

노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은 자세를 낮추는 동시에 허벅지를 뒤로 끌어당겼다. 언제라도 튀어 나가 적의 심장을 뚫어버릴 수 있는 숙련된 전사의 몸가짐이었다. 저렇게도 싸울 수 있는 놈이었군. 녀석이 말했다.

[너. 인간 전사. 신에게 선택받은 사내야. 너희들이 경배해 마지않는 드높은 천상신들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느냐?]

그래, 존나게 궁금하다. 그 새끼들은 나한테 일만 시키지. 뭔가 제대로 된 걸 알려주지도 않거든. 내가 왜 이 땅에 떨어졌는지. 이게 정말 게임 속 세상인지. 만약 아니라면 나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이 힘. 시스템 창이란 건 대체 무엇인지. 그는 무엇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여는 대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한계를 맞이한 제 검을 들어 올렸다.

태양 빛을 받은 검신이 찬연히 빛났다. 하지만 이를 들고 있는 전사의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그 확고한 몸짓에 대악마는 다시금 말했다. 아까보다 더 다급한 목소리였다.

[너희들이 경배하고 부르짖는 높은 곳의 존재들! 놈들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녀석들은 그저 많은 생명체들을 죽인 살육자들일 뿐이다. 망자들의 피와 살을 제물로 삼아 하늘로 올라간 존재들. 위대한 의지를 제 마음대로 주무르며 이에 빌붙어 살고있는 기생충 같은 놈들!]

진위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신성모독적인 얘기였다. 하지만 악마가 내뱉기에는 적절한 말이기도 했다. 벨로크는 분노를 내비치기보다 그냥 웃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천상신인지 뭔지 하는 놈들이 믿을 수 없는 새끼들이라고? 나도 아는데?”

아델한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신이라고 불리우는 존재들. 노왕의 말대로라면 격을 쌓아서 승천한 어떠한 존재들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서로 간에 신뢰가 없는 일방적인 관계이니 의심은 당연했다.

[뭐?]

신의 사랑을 받는 사내의 절개없음에 혹은 그 불경함에 뿔달린 소악마는 당황했다. 그러다가 이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알고 있다니 얘기가 빠르겠구나. 우리···]

“그렇다고 너하고 손을 잡고 싶지도 않다.”

[···]

단호한 말투에 녀석은 입을 헙 다물었다. 눈동자 역시 바르르 떨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했다. 벨로크의 시선은 오래 산 악마의 얼굴로 잠깐 향했다가 놈을 샅샅들이 훑었다. 이윽고 그는 피식 웃었다. 뿔과 붉은 눈이 달린 거죽은 벌벌거렸지만 녀석의 발끝과 다리, 어깨의 근육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놈은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극이 노리는 것은 분명했다.

이거 왕이 아니라 광대셨군. 노왕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팍 치켜올렸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더러운 천상의 앞잡이! 네놈도 나와 같이 가자!]

시커먼 피가 흐르는 육체가 스프링처럼 가속했다. 마지막 기운을 짜냈는지 그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손톱 역시 이글거리는 불길이 가득 담겨있었다. 악마가 악다구니를 쓰며 덤벼드는 순간. 벨로크의 대검이 번뜩였다. 억눌려있던 무언가가 폭발하듯 악마의 손톱과 기사의 검이 벼락처럼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펑. 한발 늦게 공기가 터져나갔다. 사막의 건조한 모래바람이 휘잉 불었다.

[크흐흐흐. 아무래도 너의 참마검이 그 수명을 다한 모양이군.]

비웃음과 함께 노왕이 몸을 돌렸다. 녀석의 상체에는 긴 검상이 하나 나 있었다. 왼쪽 팔도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악마에게는 그리 큰 상처가 아니었다. 전부 다 벨로크의 대검이 조각났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산산이 부서져 십자막이와 손잡이밖에 안 남은 룬검을 슬쩍 바라보다가 그것을 휙 집어던졌다. 노왕은 고개만 까딱거려 이를 피했다. 그는 권능을 얻기 전. 화염의 거인이 되기 전에도 대단한 전사였다.

[무기를 잃은 전사. 이것만큼 쉬운 먹잇감이 어디 있을까? 아무래도 위대한 의지는 나를 보살피고 있는 것 같군.]

악마는 남은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탁한 녹색의 불꽃이 단검 같은 손톱 주위로 피어났다. 시간이 지나서 힘을 조금 더 회복한 것 같았다.

다시금 모래바람이 치솟았고 시커먼 잔상이 덤벼들었다. 벨로크는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휙휙 털었다. 이윽고 몸을 돌려 손톱을 피하는 동시에. 녀석의 머리통에 제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났다. 수천 살 먹은 악귀이자 군단의 주인. 사막 왕국을 전복하려던 대악마가 그렇게 죽었다.

여느 죽음이 그렇듯. 녀석의 최후 역시 별거 없었다. 오직 머리 잃은 시체만이 털썩 쓰러지며 사막의 흙먼지를 나풀거릴 뿐이었다. 이를 잠깐 바라보던 벨로크는 다시금 손을 털었다. 이빨과 뼛조각 등이 손등에 박혀서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태여 놈의 시신을 조각내서 확인사살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녀석의 머리가 깨질 때 느껴졌던 고양감 덕분이었다. 레벨업이었다. 그것도 고양감이 오래 느껴진 걸로 봐서 두 번은 한 것 같았다. 덕분에 노왕과의 싸움에서 온 피로감이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았다. 그래, 그 지랄을 했는데. 이 정도는 돼야지.

그는 눈을 감고 곧바로 의식 세계로 들어가는 대신. 절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절한 채, 신음하고 있는 이자벨을 훌쩍 들어 카라의 옆에 내려놓았다. 아델 또한 두 사람의 옆에 얌전히 눕혀놓았다. 세 사람이 멀쩡한지 확인한 그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너진 지하의 동굴. 그 위로 쌓인 피라미드의 잔해로 인해 주위는 엉망이었다.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어쩌면 2차 붕괴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니면 살아남은 데몬의 잔당들이나 악귀들이 습격을 해올지도 몰랐다.

그는 다시 한번 더 느꼈다. 이곳은 게임이 아니었다. 보스를 무찔렀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며,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변수는 언제든지 존재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일단 동료들이 일어날 때까지 내가 경계를 서야겠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몸속에서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윽고 흉터투성이의 가슴 위로 번쩍이는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이건 또 뭐야?

[꺼지지 않는 심장]

속삭이듯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슬쩍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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