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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화염으로 이루어진 얼굴이 사선으로 어긋났다. 시퍼런 빛을 띠고 있는 룬검이 그 사이를 가로질렀다. 대검은 별다른 저항감 없이 놈을 찢어내고 있었지만, 벨로크는 혀를 찼다. 저 아래에 있는 용암이 시뻘건 아가리를 잔뜩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목걸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아니, 열기는 그렇다 치더라고 저 늪처럼 생긴 공간에 빠진다면 탈출할 수가 있나? 상념은 금방 끝났다.
“벨로크!”
어느새 몸을 추스른 이자벨이 떨어지던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벨로크를 끌어안은 채 피막 날개를 휙 꺾어 자리에서 벗어났다. 잠시 후. 불로 된 거인의 몸체가 우르르 쏟아지자 들끓고 있던 용암이 범람했다. 휙휙 튀는 불똥 중에 하나가 가죽 부츠 앞에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카라는 치이익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 치다가 반투명한 역장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세 사람에게 물었다.
“끝난 거야?”
“후우, 후우.”
벨로크를 내려놓은 이자벨은 날개를 부르르 떨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타다만 자신의 갑옷 상의를 한 손으로 거칠게 잡아 뜯었다. 이제는 더 새카매진 갑옷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올릴 때. 망토를 벗은 아델이 그녀의 물집 가득한 상반신을 덮어주며 답했다.
“머리가 깨졌다. 그리고 몸체가 슬라임처럼 녹아내렸지. 아무리 오래 산 괴물이라도 이 정도라면 죽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방심이 죽음을 부른 거죠. 아니, 아닌가? 녀석도 용암 속으로 냅다 달려들어서 검을 휘두를 줄은 몰랐으려나···”
이자벨이 질린 표정으로 벨로크를 바라볼 때. 그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굳이 플래그를 세우는 카라의 말이 아니더라도 뭔가··· 그는 슬쩍 눈을 감았다. 이윽고 두 눈을 부릅뜨면서 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때. 용암이 부글거리더니 어느 한 곳으로 주르륵 모여들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화염의 구였다. 요상한 문양이 사방에 새겨져 있고 제 혼자서 박동하고 있는 것이 꼭 심장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심장은 주위의 용암을 모조리 먹어 치우며 폭탄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러···”
눈을 부릅뜬 카라가 역장에 힘을 불어넣는 동시에 골렘들을 불러모았다.. 벨로크의 대검에 깃든 망령 역시 얼음으로 된 보호막을 만들어 냈다. 이자벨 또한 날개를 활짝 펼치며 세 사람을 감쌌다. 잠시 후. 맥동하던 심장이 뻥 터졌다. 동굴이 우르르 무너지고, 몰아치는 화염의 파도가 일행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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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다···! 머리를···
-꺄아아악!
각양각색의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광경이 휙휙 지나갔다. 시뻘건 색채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반투명한 파란색에 밀려 사라졌다. 그다음에는 갈색과 회색빛이었다. 동그란 것, 뾰족한 것, 일정한 형태도 없이 그냥 커다란 것까지 각양각색의 파도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곧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의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시야가 뒤죽박죽으로 흔들리고 몸 곳곳에서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흙먼지가 입을 턱 틀어막고 고통에 겨운 여인의 신음과 함께 시커먼 피가 얼굴에 주륵 묻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혼란한 상황 속. 그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양손에 바위 같은 굳은살이 가득 박히기 전의 나. 악귀의 피와 허여멀건 한 수프 대신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배를 두드리던 나. 그리고 차가운 날붙이와 전신을 옥죄는 갑옷 대신 펜과 마우스, 핸드폰을 들고 낄낄거리던 20대 청년이던 시절의 나에 대한 회상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건데? 언제까지 싸워야 돼?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죽이고 괴물의 손발톱을 얻어맞고 고통스러워하고. 이게 재밌냐? 내가 발버둥 치는 게? 대답해. 이 개새··· 어깨와 목이 조금 굽었던 현대인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전사. 어떻게든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 두 눈을 불태우고 있는 떡 벌어진 어깨의 칼잡이. 기사 벨로크였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쿠르르 소리와 함께 몸을 짓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수많은 악마들과 괴물, 짐승들의 피를 머금은 쇠붙이가 오연히 그 자태를 드러냈다. 태양 빛에 반사되는 검광을 뒤로한 채, 그는 입에 있는 먼지를 퉤 뱉어냈다. 이윽고 거인을 상회하는 괴력으로 바위틈에 끼어 있던 다른 팔과 다리를 조심스레 빼냈다.
물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카라가 새겨준 대마법 보호막. 기이한 금색 문양은 다 벗겨졌으며 그 아래에 철판 역시 잔뜩 우그러져 있었다. 갑옷이 그 모양이니 다리 역시 잔뜩 금이 가고 뼈가 뒤틀려 있었다. 호흡을 내쉴 때마다 폐부가 고통스러운 거로 봐서 갈비뼈 역시 몇 개 나간 듯 했다.
“엿 같은 세계 같으니.”
그는 검을 바닥에 박은 채, 몸을 찌르고 있는 망가진 갑옷을 우악스러운 손길로 뜯어냈다. 비틀린 다리 역시 슬쩍 손을 움직여서 다시 맞췄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곧 신체 내부에서 화끈거리는 감각과 함께 몸을 타고 흐르는 피가 거세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높은 체력 수치가 주인의 몸뚱이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이대로 며칠 정도만 지난다면 이 상처들도 씻은 듯이 나을 것이다. 시발. 골절이 그렇게 금방 낫는다고? 몇 주는 입원해야 할 상처를? 이건 진짜 어떻게 된 몸이야. 그는 피식 웃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갈비뼈가 아팠기 때문도 있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악마 때문이기도 했다. 폐허가 된 피라미드 위. 엉망이 된 잔해 위에 오롯이 서 있던 불의 거인이 입을 열었다.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였다.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정말이지 놀랍군··· 칼라가 말해준 소문이 축소되었어. 아스타로트를죽인 것은 인간들의 군대가 아니야. 너. 전사. 오롯이 너의 힘으로 해낸 거로군.]
저런 놈이 내 밑에 있었더라면··· 거인이 중얼거렸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박아두었던 검을 들어 올리는 동시에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가 서 있는 곳의 근처에 있던 바위가 들썩거렸다. 이윽고 날카로운 손톱이 땅을 비집고 나오더니 피투성이가 된 이자벨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녀는 울컥 검은 피를 토해내고는 제 몸뚱이를 꺼냈다. 꼴이 엉망이었다. 양 날개는 물론, 한 쪽 다리 마저 뜯겨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감싸서 파편을 막아준 덕분에 카라와 아델은 사지 멀쩡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자벨이 기절한 카라를 한쪽 구석에 고이 내려놓을 때. 아델이 피가 흐르는 머리를 감싸 쥐며 말했다.
“이자···벨. 너. 그 상처. 으으···”
“말··· 하지 마요. 일단 으윽. 몸을 추스르는 게 급선무에요.”
꽈릉. 번개 터지는 소리가 울리자 아델이 시선을 돌렸다. 다시금 화염의 망치를 꺼내든 불의 거인과 벨로크가 싸우고 있었다. 노왕은 쥐고 있던 망치로 바닥을 쿵 내려찍었다. 고대인의 유적이 그 잔해마저 조각났다. 흙먼지가 와르르 일어났다. 그 아래에 양손으로 검을 받친 채, 이를 막아내고 전사가 보였다. 그는 놈의 망치질을 제대로 피해낼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너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이름 모르는 전사야. 하지만 아무리 괴물 같다고는 하나 너도 인간이로구나. 상처 입고 피를 토하면 죽는 인간 말이다. 엉망이 된 몸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비웃음을 흘린 노왕이 입을 쩌억 벌렸다. 그 안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퍼런 불길이 콰르르 쏟아졌다. 열기 역시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대검의 룬 문자가 불타는 것을 넘어 녹아내릴 듯이 점멸했다. 목에 걸고 있던 반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망령의 보호막과 화염 낙인의 반지로 인해 어떻게든 막아내고는 있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갈듯 보였다. 반지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이 하나 나가지 않았던 대검 또한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금이 쩌저적 가고 있었으니까.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이를 보고 있던 이자벨은 광인처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한 쪽밖에 없는 다리로서는 균형조차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해라도 하듯이 제 몸을 퍽퍽 때리다가 눈을 빛냈다. 무슨 결심을 한 듯 보였다.
이자벨은 두 눈을 감고 뭐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몸에 새겨진 문신이 탁한 빛을 뿜어냈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그녀의 모습 역시 변화했다. 뿌드득 뼛소리와 함께 잘려있던 다리와 날개가 다시 돋아나고, 송곳니와 머리의 뿔 손발톱 등이 흉하게 커졌다. 엉덩이에는 채찍 같은 꼬리까지 자라났다. 악마의 마력을 폭주시킨 것이다.
“크으으으.”
시뻘건 눈을 빛내며 뿌드득 이를 악문 이자벨이 노왕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주 재빨랐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거인에게는 그 모습이 잘 보였다.
[이 더러운 요정년이···]
노왕은 벨로크에게 망치를 내려찍는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시퍼런 불길이 이제는 날개 달린 악마에게 쏟아졌다. 실수였다. 놈은 한쪽에게 제힘을 온전히 쏟아부었어야 했다. 이자벨의 피막 날개가 휙 꺾이며 한 차례 더 가속했다. 뱀처럼 쫓아가던 불길은 그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런!]
놈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벨로크 또한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벨로크님!”
아델의 목소리와 함께 샛노란 빛이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치유술이었다. 벨로크는 엉망이 된 몸뚱이가 조금은 호전되는 것을 느끼며 이를 으득 물었다. 이윽고 한쪽 무릎을 올려 대검을 처 올렸다. 망치가 흔들리고 녀석의 무게중심 역시 흔들렸다. 슬쩍 몸을 틀어 망치를 피해낸 벨로크가 빛의 채찍을 만들어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검광이었다. 불의 거인의 다리가 조금 잘려나가며 서리가 끼었다. 하지만 녀석의 덩치에 비해서는 티끌만 한 상처였다. 게다가 틈새를 벌렸던 상처 또한 다시금 화염을 내뿜으며 수복되었다.
[흐하하. 간지럽구나! 겨우 그 따위 공격으로 나를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비웃음을 흘린 녀석이 눈을 번뜩였다. 거인의 몸 주위로 불꽃의 고리가 생겨나며 뻥 폭발했다. 벨로크와 이자벨은 뒤로 나가떨어지며 바위와 폐허의 잔해 속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하지만 곧 날개 달린 악마는 바위를 깨부수고 나와 놈에게 날아들었다.
“——!”
크게 고함을 지른 인간 전사 또한 엉망이 된 검을 꼬나쥐고 덤벼들었다. 화염의 망치와 서리가 낀 대검이 다시금 번개를 토해냈다. 그 위에서는 비수처럼 돋아난 날카로운 손톱이 거인의 몸뚱이를 갈라냈다.
둘 다 제 목숨을 돌보지 않는 무식한 육탄공격이었다. 그렇기에 더 없이 치명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천 년 묵은 악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놈은 크흐흐 웃으면서 제 몸의 불길을 한층 더 강하게 피워냈다. 그러자 타격을 입고 작아졌던 거인의 몸뚱이가 다시금 그 크기를 부풀렸다. 끔찍한 재생력이었다.
“시···발. 대체··· 어떻게 해야···”
계속 기도문을 외우며 벨로크에게 치유의 빛을 뿜어내고 있던 아델이 컥 피를 토했다. 제 몸을 치유하는 대신 벨로크를 지원했기에 생겨난 부작용이었다. 그녀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는 정신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점점 약해져만 가고 있었다.
[발버둥 쳐라!]
반면에 불의 거인의 몸놀림은 가면 갈수록 빨리 지고만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주변의 열기가 놈의 몸뚱이로 쉬익 빨려 들어갔다. 그럴수록 놈은 제 상처를 수복했다.
권능. 빌어먹을 권능. 아델은 알 수 있었다. 저게 놈의 능력이었다. 주변의 힘을 흡수하는 것이다. 저 불타는 몸을 보면 이곳 사막의 열기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곧 마땅한 형체도 없는 저놈은 죽일 수 없는 괴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절망감이 차오르려는 순간. 가슴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열기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 아델은 황급히 제 품을 뒤적거렸다.
“이건···”
붉은색의 가죽 표지에 금박으로 글씨를 입힌 작은 책이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헬레나의 성서였다. 그녀는 뭐에 홀린 것처럼 책을 펼쳤다. 이윽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책에는 새로운 구절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녀도 처음 보는 신성 주문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델은 잠깐 하늘을 바라봤다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인을 향해 한쪽 손을 뻗으며 나지막하게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의 여신. 거룩하신 나의 어머니. 여기 당신의 종이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내 앞을 가로막는 저 부정한 존재에게 그대의 진노를···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는 당신의 칼날을 내리소서!”
아델의 머리칼이 붉은색으로 물들며 휙 치솟았다. 동시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섬광이 그녀의 손에서 피어오르며 하늘로 솟구쳤다. 몸을 찌르는 불쾌한 기운에 거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놈이 아델을 노려보았다.
[이건 또 무슨 수작···]
거인은 불을 뿜으려다 몸을 우뚝 멈췄다. 난데없이 주변이 캄캄해졌기 때문이다. 녀석이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시커먼 어둠에 물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검은 태양에 균열이 쩍 가며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황금빛 성력이 넘실거리는 문장검이 대악마의 머리 위로 벼락처럼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