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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14화 (114/222)

114

두 번째

카라를 부르면 너무 늦는다. 이자벨은 피막 날개를 화악 펼치며 다급히 그에게로 달려갔다. 날개로 바람을 일으켜서 불을 끄거나 몸을 뒤덮어서 진화시킬 생각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이게 무슨···”

어마어마한 열기였다. 당장에 가까이 붙은 이자벨의 콧잔등으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멀쩡했다. 몸이 화염으로 뒤덮여 있는데도 전혀 고통스러워하거나 얼굴이 녹아내리지도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사자한테 고마워해야겠는데.”

벨로크는 몸에 붙은 불덩이들을 손으로 휙휙 털어대며 말했다. 이자벨의 시선이 돌아갔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요란스레 반짝이고 있었다. 괴물 사자의 배 속에서 나온 주문 걸린 반지. 용의 브레스도 몇 번은 막아낸다는 귀물. 화염 낙인의 반지. 그녀는 입을 헤 벌렸다가 다급히 그의 몸에 붙은 불을 같이 털어냈다.

“기막힌 우연이네요.”

그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한편으로는 이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불의 힘을 다루는 놈을 상대하기 전. 하필이면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무구가 손에 들어온다? 그것도 동네 뒷산에서 사람이나 잡아먹던 사자한테서? 정말 그럴 수도 있겠지. 어디 돈 많은 부호가 여행을 가다가 잡아먹혔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쓰게 웃었다.

벨로크는 이 엿 같은 세상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에 빵 한 개가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 이웃에게 밀고 당해 화형대로 보내지는 사람. 길을 가다 강도에게 칼을 맞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사람 등. 살기가 퍽퍽한 것을 넘어서 눈만 뜨면 죽어 나가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나름 이 세상에서 자수성가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고귀한 핏줄, 괴물 같은 힘과 이능, 넘쳐나는 재산과 동료들을 얻었으니까.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는 노력했다. 정말 목숨 걸고 싸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디서나 해답은 존재했던 것 같았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마치 게임의 가이드북처럼 말이다. 거기서 그의 기분은 한없이 추락했다. 자신이 이룩한 이 모든 것.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 누군가의 놀음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그를 보며 이자벨이 뭐라 말을 하려는 찰나. 다시금 쿠우웅 공동이 울렸다. 자세를 잡은 그가 시선을 돌렸다. 불덩이가 날아온 방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날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거대한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너. 하찮은 필멸자야. 재미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구나. 들어오라. 영혼이 타오르는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줄 테니까.]

거만하고 광포한 어조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릿저릿 아려오기도 했다. 물론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침을 퉤 뱉으며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던졌다.

한바탕 쌈작질을 하고 나면 이 복잡한 머리도 정리될 것이다. 그리고 놈을 죽인다면 아스타로트를 죽였을 때처럼 또다시 그 시커먼 공간 속으로 갈 수 있겠지. 거기서 여신을 만나고 물어볼 것이다. 자기 뒤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싸울 것이다. 그가 그렇게 결심했을 때. 남은 데몬들을 처리한 아델과 카라가 옆으로 다가왔다.

“방금 그 목소리. 녀석이지?”

카라는 얼굴을 조금 굳히고 있었다. 악귀와의 전투로 아무리 단련된 마법사라 해도 새로운 악에 맞서는 건 늘 새로운 두려움을 담보로 했다. 하물며 그것이 몇천 년 묵은 노괴. 대악마라고 까지 불리는 괴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녀의 어깨를 아델이 탁 잡았다.

“축배는 이 전투가 끝나고 나서 들도록 하지.”

아델의 손 역시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라는 그녀의 손등에 제 손을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은 부활시킨 데몬들과 골렘을 앞세운 채,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죽인 녀석들이 이곳의 병력 전부였는지. 혹은 왕의 명령 때문인지 앞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걸어가는 와중 카라는 쓰고 있던 후드를 펄럭거리며 말했다.

“피부가 타들어 갈 것 같아. 열기를 막아주는 옷을 입고있어도 이 정도라니···”

“그럴 만도 해요.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까딱하면 산채로 녹을 거에요.”

날개를 펄럭거리며 공중에서 정찰을 하고 있던 이자벨이 말했다.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벽처럼 둘러싸인 시체 데몬들 너머로 주변의 광경이 보였다. 지상에 있는 피라미드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있는 구조물이었다면 이곳은 울퉁불퉁한 자연동굴이었다.

그것도 양옆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용암으로 인해 사방이 붉은빛을 띠고 있는 공간이었다. 아델이 말했다.

“대체 이만한 크기의 땅굴은 어떻게 판 걸까요?”

그녀 역시 시선을 휙휙 돌리고 있었다. 수십 미터는 가뿐히 넘어가는 천장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천장을 받치고 있는 석주는 아까 봤던 데몬들의 허리통만 했다. 동굴이라면 구불거리며 좁아지는 공간도 있을 것이고 넓어지는 공간도 있어야 하건만, 이곳은 처음부터 끝까지 넓었다. 이상한 공간이었다.

글쎄. 내 기억 속에도 없는 정보인데. 벨로크가 어깨를 으쓱이자 카라가 답했다.

“왕국 전체에 부하들을 잔뜩 깔아놓고도 수백 마리의 친위병을 거느리고 있던 녀석이야. 이 정도 공간이야 삽질 몇 번이면 금방 만들어낼걸? 그게 아니라면 원래 있던 곳을 무단으로 점령한 거겠지.”

“후자라면 이곳도 고대인의 영역이라는 거네요. 우리가 지나쳤던 곳처럼 함정이 있지는 않을까요?”

“있다고 해도 아까 전 녀석이 던진 불덩이에 비한다면 장난감 수준이겠지. 우린 그것만 조심하면···”

카라가 말하고 있을 때. 풍덩 소리가 들렸다.

끄에에에엑!

시선을 돌리자. 시체데몬 하나가 용암에 녹아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두툼한 가죽과 살점이 순식간에 연기를 피워올리며 분해되었다. 지면이 녀석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기에 생겨난 일이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길수록 그런 현상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거 이대로 가다가는 놈을 상대하기 전에 빠져 죽겠는데? 이자벨 역시 그렇게 느낀 것인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이놈들은 여기다가 두고 골렘 몇 기만 가져가는 게 어떨까요?”

지능이 없는 시체 괴물 보다 카라로 인해 좀 더 섬세한 조종이 가능한 피조물을 데려가자는 뜻이었다.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아무래도 바위니까 여차하면 방패나 발판으로 쓸 수도 있겠지. 그나저나···”

말끝을 흐린 그녀가 벨로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몸 상태는 어때? 괜찮겠어?”

안 지쳤냐는 뜻인가? 그게 아니면 놈을 죽일 수 있겠냐는 뜻인가? 그는 흔들리는 카라의 눈동자를 보다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했다.

“문제없다.”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문제 있으면 어떡할 건데? 여기까지 와서 약한 소리를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건 이 몸뚱이의 성격과 위반되는 행위이며 전사로서의 마음가짐 또한 아니었다. 그는 늘 그렇듯이 악마의 대가리를 깨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조금을 더 걸었을까. 안 그래도 환하던 주변이 온통 주황색으로 가득 찼다. 피부를 짓누르던 공기 또한 한층 더 무거워졌다. 선두에서 걸어가던 벨로크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저 앞으로 시뻘건 호수 하나가 보였다. 그냥 호수가 아니었다. 새카만 암석들이 군데군데 박혀있고 연기와 기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죽음의 집합체였다.

그리고 그 중간··· 그가 시선을 올렸다. 이글거리는 눈동자 두 쌍이 일행을 오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했다. 데몬 군단의 주인이자 수천 살 먹은 요괴. 아리안 땅을 전복시키려는 자. 노왕은 입에서 불길을 뿜어내며 말했다.

[어서 오라. 중간계의 전사들아. 이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혔느냐?]

단순히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 대기가 쿠르르 울렸다. 목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마음은 한없이 나약해지려고만 했다. 일행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악마가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지상 생물체에 품고 있는 증오는 어느 정도인지.

물론 벨로크에게는 별 상관없는 얘기였다. 마음속의 증오라면 그도 넘쳐났다. 매번 목숨을 걸고 싸워나가야만 하는 이 현실에, 더럽게 짜고 냄새나기만 하는 이곳의 음식에 그리고··· 자신을 낯선 땅으로 보내 놓고 이를 즐겁게 관람하고 있는 정체 모를 무언가에. 그는 이 모든 감정들을 들고 있는 검에 담았다.

“뒤에 네 부하들 뒈져있는 거 안 보이던? 너도 곧 그렇게 될 거다.”

오래 산 악마는 웃었다. 천장에서 돌조각이 떨어지고, 불로 된 호수가 거칠게 요동쳤다. 녀석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다만 용 하나를 죽인 걸로 세상이 떠받들어주니 뭐라도 된 것 같나? 하찮은 자들아. 그 오만이 너희들의 목을 조르리라.]

땅이 쿠웅 울렸다. 녀석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였다. 20미터는 가뿐히 넘어가는 체구. 온몸이 시뻘건 화염에 뒤덮여 있는 불의 거인이 그 위용을 뽐냈다. 녀석은 한쪽 손을 용암에 담갔다. 이윽고 그 속에서 곳곳에 가시가 박혀있는 거대한 망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스타로트 그년은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었지. 하지만 천상신들의 추격이 두려워 고작해야 인간이나 요정 나부랭이들을 주무르며 놀았을 뿐이다. 멍청한 년. 그 정도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렇게밖에 써먹지 못하다니. 자. 여기서 질문이다. 나는 증오를 상징한다. 이런 내가 무슨 권능을 가지고 있겠느냐?]

노왕은 오랜만의 전투가 즐겁다는 듯 불로 된 입가로 호선을 그렸다. 일행은 그 누구도 놈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아델과 카라는 기도문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자벨은 공중을 부유하며 녀석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벨로크 역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몸에서 용암을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거인. 열기로 인해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놈의 가슴으로 장창을 쏘아냈다.

끼아아아악

칼라의 힘이 깃들어있던 창날이 시퍼런 빛을 뿌리며 쇄도했다. 하지만 불의 거인은 망치를 휘두르는 것만으로 이를 가볍게 튕겨냈다. 이윽고 표면이 얼어붙어 있던 무기를 손으로 툭툭 털며 말했다.

[칼라. 그 마녀의 힘이로구나. 흑마술사라는 놈이 멍청하게도 제 영혼을 사로잡히고 말았군. 옆에 있는 그 악마의 짓인가? 그래, 느껴진다. 너한테서 흑룡의 냄새가 진하게 나는구나.]

이자벨을 보며 눈을 빛낸 노왕은 한쪽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서 거센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요정의 감각과 몸속에 흐르는 악마의 피. 이 둘이 합쳐진 새로운 감각으로 그 불길을 피해냈다. 아니, 피해냈다고 생각했다. 노왕의 손짓에 따라 살아있는 듯 움직인 불꽃이 그녀의 등을 가격하기 전까지는.

“끄으으으!”

지상으로 추락한 이자벨이 데굴데굴 몸을 굴렀다. 살점이 녹아내리고 그 위로 기포가 보글거렸다. 고통에 겨운 얼굴로 신체를 재생시키고 있는 그녀의 앞을 벨로크가 막았다. 검이 번뜩였고 또다시 쏘아지던 불덩이가 깨져나갔다. 한기가 서린 검과 화염 낙인의 반지. 두 개가 합쳐졌기에 이뤄낸 결과였다.

[발버둥 쳐라.]

노왕은 용암의 호수 밖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손만 까딱거렸다. 사방에서 유황 냄새가 진동을 했다. 명확한 살상 의지를 가진 불덩이들이 일행을 향해 쇄도했다.

“나의 주. 나의 광명이여. 부디 나에게 저 칼날들을 막아낼 힘을.”

바닥에 검을 꽂고 한쪽 무릎을 꿇은 아델이 여신의 문장 방패를 띄워냈다. 황금색의 역장 위로 시뻘건 불꽃이 펑펑 터져나갔다. 아델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럴수록 역장이 흔들리며 그 빛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새끼가. 이자벨의 앞을 막은 채, 검을 휘둘러 불덩이를 분쇄하던 벨로크 역시 이를 악물었다. 이곳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불리한 공간이었다.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닌 이상 마그마 속에 있는 놈에게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었으니까. 이대로 있다가는 야금야금 체력을 빼앗긴 채, 숯덩이가 되어 타죽을 뿐이었다.

‘발을 디딜 지면이 없으니 칼을 휘두를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변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신비한 힘을 다루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일행에게는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마법사 카라가 안광을 번뜩이면서 제 지팡이를 치켜올렸다. 그녀는 높고 크게 주문을 외우면서 벨로크에게 눈짓했다. 이윽고 남은 한 손으로 동굴의 벽면을 손짓했다.

그는 독심술사가 아니었기에 카라의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기회를 만드려고 한다는 것은 알았기에 자세를 다잡았다. 마침내. 카라의 중얼거림이 끝났다. 이윽고 그녀는 문장 방패 바깥으로 제 지팡이를 내밀며 크게 소리쳤다.

“벤시의 숨결이여-!”

지팡이 끝에서 시퍼런 서리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노왕은 코웃음을 쳤다.

[빌려온 힘 따위로 나를 막으려 드느냐.]

녀석이 다시금 손을 뻗었다. 그 아래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기의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카라가 노리는 것은 놈의 몸체가 아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지팡이를 휙 꺾었다. 서리 광선이 동굴의 벽면을 물감처럼 수놓았다. 이윽고 그 표면을 얼려버리며 투명한 징검다리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 다리가 향하는 곳은 물론 용암부의 중심에 있는 노왕이었다.

“지금!”

카라가 소리치기도 전. 벨로크는 이미 훌쩍 몸을 날려 얼음으로 이루어진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표면은 더럽게 미끈거렸다. 한 발이라도 잘못 디뎠다간 아래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로 직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전사의 투지가 그의 발걸음을 종용했다.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차가운 이성 또한 그에게 명령했다. 지금 아니면 한칼도 못 먹일 거라고.

[하하! 유랑극단 같구나.]

노왕은 모아두었던 불꽃을 벨로크에게로 뿜어냈다. 서리로 조형되었던 다리가 순식간에 녹아들고 허연 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오감을 끌어올린 전사의 몸이 흐릿한 잔상만 남긴 채, 하늘로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노왕은 저 인간의 몸짓을 순간이나마 놓쳤다는 것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곧 손에 들린 제 무기. 가시가 숭숭 박히고 불꽃이 넘실거리는 망치를 들어 올렸다. 망치와 대검이 맞부딪쳤다. 벼락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공동에 지진이 일어났다.

노왕은 눈을 크게 떴다. 손아귀 너머로 느껴지는 힘이 상상 이상이었던 탓이다.

[이··· 무슨. 대,단,한··· 힘···이군.]

불의 거인은 무릎을 조금 굽히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눈앞의 인간을 자세히 살폈다. 풀어헤쳐 진 검은 머리와 고요하게 가라앉아있는 눈. 하지만 그와 대비되게 맹수처럼 으르렁거리고 있는 이빨. 놈은 공포를 집어먹기보다는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거 정말 인간인가? 하지만··· 거인은 화염으로 된 입가를 비죽 찢었다. 거인의 몸 주위로 다시금 불길이 이글거리며 동그런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그리고 떠오르는 화염구들의 목표는 당연히 검을 맞대고 있는 벨로크였다. 이에 저항하듯 그의 목에 걸린 붉은 반지가 화염을 머금으며 잔뜩 요동치고 있었다. 노왕은 다시금 씹어뱉듯 외쳤다.

[너··· 티탄, 만큼의, 힘을··· 가진, 전사. 전투는··· 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내, 보여주···]

벨로크는 놈의 중얼거림을 더 들어주고 싶지가 않았다. 녀석이 말할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불꽃이 아주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놈이 뻗어내려고 하는 화염구에 몸이 타 죽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지? 잠깐 고민하던 그는 곧 해결책을 찾아냈다. 벨로크는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줬다. 망치가 댕강 조각나고 대악마의 머리가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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