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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13화 (113/222)

113

결착

용살자의 벼락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늘에서 천둥을 떨구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망령의 칼날은 조금 달랐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냉기.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여인이 흐릿하게 서려 있는 검날. 벨로크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에 베이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리 좋은 꼴은 못 볼 거라는 걸. 모든 것을 불태워서 정화하는 아델의 성력과는 많이 다른, 정반대에 위치한 힘 같았다.

저주받은 검? 마검? 그런 느낌인데.

1초도 안 되는 시간. 짧은 상념을 거친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리에 산양 뿔을 달고 있는 놈. 얼굴이 악어처럼 된 녀석, 소의 머리에 부엉이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놈까지. 개개인의 특징은 조금 달랐지만 그 베이스는 비슷해 보였다. 6미터 넘어가는 근육질 덩치를 가진 괴물들. 하나하나가 팔을 휘두르고 발을 내려찍기만 해도 일행을 곤죽으로 만들 수 있는 악마들.

“잘못하면 여기서 뼈를 묻겠는데.”

얼굴을 굳힌 카라가 품을 뒤적거려 나머지 골렘 조각상들을 우르르 꺼내 들었다. 아델과 이자벨 또한 제 무기를 꼬나쥐며 서로 간에 등을 맞댔다.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일행의 모습에 데몬들은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거렸다.

“마녀 놈들은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고작해야 네 명한테 당한 건가?”

“문지기도 당했다. 오늘은 하쿰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멍청하군. 고작해야 인간들한테.”

“저거 봐. 악마다. 뿔 달린 요정이야. 좀 이쁘장한데? 저건 내꺼다!”

“그럼 난 저 성기사로 하지. 잘 조련시켜서 노예로 부리면 좋을 것 같거든.”

경박하게 웃어 재끼는 놈. 진중하게 말하는 놈. 그냥 혀를 내밀며 군침을 다지는 놈과 묵묵히 무기를 꼬나쥐고 싸울 태세를 하는 놈까지. 놈들은 숫자만큼이나 말투나 행동방식도 다양했다. 악마들로 이루어진 군대라고 해도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무슨 용병 새끼들 같은데. 벨로크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말하는 게 영 천박하군.”

그의 말을 들었는지 데몬들의 진영에서 다시금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천박? 최고의 칭찬이군.”

“하찮은 인간 놈이 뭐라는 거냐.”

“토막 내버리자. 죽-”

대검이 번뜩였다. 말을 내뱉던 녀석의 몸뚱이가 반으로 쩍 갈라졌다. 우르르 쏟아지는 피와 장기들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검을 휙 털었다. 비웃음을 흘리던 데몬들이 얼굴을 굳혔다. 그는 녀석들을 무시한 채, 냉기가 서려 있는 칼날을 힐끔 바라봤다.

방금 전. 녀석의 무기를 부수고 두툼한 살점과 뼈, 근육을 가를 때까지 약간의 반발감만 느껴졌을 뿐이다. 평소보다 힘이 더 적게 들었다는 뜻이다. 이는 곧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거 좋은데? 부과 효과도 있고 말이야. 어느새. 얼어붙어 있는 데몬의 시체를 콰드득 즈려밟으며 벨로크가 말했다.

“안 덤비고 뭐하냐?”

그가 말한 순간. 공기를 찢는 파공성 여러 개가 들렸다. 위쪽이었다. 그는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검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시퍼런 칼날에 서리가 끼며 보호막이 생겨났다. 통짜 뼈로 이루어진 화살촉들이 맥없이 튕겨져 나왔다. 날개를 펄럭거리며 공중을 부유하던 데몬들이 당황할 때. 벨로크의 어깨가 흐릿해졌다. 한 줄기 섬광처럼 뻗어 나간 왕의 장창이 활대를 부수고 한 녀석의 머리통을 꿰었다.

끄르륵!

단말마를 남긴 녀석이 공중에서 휙 떨어졌다. 이윽고 아래에 있던 데몬 한 놈과 부딪히며 나란히 바닥을 굴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당황하고 있는 녀석들의 날개와 머리통에 곧 붉은 깃털들이 돋아났다. 마찬가지로 지상으로 추락하는 놈들을 보며 이자벨은 보우건을 내렸다. 그리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으며 말했다.

“누가 네꺼라는 거야. 이 역겨운 새끼들아.”

그것이 시작이었다.

“죽여!”

“없애!”

더 이상 아군으로 인한 오인사격은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걸까. 아니면 눈앞의 인간들이 보통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을까. 데몬들의 군대가 파도처럼 쏟아져 왔다. 일행은 단 네 명. 반면에 놈들은 수백이다.

녀석들이 공간을 선점하고 밀어붙인다면 여덟 개의 손은 당할 수밖에 없다. 무기를 휘두를 공간을 얻기는커녕. 제 몸뚱이보다 훨씬 큰. 사방에서 쏟아지는 수십 개의 날붙이들을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하지만 일행은 평범한 전사들이 아니었다. 개개인이 특별한 비전을 지닌,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던 대악마를 사냥한 전사들이었다. 주문을 외우고 있던 카라의 옆에 선 채, 그녀를 지키던 아델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광휘여!”

아델의 손에서 샛노란 빛이 연신 번쩍거렸다. 여신의 축복이었다. 선두에서 검을 휘두르던 벨로크의 몸놀림이 한층 더 빨라졌다. 데몬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이자벨은 한 녀석의 시체를 방패 삼아 그 빛을 막아내고 있었다. 잠깐의 틈이 생겨난 그 순간. 카라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그녀는 손에 들린 조각상을 사방으로 휙휙 던졌다. 데몬들의 틈바구니였다. 이윽고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찍으며 말했다.

“맹목적인 나의 방패들아. 이리로 와라. 어서 와서 네 주인을 지켜라!”

데몬들의 틈바구니에 반투명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녀석들이 당황했다.

“뭐··· 뭐냐? 이건?”

“주문이다! 모두 조심-끅”

소리치던 녀석의 머리통이 뭉개졌다.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암석 거인이 휘두른 주먹 때문이었다. 오직 주인의 명령밖에 듣지 않는 살인 병기. 공포심이란 것이 결여된 마법 생물체. 카라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양팔을 치켜올린 아홉 기의 골렘이 사방에서 날뛰었다. 뼈로 된 도끼를 바위로 된 팔로 막아내고 다시금 제 손을 휘둘렀다. 이자벨의 쌍검에 발목이 잘려 울부짖고 있는 데몬을 발로 짓밟기도 했다.

쿠우우우

물론, 골렘들의 덩치는 데몬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날뛰었기 때문에 데몬들의 전열을 무너뜨리고 포위망을 약화시키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때. 골렘 한 기의 머리가 퍼석 깨졌다.

“별것 아닌 바윗덩어리다! 힘을 합쳐 놈들을 먼저 처리해라!”

갑작스레 연결이 끊기자 술자인 카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벨로크의 시선이 돌아갔다. 다른 놈들보다 머리 한 개 정도는 더 크고 달려있는 뿔도 네 개나 되는 녀석이었다. 명령을 내린 놈은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며 또 다른 골렘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었다.

“죽어어-컥”

그는 길쭉한 검을 휘둘러오는 데몬을 칼날 채로 동강 내버렸다. 주인 잃은 칼날이 바닥에 턱 박혔다. 원래라면 그도 이런 기행을 함부로 선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체력의 문제도 있었지만 데몬이라는 놈들은 보통의 악마들보다 훨씬 강했으니까.

주문 대신 스스로의 육체를 극도로 단련한 지하의 전사들. 혼자서 도시 하나는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괴물들. 칼라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데몬들에 대한 정보였다. 하지만 거인의 괴력과 망령의 칼날. 여신의 축복이 더해지자 벨로크는 한 번 휘둘러 한 놈의 머리통을 쪼개버릴 수가 있었다.

수십 년 혹은 수 백 년 동안 같이 싸워온 동료가 허무하게 당했다. 주위에 있던 놈들이 흠칫 놀랐다. 그 잠깐의 틈을 벨로크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땅을 박찼다. 목표물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뿔 네개 달린 놈이었다.

명령을 내리는 놈이니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녀석이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전쟁 와중 죽일 수 있다면 대가리부터 치는 것은 언제나 옳았다. 벨로크는 검을 횡으로 휘둘러서 앞을 가로막는 놈의 상체를 절단냈다. 이윽고 쓰러지는 놈의 무릎을 밟고 뛰어올라 한 쪽 손을 뻗었다.

부르르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한 장창이 손으로 휙 날아들었다. 그는 장창을 잡는 즉시 다시 한번 더 외쳤다.

“칼라.”

파형 무늬가 새겨진 날붙이에 시퍼런 룬이 하나 더 새겨졌다. 마찬가지고 망령의 저주 역시 서리기 시작했다. 벨로크는 어깨를 뒤로 당기며 벼락처럼 손을 뻗었다.

“굴릭! 판! 석상들부터 파괴해라! 그리고 마법사와 성기사부터 죽여! 나머지는 천천-큭!”

명령을 내리던 데몬이 말을 멈췄다. 목덜미가 서늘했기 때문이다. 숙련된 전사인 녀석은 다급히 망치를 가슴께로 끌어올렸다. 덕분에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던 장창의 궤도를 틀어낼 수 있었다.

“끄으으으. 이 개새끼가.”

옆구리에 박힌 날붙이를 보며 뿔 네 개 달린 데몬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무슨 마법이 걸린 건지 창날이 박힌 상처가 대번에 얼어붙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웬 인간 여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죽어죽어죽어

가지고 있는 힘만큼이나 제법 지위가 높았던 데몬은 이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저주였다. 그것도 웬만한 악마들의 솜씨를 가뿐히 능가할 정도로 지독했다.

“크아아아.”

지끈거리는 두통을 뒤로한 채, 데몬은 창날을 꾹 잡았다. 이윽고 힘을 줘서 그것을 뽑아내려 했다. 그 순간. 벨로크가 손가락을 튕겼다. 창대의 시퍼런 빛이 더욱 커지며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당황하고 있는 데몬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요상한 빛을 뿜어내고 있던 창이 펑 터졌기 때문이다. 녀석의 의식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상체의 반이 날아가고 내장에 얼음 조각이 박히고도 살 수는 없었다. 쿵 쓰러지는 시체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이거 쓸만하군.”

용살자의 벼락이 다수의 적을 상대로 큰 힘을 발휘한다면 이 능력은 일대일의 전투에 특화된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오러 블레이드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잠깐 고향에서 즐겨보고는 했던 양산형 소설들을 떠올렸다. 그 순간. 그의 뒤를 노리고 슬글슬금 다가오던 데몬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녀석의 공격은 닿지 못했다. 흐릿한 잔영을 남긴 채, 다가온 쌍검이 목덜미를 그어버렸기 때문이다.

“끄르르르.”

제 목을 부여잡으며 쓰러진 데몬은 곧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자벨이 손이 까딱거리자 되살아난 시체는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며 제 동족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놈들만 벌써 수십 마리였다. 이제는 살아있는 데몬들보다 시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더 많았다. 날개를 펄럭거리며 벨로크의 옆으로 착지한 그녀가 말했다.

“뭘 그렇게 넋 놓고 있어요? 아직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휘두르기도 전에 네가 먼저 처리했잖아? 그는 들어 올렸던 검을 내리지 않은 채, 훌쩍 몸을 날려서 한 놈의 몸통을 쪼갰다. 얼굴 가득 검은 피가 쏟아졌다. 몇 개는 입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회색빛 요정의 몸에서 나는 체취와는 차원이 다른 역겨운 악취였다. 에이. 시발. 그는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제 슬슬 끝나가는 것 같은데.”

벨로크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리저리 금이 가기는 했지만, 암석 거인들은 아직도 굳건히 버텨주고 있었다. 그 틈으로 시퍼런 뇌전이 번쩍였다. 카라가 뿜어낸 벼락이었다. 아델 또한 도끼를 휘둘러서 한 놈의 머리통을 쪼개고는 그에게 치유의 빛을 보내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팔다리가 토막 난 시체, 눈알을 흘리고 있는 시체, 배가 갈라져 내장을 뿌리고 있는 놈까지. 어디를 봐도 시체 밭이었다. 곧이어 녀석들 또한 이자벨의 손에 의해 부활한 후. 바닥을 기는 좀비가 되어 제 동족들을 물어뜯었다.

“으으으···”

“대체 이놈들은 뭐냐!”

이쯤 되자 죽음을 불사하지 않던 악마들의 군대라고 해도 전의를 다잡는 것은 무리였다. 외곽에 있던 한 놈이 시작이었다. 녀석은 눈치를 슬쩍 보더니 다급히 발을 뺐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리자 다른 놈들의 고개도 돌아갔다. 녀석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동족들을 잠깐 바라보면서 얼굴을 찌푸리다가 이내 줄행랑을 쳤다.

저놈들은 독전관도 없나 보군. 놈들을 추격해서 죽여야 하나? 그래야 우두머리를 사냥할 때도 좀 편해질 텐데. 그 순간. 공동이 쿠우우웅 흔들렸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굉음. 악마의 비명. 망자의 부르짖음 등을 모조리 잡아먹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와··· 왕이시여!”

“부디 진노를 가라앉혀 주십시오!”

데몬들은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흠칫 몸을 떨었다. 몇몇은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저 새끼들이 뭐 하는 거지? 그때. 벨로크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그가 옆에 있던 이자벨을 휙 밀친 순간. 석굴의 끝자락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아주 빠른 속도로 그를 집어삼켰다.

“벨로크!”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 그를 보며 이자벨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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