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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12화 (112/222)

112

결착

“어떻게 이곳까지 내려온 거-컥!”

당황하고 있는 마녀의 목에 퍽 화살이 꽂혔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그녀를 뒤로한 채, 이자벨은 허리춤을 매만졌다. 이윽고 화살 한 아름을 꺼내 탄약통에 철컥 집어넣고는 다시금 보우건을 발사했다. 붉은 깃털을 매단 화살촉들이 쉴 틈 없이 쏟아졌다.

“끄윽!”

“아아악!”

어둠에 잠긴 통로 너머로 숨넘어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악마가 된 요정의 탁한 안광이 음영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샅샅이 훑었다. 없다. 적어도 그녀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녀석은 안 보였다. 보우건을 어깨에 척 걸친 이자벨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망치던 녀석들은 이걸로 다 처리한 거 같은데요?”

“수고했다.”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준 벨로크가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윽고 바닥의 한 부분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부츠 발로 그곳을 꾸욱 눌렀다. 달칵. 달칵. 쿠구구궁. 고요한 석실 아래. 요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카라와 아델, 이자벨에게는 낯선 소음이었지만 그에게는 퍽 익숙한 소리였다.

기계장치. 맞물려 있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벨로크는 즉시 검을 휘둘러서 통로의 옆부분을 후려쳤다. 돌벽이 우르르 무너졌다. 안에 있던 화살촉들 역시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툭 부러졌다. 이걸로 일곱 개째인가?

“무슨 함정이 이렇게나 많아?”

카라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자 아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벨로크님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왔지 않나.”

“뭐, 그건 그렇지. 정말 다행이야. 만약 네가 그 마녀의 기억을 흡수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이 유적지의 중심부를 헤매고 있었을 테니까.

벨로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주와 고위 마녀들만이 안다는 비밀통로를 이용해(그가 생각하기로 그건 엘리베이터였다.)피라미드의 하층까지 내려온 건 좋았다. 데몬들을 부르기 위해 지하 깊숙한 곳으로 도망치고 있던 마녀들을 추격해 녀석들을 죽인 것 까지도 좋았다. 하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함정들은 사사건건 일행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꼭 지나쳐야 하는 것만 골라서 해제했는데도 시간이 꽤나 걸려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지.’

무너진 벽돌과 마녀들의 시체를 훌쩍 뛰어넘은 벨로크가 조금 더 걸음을 옮겼다. 뒤를 이어 한 손에 성력의 불꽃을 피워올린 아델과 지팡이에서 불빛을 뿜어내는 카라. 피막 날개를 다소곳이 접은 이자벨 또한 움직였다. 어둠에 잠겨있던 복도가 각각 주황색 흰색 등으로 알록달록하게 빛났다.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낡고 풍화된 갈색 벽에는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슴 혹은 그것을 사냥하는 인간. 태양 아래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요상한 가면 쓴 사내와 이를 숭배하듯 잔뜩 엎드려 있는 사람들까지. 고고학자들이 봤다면 눈동자를 빛냈을 광경이었다. 실제로 카라는 힐끔힐끔 벽화를 둘러보기도 했다.

물론, 그는 전사였기 때문에 그의 관심사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뻥 뚫려 있는 고대인의 흔적들 너머로 문이 하나 보였다. 기름 먹인 나무로 문짝을 만들고 그 위에 강철을 덧대 보강한, 성문처럼 보이는 문이었다.

영역표시 뭐 그런 거냐? 낡아빠진 주변 광경과는 대조되는 새것의 느낌. 그 기묘한 위화감이 아니더라도 벨로크는 알 수 있었다. 저 안에 놈들의 소굴로 통하는 통로가 있다. 노왕이라 일컬어지는 수천 년 먹은 악마. 시뻘건 불길 아래에서 눈을 빛내던 거대한 괴물. 두 번째 대악마.

놈은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칼라와의 대화를 보면 모르는 것 같은데. 녀석들은 아스타로트를 죽인 것이 게오르그 공작과 그의 기사단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델과 자신은 그저 여기에 한 숟가락 걸쳤을 뿐인 능력 있는 전사. 위협적인 칼날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렇다면 이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벨로크는 생각을 멈췄다. 문 저편에서 웬 기척 하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슬쩍 한 손을 들었다. 뒤따라오던 아델과 카라, 이자벨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타락요정은 제 호흡마저 멈췄다.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벨로크는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이 내지르는 쇳소리. 문의 방음 상태. 저 안에 있는 괴물의 귀가 얼마나 좋을지 잠깐 생각해보았다. 상념은 길지 않았다. 그 무엇하나 장담할 수 없었다.

굳이 저 안에 있는 괴물들이 아니더라도 당장에 이 건물 자체가 무너져서 죽을 수도 있었다. 혹은 전혀 색다른 위협이 나타나 일행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었다. 불확실성의 연속이었다. 이는 자기 손에 피를 묻혀가며 투쟁해나가야 하는 이 세계나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가득한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벨로크는 움직였다.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죽음과 가까운 기사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 자신을 채찍질했다. 새카만 강철 부츠가 땅을 박찼다. 그는 검을 휘둘렀다. 쾨지지직 소리와 함께 철판이 우그러졌다. 그 안에 존재하는 나무로 된 문짝마저 덜렁거렸다. 그는 내려찍었던 검을 회수하는 동시에 반파되어 있던 문을 강하게 걷어찼다.

“이게 무슨··· 웬 놈들이냐!”

난데없이 현관문이 박살 나고 웬 칼을 든 괴한이 집안에 난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머리에 사슴뿔 같은 것이 달려있고 남색깔의 거죽을 자랑하던 데몬은 잠깐 당황했다. 하지만 녀석은 곧 기민하게 반응했다. 옆에 세워두었던 거대한 공성추를 들어 올리고는 대번에 내려찍으려 한 것이다.

피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았고, 상대의 무기 역시 너무 컸다. 그래서 벨로크는 찌르기로 상대의 내려찍기를 파훼하려는 기행을 선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데몬의 큼직한 눈에 화살들이 퍽퍽 박혔다.

“크아아아아!”

눈에 이물감이 든다. 시야가 암전된다. 한순간에 양 눈이 멀어버린 데몬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럼에도 녀석은 문지기로서의 본분을 다하려고 했다. 기어이 손에 들린 무기를 휘두르려고 한 것이다. 녀석은 그럴 수가 없었다. 화살촉에는 맹독이 잔뜩 발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끄르르르···”

마귀할멈이 키웠던 독초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을 정제한 카라의 솜씨가 뛰어난 걸까. 6미터 넘어가는 괴물은 무기도 휘두르지 못한 채 허우적거렸다. 이윽고 버티다 못한 데몬이 한쪽 무릎을 꿇자. 녀석의 머리통으로 벼락처럼 도끼가 날아들었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 잃은 시체가 바닥에 몸을 뉘었다. 훌쩍 몸을 날렸던 아델은 도끼를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제 도끼날을 살폈다. 그간의 전투로 인해 이가 많이 나가 있었다. 조금만 더 무리한다면 금이 갈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잠깐 고민하던 아델은 기도문을 외웠다. 성력의 불꽃이 무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러면 조금 더 쓸 수 있겠지. 아델이 제 스스로 수를 짜낼 때. 이자벨 또한 다시금 화살을 채워 넣으며 다가왔다.

“독이 아주 효과가 좋네요? 설마하니 저 덩치를 비틀거리게 할 줄은 몰랐는데.”

카라는 피식 웃었다.

“뇌하고 제일 가까운 부분에 맞았으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당연해. 독기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테니까.”

“가급적이면 눈을 맞춰야겠네요.”

얼씨구. 이젠 나 없이도 잘 잡네. 이거 걱정 안 해도 되겠는 걸. 한층 강해진 일행을 보며 벨로크가 마음을 놓을 때. 아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는 방의 중앙에 뚫려있는 거대한 구멍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레버 하나가 놓여있었다. 역시나 손잡이부터가 큰 것이 인간을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니었다. 아델이 말했다.

“여기 움직이는 구조물이 있습니다. 크기는 조금 다르지만 저희가 조금 전에 사용했던 것과 같은 것처럼 보입니다.”

“엘리베이터.”

“네? 엘리··· 뭐요?”

어리둥절해 하는 아델을 보며 벨로크는 말을 정정했다.

“움직이는 도르래로군. 하긴 놈들의 덩치를 생각해본다면 이편이 효율적이긴 하지.”

6미터 넘어가는 괴물들을 위한 계단을 만드느니. 이게 낫기는 했다. 발걸음을 옮긴 벨로크가 레버를 휙 당겼다. 그러자 쿠르르르 소리와 함께 시커먼 구멍 속에서 발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문지기의 비명을 들었다면 아래에 있는 놈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거 내려가자마자 포위당할 수도 있겠는걸.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이자벨은 죽어버린 데몬의 사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카라가 말했다.

“이자벨. 배고파?”

“··· 절 대체 뭘로 보는 거에요? 전 돼지가 아니라구요.”

이자벨이 멀뚱한 표정을 짓자 카라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죽어버린 녀석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길래.”

이자벨은 카라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금 시선을 돌려 시체를 바라봤다. 그녀는 조금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녀들의 시체는 영 쓸모가 없었어요. 리치를 만드는 게 아닌 이상. 그년들을 부활시킨다고 해도 생전의 주문들을 사용하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건 다르죠.”

이자벨의 초록색 눈이 탁한 안광을 흘렸다. 요요하면서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카라가 말끝을 흐렸다.

“설마···”

그녀의 짐작이 맞다는 듯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한쪽 손을 뻗으며 외쳤다.

“데-파르마!”

그녀의 몸에 새겨져 있던 문신이 점멸했다. 검은 장갑을 낀 손 너머로 시커먼 연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목 없는 시체가 부르르 떨렸는데. 이는 안개처럼 꾸물거리던 안개가 시체에 스며들수록 강해졌다. 잠시 후.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식을 방해받은, 머리가 사라진 데몬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절규였다.

“아르-틸라”

이자벨이 손짓하자 기우뚱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은 바닥을 굴러다니던 무기를 손에 쥐었다. 이윽고 쿠웅 발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뒤편에 시립했다. 이자벨은 되살아난 망자를 툭툭 치면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고기 방패 정도는 되지 않겠어요?”

“방패치고는 좀 큰데?”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반쪽짜리 성기사는 망자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대신 앞으로의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물었다.

“최대 몇 마리까지 부활시킬 수 있지?”

이자벨은 제 가슴에 손을 대며 내면을 타고 흐르는 검은 피와 어둠의 마력을 가늠해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덩치가 덩치인지라. 그렇게 많이는 안 돼요. 한··· 수십 마리?”

그래, 원래 잡것들 처리하는 데는 네크로맨서가 최고지. 우두머리한테는 영 힘을 못 쓰지만 말이야. 그가 옛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

“그게 무슨··· 그 정도면 일인 군단 수준이잖아. 웬만한 강령 술사들 몇을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데?”

카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자벨 자신에게는 안된 일일지도 모르나. 그녀가 악마가 되고 나서 일행의 전력이 대폭 증가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웬만한 괴물을 능가하는 신체 능력에 대규모 강령술마저 부릴 수 있으니까. 그녀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지 쓰게 웃고만 있었다. 그 순간. 쿠우웅 소리가 들렸다. 아래에 내려가 있던 발판이 올라온 것이다. 벨로크가 고갯짓했다.

“이동하지.”

목 없는 데몬을 방패처럼 앞세우고 네 사람은 그 뒤쪽에 위치했다. 아델과 카라가 헬레나의 문양 방패와 반투명한 역장을 펼쳐냈다. 벨로크는 레버를 당겼고, 일행은 무저갱 같은 지하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발판은 쿠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것도 잠시.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완전무장을 갖춘 채, 살벌한 기세를 풍겨대는 수백 마리의 데몬들이었다. 주변을 가득 둘러싸고 있어서 주위 광경이 하나도 안 보일 정도였다.

왕국 안으로 잔뜩 퍼져있다며? 대다수의 병력이 빠져나갔는데도 이 정도야? 엿 된 것 같은데. 일행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 역시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검 손잡이를 꾸욱 쥐었다. 아무래도 온 힘을 다해야 할 것 같았다. 잘못 하다가는 우두머리를 만나기도 전에 괴물들의 파도에 압사당하게 생겼으니까.

망령의 칼날이라고 했지. 벨로크는 새롭게 생겨난 내면의 힘을 떠올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칼라.”

대검에 새겨진 룬이 시퍼렇게 번쩍였다. 망령의 귀곡성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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