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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착
망령의 칼날? 이건 또 뭐야? 갑작스럽게 새로운 힘이 떠오르자 벨로크는 당황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속. 차가운 회색빛의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냥 경험치가 많이 올랐고, 스킬이 생겼다는 것만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심령제압! 벨로크! 괜찮아?!”
상황을 알아차린 카라가 다급히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손가락을 펴 보이면서 말했다.
“이거 몇 개로 보여?”
세 개. 라고 말하려던 그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럽게 눈앞을 지나가는 어떠한 이미지들 때문이었다. 비천한 출신의 꼬마아이의 기억. 삐뚤어진 아이가 성인이 됐을 때의 기억. 시커먼 로브를 쓴 자들과 피 묻은 단검. 요상한 의식. 아주 짧은 찰나. 수십 배의 속도로 영상을 재생한 듯. 그는 한 사람의 생애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가엾은 아이야. 내 너를 어루만져주겠다. 나를 따라 오겠니?
-실의에 빠진 여인아. 이 비극적인 전쟁이 너의 모든 것을 앗아갔구나. 내가 남편과 아이를 다시 만나게 해주마. 나를 따라오렴.
-교단 놈들은 항상 그런 식이지.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을 죄라 칭하며. 오직 죽음으로만 너의 무고함을 입증하게 한다. 난 너의 억울함을 잘 알고 있다. 나와 함께 녀석들에게 복수하자.
전쟁고아, 남편 잃은 미망인, 시기 질투를 받아 마녀로 몰린 처녀 등. 삶이 나락까지 떨어진 자들을 모아 제 세력을 일궈낸 여자. 스콜라라고 불리는 마녀집회의 우두머리. 세상을 혼돈으로 물들이려던 괴인. 스스로를 마탑주라 칭하던 그녀의 이름은 칼라였다.
칼라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수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모았다. 실험체와 제물을 공급받기 위해. 재능있는 자들은 제자로 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성기사들의 추격을 피해 하수구로, 깊은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면서 기괴한 의식들을 벌였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망친 사람들은 추격해서 죽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피와 광기에 매몰된 사악한 자들만 남게 되었다. 칼라는 이와 같은 일을 수십 년 동안 반복하며···
그러니까··· 이게 그년의 기억이다. 이거지?
벨로크는 이 사태가 뭔지 알 것 같았다. 경험치가 올랐고 새로운 스킬이 생겨났다는 건 그 망령이 죽었다는 뜻이다. 즉, 그는 지금 망령의 힘과 기억을 흡수한 것이다. 눈앞에서는 카라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리 한편으로는 칼라의 생애가 지나갔다. 대부분이 끔찍한 실험과 어두운 주문들의 습득을 위한 노력. 어떻게 하면 세상을 파괴시킬 수 있을지 고뇌하는 시간들이었다.
미친년. 이거 언제쯤 끝나는 거야? 벨로크는 종래에 가서 어릴 때의 불후한 가정환경이 인격 형성에 끼치는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미지가 바뀌었다. 세모꼴로 솟은 피라미드 건물과 그 아래에 존재하고 있는 깊은 구멍. 지하던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건···’
벨로크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 순간에도 칼라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깊고 어두운 석실로 내려갔다. 이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얼굴을 훔치며 욕설을 내뱉는 칼라보다 주위의 광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도시 하나는 들어찰 거 같은 거대한 지하 공동 아래. 시뻘건 화염이 넘실거렸다. 아니, 그냥 화염이 아니었다. 새카만 암석들이 군데군데 존재하고 진득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주황색의 액체. 저건 마그마였다. 그리고 파괴적인 불꽃들의 향연 아래. 그것이 보였다.
-불과 증오의 지배자.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쌓아 올린 자. 데몬들의 왕! 지하의 다섯 권좌여! 내가 왔다! 당신과 피를 나눈 혈맹이자 영혼의 동맹자. 수십 명의 마법사를 거느린 나! 칼라가 말이다!
로브를 젖힌 칼라가 양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그 요란스러운 수식어에 혹은 주문쟁이 특유의 뇌리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그것은 눈을 떴다. 이윽고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호수처럼 쌓여있던 용암이 파문을 그렸다. 대악마는 입에서 불길을 뿜어내며 말했다.
-하찮은 인간아. 거만 떨지 말라. 네년이 가지고 있는 힘. 그 사특한 사술들도 지옥불 앞에서는 그저 무력할 뿐이니까.
칼라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비죽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가진 주문의 힘은 네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 천 년 동안 쌓아 올린 너의 육체와 힘은 그야말로 절륜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눈을 치켜뜨며 절벽 아래를 오롯이 내려다보았다.
-나는 네 아랫것이 아니다. 네 명령이면 죽음도 불사할··· 그런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진리의 탐구자요.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하는 구도자다. 나를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을 것이다.
노왕은 인간의 도전적인 눈동자를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금 불길을 내뿜었다. 그는 용암의 강에 몸을 푹 담그며 말했다.
-용건이 무엇이냐? 시덥잖은 일로 내 잠을 깨운 것이라면 너를 갈기갈기 찢어놓겠다. 그리고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영혼마저 태우리라.
-아스타로트가 죽었다.
툭 내뱉은 칼라의 말에 용암이 거칠게 요동쳤다.
-···다른 권좌가 손을 쓴 건가?
-아니, 인간이다. 인간들의 손에 죽었다. 수천 명의 정병들과 기사단. 그리고 수도에 존재하는 대교회들이 모조리 나섰다는군. 특히나 헬레나의 화신이라 불리우는 성기사와 대검을 든 사내의 활약이 대단했다던데···
-아무리 교회들이 나섰다고 하나. 요정이나 난쟁이 군대도 아닌 인간들의 손에 죽었다? 그 간교한 용이?
당황하고 있는 노왕을 보며 칼라는 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게 좋았다. 오래 산 괴물이라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저놈이 흔들리는 모습 자체가 좋았다. 한 꺼풀 벗겨보면 인간과 그리 다를 바 없는 것들이 말이야··· 속마음을 숨긴 그녀가 말했다.
-아드리아 왕국의 수도에 잠복하고 있던 부하가 보내온 정보다. 마귀왕이라 불리우던 전대 왕이 죽고, 여명 기사단의 주인. 북부 관문의 지배자. 게오르그 공작이 새롭게 나라를 다스리게 됐다는군. 아리안의 고위 귀족들이나 왕족들의 입에서도 허구헌날 이 얘기가 오르내리고 있다. 정보의 신뢰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노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죽은 동료 혹은 경쟁자에 대한 애도. 아니면 다섯 중. 넷이 남았으니 앞으로 급변하게 될 상황에 대해서 고심하는 듯했다. 그는 한층 더 약해진 불길을 입으로 내뿜었다.
-제 본신인 용의 비늘과 손톱을 단련할 생각도 안 한 채, 꼭두각시들이나 조종하고 다니니 그런 꼴을 당한 거겠지. 한심하군. 너. 주름살 가득한 마녀야. 용건은 그걸로 끝인가?
칼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 부하가 재밌는 걸 주웠다는군. 몸속에 대악마의 마력을 품고 있는 요정인데. 그년을 데리고 지금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모양이야. 그 요정을 이용한다면··· 비어버린 한 개의 옥좌를 다시 채울 수 있을지도 몰라. 아스타로트의 유지를 잇는 새로운 대악마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는 얘기지.
-네년들의 소꿉놀이에 내 부하들의 피와 살점을 내어달라 이 말인가? 격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쌓인다고 생각하나?
노왕은 코웃음을 치며 꺼지라고 말하려다가 곧 있을 천상신들과의 싸움을 떠올렸다. 대악마 까지는 못 되어도 시커먼 검은 피가 흐르는 괴물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다. 게다가··· 마법사란 놈들은 언제나 기상천외한 짓거리들을 벌이는 놈들이니 정말 새로운 대악마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면 자신은 다른 권좌들보다 더 높은 위치를 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울질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가 말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군. 내어주겠다. 허나 명심해라 마땅한 결과물이 없다면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을까? 오래 산 왕이여.
진하게 미소짓는 칼라를 뒤로한 채, 이미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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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거였군. 생각보다 거물이었잖아? 이 힘은 또 어떻게 쓰는 거지? 벨로크는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대고 있는 카라의 손목을 슬쩍 잡으며 말했다.
“어린애 취급은 그만둬라. 세 개다.”
“멀쩡한 것 같아 다행이네. 엄청나게 강력한 망령이라 혹시나 했는데.”
“혹시 모르니 일단 치료를 해드리겠습니다.”
다가온 아델이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기도문을 외웠다. 전투의 여파로 인해 구멍이 숭숭 뚫린 갑옷을 매만지고 있던 이자벨은 눈을 찡그리며 일행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성력이 뿜어내는 빛을 가까이서 마주하자 눈과 피부가 따갑고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치료를 끝낸 벨로크는 세 사람을 불러모아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용암 속을 제 마음대로 활보하는 괴물이라니···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네요. 녀석의 공격이 몸에 닿기라고 한다면 그냥 녹아버릴 테니까.”
카라의 마법과 아델의 성력으로도 막아낼 수 있을까?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해 이자벨이 고민할 때. 카라는 다른 쪽에 관심을 두었다.
“망령의 기억과 힘을 흡수한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네가 무슨 사람 잡아먹고 능력을 키우는 괴물도 아니고··· 설마, 네가 사용하는 그 벼락도 아스타로트를 죽이고 흡수했기에 생겨난 힘인 건가?”
잡아먹고 능력 키우는 건 맞는데? 사냥을 해서 경험치를 올리고 레벨업을 하면 더 강해지는 게 당연하지. 노력. 그에 따른 결과. 이 단순한 사실은 게임 속 세상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통념이다. 하지만 현실이 되어버린 게임. 데이터 쪼가리가 아닌, 그 나름의 신념과 의지를 가진 채 이세계를 살아가는 주민들에게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기도 했다.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괴물을 많이 죽인다고 해서 무조건 강해진다고 볼 수도 없다. 그냥 경험이 쌓여서 능숙해질 뿐. 오히려 뼈가 삭거나 팔 한 짝을 잃어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 그게 일반적인 거지. 그의 곤란한 표정을 읽은 걸까? 아델이 도끼자루에 묻은 피를 휙 털면서 말했다.
“벨로크님은 고대신의 축복을 받으셨다. 지금은 잊혀진 강대하고도 불가사의했던 존재들의 힘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해를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호기심 반. 의구심 반으로 카라가 벨로크를 바라볼 때. 아델이 그의 앞을 척 가로막았다. 그녀가 반파된 문을 고갯짓했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위층에서 난리가 났으니 필히 지하까지 그 소란이 전해졌을 터. 놈들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몰아쳐야 한다. 그렇지 않습니까? 벨로크님.”
반론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그 어투에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기사가 다 되었군.
“물론이다. 다들 준비는 됐나?”
“미안. 이거 진짜 고질병이야. 고쳐지지가 않네.”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린 카라가 안광을 반짝였다. 마녀의 사체에서 떼온 팔을 씹으며 입가를 우물거리던 이자벨 또한 들고 있던 고깃덩이를 홱 던졌다. 이윽고 허리를 뚜둑거리며 몸을 풀더니 보우건을 손에 들었다.
“준비됐어요.”
“다시금 축복을 내려드리겠습니다.”
한쪽 손을 들어 올린 아델이 빛을 흩뿌렸다. 효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카라 또한 숙련된 전사의 몸놀림을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네 사람은 반파된 문을 넘어 재빨리 건물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데몬들의 거주지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기 위함이다. 달려가는 와중 카라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 제대로 가는 것 맞아? 서두르는 건 좋은데. 조심해야 해. 메르는 고대인의 유적지야. 미로처럼 길이 얽혀있는 것은 예사에 스콜라 놈들이 수작질을 부린 함정들도 즐비할 거라고.”
그 순간. 제일 선두에 있던 벨로크가 카라의 팔을 홱 잡아끌었다. 그녀가 있던 자리가 푹 꺼지며 아래에서 빛이 번쩍였다. 파지지직 지나가는 벼락을 보며 카라가 진땀을 흘릴 때. 슬쩍 웃은 그가 제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잊었나? 이곳을 제집처럼 사용하던 년의 기억이 지금 내 머릿속에 있다.”
이 던전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함정의 종류는 무엇인지. 또 그것들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벨로크는 이 모든 사실들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는 뜻이었다.
“··· 진짜 사기적인 능력이네.”
카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