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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착
대검은 마녀의 몸통을 손쉽게 가르며 그 안의 내용물들을 쏟아내게 했다. 이런 놈들 수백이 덤벼봤자 금방 다 도륙할 수 있을 듯했다. 형체가 없는 망령 대신 육신이 존재하는 적을 베는 것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웠으니까.
그 순간. 벨로크의 감각이 경종을 울렸다. 카라 역시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다급히 한 쪽 손을 뻗었다. 골렘의 팔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다가왔다. 하지만 시체에 새겨져 있던 주문이 사출되는 게 더 빨랐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 찰나의 순간. 검을 방패처럼 앞세운 것이다. 심볼이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마녀의 시신이 뻥 폭발했다.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주저앉아있던 아델이 자리를 박찼다.
“벨로크님!”
그녀가 다급히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바닥에 검을 박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물론 멀쩡하지는 않았다. 쓰고 있던 투구는 어딘가로 날아갔고, 얼굴에도 옅은 생채기 몇 개가 생겨났다. 머리칼 역시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하지만 사지는 제대로 달려있었으니 이 정도면 양호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라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엉망이 된 석실 안. 표식이 새겨진 마녀들만 수십 명이었다. 카라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설마 저것들 전부?”
[그래. 전부 다 내 아이들이지. 내 영혼, 내 힘을 받아들인 나의 파편들! 내 계획을 방해한 너희들을 산산이 조각낼 맹목적인 추종자들!]
일제히 중얼거린 마녀들이 으르르 울었다. 그들은 양팔을 휘적거리며 무슨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저기에 있는 녀석들 전부가 마탑주 그년이란 말이지? 재주도 좋군.
“여신이여 당신의 힘을!”
“난 괜찮다. 지금은 저놈들을 막아내는 게 급선무다.”
벨로크는 치료의 주문을 외우려는 아델을 제지하고는 내면의 힘을 끌어올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 시체들과 함께 폭사하게 생겼으니까. 그의 어깨가 흐릿하게 움직였다. 벼락을 머금은 장창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물론 그것만으로 저 성난 파도들을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창날은 선두에 있던 마녀 하나의 가슴팍을 꿰뚫었을 뿐이니까. 일반적인 창이었다면 여기서 끝났겠지. 하지만···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뚫려있는 탑의 천장으로 시커먼 먹구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벼락을 불러들일 생각이겠지? 소용없다!]
코웃음을 친 마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부 다 똑같은 표정을 한 채, 천장과 벽면을 기어 오는 것이 여간 소름 끼치는 게 아니었다. 시발. 무슨 기계 같네. 그녀들의 손아귀가 몸에 닿기 전. 벨로크는 일행을 제 주위로 불러모았다. 그러고는 카라에게 말했다.
“골렘으로 벽을 만들어라!”
“알았어!”
그의 뜻을 알아차린 카라가 손짓했다. 5미터짜리 석상 거인이 몸을 웅크리며 일행을 감쌌다. 그 위로 마녀들이 쏟아졌다. 녀석들은 기생충처럼 골렘의 몸체에 들러붙었다. 이윽고 손톱으로 표면을 긁어내리다가 뻥 폭발했다.
쿠우우우우
석상이 기우뚱거렸다. 흙먼지가 우르르 쏟아졌다. 마녀들 중 몇은 네다리로 기어 오며 골렘의 틈 사이로 들어오려 했다.
“어딜!”
이자벨이 그런 녀석들을 걷어찼다. 여의치 않으면 제 몸을 방패 삼아 폭발을 막아냈다. 몸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그녀가 신음성을 내뱉었다. 시커먼 검은 피가 후두둑 튀었다. 아델 역시 여신을 부르짖으며 성력으로 된 문장 방패를 띄워 올렸다. 그녀의 뒤편에 위치한 채, 엎드려 있던 카라가 소리 질렀다.
“아직이야?! 얼마 못 버텨!”
이대로 있다가는 골렘이 무너져서 매몰되어 죽거나, 사이로 들어오는 놈들의 폭발에 휘말려 죽을 것이다. 그 순간. 카라의 머리카락이 부르르 떨리며 사방으로 솟았다. 피부 역시 저릿저릿했다.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한 손을 치켜올린 벨로크가 시퍼런 스파크를 피워내고 있었다. 그 크기나 밝기가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이번에는 좀 다를걸.”
전류가 흐르는 손을 꾸욱 쥔 그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포인트를 투자함으로써 한층 더 강해진 정신력. 이를 바탕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힘의 파동이 생각보다 강력해서였다. 아껴두고 싶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텅텅 비어버린 내면의 힘. 지끈거리는 머리.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
시커먼 먹구름이 쿠르르르 울면서 재차 번개를 토해냈다. 폭탄 터지는 소리 역시 연거푸 울려 퍼졌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이자벨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저 벼락의 세례가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맞아봤었으니까. 살갗을 불태우고 뼈를 부수며 안의 장기마저 녹여버리는 그 힘. 실력 있는 마법사의 뇌전 주문 몇 개가 모여들어야 낼 수 있는 그 힘.
‘위력이 어째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눈앞의 천재지변에 이자벨은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감탄했다. 저 사내는 대체 어디까지 강해지려고 하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기다란 귀를 꾹 막은 채, 이 재앙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삐이이이 울리던 이명이 점차 잦아들고 하얀 잔상마저 사라졌을 때. 이자벨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코를 킁킁거렸다. 고기 타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아델과 카라 역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벨로크는?”
반파된 골렘의 잔해를 해치고 그녀가 밖으로 나갔다. 석실은 엉망이었다. 발아래에는 온통 회색빛의 재들로 가득했다. 한때는 인간이었던 자들의 유해들. 이자벨은 이런 비정상적인 광경을 볼 때마다 한 번씩 느꼈다.
나와 같이 살아 움직이고 말을 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내 끝도 이렇게 초라할까? 그녀는 괜스레 돋아난 닭살을 매만지며 시선을 돌렸다. 석실의 끝자락에 두 개의 인형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마녀의 몸뚱이에 벨로크가 검을 꽂아놓고 있었다. 부릅떠져 있는 그녀의 두 눈을 이자벨은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끄르르르륵··· 이게 대체··· 이 무슨 터무니없는 힘이란···말, 인가··· 신의 사랑이라도 받는···]
“다 떠들었나?”
진물을 뚝뚝 흘리며 얼굴이 녹아내리고 있는 마녀를 보며 그는 손을 슬쩍 움직였다. 반으로 쩍 갈라진 마녀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잠깐 내면속 세계로 들어가 놈의 죽음을 확인해보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마탑주 그년의 말 대로라면 여기 스콜라에 소속되어있는 마녀들 전부가 그녀라는 뜻이었다. 그 말은 곧 아리안 전역에 퍼져있는 마녀들의 몸뚱이에 그녀가 기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 귀찮은 새끼. 이래서 주문 쓰는 놈들이 문제다. 언제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날 엿먹이거든.
“괜찮으십니까?! 벨로크님!”
벨로크는 고개를 돌려 슬쩍 손을 흔들어주었다. 벼락의 힘이 고갈된 것만 빼면 아주 멀쩡했다. 그 순간. 반으로 갈라져 있던 마녀의 눈동자가 비죽 굴러갔다. 이윽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안에 있던 시퍼런 연기가 그를 향해 쏟아져 왔다. 벨로크는 그 몸짓을 바라만 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저 바퀴벌레 같은 년을 확실히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시커먼 용을 잡고 그 힘을 흡수했을 때처럼.
[탐···난다! 네놈의 그··· 힘! 신한테··· 사랑받는 육체! 내가··· 가지겠다!]
괴물 같은 감각과 거인의 괴력을 가진 사내. 요정을 능가하는 검술을 가진 자. 그리고 정체불명의 힘을 폭풍처럼 다루는 자. 그녀에게 있어 벨로크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횃불과도 같았다. 탁한 영혼의 두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어느새. 여인의 형상을 띄고 있는 연기가 시퍼런 손아귀를 뻗었다. 마탑주의 망령이 그의 몸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회색빛 스모그가 가득한 콘크리트 더미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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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대체 어디야···?]
마탑주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려 했던 망령은 혼란스러웠다. 전사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그의 내면으로 빙의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곳은 대체 뭐란 말인가?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녀가 돌리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대박.
-개쩐다. 무슨 영화 찍나?
무슨 말이야? 이윽고 그 사람들은 이상한 쇳덩이와 유리의 혼합물을 들어 올리며 작은 섬광을 피어댔다. 망령은 흠칫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낯선 복식의 사람들. 탑처럼 솟아있는 건물. 살아있는 것도 아닌데 움직이는 쇳덩이. 이 모든 것들이 처음 보는 광경이다.
이곳이 이 사내의 심상 세계라고? 고서에나 나올법한 뒤틀린 세계가?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거기. 인간!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설명을···]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녀가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그녀를 보며 깔깔거리던 사람들의 표정이 석상처럼 굳었다. 요상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쇳덩이들 또한 우뚝 제 자리에 서버렸다. 마치, 온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녀의 혼란이 더 커졌다.
[시간 정지? 주문? 뭐야아아아아 이건 또!]
얼굴을 부여잡으며 절규하고 있는 망령의 귀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공기가 찢어 발겨지는 듯한··· 거대한 파공성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거대한 파충류의 눈동자가 자신을 오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타로트? 당신은··· 분명 죽었잖아? 아니, 그보다 여기는 그 사내의 내면속 세계인데.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당황하고 있는 망령을 보며 타락용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접으며 끌끌 웃을 뿐이었다. 비웃는 듯했다. 그녀가 한층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아스타로트. 하늘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세상을 기만하려 날뛰던 대악마여. 나한테 상황을 설명해다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스타로트라···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망령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밴시의 귀곡성이 주변에 휘몰아쳤다. 심약한 자는 듣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용은 무덤덤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이듯 영문 모를 말을 계속해서 내뱉었다.
“영광은 사라졌다. 저 드높은 천상신들을 끌어내리고 이 세상의 법칙을 바꾸려 한 나의 투쟁 역시, 덧없는 먼지 속으로 사라졌을 뿐이다. 나는 그저··· 아스타로트라고 불리우던 생물의 파편. 혹은 부스러기처럼 남아있는 의지의 일부분일 뿐.”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패배자처럼 말하는 용을 보며 망령은 생각했다. 심상 세계는 영혼의 거울. 곧 그 사람이 살아왔던 모든 일생. 쌓아왔던 격과 업을 나타낸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다.
‘그자의 살아온 환경··· 외딴 세계처럼 보이는 이상한 도시··· 죽어나자빠진 용. 신에게 사랑이라도 받는 듯. 그가 사용하던 기이한 힘···’
헉 소리를 낸 망령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이 벨로크라는 사내의 뒤에 있는 건··· 용이 끌끌거렸다. 허탈함이 잔뜩 느껴지는 어조였다.
“너. 수십 년을 산 사악한 마녀야. 알아챘나? 태양의 여신 헬레나. 달의 여신 셀레네. 죽음의 신 샤트라. 그리고 잠들어있는 고대신들까지. 아무리 날고 긴다 하는 신들도 이 사내의 뒤에 있는 존재에 비한다면 한낱 먼지일 뿐이다. 아니, 데이터 덩어리인가? 그리고 그 강대한 존재가 원하고 있다. 다섯 권좌의 죽음을 말이다. 데몬의 왕.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증오하던 그 늙다리도 곧 이곳으로 오겠구나.”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해일처럼 밀려오자 망령이 몸을 벌벌 떨었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마라··· 나약한 패배자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난··· 난 여기서 나가야겠다! 나는···”
떠듬떠듬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망령을 보며 용은 진하게 웃었다. 아까와는 달리. 입가가 크게 찢어지며 안에 있는 칼날들이 훤히 보이는 미소였다. 흉흉한 그 기세에 흠칫 놀란 망령이 뒷걸음질 쳤다.
[···?! 잠깐 지금 뭐 하는···]
“누구 때문에 힘을 좀 썼더니 배가 고파서 말이지.”
용의 몸체에서 파지지직 스파크가 일어났다. 이윽고 한 줄기 벼락이 된 용이 망령을 꿀꺽 집어삼켰다. 녀석은 입가를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날개를 활짝 펼치며 하늘이 떨어져라 포효했다.
크아아아아아!
[새로운 스킬 ‘망령의 칼날’이 생성되었습니다.]
넘실거리는 힘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