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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08화 (108/222)

108

결착

모래만이 가득한 황량한 땅에서 나 홀로 우뚝 솟아있는 건물은 굉장히 눈에 띄었다. 이를 보고 있던 카라 역시 말했다.

“피라미드? 저건 ‘메르’라고 불리는 고대의 건축물이야. 그 옛날 지배자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상징물, 혹은 별을 관측하기 위한 천문대나 신전 등으로 쓰려고 만든 건물이지.”

어쭈. 곧이곧대로 피라미드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양심에 찔렸나 보네.

“저곳에 놈들이 숨어있다는 말이죠? 창문 하나 없는 탑이라··· 입구도 한 개? 그 정도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슨 성 같네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던 이자벨이 말했다. 카라는 제 머리칼을 헤집으며 답했다.

“하르모아년의 말대로면 저 안은 완전히 미로야. 도굴꾼들을 막아내기 위한 고대인들의 함정들과 마녀들이 새겨놓은 사악한 주문들이 가득해. 한 마디로 극도로 위험하다는 얘기지.”

“그런 건 이미 경험해보지 않았나?”

시큰둥한 벨로크의 말에 카라는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잠깐 하늘을 바라봤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가 내리쬐는 태양이 더 뜨거운 느낌이다. 그렇다고 아래로 내려가서 살피자니 놈들한테 들킬 우려가 있다.

끄에에에-엑!

지금도 그들이 있는 창공 아래에는 안면조들이 날갯짓을 하고 있었으며, 탑 주변에도 작은 점들이 수두룩하게 찍혀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많이도 깔아놨군. 카라는 쓰고 있는 로브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야? 메르는 두꺼운 바윗덩어리들을 조각해서 쌓아 만든 건축물이야.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요새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고 정문으로 간다면 인사 대신 마법과 화살이 날아올 텐데?”

아델은 잠깐 제가 알고 있는 전술 등을 떠올렸다. 공성전의 기본원리. 최소 수비 측 보다 세 배는 많은 병력으로 몰아치기. 기각. 적들이 굶어 죽거나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이것도 기각. 음··· 그녀가 골머리를 쌓을 때. 이자벨이 등 뒤의 피막 날개를 펄럭거리며 말했다.

“제가 재빨리 침투해서 입구의 적들을 처리하는 건 어떨까요?”

카라가 우려의 말을 내비쳤다.

“위험하지 않겠어? 내부는 네 생각보다 훨씬 좁을 거야. 제대로 몸을 피할 곳도 없을 텐데···”

이자벨은 피식 웃었다.

“화살이나 주문 몇 개 정도야 몸으로 때우죠 뭐. 제 몸뚱이 잘 알잖아요?”

“만약의 사태란 게 있으니까···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그게 제일 괜찮은 생각 같은데... 음. 어떡한다.”

“그럼 다들 준비를··· 응? 왜 그래요?”

이자벨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아가려 할 때. 뒤에 타고 있던 벨로크가 그녀의 어깨를 탁 잡았다.

“훨씬 더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지.”

그는 일행이 지금 있는 위치가 탑의 꼭대기 위. 하늘이라는 것. 그리고 가속도가 붙은 검이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에다가 레벨업을 통해서 한층 더 강력해진 힘과 아델의 축복을 더 한다면? 이거 옛날 생각이 나는군. 탑의 꼭대기를 바라보며 벨로크가 검을 뽑아 들자 카라가 헉 소리를 냈다.

“너··· 설마하니 또. 그 짓거리를 할 생각이야?”

“그 짓거리? 아··· 그때 거대악어를 죽였을 때를 말하는 거죠? 확실히··· 대단한 기습이 되겠네요.”

낯빛이 창백해진 이자벨이 날개를 펄럭거리며 괴조에서 떨어져 나왔다. 카라는 그를 말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 인간은 말한다고 해서 들어먹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는 얌전히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나도 도울게. 마법으로 먼저 타격할 테니까. 약해진 부분을 내려찍어버려.”

안 말려서 좋군. 피식 웃은 벨로크가 아델을 보며 말했다.

“축복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델이 눈을 감으며 기도문을 외웠다. 높은 고도 때문에 집중이 필요한 것 같았다. 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여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한 채, 이자벨은 등에 메고 있던 보우건을 꺼내 들고는 화살을 장전했다. 잠시 후, 아델이 벨로크를 향해 한쪽 손을 뻗었다.

“위대하고 거룩하신 나의 태양이여··· 내 적을 단죄할 수 있는 힘을 내려주소서.”

그녀의 손에서 샛노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를 받아들인 벨로크는 꾸욱 쥐고 있던 검 손잡이를 조금 느슨하게 쥐며 내면에서 넘실거리는 힘을 다스렸다. 잘못하면 검을 부숴버릴 것 같았다. 이에 맞춰 카라 역시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갈색 눈이 진한 안광을 뿜어냈다.

카라는 지팡이를 휘휘 돌리면서 벨로크를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괴조의 고삐를 그러쥔 채, 다른 손에 들린 지팡이를 아래로 척 겨누었다. 목표는 물론 마녀들의 요람이라 불리는 탑의 꼭대기였다. 카라가 높고 웅장한 목소리로 주문의 마지막 단락을 외쳤다.

“모든 것을 꿰뚫는 빛이여!”

그녀의 수정 지팡이가 번쩍였다. 보랏빛의 광선이 지이이잉 쏟아졌다. 이 요사스러운 광채는 궤적에 걸리는 모든 괴물들을 살점과 내장 덩어리로 분해시켜버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탑의 꼭대기 부분을 강타하며 거대한 바위를 통째로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벨로크의 눈에는 이 모든 광경들이 자세히 보였다. 그리고 힘을 잃은 빛무리가 스르르 사라지며 거대한 홈이 파인 탑의 끄트머리도 잘 보였다.

“후우. 후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뚫렸나?”

거친 숨을 몰아쉰 카라가 눈을 빼꼼 뜨고 있을 때. 가볍게 몸을 일으킨 벨로크가 안장 위로 올라섰다. 괴조의 날갯짓으로 인한 흔들림에도, 높은 고도에서 몰아치는 바람에도 그의 자세에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그간의 고행으로 다져진 대단한 균형감각 덕분이었다. 그는 손에 들린 검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이윽고 슬며시 무릎을 접으며 내면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대검에 새겨져 있던 룬이 불타올랐다. 샛노란 스파크가 검신을 타고 흐르며 파지지직 소리를 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베어버릴 파괴적인 마법검이었다. 그가 말했다.

“길을 열겠다. 곧바로 따라오도록 해라.”

그는 한쪽 발로 괴조의 옆을 툭 찼다. 끄에에엑! 괴성을 내지른 녀석이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면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래에 있던 탑 역시 시시각각으로 크기가 커졌다. 어느 순간. 벨로크는 괴조의 등을 박차며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자신의 육체가 무사할 만큼, 검이 충분한 가속도를 얻을 만큼의 높이를 계산한 것이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부유감을 무시한 채,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쭉 뻗었다. 그렇게 한 줄기 검은 선이되어 돌진했다. 그 순간.

끄에에에엑!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나타난 괴물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녀들이 정찰을 위해서 풀어놓았던 안면조들이었다. 귀찮게 됐군.

여기서 놈들을 떨쳐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면 그 속도와 위력이 줄어든다. 혀를 찬 그가 벼락의 힘을 끌어 올리려는 찰나. 뒤편에서 쉭쉭 파공성이 들려왔다. 달려들던 안면조들의 눈과 가슴에 퍽퍽 붉은 깃털들이 박혔다. 이윽고 스르릉 쇳소리가 울리더니 울부짖고 있는 녀석들의 목이 뎅겅 날아갔다.

흐릿한 잔상만을 남기는 움직임에 벨로크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양손에 쌍검을 든 이자벨이 피막 날개를 펄럭거리며 괴조들을 썰어대고 있었다. 덕분에 살았군. 이제 거슬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한 줄기 빛살. 아니 작은 운석이 되어 탑의 끄트머리를 강타했다.

검신이 기기기긱 비명을 질렀다. 강철과 마찰하고 있는 바위 또한 쿠르르르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말도 안 됐지만, 이 무식한 싸움의 승리자는 날붙이였다. 어마어마한 가속도를 얻은 벨로크의 검이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숴버린 탓이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쿠웅 울리고, 산처럼 쌓여있던 바위들을 단번에 뚫어낸 그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슬리는 것이 없는 거로 봐서 탑 내부에 진입한 모양이었다. 그는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손으로 휙 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서적들과 수정구. 프릴이 달린 침대와 고풍스러운 의자가 놓여있었다. 누군가의 방으로 보였다. 그것고 꽤나 지체 높은 사람. 물론 쏟아져 내린 바위들로 인해 멀쩡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말이다.

벨로크는 시선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우르르 무너져 있는 바위들 사이로 하얀 손 하나가 삐죽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자수가 놓아진 고급스러운 로브를 입고 있는 걸로 봐서 이 방의 주인처럼 보였다. 대체 누구지?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석실의 문이 열리며 일단의 로브 쓴 무리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마탑주! 무슨 일입니까! 허억! 누, 누구-억!”

그녀의 로브 자락이 홱 젖혀지며 맨 얼굴이 드러났다. 스모키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빡빡 민 여인이었다. 그 머리에는 쇠붙이 하나가 박혀서 피를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 눈을 까뒤집은 여인이 털썩 자리에서 쓰러졌다.

“할리아!”

동료를 부르짖으며 소리치는 마녀, 주문을 외우는 마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는 마녀들을 보면서 벨로크는 웃었다. 스모키 여인이 내뱉었던 말. 마탑주라면 탑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당황하고 있는 저들의 표정과 상황으로 봐서 이 방은 그년이 기거하는 곳으로 보였다. 바위에 깔려있는 저 여자가 마탑주겠지. 그는 한쪽 손을 뻗어 마녀의 머리에 박힌 창을 회수하면서 말했다.

“대가리를 죽이고 시작하다니 이거 운이 좋은데.”

“이 개새끼가!

또 다른 로브 쓴 마녀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서 휘이잉 바람이 불어왔다. 벨로크의 눈에는 투명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칼날 몇 개가 보였다. 그 속도가 대단히 빨랐기에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뭐, 상관없지. 그는 입고 있는 갑옷을 슬쩍 보고는 검을 꾸욱 쥐며 앞으로 냅다 달려들었다.

“멍청한 칼잡이 같으니! 그대로 사지를 잘라서 흩뿌려 주-아니?!”

마녀는 화들짝 놀랐다. 주문을 얻어맞은 벨로크가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몽둥이라도 맞은 듯. 상체를 잠깐 움찔거렸을 뿐. 몸이 조각나지는 않았다. 조각난 건 그녀였다. 순식간에 다가온 거대한 칼날이 그녀의 머리통을 쪼개버렸기 때문이다.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힘 주문을 뻗어내 벨로크를 후려친 마녀 하나가 소리쳤다.

“미친! 주문을 막아내는 갑옷이다! 우리끼리는 무리야! 데몬들을 불러야-억!”

그 마녀 또한 끄르륵 소리를 내며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어느새. 뒤따라온 이자벨이 화살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녀들을 보면서 스산한 미소를 흘렸다. 이윽고 날개를 활짝 펼치며 연달아 보우건을 쏘아댔다.

“꺼어억!

“끄르륵!”

쏟아지는 화살비에 보호막 주문을 펼치지 못한 몇 명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쓰러진 그녀들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포션병을 꺼내려 했지만 이내 얼굴을 파랗게 물들이며 게거품을 물었다. 화살촉에 달린 독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도 벨로크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검이 닿을 때면 보호막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그저 유리처럼 깨지며 그 안의 주인 또한 조각날 뿐이었다.

아주 짧은 찰나. 순식간에 이뤄진 기습 덕분에 마녀들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동료들의 절반이 순식간에 당해버린 것이다. 남아있던 마녀들이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시발! 저년은 또 뭐야! 악마처럼 보이는데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지?!”

“잠깐만! 저거 하르모아님이 말했었던 실험체아냐? 대악마의 마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그렇다면 설마···! 대악마 사냥꾼?!”

몇몇 상황을 파악한 마녀들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여기에다가 카라와 아델이 괴조를 타고 합류하자 그녀들의 전의는 완전히 꺾여버렸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해! 데몬들과 합류해서 싸워야 한다고!”

마녀들의 잔당이 몸을 돌려 도망치려는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바위들이 쿠르르 움직였다. 이윽고 한기가 들어차며 소름 끼치는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설마하니 위에서 습격해올 줄이야.]

마녀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쳐 죽이고 있는 네 사람보다도 저 목소리 하나가 더 두렵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그녀들의 돌아가는 시선. 흔들리는 동공과 딱딱거리는 이. 벨로크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위 마녀인 하르모아가 그랬듯. 마탑주라는 저년이 망령으로 되살아 날 거라는 것쯤은 예상했으니까.

[헬레나의 성기사와 원소술사. 악마가 된 요정에 그냥 칼잡이까지··· 무슨 유랑극단이냐? 후후후, 나는 네놈들이 누구인지 안다. 오만하게도 스스로를 대악마 사냥꾼이라고 칭한다지? 게오르그의 아래에 빌붙어 한칼 거들었을 뿐인 잔챙이들이 말이다!]

목소리는 흐느끼듯 울었다. 그에 맞춰 석실에 서리가 끼더니 온도가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실력에 자신이 있어 여기까지 기어 들어온 모양인데. 네놈들의 그 힘. 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끄르르륵!]

그 순간. 번쩍! 벼락이 쳤다. 울부짖고 있는 망령을 보며 벨로크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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