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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03화 (103/222)

103

대사막

괴물 사자의 어깨가 팍 뒤로 꺾였다. 장창이 향했던 곳이 놈의 미간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한 반사신경이었다. 녀석은 깨개갱 소리를 내며 몇 번 뒷걸음질 치더니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윽고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톱니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르르

녀석의 거대한 덩치 때문일까? 사자는 웅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압감이 전혀 줄지 않았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쏘아질 것처럼 보이는 자세가 사뭇 위협적이었다. 완연한 전투태세를 갖춘 맹수를 보며 벨로크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다만 그의 눈빛은 겁에 질린 사냥감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망한 듯했다.

“저건 못 써먹겠군. 생각보다 튼튼하지가 않아.”

그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사자의 어깨를 보며 말했다.

“설마 녀석을 벌거벗겨서 갑옷으로 만드실 생각이셨습니까?”

한 손에는 성력의 불꽃을 다른 한 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던 아델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웃으면서도 태연하게 발을 움직여 괴물 사자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벨로크의 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또는 혹시나 모를 사자의 도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 걸음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에서 버티고 있는 벨로크 때문일까. 사자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앞뒤로 포위되어버렸다. 맹수의 누런 눈이 조금 흔들렸다. 당황한 듯했다.

크아아아아!

사자는 앞발을 잔뜩 접으며 다시금 흉성을 토해냈다. 마을 사람들 스무 명을 잡아먹은, 떠돌이 여행자들을 포함하면 그 배는 될법한 인간을 학살한 괴물의 위협이었다. 뭐? 어쩌라고? 벨로크와 아델에게는 소용없었다. 그냥 멀뚱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무기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아델이 피워낸 성력의 불꽃이 걸음걸이에 따라 흔들렸다. 쿰쿰한 어둠이 깔려있던 동굴의 그림자들마저도 살짝 춤췄다. 마침내. 맹수의 누런 눈이 세모꼴처럼 찢어졌다. 동굴의 바닥 역시 깊게 고랑이 파였다.

그 몸놀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명확했다. 상처를 얼마나 입든 이 정체불명의 인간들을 찢어 죽이겠다는 괴물의 의지였다. 사자는 정말 그렇게 행동했다. 몸을 스프링처럼 구부리며 재빨리 땅을 박찼다. 놈의 형체가 안개처럼 흐려졌다. 이 영악한 괴물은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좌우로 지그재그를 그리며 그에게 혼란을 주고는 끝내 동굴의 옆면을 박차며 소용돌이치듯 그를 내려찍었다.

벨로크에게는 소용없었다. 룬검이 번뜩였다. 맹수의 앞발이 잘려나갔다. 그는 슬쩍 몸을 틀어서 떨어지는 사자의 몸뚱이를 피해내고는 재빨리 뒤돌았다. 사자 역시 커허어어엉 비명을 내지르다가 바닥에 발이 닿는 즉시 훌쩍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잘려나간 앞발 때문인지 녀석은 균형을 잡지 못했다. 그냥 비틀거리며 바닥을 나뒹굴었을 뿐이었다.

몸놀림에 비해서 내구성은 영 별론데. 역시 저건 카펫으로나 써야겠군. 고개를 까딱거린 벨로크가 녀석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갔다. 사자는 엉망이 된 갈기털을 이리저리 흔들며 남은 앞발을 휘두르려 했다. 그 순간. 녀석의 남은 발 역시 퍽 잘려 나가며 피를 흩뿌렸다. 거대한 양날 도끼가 동굴 바닥을 부순 채, 틀어박혀 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델. 내가 맞았으면 어떡하려고 했나?”

“벨로크님이라면 가뿐히 피하셨지 않겠습니까? 저도 녀석한테 한 방 먹여주고 싶었습니다.”

얘가 점점 통통 튀네. 뒤편에서 들려오는 아델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검을 들어 올렸다. 시선을 내리자 한순간에 앉은뱅이가 된 포식자가 낑낑거리며 거친 숨을 흘려대고 있었다. 샛노란 맹수의 눈 역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개새끼를 보는 것 같군. 그러게 누가 사람들을 그렇게 잡아먹으래? 그는 습관적으로 검을 내려찍으려다가 멈칫했다. 이윽고 들고 있던 검을 휙 던졌다. 뒤쪽에서 걸어오던 아델이 이를 보고 물었다.

“벨로크님? 뭐 하십니까?”

“모피에 구멍이 뚫리면 조금 그럴 것 같아서.”

“강도가 약해서 갑옷으로도 못 쓰시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꾸욱 쥐며 아직까지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사자의 가죽을 보면서 생각했다.

대저택 정도 되는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 거라면 이에 어울리는 장식품 정도는 몇 개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만약에 원래 세상으로 못 돌아갈 때를 대비하는 거지. 이 정도 크기와 색감이라면 나중에 비상금이 필요할 때 팔 수도 있을 테니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낯선 생각을 하고 있던 벨로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괴물 사자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면서 말했다.

“바닥에 깔고 앉을 카펫으로는 쓸 수 있겠지.”

적당히 힘 조절을 했기에 사자의 머리가 박살 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컥 소리와 함께 눈을 까뒤집으며 절명했을 뿐이었다. 그의 입가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사자가 준 경험치가 생각보다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대악마 만큼은 아니어도 웬만한 괴물떼 잡은 것보다는 더 많았다. 생각보다 강한 놈이었나? 그는 잠깐 생각했다.

확실히 이런 동굴이 아니라 평야에서 마주쳤다면 좀 까다로웠을 것 같았다. 녀석은 자신의 창을 피해낼 만큼 재빨랐으니까. 아마 하이에나처럼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그들이 지치기를 노렸다가 부지불식간에 습격해오지 않았을까? 뭐, 이제는 뒈진 녀석이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녀석은 이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줄 재산이 되었다는 것과 그가 레벨업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스킬 포인트도 제법 모았으니 스킬업을 할 수 있겠는데. 뭘 찍지? 그때.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던 아델이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확실히 아름답긴 아름답군요. 벨로크님의 품격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아델은 그 말과 함께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뭘 할지 알겠다는 뜻이었다. 저 말투는 시간이 가도 안 고쳐지는군. 그 역시 피식 웃으며 장창을 불러들였다. 이윽고 창의 크기를 줄여 아델과 함께 사자를 해체했다. 핏물을 빼고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기는 작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벨로크가 별거 없는 자유 기사였던 시절. 아델 역시 아무런 능력 없는 종자였던 시절. 두 사람은 종종 짐승들을 사냥해서 얻은 모피를 팔아 생활비를 충당하고는 했으니까. 뭐, 내가 직접 겪은 기억은 아니지만··· 아니, 이제는 내 기억이라고도 할 수 있나?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녀석을 해체하던 아델이 느닷없이 소리쳤다.

“벨로크님? 이걸 보십시오.”

뭔데? 소화 되다만 시체라도 나왔나? 벨로크가 고개를 돌리자 시뻘겋게 물든 그녀의 건틀릿 위에 웬 시뻘건 고리 같은 게 놓여져 있었다. 살점과 피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반지로 보였다. 아델은 그것을 손으로 슥슥 문지르다가 피가 지워지지 않자 쯧. 혀를 차며 허리춤의 수통을 꺼내 물을 들이부었다. 그러자 반지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루비로 장식된 작은 금반지였다.

반지의 표면에는 이제는 익숙한(여전히 뜻은 모르지만)기이한 룬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시발. 벨로크는 간만에 RPG 게임을 하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동굴 트롤이든 만티코어든 하다못해 대악마든 이 엿 같은 괴물들을 끝없이 죽여도 그렇게 나오지 않던 금붙이가 웬 짐승 한 마리의 뱃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도 생긴 거로 봐서 주문 걸린 물건이었다. 하물며 악세사리니 대단히 귀한 물건일 것이다. 내가 운이 없는 건가? 이건 찾은 애가 가져야지. 쓰린 입맛을 다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 잘 어울리는군. 축하한다. 아델. 범상치 않아 보이는 물건인데··· 카라에게 가지고 가서 감정을 받아보자.”

아델은 손에 들린 반지와 벨로크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이윽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반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왜?”

“녀석을 죽인 것은 벨로크님이지 않습니까?”

"너도 한 손 거들었잖나?"

아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보고 가지라고 하셔도 안 가질 겁니다. 그리고···”

잠깐 말끝을 흐린 아델이 손에 들린 반지와 그를 번갈아 바라봤다. 이윽고 벨로크의 두 눈을 진하게 바라보며 한 듯 한층 높아진 어조로 말했다.

“벨로크님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그녀의 진중한 반응에 벨로크가 당황했다.

“내가 말이냐? 그야···”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화들짝 놀란 아델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아무튼 이 반지를 당신께 드리는 건 제 뜻입니다. 온전히 제가 생각하고 제가 내린 결정이니 그냥 받아주십시오."

그녀는 그 말과 함께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것 처럼 보였다. 빨개진 그녀의 귀를 보며 벨로크가 툭 내뱉었다.

"아델. 아직 다 안 벗겼는데?"

"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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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저게 대체 무슨 크기야! 진짜 괴물이잖아!

-저걸 단둘이서··· 아니, 두 분이서 잡았다고? 그야말로 샤트라께서 내리진 전사가 아닌가?!

-아아··· 마르셀. 드디어 네 원수를 갚게 됐어. 신이여 감사드립니다. 전사님들 감사드립니다!

집안에 꽁꽁 틀어박혀 있었기에 사자의 실제 모습을 못 본 주민, 운이 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녀석의 모습을 여과 없이 확인했기에 더 놀란 시민, 약지에 반지를 낀 채 울고 있는 미망인까지. 아나리크 마을의 주민들은 벨로크와 아델이 괴물 사자의 가죽을 짊어지고 오자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을의 고민거리가 해결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즐거워 보이는군. 이쪽은 죽을 맛인데 말이야. 시발. 괜히 들고 왔나? 사막을 횡단하며 수십 킬로는 될법한 짐을 들고 오는 게 오직 힘들었을까?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 아래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여관의 앞에 사자의 가죽을 홱 집어 던졌을 때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너머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무언가가 짤랑거리는 소리 역시 들렸다.

“잠깐 나와주게. 잠깐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벨로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키가 컸기에 얼굴이 시뻘게진 촌장이 모여든 시민들을 해치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게 아주 잘 보였다. 촌장은 곧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두 사람의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는 헉헉 대면서도 눈으로는 사자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놈이야··· 이 빌어먹을 새끼가 맞아. 이 덩치. 이 윤기. 내가 잊을 리가 없지. 보름달이 뜨는 밤. 입가를 피투성이로 물들인 짐승 녀석···”

노인은 욕설을 내뱉으며 사자의 가죽을 짓밟으려다가 멈칫했다. 가죽이 아주 깔끔하게 벗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뻗었던 발을 다시금 되돌리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이윽고 숨을 고르더니 벨로크와 아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정말··· 정말 고맙소. 이 개새끼를 잡아주어서 정말로 고맙소!”

평소 같았으면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아델은 잠잠했다. 벨로크 역시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업, 주문 걸린 반지, 아델과의 관계.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를 몰랐던 촌장은 참 한결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허리춤을 매만졌다. 그가 돈주머니를 건네며 말했다.

“여기 약속했던 보수금이오. 특별히 내 조금 더 넣었소. 자네들 덕분에 마을의 제일 큰 고민거리가 해결되었으니 말이오.”

벨로크는 돈주머니를 받아들였다. 묵직했다. 안을 확인해보자 동화부터 시작해서 은화, 금화와 웬 구리반지까지 아주 다양한 것들이 모여있었다. 마을에서 끌어모았다더니 아주 영혼까지 긁었군. 그는 잠깐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다가 촌장에게 도로 그 주머니를 내밀었다.

“왜? 왜 그러시오? 부족하오?”

“돈은 됐고. 이 마을에 혹시 괜찮은 무두장이가 있소?”

촌장은 당황한 눈치로 주머니를 다시금 받아들면서 말했다.

“20년 경력이 넘은 장인이 한 명 있기는 있지. 웬만한 도시의 길드장 못지않은 솜씨요.”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돈 대신 이 가죽을 좀 가공해주시오. 갑옷 말고 모피로 쓸 거요.”

“물론 가능하오. 하지만 정말 돈을 안 받아도 괜찮겠소?”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열광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중년 여인과 꽃을 든 아낙들. 고사리손을 오물거리며 웃고 있는 애들까지.

저번에 지나쳤던 그 마을과는 완전히 대비되는군. 왜들 그렇게 좋아해? 당신들끼리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또 나타나면 어떡하려고? 벨로크는 잠시 그 광경을 보다가 여관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괜찮소. 그 돈으로 실력 있는 용병이나 좀 고용하도록 하시오.”

연신 고맙다는 말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에 손님이 오지는 않은 것인지 여관은 고요했다. 주인마저도 안 보였다. 그저 카라만이 정체모를 과일을 넣은 음료수를 쪽쪽 대며 마도서를 읽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왔어? 꼴이 엉망이네. 바깥도 시끄럽던데. 너희들 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온 거야?”

뭘하긴 사냥하고 왔지. 레벨업도 했는데.

“여신의 성기사로서 고통받고 있는 마을주민들을 구원해주었다.”

싱글싱글 웃은 아델이 도끼를 내려놓은 채,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몸이 찝찝한지 씻을 모양이다. 벨로크 역시 그녀를 따라 갑옷을 벗었다. 그러던 와중 무언가가 퍼뜩 생각났다. 참. 그게 있었지. 그가 카라를 보면서 말했다.

“카라. 네가 봐줬으면 하는 게 있다.”

“응? 뭔데?”

“이 반지. 혹시 어떤 건지 알 수 있겠나?”

“뭐야? 주문 걸린 장비잖아? 이번에 나가서 주워온 거야?”

벨로크가 루비 반지를 내밀자 그녀가 이를 받아들여서 살폈다. 이윽고 대수롭지 않던 그녀의 표정에 서서히 놀라움이 드러났다. 카라가 반지를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거야?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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