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01화 (101/222)

101

대사막

이자벨의 시선을 따라서 일행은 눈을 굴렸다. 카라의 지팡이에서 나오는 빛 역시 돌아갔다. 수술실처럼 보이는 방안은 난장판이었다. 얇은 해부용 칼과 망치, 끈적한 액체가 든 유리병이 바닥을 잔뜩 수놓고 있었다. 중앙에는 위아래로 수갑이 달린 쇠침대가 거치되어 있었다. 굳어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세 사람은 알 수 있었다. 그녀한테 일어났던 모든 참상이 바로 이곳으로부터 비롯되었단 것을.

“역겨운 새끼들···”

“하르모아 이 개 같은 년. 좀 더 고문해줬어야 하는데.”

아델이 욕설을 내뱉었고 카라 역시 죽어버린 마녀들을 씹었다. 이자벨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몇 번 심호흡을 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잔뜩 어지럽혀져 있는 방의 구석에 그녀가 원하던 물건이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에 도르래와 탄약통이 달린 나무 뭉치. 난쟁이 전사의 유품이자 그녀가 사용하던 연발 보우건이었다. 용케 안 잃어버렸군.

“녀석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봤었는데. 다행히 멀쩡하네요.”

흐릿하게 미소지은 이자벨이 석궁에 묻어있던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이윽고 달려있는 끈을 이용해 등에 멨다. 그녀는 시커먼 피가 잔뜩 묻은 침대를 힐끔 바라보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일행을 향해 뛰어왔다.

“여기서 가져가야 할 건 다 챙긴 것 같아요. 어서 나가죠.”

일행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장소가 아니더라도 이런 찝찝한 장소에 더 있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실험실을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카라가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 연구실 부숴버리자.”

“굳이 힘쓸 필요가 있나?”

벨로크가 안면괴조의 시체들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카라가 대답했다.

“한탕을 노리는 모험가들이나 잠자리를 찾는 괴물들이 이곳의 사악한 기운에 이끌려 다가올 수도 있어. 그러면 제2의 흑마법사 혹은 더 강력한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럴 거면 우리가 떠나온 도시의 시체부터 청소해야 하지 않나? 거기에도 많을 텐데. 그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지만, 카라의 시선이 이자벨을 힐끔거리는 걸 보고 깨달았다. 이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란 것을. 안 좋은 기억만 남아있는 장소를 싹 다 불태워버리자 이거지? 이자벨 역시 이를 느꼈는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어요. 난 이제 괜찮은데···”

벨로크는 아무런 말 없이 검을 뽑아 들었고 카라 역시 안광을 빛내며 주문을 외웠다. 아델 역시 한 손 거들었다. 잠시 후. 요란한 빛과 함께 지면이 쿵쿵거렸다. 이윽고 거센 모래 먼지가 일며 우르르 무너진 실험실이 강렬한 화염을 토해냈다. 이자벨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한참이나 그 파괴의 현장을 지켜보더니 종래에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왜들 그렇게 기운들이 넘치는지··· 앞으로 갈 길이 먼데. 이래 가지고 어디 이동이나 제대로 하겠어요?”

이자벨은 가볍게 일행을 책망했지만, 목소리는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남는 게 체력이라서 말이지.”

검을 집어넣은 벨로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몸에 줄이라도 칭칭 감지 뭐.”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미간을 구긴 카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델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는 체력을 키워야 한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아델··· 마법은 검술과 달라. 주문이라는 건. 이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힘이라는 건 술자의 강력한 의지와 정신력을 이용해 세상을 속이는 일이야. 손에 들린 날붙이로 상대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게 전부인 세상과는 완전히 별개라는 얘기지.”

카라는 마법사로서의 교만함이 잔뜩 묻어나는 어투로 일장 연설을 했다. 아델은 시큰둥했다. 투구를 벗은 그녀가 귀를 파며 말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 모르나?”

“예시가 잘 못 됐잖아. 난 충분히 건강해. 다만 이건 과도한 뇌력의 사용으로 인한 과부하 상태로서···”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것을 웃으며 바라보던 이자벨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준비를 해볼까요.”

그녀는 벨로크가 내려놓은 안면괴조들의 시체앞에 쪼그려 않더니 가방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새하얀 뼛가루와 거뭇한 두개골을 꺼내 가루는 시체 위에 훌훌 뿌리고 두개골은 얌전히 올려놓았다. 그 기이한 행태 때문일까? 아델과 얘기하고 있던 카라의 시선이 대번에 돌아갔다. 그녀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사자부활의 주문. 저렇게 쓰는 거로군. 꽤나 수고스럽잖아?”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아요. 좀 더 튼튼하게 만들려고 보강하는 중이죠. 우리는 갈 길이 머니까.”

그녀는 새빨간 피가 담긴 쟁반을 한 손에 든 채, 다른 한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얄쌍한 검지 손가락을 붓 삼아 시체 위에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다. 창백한 고깃덩이 위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질수록 주변의 온도가 낮아졌다. 나중에 가서는 불길한 색으로 꾸물거리는 연기마저 뿜어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보면 기겁하겠군. 왜 사악한 주문을 쓰는 자들이 교회의 공적이 되는지 알 것 같은데.

이 괴기스러운 의식을 지켜보던 벨로크의 머릿속에 난데없이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옛날 로벤에서 사교도를 토벌할 때도 이랬던 것 같았다. 로브 쓴 마녀 구불거리는 칼. 산제물과 의식. 양 머리의 악마.

그때는 저렙이었지. 지금의 난 어느 정도지? 잠깐, 이 게임의 만렙은 몇이었더라? 점점 흐릿해지는 모니터 바깥의 기억에 벨로크가 인상을 찌푸렸을 때. 스으윽 붓질하는 소리가 끝났다. 쪼그려 앉아있던 이자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손가락에 묻어있는 피를 쪽 빨고는 말했다.

“다 됐어요. 이제 일으켜 세울게요.”

그녀가 한쪽 손을 내밀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청력이 좋은 벨로크는 이자벨의 중얼거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을 수 있었는데. 카라의 높고 선명한 주문과는 조금 다른(이따금씩 뜻도 알 수 있었던)사뭇 기괴한 음성이었다.

“데-파르마!”

이자벨이 강하게 소리친 순간. 그녀의 몸에 새겨져 있던 시커먼 문신이 빛났다. 이에 동조하듯 피로 그려진 마법진 역시 점멸했다. 동태눈깔처럼 죽어있던 악귀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무줄처럼 늘어져 있던 혓바닥 역시 쏙 들어가며 크르르 숨소리를 냈다. 진짜 부활했네. 벨로크가 헛웃음을 지을 때. 안면괴조가 소리 질렀다.

끄에에에-엑!

“잠깐! 이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괴물의 흉흉한 기세에 아델이 반사적으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카라 역시 벨로크의 뒤로 숨어들었다. 그러게. 이놈 이거 정상인가? 그가 주먹을 들어 올리고 인간거죽이 달린 악귀들이 날개를 접었을 때. 이자벨이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아르-틸라!”

녀석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번들거리던 눈동자 역시 인형처럼 생기를 잃어버렸다. 후 한숨을 내쉰 이자벨이 손을 휙 저었다. 그러자 두 마리의 안면괴조가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요. 나도 이론으로만 알고 있었지.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이라 약간의 실수가 있었나 봐요.”

실전은 언제나 다른 법이지. 그나저나 태우고 가다가 떨구는 건 아니겠지? 카라 역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자벨을 향해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조금 낮게 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자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완전히 지배에 성공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당신들의 의견을 존중할게요. 그럼 두 명씩 나뉘어서 타도록 하죠.”

세 여인이 각각 눈을 굴리며 벨로크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결국 벨로크와 이자벨, 카라와 아델이 같이 타게 되었다. 성기사인 아델과 악마인 이자벨을 같이 태우기에는 꺼림칙했고, 신체적인 능력이 약한 카라를 이자벨과 태우는 것 역시 그랬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이자벨과 다르게 침울한 얼굴을 한 아델과 카라는 낙타가 매고 있던 짐을 괴조의 등으로 옮겼다. 그들은 곧 괴물의 목에 밧줄을 걸어 간이 고삐까지 만들고는 한쪽을 힐끔거렸다. 아델이 말했다.

“낙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유를 되찾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몸이 가벼워져서 기쁜 건지. 낙타들은 푸르르 웃으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카라는 조금 씁쓸한 기색으로 남는 물주머니를 조금 가져와 녀석들의 입에 부어주며 말했다.

“이대로 둔다면 굶주린 괴물들의 배 속을 채워주거나 도적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지. 운이 좋다면··· 그래, 한탕을 노리는 상단의 짐을 끌게 될 수도 있겠어.”

그 도시에 놔두고 와야 했을까? 그렇다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 많은 짐을 우리가 끌고 와야 했겠지. 도시에 남았다고 해서 녀석들이 살아남았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벨로크는 짙은 속눈썹을 가진 짐승. 축 처진 듯하면서도 초롱거리는 녀석들의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몇 달 동안 그를 태우면서 골병이 걸려서 죽나. 아니면 여정 도중 피치 못할 괴물들의 습격으로 죽나. 다 같은 죽음이었다. 그럴 바에 자유를 만끽하다 쓰러지는 것이 더 좋겠지. 그는 낙타들을 향해서 다가갔다. 이윽고 손바닥을 슬쩍 움직여서 녀석들의 볼기짝을 후려쳤다.

히히히힝

그의 손이 매웠던 건지. 아니면 훈련받은 대로 움직인 건지. 낙타들은 거칠게 투레질하며 이리저리 흩어졌다. 동그런 족적을 남기는 토사와 흩날리는 흙먼지를 뒤로한 채, 벨로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했다.

“갈 길이 멀다. 이만 출발하도록 한다.”

그는 이미 올라타고 있던 이자벨의 등에 상체를 기대며 괴조의 고삐를 그러쥐었다. 침울한 기색의 카라와 아델 또한 괴조의 등에 올라탔다. 이자벨이 다시금 주문을 외우며 손을 휘저었다.

끄에에에-엑!

인간거죽을 쓴 괴물이 고개를 치켜올렸다. 이윽고 거대한 날개를 펄럭 거리며 맹금류의 발을 탁 박차자 지면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으아아아악!”

카라의 비명과 얼굴 가득 느껴지는 바람을 뒤로한 채, 일행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마녀들과 데몬들의 거주지가 있다는 룽겐 대사막의 부근. 아리안 왕국의 수도였다.

#

출세를 위해 고향을 등지고 떠난 젊은이는 이곳을 별거 없는 촌동네라 불렀다. 오랜 타지생활에 지쳐 녹초가 되어 돌아온 노인네는 이곳을 하나뿐인 마음의 안식처라 불렀다. 도시라고 불리기에는 규모가 작았으며 마을이라고 불리기에는 애매하게 큰. 요상한 마을 아닌 마을의 이름은 아나리크였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 만한 것을 뽑는다면 이 별것 없는 마을의 위치였다. 룽겐 대사막의 중간쯤에 위치했기에 그곳을 횡단하는 여행자나 고행자들을 위한 몇 안 되는 쉼터 역할을 한다는 것일까?

뭐, 그 약간의 여행자들마저도 요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왕자들의 왕위분쟁과 범람하고 있는 괴물들로 인해 발길이 뚝 끊겼지만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은 법이었다. 파리만 날리고 있던 여관주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매우 특이한 복장을 한 이방인들이었다.

거대한 대검을 매고 있는 사내와 고양이 같은 눈매에 흉흉한 도끼를 든 여인, 붉은 머리칼의 지팡이를 든 여인 하나와 병이라도 앓고 있는지 후드와 붕대를 꾹꾹 눌러쓰고 있는 가녀린 체구의 사람까지 총 네 명이었다.

손님이 고팠던, 정확히는 그들이 가진 돈주머니가 급했던 주인은 네 사람의 수상한 행색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여관주인이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나리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요. 룽겐대사막을 넘어가시려면 꼭 저희 마을에 들리셔야합죠. 암요.”

거대한 체구의 외국인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손가락을 튕겼다. 여관 주인이 이를 잽싸게 받아들고는 확인했다. 금화였다. 주인의 입가가 흐뭇하게 미소지을 때. 사내가 말했다.

“우선 맥주 네 잔. 그리고 먹을만한 요깃거리들도 좀 내오도록.”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관주인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나자. 붉은 머리의 여인이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모래 먼지가 가득한 머리를 털어대며 말했다.

“중간에 일이 조금 꼬이는 바람에 수도를 지나쳐 이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차라리 잘 됐어. 이 방법이 최선같아.”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 네 말마따나 굳이 그곳으로 갈 필요가 없더군.”

그냥 놈들의 본거지로 곧바로 쳐들어가면 되는 거였어. 뒷말을 숨긴 그가 고개를 까딱거릴 때. 온몸을 꽁꽁 가린 이자벨 역시 입을 열었다. 붕대 때문에 약간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아요. 경비병이 사라진 집을 터는 것만큼 손쉬운 일은 없죠.”

후드 아래의 그녀가 탁한 안광을 빛내며 웃을 때. 도끼를 벽에 세워둔 아델이 식탁에 팔을 올렸다. 아델은 턱을 괸 상태로 말했다.

"언제쯤 치실 겁니까?"

"몸만 회복되는 대로 가야지."

벨로크는 약한 스파크가 감도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드높게 치솟은 탑 아래에 그들의 목표가 있었다. 이제야 두 번째 보스로군. 길고 길었다. 이 새끼들아. 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하며 지난 이주 간의 여정을 떠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