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98화 (98/222)

98

구원

꺼슬거리는 감촉이 제일 먼저 느껴졌다. 뒤를 이어 비릿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입속으로 침범했다. 벨로크도 몇 번 먹어본 적 있는(자의는 아니었지만) 악마의 피맛 이었다. 하지만 곧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농밀하며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입을 습격한 물컹거리는 살덩이가 만들어내고 있는 효과였다.

“으으음.”

벨로크의 목을 휘감고 있는 이자벨의 팔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양팔에 힘을 가득 주며 뱀처럼 더 달라붙으려 했다. 다소곳이 모아져 있던 다리 또한 슬금슬금 벌어지며 그의 허벅지를 사로잡으려 했다. 얘가 왜 이렇게 대담해졌어? 그보다 이대로 있다가는 큰일 나겠는데.

-아델. 혹시 모르니까 조금만 더 단단하게 묶어줘. 저년을 끌고 가야 하니까 말이야.

-쌍년아! 얌전히 있지 못해?

[끄으으으! 그마안!]

아델은 흐릿해진 하르모아의 영체에 성력의 채찍을 단단히 묶어내리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카라는 허깨비 같은 그녀의 몸체에 통하지도 않는 따귀를 날리거나 욕설을 뱉고 있었다. 카라가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벨로크! 이쪽은 끝났어. 너희 쪽은 어때?”

초월적인 오감으로 뒤편에 있던 상황을 실제처럼 그려내고 있던 벨로크는 다급히 이자벨의 혀를 깨물었다.

“아윽!”

이어서 그의 손과 발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똬리처럼 매달려있던 이자벨의 팔과 허벅지를 걷어내고 그녀를 처음 안았을 자세 그대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의 강인한 육체는 이 모든 일을 1초도 채 걸리지 않은 채 해내 버렸다.

시발. 일단 급한 불은 끈 건가. 벨로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이자벨은 가느다란 실선이 남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눈을 슬쩍 감았다. 전투의 여파로 기절한 건지. 그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아델과 카라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든 건지. 뭐가 됐든 악마가 된 이 요정 아가씨는 한층 더 요망해진 것이 분명했다.

“치사하게 나한테만 맡겨두는건가?”

벨로크가 중얼거리자 이자벨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품에 안긴 그녀를 보며 피식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끝났다. 이자벨도 무사하다.”

“정말?! 다행이야! 난 네가 이자벨을 죽여버리는 줄 알고···”

이 여자가? 카라는 환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두 사람을 살폈다. 아델 역시 불의 채찍으로 하르모아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돌아갔다. 벌거벗고 있는 이자벨과 이를 안고 있는 벨로크를 향해서였다. 아델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 벨로크님. 제가 이자벨을 안을까요? 아무래도 같은 여자끼리 그··· 하는 것이 편하지 않을런지.”

뭘 하는데? 벨로크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카라가 먼저 말했다.

“아델. 음. 나도 그게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너는 계속 하르모아를 속박하고 있어야 해. 성력의 힘이 아니면 망령은 언제든지 달아날 수 있으니까.”

“남은 손으로도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아델이 한쪽 어깨를 휙휙 돌리며 말했지만 카라는 후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이자벨에게로 향했다. 아까 전 피막 날개가 돋아나고 덩치가 더 커진 괴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시체마냥 회색빛이었고 머리에는 뿔이 달려있었다. 그녀는 요정이 아니다. 악마다. 카라는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이런 말 하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이자벨과 너는 이제 극상성이야. 너는 여신의 성기사지만 이자벨은···”

“아···”

두 사람은 말을 아꼈다. 이윽고 그들 사이에 침울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하르모아의 신음성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자벨의 몸의 떨림이 심해지고 눈가가 파르르 흔들릴 때. 벨로크가 그녀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일단 좀 쉬도록 하지. 긴 하루였으니까.”

“맞아! 더럽게 긴 하루였어! 그래, 어서 움직이자! 여관으로 가서 따뜻한 불도 좀 쬐고 맛난 것도 먹자고!”

카라의 의도적인 호들갑과 함께 세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강철 부츠가 철그럭 거리고 가죽 장화가 또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들이 움직이는 대로 잿더미가 부스스 흩어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시퍼런 달빛에 비치는 거무튀튀한 찌꺼기. 그것들은 잔재였다. 몇백 년 역사를 가진 오아시스, 이곳에서 대대손손 살아가던 주민들, 사람 잡아먹는 악귀들과 음험한 마녀들이 남긴 편린. 일행은 미약한 흔적만이 남아있는 그 재의 폭풍을 묵묵히 걸어 나갔다. 목이 간질거리고 눈이 따끔거려도 네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어찌 됐든 그들은 이번에도 살아남았으니까.

#

벨로크가 웬 뿔 달린 악마를 안아 들고 아델이 온몸이 투명한 여인을 채찍으로 묶어 끌고 왔지만, 여관은 고요했다. 욕설을 지껄이며 스트레스를 푸는 취객이나 눈을 크게 뜨며 비명을 지를 사람들이 다 죽어버린 탓이다.

“이 도시에서 제일 좋은 여관일까? 시설이 꽤나 괜찮은데?”

두툼한 양탄자가 깔린 바닥을 걸으며 카라가 중얼거렸다.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게 나무 바닥이 비명을 안 지르는 것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아델 역시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나 복층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널따란 내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을 치우고 이불을 깔 필요가 없겠군. 게다가 각 방도 쓸 수 있겠어.”

이곳에도 물론 내장이나 떨어진 팔 같은 희생자들의 흔적이 즐비했지만,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았다. 카라는 입고 있는 가죽갑옷을 훌훌 벗어던지고는 땀에 젖은 면바지와 티를 펄럭거렸다. 아델 역시 도끼를 내려놓고 쓰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채찍을 꾹 쥔 채, 축 늘어진 단발머리를 찰랑 거라며 말했다.

“벨로크님.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하기 전에 이 년부터 어떻게 해야 할 듯싶습니다.”

그녀가 살짝 손목을 움직이자 하르모아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몸의 크기도 점점 줄어들고 형체로 흐릿해지는 게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저 새끼한테는 갚아줄 게 있었지. 캐내야 할 것도 많고 말이야. 벨로크는 어느 순간 진짜로 잠들어버린 이자벨을 조심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나신을 옷가지로 덮어주며 말했다.

“가능하면 이자벨한테 복수의 순간을 맛보여주고 싶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 밖으로 나갈까?”

아델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에 작은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딱 봐도 지하실일 겁니다.”

“좋아. 어디 솜씨를 좀 발휘해볼까?”

입가 미소를 지은 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끈 달린 룬북과 작은 배낭 하나를 들어 올렸다. 속에서 울리는 짤랑거리는 소리. 플라스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술재료들이 내지르는 소음이었다. 세 사람은 곤히 자고있는 이자벨을 남겨둔 채, 지하실로 내려갔다.

아델의 성력이 내는 불꽃과 카라의 지팡이 빛이 그들의 얼굴을 붉게 혹은 하얗게 보이게 했다. 어느 쪽이든 다 죽어가는 하르모아에게는 두려운 광경일 뿐이었다.

[제, 제발···]

몸이 투명해졌다가 불투명해졌다가 하며 벌벌 떨고 있는 망령을 보며 벨로크가 웃었다. 송곳니가 드러나는 야성스러운 미소였다. 그가 말했다.

“이제 와서 자비를 구걸하기에는 너무 늦었단 거 너도 알지?”

망령의 떨림이 더 커졌다. 흐릿하게 보이는 입가의 주름과 얼굴이 제 형상을 갖추지 못할 정도였다. 벨로크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마녀의 썩어빠진 영혼을 보며 한 여인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금색 머리카락에 기다란 귀를 쫑긋거리던 요정.

너 같은 놈한테 당하기에는 아까운 여자였지. 그의 주먹이 망령의 신체를 넘어 돌바닥을 쾅 부쉈다. 소용없다는 것은 안다. 그저 단순한 분풀이였다.

[히이익!]

그럼에도 하르모아는 크게 비명을 내질렀다. 눈앞의 사내가 손짓 하나로 수백의 악귀와 자매들을 몰살시킨 원흉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성기사의 성력이 주는 고통 때문에 영혼 자체가 깎여나가서 그런 걸까. 뭐가 됐든 하르모아는 차오르는 공포심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녀의 영혼이 바짝 쪼그라든 순간. 벨로크의 무심한 눈동자가 그녀를 주시했다. 그가 말했다.

“이자벨이 애원했을 때에도 너희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겠지. 똑같이 갚아주마.”

기사가 손짓하자. 화염의 채찍이 촤아악 휘둘러졌다. 요상한 발음과 함께 유리병이 찰랑거리는 소리 역시 들려왔다. 곧이어 폐허가 된 도시의 지하실에서는 망령의 울부짖음이 가득 울려 퍼졌다.

#

“고위 마녀라고 하길래. 아는 것이 많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건진 게 별로 없어. 다음에는 데몬이라 불리는 그 악마들을 붙잡아서 물어봐야 할까?”

지하실의 계단을 올라가던 카라가 손에 들린 유리병을 흔들어 재끼며 말했다.

“인간이 아닌 악마가 순순히 입을 열지는 모르겠다만···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아델은 조금 질린 얼굴로 카라와 그녀의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바라보다가 답했다. 제일 선두에서 걸어가던 벨로크 역시 한 마디 뱉었다.

“뭐가 됐든 마녀들의 탑과 그 아래에 있다는 데몬들의 거주지로 가려면 아리안의 수도를 넘어 룽겐 대사막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군.”

“생각보다 놈들의 규모가 큰 것은 물론 활동하는 영역 또한 광범위합니다. 저희가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요?”

“확실히··· 이 속도로 도착할 때쯤이면 이 나라는 이미···”

말끝을 흐린 벨로크가 지하실의 문을 연 순간.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윽고 미약한 문틈이 완전히 벌어지며 눈앞의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하게 정리된 식탁 위. 김을 모락모락 뽐내는 수프 냄비가 중앙에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시뻘건 양념을 친 닭고기와 부드럽고 하얀 밀빵, 코르크 마개가 달린 술병들이 한가득 놓여져 있었다.

고된 전투와 심문을 끝마쳐서 그럴까. 세 사람의 배는 자동적으로 꼬르르 신호를 울렸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음식으로 향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채, 식탁 위에 포크나 잔 따위를 올려놓고 있는 뿔 달린 여인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콧소리가 적당히 섞인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왔어요? 다들 바빠 보이길래. 오랜만에 솜씨를 좀 발휘해 보았어요.”

“이자벨! 세상에! 언제 깨어났어? 이제 괜찮은 거야?!”

카라가 제일 먼저 뛰쳐나갔다. 그녀는 이자벨의 등을 와락 껴안으며 제 얼굴을 비볐다.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시울 역시 잔뜩 붉어져 있는 게 우는 듯했다.

“방금요··· 네. 이제 괜찮아요. 머리도 안 아파요.”

이자벨은 조금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카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는 몸을 돌렸다. 탁하지만 따뜻한 빛을 담고 있는 시퍼런 눈동자가 갈색 눈을 진하게 주시했다. 그녀는 그렇게 카라를 끌어안으며 미소짓다가 고개를 들었다.

벨로크는 보기 좋다는 듯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아델은 쭈뼛거리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자벨이 말없이 한쪽 손을 내밀자. 아델은 눈치를 슬쩍 보다가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 사이에 파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자, 잠깐만! 아무래도 이건 좀···”

아델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려 했지만 오히려 이자벨이 아델의 손을 꽉 붙들며 말했다.

“버틸, 만해요. 아델도 나 좀··· 안아주면 안 돼요? 나. 사람의 온기가 아니, 당신들이 너무 그리웠어요···”

이자벨의 애처로운 말에 아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윽고 아델 역시 이자벨을 힘껏 껴안았다.

얼씨구. 여자애들은 다들 왜 저렇게 스킨십을 좋아하는 걸까? 뭐, 보기는 좋은데... 그녀는 종래에 벨로크에게까지 손을 내밀려 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사래 쳤다.

“이번에는 참을 자신이 없어서 말이야. 나중을 기약하지.”

그 의미심장한 말에 뿔 달린 요정의 눈가가 진한 호선을 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