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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97화 (9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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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아아아아악!”

이자벨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뇌리를 강타하는 사악한 속삭임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검은피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제 몸을 감싸며 허리를 숙이고는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이자벨!”

“설마···”

아델과 카라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시퍼런 보름달 아래. 새까맣게 타고 녹아내린 머리 하나가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보랏빛의 안광을 뿜어내며 쉴 틈 없이 입술을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이자벨의 낙인이 점점 시뻘게졌다. 비명 역시 커져만 갔다.

카라는 한순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녀가 주문을 사용하기도 전에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가 휙 흩날렸다.

[이자베엘! 이 걸레 같은 년아! 다 죽어가는 것을 살려주고 넘쳐나는 힘까지 주었더니. 나를 이렇게 배신해? 내가 그렇-어억!]

소리치던 마녀의 머리에 파형 무늬의 장창이 틀어박혔다. 카라가 뒤를 돌아보자 후드와 여인용 옷가지 몇 개를 들고 있던 벨로크가 이곳으로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뜀박질은 잠깐이면 충분했다. 그는 금세 두 사람을 지나 마녀의 머리 앞에 도달했다. 이윽고 또다시 날아 재끼며 발악하려던 머리통을 거세게 짓밟았다. 안구가 비죽 튀어나오고 뼛조각과 뇌수 등이 흩뿌려졌다.

질긴 새끼. 뒤졌나? 벨로크는 거칠게 발길질을 하다가 슬며시 발을 뗐다. 마녀의 잔해는 곤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 위로 시퍼런 안개 같은 것이 슬금슬금 끼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가지가지 하는군.”

육감이 찌르르 경고성을 울렸다. 지금까지 쌓아온 전사의 경험 역시 그에게 경고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이 빌어먹을 주문쟁이의 농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벨로크는 저 안개에 접근하는 대신. 벼락의 힘을 불러들여 멀리서 태워버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방금 전의 전투로 인해 그 힘이 고갈되었음을 깨달았다. 염병. 귀찮게 됐는데. 그가 빛을 잃어버린 룬검을 보며 혀를 찰 때.

“엎드려! 벨로크!”

뒤편에 있던 카라의 주문이 작렬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안개의 틈 사이로 떨어진 것이다. 치솟는 화염의 열기에 안개의 기세가 잠깐 줄어드는가 싶었지만, 이내 무서운 속도로 꿈틀거리며 무슨 형체를 이뤄갔다. 그의 옆으로 다가온 카라가 머리칼을 헤집으며 말했다.

“엿 같은 마녀 새끼 같으니. 저건 또 무슨 해괴한 주문이야?”

“너도 모르는 모양이군. 아델은?”

“이자벨을 붙들고 있어. 계속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면서 자해하고 있거든.”

아까 전부터 끊이지 않는 비명에 벨로크는 고개만 슬쩍 돌렸다.

“아아아악!”

온몸에 검은 핏줄이 돋아난 이자벨이 제 몸을 미친 듯이 긁어대거나 찌르고 있었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목이나 심장을 찌르면 확실히 위험할 듯 보였다.

“이자벨! 제발! 진정해라!”

아델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막아보려 했지만 넘쳐나는 악마의 힘에 오히려 끌려다닐 뿐이었다. 그 순간. 모여들었던 안개가 완전한 형상을 이루었다. 일행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스콜라의 고위 마녀. 이자벨을 타락시킨 자. 하르모아였다. 시퍼런 영체의 형상을 띠고 있던 그녀는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눈 깜짝할 새에 접근한 벨로크가 검을 휘둘러왔기 때문이다.

새끼. 빠르네. 그의 대검이 애꿎은 흙먼지를 일으킬 때. 망령이 된 마녀는 긴 꼬리를 휘날리며 공중을 부유했다. 이윽고 일행을 내려다보며 보랏빛의 눈동자를 이글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영체 특유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속삭임이었다.

[이 개 같은 년놈들아··· 이번 일에 투입된 우리 마탑의 예산과 인력이 어느 정도인지나 알고 있는 거냐? 네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냔 말이다!]

“아가리 닥쳐! 이 쌍년아!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 미치광이 새끼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그리고 이자벨한테 감히 저딴 짓을 벌여? 보아하니 망령이 된 것 같은데. 네년은 그 더러운 영혼마저도 편히 쉬질 못할 거야! 왜냐면 내가 너를 사로잡아서 아주 끔찍한 실험이 뭔지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카라는 거칠게 입을 놀린 후. 벨로크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빠른 음성이었다.

“벨로크. 저년은 지금 비정형 악귀가 된 상태야. 너도 알지? 하멜른에서 본 적 있잖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이 흐릿한 영체의 괴물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놈들. 카라가 다시금 말했다.

“물론 네 검이면 베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너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이자벨을 막아야 해. 저년이 살아있는 이상. 이자벨은 조종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너와 아델이 저 괴물을. 내가 이자벨을 상대하자 이 말이군. 하지만... 저게 도망치면 어쩌지?”

그렇다면 이자벨은 영원히 놈의 장난감이 되는 것이 아닌가. 벨로크의 우려에 카라는 비죽 미소를 흘렸다. 그녀가 말했다.

“저년의 돌아버린 눈동자를 보면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나와 아델이 최선을 다해서 막아보겠어. 아니, 반드시 저 개같은 년을 죽여보일게. 믿어줘! 아델! 이쪽으로!”

카라는 크게 소리치며 아델을 불렀고, 두 사람은 곧 제각각의 주문들을 뿜어내며 망령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이자벨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꼴은 엉망이었다. 머리칼은 무슨 귀신처럼 산발이 되어있었고, 홀딱 벗은 나신에는 흙먼지와 검은피가 가득했다. 그는 발광하는 그녀의 팔뚝을 거세게 붙잡았다. 몸에 와닿는 무식한 힘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이자벨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흐릿하게 눈을 뜨고는 말했다.

“벨로크?”

“그래.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테니까.”

벨로크의 얼굴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거대한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아델이 일으킨 성력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는 이자벨을 끌어안으며 양팔을 단단히 속박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끄아아악!]

허공을 부유하는 마녀를 향해 아델 역시 허공을 날아다니며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상에 있는 카라가 눈을 빛내며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유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았다. 강력한 주문이 걸린 채찍에 성력의 불꽃이 더해지자 제 육체를 잃은 망령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뒈져!”

하르모아의 영체가 한층 더 흐릿해졌다. 마녀는 끈 풀린 연처럼 지면으로 추락했다. 이대로 간다면 금방 끝날 듯 했다. 그 순간. 마녀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빛났다. 그녀는 지면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손가락을 뻗어 이자벨을 가리켰다.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해도··· 넌 절대 행복해지지 못해. 동료들한테 돌아가지도 못하게 해주지. 그냥 이성을 잃은 괴물이나 되어버려.]

하르모아의 손가락에서 보랏빛의 광채가 뿜어졌다. 이자벨의 몸에 새겨져 있던 낙인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그녀를 안고 있던 벨로크에게까지도 그 열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아으으으윽!”

이자벨은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버둥거리다가 시선을 올렸다. 시커먼 갑주를 입은 기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심하게만 보였던 검은 눈동자 속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벨로크가 입을 열기 전. 이자벨이 입술을 떠듬거렸다.

“벨,로크··· 나, 으윽. 부탁이··· 있어요. 들어줄,래요?”

“거절하지.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거든.”

그의 단호한 말투에 그녀는 웃었다. 악마의 웃음이 아니라 옛날에 보여줬었던 요정 여인의 미소였다. 그녀가 말했다.

“부탁···이에요. 나. 당신,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요. 제발··· 나 좀.”

이자벨의 몸의 흔들림이 더 커졌다. 이윽고 우드득 뼛소리와 함께 적어도 인간의 형체는 유지하고 있었던 손발톱이 짐승의 그것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크르르 치솟는 괴물의 음성을 가다듬으며 힘겹게 말했다.

“나 좀··· 죽여,줘요. 제발. 내가 이성을··· 잃기 전에-에엑!”

이자벨은 그 말과 함께 벨로크의 가슴을 탁 쳤다. 약하디약한 손길이었다. 그는 물론 고개를 저었다. 제 손으로 동료를 죽인다면 잠자리가 아주 사나워질 것 같았다. 그건 곧 이 엿 같은 세상에서의 하루가 더 힘겨워진다는 것과 같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탁한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아··· 안 돼···”

시커먼 연기가 쾅 폭발했다. 벨로크는 무슨 공성추에라도 얻어맞은 듯 바닥을 굴렀다. 이윽고 몸에 익은 대로 낙법을 하는 동시에 습관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흐릿한 연기를 가르고 무언가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직후. 불꽃이 튀었다. 기기긱 비명을 지르고 있는 대검 사이로 시리도록 차가운 광망이 보였다. 그것은 입가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게 울었다.

크르르르

한층 더 커지고 날카로워진 손발톱과 어깨를 찢고 나온 피막 날개, 엉덩이 쪽에 돋아난 삼각형 모양의 꼬리와 3미터는 넘어 갈법한 덩치까지. 이제는 진짜 괴물이 되어버린 이자벨을 보며 벨로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혐오감이나 공포감, 경험치에 대한 욕구 따위는 아니었다.

얘를 어떻게 되돌린다? 본판이 있어서 그런가 그럭저럭 봐줄 만 한데? 끝까지 안 돌아오면? 뭐, 목줄이라도 채워서 데리고 다녀야 하나?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말했다.

“정신 차려라. 같은 흔해빠진 소리는 안 통하겠지?”

끄아아아악!

이자벨이었던 존재는 피막 날개를 활짝 펼치며 제 손톱을 마구 휘둘렀다. 규칙성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오직 상대를 찢어 죽이겠다는 본능만이 서린 공격이었다. 벨로크는 흐릿한 잔상의 폭풍에 제 날붙이를 가져다 댔다. 위에서 내려찍어오는 것을 검면으로 막고 옆구리를 찔러오는 것을 검날로 막았다. 다리 사이로 쏘아져 오는 꼬리 역시 검의 십자막이로 막아냈다.

그의 양발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등에 핏줄이 비죽 솟아오르기도 했다. 이거, 장난 아닌데. 과연 하르모아라는 년이 자신할만했다. 변화한 이자벨의 힘과 스피드는 그가 지금껏 상대해왔던 악귀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정도였으니까. 그래, 그렇기는 한데··· 벨로크는 고개를 까닥거리고는 느닷없이 검의 손잡이를 탁 놓았다.

악귀의 힘을 지탱하던 지지대가 사라지자, 강철로 된 쇠기둥이 쿠웅 날아갔다. 그녀가 찢어져라 미소를 지었다. 송곳니와 톱니 같은 이빨이 흉흉하게 드러나는 야성이 가득한 미소였다. 나쁘지 않군. 적어도 벨로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자벨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재빨리 손을 뻗어왔다. 비수처럼 돋아난 손톱이 벼락처럼 뻗어왔다. 금방이라도 그의 심장을 뽑아서 먹어 치울 기세였다. 잠시 후.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창백한 피부를 붙들고 있는 강철 건틀릿 때문이었다.

캬아아악!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온몸을 비틀었지만, 벨로크의 몸뚱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석상처럼 무표정했다. 그가 말했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검보다는 주먹이 낫겠지.”

벨로크의 왼손이 망치처럼 휘둘러졌다. 이자벨의 얼굴이 퍽 꺾였다. 하지만 그녀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남은 왼손과 꼬리, 어깨의 피막 날개를 동시에 찔러왔다. 벨로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찔러오는 가시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윽고 왼손만 휙휙 움직여서 그 모든 것들을 다 쳐냈다.

그녀가 당황한 그 순간. 쿠웅. 시야가 흐릿해지며 별이 떠올랐다. 그의 박치기 때문이었다. 이자벨은 톱니 같은 이빨을 뱉어내며 피를 뿜었다.

“컥.”

벨로크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자벨의 힘과 속도를 고려하고, 신체의 내구성과 재생력마저 계산했다. 이윽고 손과 발 모두를 사용해서 연타를 날렸다. 그녀의 고운 얼굴이 와락 뭉개졌다가 다시금 재생되었다. 그 자리를 비집고 또다시 주먹이 작렬했다. 허벅지가 꺾이고 종아리가 엇나갔다. 악마의 상징이던 피막 날개와 뿔 역시 우드득 꺾여버렸다.

그는 그렇게 괴물이 된 이자벨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몸을 타고 흐르는 사악한 힘이 뿌리 뽑힐 때까지 그녀를 두드려 팼다. 끝도 없이 흘러내리던 검은피가 점차 줄어들었다. 짐승처럼 울리던 괴성 역시 어느새 맑고 깨끗한 음성으로 바뀌었다.

“아, 아아아.”

벨로크의 무식한 계획이 맞아떨어졌던 걸까?

[끄아아아···]

“시발년아! 넌 이제 뒤졌다고 복창해라! 지옥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

“아델. 잠깐만! 그렇게 쉽게 죽여서는 안 돼. 이 년으로부터 물어볼 것이 많아! 그리고 영혼에 대한 고문이라면 나한테 맡겨. 특별한 비법이 담긴 플라스크에 가둔 다음 영겁과도 같은 고통을 주겠어!”

아니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하르모아가 카라와 아델의 손에 제압되었기 때문일까? 이자벨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속박하고 있던 사악한 의지가 스르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멍하던 정신이 깨어나고 몸의 통각 역시 되살아났다. 축축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자신의 등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아파. 라고 생각하던 순간. 몸 위로 부유감이 느껴졌다.

이자벨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새하얀 달빛 아래. 기묘한 문양 갑주를 입은 흑기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자신은 그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그가 말했다. 어째선지 다정하게만 들려오는 음성이었다.

“내가 조금 거칠었지?”

“···”

이자벨은 입을 떠듬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이윽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벨로크의 목에 슬며시 양팔을 감았다. 그의 검은 동공과 코, 입술이 눈에 자세히 들어왔다. 두 사람간의 숨결 역시 아주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깐··· 이거 좀 이상한데?”

벨로크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그가 당황할 때.

“네. 많이요. 아주 많이 거칠었어요.”

이자벨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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