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타락
마녀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성기사의 신성 주문과 상대 마법사의 주문, 화살 같은 투사체를 대비해 보호막을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벨로크의 투창은 그들의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어버렸다. 인지를 넘어선 속도와 가공할 위력으로 코앞에 당도한 것이다. 목표는 물론 하르모아였다. 뭐든지 우두머리부터 처리해야 하는 법이니까. 아니, 제일 띠꺼운 새끼였으니까.
하르모아가 반응하기도 전. 그 찰나의 순간. 파형 무늬의 장창이 날아들었다. 보랏빛의 장막이 콰장창 깨졌다. 이대로라면 그녀의 머리통 역시 날아갈 듯 했다. 그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시뻘건 불꽃이 튀었다. 중간에 끼어든 칼날 때문이었다.
마녀의 보호막을 깨부수느라 속도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창날을 받아내고 있는 자의 근력과 솜씨 덕분일까. 결론적으로 벨로크의 장창은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바닥에 턱 박혔다.
“···”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하르모아는 두 눈을 끔뻑거렸다. 시퍼런 칼날의 주인이 팔을 내렸다. 이윽고 기이한 각도로 꺾여있는 제 오른손을 턱 잡더니 반대로 돌렸다. 우드득 뼛소리가 울리는 것도 잠시. 망가졌던 이자벨의 오른손은 어느새 깔끔하게 재생되어있었다. 이자벨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흐음. 처음 보는 무기 같은데··· 어마어마한 위력이네요. 분명히 흘렸는데. 이렇게 쉽게 부러지다니.”
말이 통하는 거로 봐서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주인은 지켜야 하는 모양이군. 벨로크는 잠깐. 악마가 된 옛 동료를 바라봤다. 실전성보다는 멋에 치중한 듯. 맨살을 드러내며 달라붙는 시커먼 가죽갑옷 아래. 문신이 새겨진 피부가 번들거렸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들고있는 검과 더불어 또 다른 칼 한 자루가 매달려있었다. 기이한 무늬가 새겨진 거로 봐서 룬검이었다. 그것도 세트로 보였다.
쌍검이라. 그런 건 또 언제 배웠대? 아니, 그것보다 이 정도 재생력과 육체라면 혹여 휩쓸린다고 해도 무사하겠는데. 그가 말했다.
“강해졌구나. 이자벨.”
그의 말투는 여전했다. 무미건조하면서도 냉정한··· 전투를 마다하지 않는 기사의 그것이었다.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지. 이자벨은 피식 웃었다. 아까전에 보여줬던 것과 같은 쓰디쓴 미소였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 정신을 차린 하르모아가 벨로크를 손가락질했다.
“아하. 그런 깜찍한 수를 숨겨두고 있었나? 하지만 이를 어째? 이자벨은 보통의 악마와는 달라. 그녀에게 주입한 악마의 피만 수십 통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살점과 원혼은 그 배를 넘어가지. 알아듣겠나? 동족의 피와 산자들의 피륙을 제물 삼아 탄생한 그녀는 이미 대악마에 근접한 괴물이야!”
“이 역겨운 새끼들이 이자벨한테 그딴 걸 처먹였다고?!”
아델이 분노할 때. 벨로크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렇군. 그녀를 이용해 내 발을 묶어둔 채, 수백 마리의 악귀와 십 수명의 마법사로 합공을 하겠다. 이건가?
끄에에에-엑!
그의 생각이 맞다는 듯 시체의 산 뒤편에 있던 악귀들이 움직였다. 제각각 시퍼런 독니와 발톱을 드러내며 땅을 박차거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녀들 역시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요사스러운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삽시간에 벌어지게 된 수 백대 삼의 전투에 두 사람은 몸을 긴장시켰다.
카라는 보호막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아델 역시 신을 부르짖으며 성력으로 된 방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벨로크만은 달랐다. 그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침침하게 가라앉은 검은 두 눈은 얼핏 여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지금? 아니,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그는 검도 뽑지 않은 채, 파지직 스파크가 흐르는 주먹을 꾹 쥐고는 주변을 훑었다. 사람 정도는 가뿐히 잡아먹을 것 같은 거대 전갈. 가시 돋친 갑피를 자랑하며 집게발을 찌걱거리고 있는 겹눈 벌레. 전에 봤던 인면괴조와 고양이의 머리에 사람 몸통이 달린 네발짐승까지 각양각색의 괴물들이 그들을 향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쏟아지는 흙먼지와 진동을 뒤로한 채, 하르모아가 비죽 미소를 날렸다. 그녀가 벨로크를 손가락질했다.
“네가 입고 있는 그 갑옷. 주문을 막아내는 갑옷이지? 이자벨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그걸 믿고 있는 모양인데. 그 생각이 오판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네. 왜냐면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사령술사거든. 소환과 제작이 주특기란 말이지. 어디 끝없이 되살아나는 시체들과 악귀, 악마가 된 친구 전부와 싸워보도록 해. 너희들이 어디까지 버티나 보겠어.”
하르모아는 예의 광소를 터트리며 이자벨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죽이란 뜻이었다. 이자벨은 몇 걸음 앞으로 나서다가 입술을 짓씹으며 발을 멈췄다. 망설이는 듯 보였다. 하르모아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녀는 지팡이를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자벨. 내 사랑스러운 아이야. 아직 교육이 덜 된 모양이구나. 기대하고 있어.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다시금 잘 조련시켜줄 테니까. 몇 달 동안 실험실 밖으로는 못 나올 줄 알아.”
서슬 퍼런 음성과 함께 하르모아의 지팡이에서 요사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자벨의 몸에 새겨진 노예의 낙인이 번쩍였다.
“아으으윽!”
이자벨은 온몸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하다 끝끝내 비명 같은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 나갔다.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일행을 포위한 채, 손발톱을 들이밀고 있는 괴물들의 틈바구니로 재빨리 섞여 들어갈 정도였다. 하르모아가 양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자! 어디 한 번. 옛 친구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죽여봐! 아주 즐거운 관람 거리가 될 테니까! 하-하하하하!”
고맙게도 알아서 잘 모여주는군. 꽈배기처럼 얽히고설킨 저 괴물들을 보고 있자니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벨로크 역시 한 쪽 손을 들어 올렸다. 화해를 위한 제스처는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의 선고에 가까웠다. 그가 중얼거렸다.
“조금 따끔할 거다. 이자벨.”
내면의 힘을 끌어올린 순간. 용살자의 벼락이 주인의 부름에 답했다. 곧 그를 중심으로 강렬한 힘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이윽고 이 파동은 하늘을 쿠르르 울리더니, 수십 갈래의 벼락이 되어 사방에 내리꽂혔다.
한순간에 세상이 환해졌다.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삐이이이 하는 이명이 연달아서 귓가를 침범했다. 그 소음이 얼마나 컸던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악귀들이나 마녀들이 내지르는 비명 따위는 가볍게 삼켜버릴 정도였다.
“꺄아악!”
“으윽!”
흙먼지가 콰아앙 치솟고 주인 잃은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가공할 위력에 카라와 아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윽고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시발. 이러다 죽겠는데. 이 재앙을 불러일으킨 벨로크 역시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무리하게 끌어다 쓴 힘으로 인해 속이 부글 끓어올랐다. 머리를 찌르는 두통 역시 시야를 흐리게 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변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보호막을 친 마녀들이 죽어나자빠질 때까지. 튼튼한 갑피와 질긴 생명력 덕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악귀들이 조각날 때까지. 계속해서 벼락을 불러들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파지지직 스파크를 내보이며 힘을 끌어올리고 있던 벨로크는 울컥 피를 토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계였다. 그의 의지로도 이 이상은 버텨낼 수가 없었다. 놈들은 어떻게 됐지?
스르르 사라지는 벼락과 새하얀 잔상을 뒤로한 채, 그는 흔들리는 시야를 억지로 다잡았다. 이윽고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 그리고 가까이. 수십 개는 가뿐히 넘어 수 백 개는 될법한 잿더미들이 보였다. 중간중간 조각난 집게나 전갈의 꼬리, 괴조의 깃털 같은 것만 흩날리는 걸 보니 악귀들은 모조리 다 죽었다.
그는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마녀들이 있던 오아시스 너머. 시체의 산 뒤편을 살폈다. 거리가 조금 멀기는 했지만, 저쪽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와르르 무너진 집터 사이로 새카맣게 익어버린 팔과 다리가 꼬깔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보호막 주문으로 막아냈기에 그나마 형체는 보존했지만 끝내 버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얼추 세어보니 다 뒤진 것 같은데. 그는 웩 거리며 피를 몇 번 더 토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자벨을 찾아볼 참이다. 살아있겠지? 그래야 되는데. 그 순간. 정신을 차린 카라와 아델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벨로크. 네가 이렇게 할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누누이 얘기했잖아. 힘 조절을 해야 한다고! 너.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 죽을지도··· 아니, 아니야.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카라가 도끼눈을 뜬 채, 그를 타박하려다 이내 주위의 상황을 상기하고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벨로크님! 피, 피가!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아델은 안절부절 다리를 접어대다가 이내, 벨로크의 가슴에 손을 대고는 재빨리 치료의 기도문을 외웠다. 온몸을 감싸는 여신의 성력이 진탕 되었던 그의 속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텅 비어버린 듯한 내부와 지끈거리는 두통은 그대로였다. 아무리 신의 힘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닌 건가? 아무래도 당분간, 이 힘은 사용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는 골치 아프게 됐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쓸다가 눈동자를 돌렸다. 근처에 있는 잿더미가 불쑥 솟아오르더니 웬 팔 하나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 팔의 주인은 거친 신음성을 내뱉으면서 제 몸을 빼냈다. 이자벨이었다. 벼락 때문에 옷이 다 타버린 건지. 새하얀 달빛 아래. 그녀는 전라의 몸뚱이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벨로크 당신은··· 볼 때마다 강해지네요. 이번에는 벼락이에요? 칼잡이가 벼락이라니. 이런 건 좀 반칙 아닌가···?”
이자벨은 제 몸을 가릴 생각도 안 한 채, 주위를 둘러보고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를 그동안 괴롭혀왔던 마녀들이 기사의 손짓 하나에 순식간에 죽어버린 것이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기에 해방감을 느끼고 할 것도 없었다.
글쎄. 네 몸 또한 반칙 수준인데. 어떤 쪽이든 말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피부는 진물과 기포를 뿜어내며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잠시 후. 시체마냥 창백한 피부가 다시금 번들거렸고 그 위에 새겨진 거무튀튀한 문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몸에 새겨져 있는 사악한 주문들을 알아본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노예의 각인··· 게다가 영혼의 포박까지··· 이런 것들을 심었다고? 지독해. 정말이지··· 더럽고 악독한 짓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자벨··· 걱정 마. 이제 다 끝났어. 이제 안심해도 돼.”
카라는 눈물을 글썽이고는 멍하니 앉아있던 이자벨을 향해서 다가갔다. 끌어 안아주고 다독여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앞을 아델이 막았다.
“아델? 왜···?”
카라가 아델의 등을 몇 번 쳤지만 아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끼를 겨눈 채 말했다.
“이자벨. 네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면. 아직도 우리들을 동료로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증명해 보여라.”
말을 하는 아델 역시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인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자벨은 웃었다. 입이 귀까지 쭉 찢어지는 악귀의 웃음이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배를 부여잡으며 깔깔거리다가 고개를 팍 치켜올렸다. 이윽고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어떻게요? 내가 뭘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나는 악마에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지하의 괴물이라구요! 이런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어요? 신뢰할 수 있겠냐고요? 지금도 내 몸속에 흐르는 검은피는 당신들을 찢어죽이라 말하고 있는데? 나는···”
이자벨은 말끝을 흐리고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투명한 실선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옅게 흐느끼며 웅얼거렸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면···”
아델이 입을 꾹 다물고 카라가 고개를 숙일 때. 벨로크가 말했다.
“뭘 어떻게 해?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같이 다니는 거지.”
무심한 듯하면서도 단호한 그 어투에 이자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나. 데려가 줄 거에요? 내가 미쳐서 당신들을 찌르면요? 그것도 한밤중에 기습하면 어떡해요?”
이자벨의 탁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속에는 지독한 불안감이 가득했지만 한 줄기 희망 역시 엿보였다. 벨로크는 이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비참한 꼴이 된 여인을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말했다. 한층 부드러워진 어조였다.
“네가 이상한 짓거리를 할 것 같은 낌새가 보인다면 내가 막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기습이라··· 이것 역시 문제 될 것 없다. 감각을 키워두고 자면 되는 일이니까. 물론 너는 나와 같은 방을 써야 하겠지만···”
“가··· 같은 방 말입니까!”
“잠깐! 그건 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이자벨의 몸에 새겨진 저 주문. 분명히 해주 할 방법이 있을 거야! 이 책에는··· 대마도사가 남긴 비전에는 분명 그 방법이 있을 거라고!”
그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자. 아델과 카라가 기겁했다. 두 사람에게서는 어느새. 악마를 동료로 넣는다는 불안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뭐. 그건 너희들끼리 알아서 고민하고.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밤공기가 차군. 감기라도 걸리기 전에 뭐 걸칠 거라도 좀 가지고 오도록 하지.”
“···”
악마가 감기 따위가 왜 걸리겠어요? 당신 이렇게 친절한 사내였어요? 이 말 진짜예요? 그녀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만 떠듬거릴 뿐. 제대로 된 언어는 나오지 않았다. 무슨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거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마녀들의 손에 붙잡혀 이런 몸뚱이로 개조당한 후. 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살의와 증오가 지금 이 순간.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대신에 그 자리에 간질거리는 무언가가 슬금슬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자벨은 다리를 오므리고는 고개를 파묻었다. 이윽고 한참을 흐느끼다가 머리를 들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뭐라 말하려던 순간.
[이 엿같은 새끼들이. 아주 꼴값들을 떨고 있군! 내가 그렇게 둘 줄 알아-아아!]
쇠를 긁는 듯한 소음이 들리더니. 잿더미 속에서 치렁거리는 무언가가 휙 날아올랐다. 이에 맞춰 이자벨의 몸에 새겨져 있던 낙인 역시 불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