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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속에서는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범인에게는 익숙지 않은 공간이동의 부작용이었다. 뾰족한 귀를 가진 요정은 3미터 높이의 허공에서 지상으로 추락했다.
“으윽···”
모래 먼지가 풀썩 치솟고 이자벨은 바닥을 굴렀다. 이윽고 양팔로 상체를 감싸며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내뱉었다. 평소 같았으면 낙법을 행하여 충격을 최소화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복부와 허벅지 어깨 등에 박힌 날붙이들 때문이었다.
뇌리를 강타하는 고통에 그녀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면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카라의 포탈주문이 성공한 것이다.
“하아, 하아. 겨우··· 살았네요. 다들 무사해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황량한 바람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고 모래 알갱이들이 바닥을 긁어댈 뿐이었다. 이자벨은 미약한 불안감을 느끼며 귀를 쫑긋거렸다. 이윽고 고개를 슬며시 돌리며 동료들의 이름을 불렀다.
“벨로크? 아델? 카라? 대답해요! 다들 괜찮아요?!”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파이어를 닮은 그녀의 눈동자에도 메마른 땅만이 한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샛노란 모래의 산과 말라비틀어진 고목, 우두커니 솟아있는 바위 몇 개. 이곳에 생명체라고는 오직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나를 빼고 다 다른 곳으로 떨어져 버린 건가? 그게 아니면 차원의 틈으로 빠져버린 거야? 몸이 조각나서 죽어버린 거냐고? 이자벨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순간. 그녀의 몸속에 있던 대악마의 마력이 꿈틀거렸다. 이 연약한 몸뚱이를 강인한 육체로 탈바꿈시키기 위함이다.
“아아악!”
이자벨은 헛숨을 들이키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몸 전체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칼에 찔린 것과는 별개로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한편에는 강렬한 쾌감이 있었다. 마치, 이 힘을 거부하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라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듯한 감각. 이건 마치···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힘에 침식당하는 순간. 자신은 괴물이 되어버릴 거다. 그것은 곧 그들이 지금껏 사냥해왔던 욕망만을 따르는 추악한 악마가 되는 것과 같았다.
싫어. 난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아. 이자벨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가 벅찼다. 이윽고 비틀비틀 걸으며 이 황량한 땅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카라! 벨로크! 아델!”
굳이 들끓는 마력이나 살인적인 날씨가 아니더라도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많았다. 단검과 화살이 박힌 온몸은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거렸고, 상처 부위로 흘러내린 피 덕분에 뼈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이자벨은 피를 컥 토하면서도 계속해서 동료들의 이름을 불렀다.
정확히는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 괴물 같은 기사라면, 요정의 청력을 뛰어넘는 감각을 가진 사내라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와 줄 테니까. 이자벨은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곧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들··· 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나만 버려두고···”
그녀는 욱신거리는 복부를 매만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손을 한 번 살펴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이게 대체···”
손바닥은 무슨 오물이라도 묻은 듯 시커멨다. 아니, 이제 보니 그 시커먼 액체는 자신의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이자벨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자신은 이게 뭔지 알고 있으니까.
악귀와 악마는 지상만물의 모든 것을 증오한다. 그리고 그들의 몸속에는 붉은 피 대신. 다른 것이 흐른다. 타락의 증표. 칠흑처럼 새카만··· 검은 피.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자벨은 제 뺨을 짝 쳤다. 이 상황을 부정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검은 피는 그녀의 얼굴에 진한 족적을 남겼고,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만 상기시킬 뿐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내가··· 악마라고? 악마가 된다고? 내 동족들을 무참히 죽였던...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제 배와 욕망을 채울 뿐인 괴물이 된다고? 이자벨은 모래에 파묻힌 상태에서도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결심이라도 한 듯. 이를 악물며 허리춤을 매만졌다.
그녀의 팔 궤적을 따라 토사가 스르르 흩어졌다. 시퍼렇게 날이 든 단도가 목젖에 겨누어졌다. 괴물이 될 바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참이다.
이자벨의 눈동자가 멍해졌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이었다.
나스 밀림 출신의 사냥꾼 집안에서 태어나. 신분 상승을 위해 군에 입대 하고, 맞지도 않는 단체생활을 하며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다. 가혹한 훈련을 견디고 사람을 죽이고 인형처럼 살다간 생에. 그러다가··· 그들을 만났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어. 어째 설까? 죽음이 임박한 이 순간.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생각나는 것은?
단도가 움직이려는 순간. 웬 음영이 졌다. 여러 개의 속삭임 역시 들려왔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한 편에는 미약한 희망이 깃들었다. 이자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베, 벨···로크? 벨로...그에요?”
목소리가 들렸다. 중저음의 굵은 목소리 대신 꾀꼬리 같은 미성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일까? 도시를 습격하러 가는 도중. 이런 걸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얘들과 이것 좀 보렴. 신기하지 않니? 이 요정. 지상의 존재면서 몸속에 지하의 마력을 품고 있어. 게다가 순도가 꽤나 높아 보이는데. 무슨 저주라도 받은 건가?”
“연구재료로 쓰실 참입니까?”
뒤편에 시립해 있는 로브 쓴 여인의 말에 제일 선두에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잘만 사용하면 꽤나 쓸만한 무기가 될 것 같구나. 간만에 몸이 달아오르는데? 지금 당장 실험해봐야겠다. 돌아가자.”
“하지만, 마탑주께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루탄카를 함락시키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하르모아님. 명령을 어기신 걸 마탑주께서 아신다면 큰 경을 치실 겁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만류에도 하르모아라 불린 여인은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입가의 주름을 조금 접으며 이자벨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있는 거라고는 오아시스밖에 없는 그딴 도시 따위 언제든지 멸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 생물은 지금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죽어버리고 만다. 나는 그걸 용납할 수가 없단 말이다. 알아들었니?”
그녀. 마녀들의 요람. 스콜라의 고위 마녀가 으름장을 놓자. 뒤편에 있던 여인들의 얼굴이 굳었다. 곧 그들은 데리고 온 만티코어의 등에 이자벨을 태웠다. 노인네의 거죽을 쓴 괴물이 창공을 날아오르고 녀석의 등 위에 있던 하르모아는 이자벨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기절한 요정의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다.
“기대하렴. 기묘한 마력을 품고 있는 여인아. 내 너를 최강의 악마로 만들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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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도시. 루탄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하의 석실. 마녀들의 임시거점은 매우 분주했다. 하르모아의 지휘 아래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험실의 한쪽에는 불길한 녹색 액체를 보글거리는 플라스크와 증류기. 같은 각종 도구들이 즐비했다. 다른 한쪽에는 피 묻은 수갑과 침대. 시체와 해골이 가득 쌓인 철창들이 놓여있었다.
으음. 언제 맡아도 이곳의 공기는 상쾌하단 말이지. 이곳의 총 책임자. 하르모아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옷 벗기고 저기 묶어. 일단 치료부터 하고, 반항하면 안 되니까 주문부터 새기자. 소중한 실험체니까 다들 조심해서 다루도록.”
마녀들은 잡아 온 요정의 옷을 벗겼다. 이윽고 포션을 뿌려 응급처치를 대충 끝내고는 이자벨의 몸에 알 수 없는 룬문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각각 노예의 각인, 영혼의 포박, 원념의 흡수, 생기 흡혈 등. 하나 같이 포악하며 끔찍한 흑마법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르모아가 지팡이를 내밀며 주문을 외우자 이자벨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를 주인으로 인식하는 과정이 끝마쳐진 것이다. 하르모아는 손뼉을 짝 쳤다. 그러고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좋아. 이제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해볼까? 일단 몸뚱이부터 바꿔야겠지. 실험체의 내면에 있는 마력을 폭주시키도록 해.”
“뭘 쓸까요?”
“가진 재료는 다 써. 데몬들로부터 받아온 악마의 피든 갓난아기의 생혈이든. 처녀의 두개골에서 꺼낸 뇌수든 뭐든 말이야.”
마녀들은 이자벨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끔찍한 약물들을 집어넣었다.
“우으읍!”
그녀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악마의 마력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자벨은 거칠게 저항했지만, 쇠사슬만이 철컹거리는 소리를 낼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르모아는 마치 애를 달래듯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착하지? 몸에 좋은 거니까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해.”
“개소··· 컥!”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자벨의 몸에 새겨진 문신이 빛을 뿜어냈다. 이윽고 선명하던 눈동자가 멍해졌다. 노예의 각인이 가진 힘이었다. 마녀들은 그렇게 요정의 몸에 악마의 피를 뿌리거나 먹이는 등. 기괴한 의식을 이어나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멍하니 풀려있던 이자벨의 눈동자가 그 빛을 되찾았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말자 큰소리로 외쳤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이 역겨운 년들아! 이거 당장 풀지 못해!”
요정이 발버둥에도 로브 쓴 마녀들은 무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실험체의 이런 반응을 살피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지독한 우월감을 선사했으니까. 미치광이 마법사들의 리더. 아르모아가 손뼉을 짝 쳤다. 이윽고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아리따운 요정 아가씨. 이제, 다시 태어날 시간이야. 나약한 육신은 버린 채, 진정한 악마로 발돋움하는 거지.”
“뭐라고? 그게 무슨···”
아르모아는 지팡이를 내밀며 기괴한 주문을 외웠고. 요사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자벨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렀다. 쇠로 된 침대와 수갑이 기기긱 소리를 낼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
"아아아악!"
그녀의 하얀 발이 버둥거리는 만큼, 핏줄이 불쑥 튀어나오는 만큼.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고통에 겨워하던 비명이 쾌락에 들뜬 신음소리로 바뀐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자벨의 가슴이 덜컹 움직였다. 이윽고 뿌드득 뼛소리와 함께 그녀의 신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파이어 같던 눈동자가 그 빛을 잃고 심연처럼 탁해졌다. 살굿빛 같던 피부 역시 밀랍이라도 된 듯 창백한 회색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금색 머리카락이 치렁거리더니 기괴하게 생긴 뿔 두 개가 치솟았다.
"아아아..."
이제는 요정의 탈을 벗어던진 채, 한 마리의 악마가 된 여인을 보며 하르모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외우던 주문을 멈추고는 지팡이를 휙 돌리며 말했다.
“뭐야? 너 대체 무슨 악마의 마력을 이은 거니? 오히려 더 이뻐진 것 같은데? 몽마라고 해도 믿을 정도야. 뭐... 상관없나. 다음에는 이걸 써볼까?"
미치광이 마법사는 광소를 내뱉으며 품을 뒤적거렸고, 실험은 계속되었다. 몇 날 며칠을 넘어, 몇 주 동안. 쇠로 된 침대가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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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그래? 뭘 보고 그렇게 심각해 있어?”
의아한 듯한 카라의 목소리에 벨로크는 쥐고 있던 금색 머리칼을 보여주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카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머리카락 색깔만으로 그런 추론을 하기에는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을 모아놓고 생각한다면 꽤나 그럴듯한 상황이 그려졌다.
이자벨 역시 사막에 떨어졌고, 스콜라라는 집단에 납치당했으며 이 마을은 그들이 습격한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이니까. 그렇다면··· 확인해보면 되지. 카라가 말했다.
“벨로크. 그 머리카락. 나한테 줘봐.”
“머리카락을? 무슨 수가 있나?”
“아! 그걸 쓸 생각이군.”
가만히 듣고 있던 아델이 무언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카라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허리춤을 두드렸다. 대마법사의 비전서가 찰랑거렸다.
“잊었어? 네가 구해다 준 이 책에 나와 있던 주문. 대단히 귀한 비전이 있잖아. 상대의 소지품만 있으면 그 사람이 현재 어디 있는지 보여주는 추적술 말이야.”
벨로크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대악마의 위치를 찾을 때도 저 주문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었다. 정말이지. 마법사 만세로군. 유틸성도 최강이야.
벨로크와 아델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진 채, 카라를 바라봤다. 그녀는 실타래 같은 금색 머리칼을 조심스레 움켜쥐고는 지팡이로 툭 쳤다. 이윽고 눈을 감고는 뭐라 뭐라 주문을 외웠다.
머리카락이 번쩍거리는 만큼.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벨로크는 몰랐지만 여러 가지 장면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휙휙 지나갔기 때문이다.
고요한 석굴. 피 묻은 침대. 로브 쓴 마녀. 생체실험.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폐허가 된 도시의 성벽... 카라는 부릅 눈을 떴다. 이윽고 헛구역질을 했다. 벨로크가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물었다.
“카라?”
“있어.”
“뭐라고?”
아직도 토기가 치미는지. 카라는 몇 번 더 웩웩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갈색깔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당황, 분노, 슬픔, 안타까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 안에 가득 담겨있었다. 카라가 말했다.
“그 머리카락. 이자벨의 것이 맞아. 하지만..."
카라는 잠깐, 말끝을 흐렸다. 이윽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요정 아가씨가 아니야. 너무 늦었어.”
"늦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당황한 아델이 큰 소리 칠 때. 벨로크의 눈은 오히려 깊게 가라앉았다. 무슨 가죽을 입혀 놓은 석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지금 어디에 있지?"
카라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여관의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으로 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