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오아시스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었네··· 도적들의 짓은··· 아니겠지?”
“도시 하나를 박살 낼 수 있는 도적이라··· 그쯤 되면 도적이 아니라 하나의 군대일 거다. 만약 규모가 엄청나게 큰 도적단이라고 해도 놈들은 본보기로 몇 명을 죽이고 재물을 갈취하지. 이렇게 학살극을 벌이지는 않는다.”
아델의 날카로운 지적에 카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며 벨로크는 생각했다. 카라는 잠시 이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여행길의 고단함을 풀기도 전에 또다시 괴물들과의 사투가 기다리고 있을 상황이 말이다.
이 새끼들 진짜. 쉴 틈도 안 주네. 하지만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그가 아델의 의견에 쐐기를 박았다.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습격자들이 입는 피해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그걸 아는 놈들은 적당히 힘 조절을 하는 법이지. 제 목숨은 소중한 법이니까.”
“인간이라면··· 말이지?”
“그래, 인간이라면.”
벨로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아시스로 다가갔다. 성벽이나 길거리가 휑했던 이유가 있었다. 도시의 시체란 시체들은 이곳에 다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뭔 개짓거리를 하는 걸까?
수면위를 둥둥 떠다니는 불어터진 시신들 대신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살덩이를 그가 살폈다. 목 뒤에 꽂힌 화살 한 발이 결정타였다. 투구 쓴 병사는 숨을 꺽꺽거리다가 죽었다. 그는 제 목을 부여잡고 있는 시신 대신 다른 시체들도 살폈다.
전의 병사처럼 화살이나 단검에 급소를 찔린 것과 더불어 날카로운 무언가에 찢기거나 뜯어먹힌 자국, 난도질당해서 내장과 뼈를 쏟은 시체까지. 각양각색의 흉수들이 보였다. 이거 한둘이 아닌데. 괴물들하고 솜씨 좋은 칼잡이가 섞여 있는 것 같군. 아니, 암살자에 가까우려나? 어느샌가 다가온 아델 역시 손가락으로 시신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상태가 괜찮습니다. 파리나 구더기 역시 그렇게 많이 꼬여있지 않고요. 비교적 최근에 벌어진 일 같습니다.”
“이 사달을 일으킨 녀석들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 쌓여있는 시체라··· 뭐, 범인은 보나 마나 스콜라. 그 새끼들이겠지. 하지만 무언가 이상해. 의식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 치고는 별다른 마법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카라가 눈을 휙휙 굴리며 지팡이로 시체를 툭 치거나 살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슬며시 걸어와 벨로크의 옆에 들러붙었다. 벨로크 역시 매를 능가하는 시력과 요정을 뛰어넘는 청력을 이용해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별다른 문제점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저 파리가 왱왱 날아가거나 구더기가 살점을 파고드는 소리, 역겨운 시취와 오물 냄새만이 코를 강타할 뿐이었다.
시발. 감각 수치가 높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군. 좀 끔찍한데. 꽤나 정신력을 갉아먹는 행위에 벨로크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집중시켰던 오감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주위에 뭐 걸리는 건 없는 것 같은데...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놈들은 기괴한 주문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괴인들이니까.”
“필요한 물품들만 얼른 챙겨서 떠나자. 이 말이지?”
카라의 말에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밤을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숙이 나을 것이다. 놈들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는 이곳에는 그들도 모르는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식량과 식수를 보충해야 한다. 그리고··· 아델의 무기 또한 바꿔야겠군.”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려서 아델을 바라봤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도끼는 어느새 이가 빠지고 금이 가서 폐품이 되어있었다. 난쟁이의 솜씨는 분명 훌륭했지만 주문 걸린 무기가 아닌 이상 그 한계가 명확했던 탓이다.
아델은 그간 괴물들의 골통을 깨부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도끼를 조금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도끼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확실히 더 이상 쓰기에는 무리처럼 보입니다. 괜찮은 거로 하나 집어오겠습니다.”
가진 재산은 넘쳐나건만 막상 벌어놔도 쓸데가 없다. 난데없이 공짜쇼핑이라니. 시발. 무슨 아포칼립스냐? 벨로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 카라가 손을 들었다.
“저기··· 나도 필요한 게 있어. 오면서 살펴봤는데. 이 도시에는 약초나 괴물들의 부산물을 파는 잡화점이 하나 있었거든? 괜찮다면 이것들을 조금 가져가고 싶어.”
“저와 카라가 같이 움직이고 벨로크님이 식량을 챙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움직이는 김에 저희가 다 가져올까요?”
아델의 말에 벨로크가 하늘을 바라봤다. 지평선에 허리를 반쯤 걸쳐둔 태양이 세 사람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들이 눈가를 찌푸리는 만큼, 몸을 죄어오던 열기가 바람처럼 흩어지는 만큼 그림자는 길어만 졌다. 제일 큰 거 하나, 그보다 조금 부족한 것 하나. 제일 작은 것 하나.
조금 있으면 해가 지겠는데··· 타이밍이 영 안 좋군. 그는 아델의 말에 곧바로 답하지 않은 채, 턱을 쓰다듬었다. 도시를 이 꼴로 만든 놈들은 필히 악귀나 악마의 하수인들이다. 그리고 놈들은 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손톱을 들이대는 괴물들이었다. 떼죽음 당한 사람들. 한곳에 모인 시체들.
만약 이곳이 놈들이 의식을 치르는 장소나 식량창고라면? 낮 동안은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밤이 되면 여기로 와 축제를 열거나 꿍꿍이를 꾸민다면?
카라는 마법적인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녀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니다. 세상은 넓고 주문은 많았으니까. 어떻게 한다? 벨로크는 열심히 굴러가던 머리를 멈췄다. 이윽고 피식 웃었다.
신중한 건 좋았다. 분명 함정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발을 들이미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니까. 하지만 다 떨어져 가는 식량 주머니와 부서져 버린 아델의 무기, 카라의 약초 등을 포기할 수는 없다. 결국에는 제 살 깎아 먹기가 될 테니까. 뭐, 피할 수 없다면 싸우면 되지. 우리가 언제 이런 것을 신경 썼다고. 그가 말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셋이 같이 움직이도록 하지. 일단 대장간부터 들르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아델은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슬며시 웃었다. 벨로크가 자신을 먼저 챙겨주는 것이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표정에 다 드러나네. 애가 이렇게 순수해서 어떡하지? 어떤 놈팽이한테 사기라도 당하면 어쩐다?
그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쓸모없는 생각이란 것을 깨달았다. 뭐가 됐든 그녀를 건드린다면 도끼에 대가리가 깨져나갈 테니까. 세 사람은 재빨리 대장간으로 향했다. 모루와 망치가 새겨져 있는 간판을 지나치자 진득한 쇠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물론, 순수한 금속뿐만 아니라 피 냄새가 섞여 들어간 것이었다.
아델이 손에 맞는 무기를 찾아 대장간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벨로크가 아래를 살폈다. 시뻘건 페인트 자국이 입구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가 말했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건물 내에서 죽은 것 같은데··· 이곳에도 시체는 없군. 아까 전의 그 오아시스로 끌고 간 건가?”
왜? 뭐하러? 이런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이제는 이놈들의 수법이나 특성이 얼추 감이 잡혔으니까. 카라는 얼굴을 조금 굳히더니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긴가민가했는데. 이걸로 확실해졌네. 전에 하멜른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지?”
“네가 잡혀있었던 곳 말이군.”
카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영주의 지독한 고문, 자신을 강간 하려 했던 간수 등.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꽤나 규모가 크다는 것 또한 한몫했다. 그녀가 말했다.
“맞아. 그 엿같은 도시. 영주를 꼬드긴 악마가 산 채로 사람들을 불태우고 그 악의와 원념을 원동력 삼아 구울의 역병을 퍼트렸던 곳. 이제는 어떻게 됐는지도 모를, 알고 싶지도 않은 장소 말이야.”
카라의 반응에 벨로크는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오아시스에 시체들을 모아둔 게 무슨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란 말이군.”
카라는 조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소환해내기 위한 의식인지. 아니면 키메라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인지. 그도 아니면 저들의 원념을 흡수해 한층 더 사악한 주문을 손에 넣기 위한 도약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튼 부정하고 기괴한 의식의 준비물이야. 우리가 나서지 않았다면 알타니스 역시 저 꼴이 되었을 테고. 전에 지나왔던 마을 역시 저렇게 되었겠지.”
그렇다면 시급한 일이 생겼다. 그가 말했다.
“놈들의 의식을 파훼할 수 있겠나?”
카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마법과 관련된 일에는 늘 자신감을 내비쳤던 그녀가 이렇게 행동하자 벨로크는 조금 놀랐다. 상대의 수준이 그렇게 높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카라가 말했다.
“내가 아까전 시체들을 살폈을 때. 별다른 마법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지? 이제 알겠어. 그건 애초에 의식이라고 할 만 한 게 없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오아시스 위에 있는 시체들은 그냥 쌓아둔 거야.”
“아무런 짓도 하지 않고 그냥 쌓아두기만 했다고?”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의식을 방해받을 것을 염려해서 경계한건지. 아니면 마법진 조차 새길 수 없을 정도로 급한 일이 생겨서 못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건 그냥 시체의 밭일 뿐이야. 거대한 무덤일 뿐이라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다 태우면 되나?”
카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피곤한 빛을 띠었다.
“우리끼리 저 많은 것들을 모조리 태울 수도 없을뿐더러. 저들이 죽을 때의 사념은 이미 이 도시 안에 가득 찼을 거야. 그러니까···”
“건드려봤자 소용없으니. 조용히 빠져나가자?”
“굳이 놈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겠지. 아니면 오아시스에 함정을 판 후 역으로 놈들을 먼저 습격해도 될 거야. 물론,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놈들이 모르고 있어야 쓸 수 있는 방법이지만···”
염병. 짜증나게 하는군. 노린 건가? 벨로크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상황은 바뀐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놈들은 여전히 안 보였고 자신들은 정비를 끝마쳐야 한다. 그래, 멍청하게 걱정만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짓은 또 없지. 그 순간. 아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습니다. 벨로크님. 이걸로 하겠습니다.”
아델은 전에 골랐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양날 도끼를 든 채, 다가왔다. 주문 걸린 무기로는 안 보였지만 무게중심이 고루 잡힌 것이 꽤나 쓸만해 보였다. 그는 아델에게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을 해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올 테면 오라지. 시발. 그들은 성큼성큼 대로변을 건넜다. 이윽고 맥주잔과 포크가 그려져 있는 건물의 대문을 뻥 걷어찼다.
안에서 괴물이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창가로 들어오는 노을빛에 희뿌연 먼지들이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세 사람은 잠깐 그 자리에 서서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어떤 걸 챙겨야 가방에 더 많이 들어갈지 고민 중이었다.
"음..."
세 사람이 서 있는 와중에도 빛과 먼지는 슬금슬금 움직였다. 이윽고 그것들은 둥그렇게 솟아있는 테이블과 구석에 있는 벽난로에 살며시 내려앉았는데. 광원체 덕분일까? 아니면 원목 특유의 고풍스러움 덕분일까? 다분히 목가적인 풍경이 연출되었다.
시뻘건 피나 내장 조각 같은 것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지. 한때 여관주인이었거나 손님이었던 자의 잔해를 뒤로한 채, 일행은 냅다 여관을 뒤졌다.
아델과 카라는 오크통을 기울여서 물주머니를 채웠고, 벨로크는 찬장을 살폈다. 이윽고 곰팡이 핀 치즈와 돌 같은 빵. 누린내 나는 염장 고기를 한가득 챙겼다. 염병. 이제 이것들을 먹어야 한다니. 좋았던 시절은 다 끝이군. 좀 더 좋아 보이는 여관을 찾아볼 걸 그랬나? 그는 잠깐 투덜거렸지만 이내 몇 주치의 식량을 배낭에 욱여넣었다.
“끝났습니다. 벨로크님.”
“다 챙겼어. 하지만... 아무래도 불안해. 우리 잡화점은 들르지 말고 그냥 빠져나가는 게 어떨까?”
이제 맞춰 아델과 카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벨로크는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슬며시 돌아갔다. 찬장의 깊숙한 곳에 있는 여관주인이 숨겨뒀을 거라 생각되는 술병을 향해서였다. 정확히는 술병의 옆에 놓인 몇 가닥의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이건, 설마?
그는 건틀릿 낀 손을 슬쩍 벗고는 찬장을 쓰다듬었다. 허여멀건 한 먼지 아래. 금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손에 잡혔다. 아주 길었다. 전에 자주 보던 길이하고 엇비슷해 보였다.
“벨로크?”
“벨로크님?”
카라와 아델의 의아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술. 금색 머리칼. 마녀들의 집회 스콜라. 악마에게 습격당한 마을. 화살과 단검. 이게 전부 다 우연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의 머릿속에서 곧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던 요정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