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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
벨로크는 한층 초췌해진 인상의 주민들을 바라봤다.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 아예 마을 밖으로 도망치거나 여전히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등.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저, 그것이...”
다른 자들과는 달리 꽤나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정돈된 턱수염과 때 묻지 않은 얼굴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마을의 지역유지. 촌장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힘 좀 있는 새끼겠지.
벨로크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다. 이 음험한 노인네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외부인을 독살하고 마녀에게 바쳤든. 제 안위를 위해서 야금야금 주민들을 바치다가 이제는 여행자들에게로 눈을 돌렸든. 뭐든 말이다.
“없으면 바쁜 사람 붙잡지 말고 그쪽도 얼른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마을을 수습하든 주민들을 모으든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벨로크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로서도 이들이 덤벼오지만, 않는다면 구태여 죽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저항하지 않는 상대를 일부러 죽일 정도로 마모된 인간은 아니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았기에 카라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아델 역시 침을 퉤 뱉으며 도끼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명백한 적의에 노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다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노인은 그 말과 함께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에 맞춰 뒤에 시립 해있던 주민들 또한 우르르 머리를 조아렸다. 피 묻은 흙이 리넨 바지를 축축이 물들였고 머리칼에도 엉겨 붙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신이라도 모시듯 경건한 모양새였다.
“음···”
“하···? 죽이려고 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구해달라?”
엎드려있는 노파와 여섯 살 난 아이를 보며 카라는 입가를 쓰다듬었고, 아델은 헛웃음을 지었다. 벨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가를 고요히 가라앉히며 석상처럼 서 있었다. 노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일단 멈춰 세우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쥐어 짜내는 것 같았다. 그 기다림은 잠깐이면 충분했다.
노인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려고 했던 마녀와 협상을 해냈을 정도의 담을 겸비했다. 눈앞의 세 사람이 피에 미친 살인귀나 비정하기만 한 전사들이 아니라는 것 역시 간파했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벌레처럼 굽혔다. 이윽고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깥에서는 상식을 벗어난 괴물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지만 어떻게든 서로를 얼싸안으며 놈들을 무찔러나갔지요. 인정이 있었고 용기와 관용이 있었습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그 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노인이 열변을 토했다. 이에 맞춰 엎드려 있던 주민들 몇으로부터 통곡성이 흘러나왔다.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을 회상하는 듯했다. 노인은 여전히 담담한 기세로 하지만 무언가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처음에 격렬하게 저항했···”
노인의 말이 끊겼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석상이 갑작스레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는 울부짖고 있는 사람들을 손쉽게 지나쳐 창의 크기를 조절했다. 이윽고 날카로운 비도를 손에 들고는 만티코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과연 카라의 호언장담답게 단단하고 튼튼했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 힘과 왕이 쓰던 명검의 날을 버텨낼 재간은 없었다. 이놈 덩치로 봐서 갑옷 몇 벌은 나오겠는데.
“벨로크님! 제가 하겠습니다! 칼을 이리 주시지요!”
“심장이랑 간! 허파 같은 것도 필요해! 여기에 다 담아줘!”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엉망이 된 사람들이 흐느끼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세 사람이 요란스레 떠들었다. 곧이어 황갈색을 띠는 만티코어의 가죽이 차곡차곡 쌓이고 조각난 두개골과 장기들 역시 유리병에 담겼다. 일행은 부지런히 움직여서 짐을 실었다. 이윽고 낙타 위에 올라타고는 녀석의 배를 툭 쳤다.
구르르르
네 쌍의 낙타가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발굽을 움직였다. 기다란 관절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만큼. 사람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엎드려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노인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벨로크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말했다.
“왜··· 왜 이러십니까?!”
벨로크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왜 이러냐니?”
“분명 저희 말을 들어주시는 게···”
“혼자서 멋대로 떠든 건 당신네들 아닌가?”
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괴물들을 죽이고 이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당신들이 조용히 있던 것도 그 긍정이란 것에 해당하는 건가?”
“그걸 저희가 어떻게···”
벨로크가 웃었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 그가 짐승 위에 올라타 있자 무슨 거인처럼 보였다. 게다가 태양을 등지고 서 있기까지 하니 시커먼 어둠의 덩어리가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그래,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나도 너희들이 이딴 파렴치한 행동을 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좀 더 확실하게 말해줄까?”
그의 입가가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야이, 답 없는 새끼들아. 독 먹여서 사람 잡아다가 바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상황이 바뀌니까 도움을 요청한다고? 노인과 어린아이를 핑계로 들러붙으면 통할 줄 알았나?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놈들을 위해서 우리가 움직일 줄 알았냐는 말이다.”
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람들의 어깨도 움찔 떨렸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이 요청이 억지에 가까운 것이란 걸.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젊은이와 병사들은 몰살당했고 마을의 지지기반은 파괴되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여기서 말라 죽느냐 사막을 횡단하느냐 두 가지였다. 그들은 그것이 싫었다. 끔찍한 고행의 길이니까. 그래서 늘 해왔던 대로 행동했다. 괴물을 신봉하며 목숨을 부지했듯이 이번에는 그 목표를 바꾼 것이었다.
“부, 부디 용서를···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주십시오! 그렇지! 돈! 돈을 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마을의 아가씨들도...”
들어줄 필요도 없군. 벨로크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장창이 날아들었고 반파되어있던 집이 우지끈 무너졌다. 히이익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아있는 촌부들을 향해 그가 말했다.
“처음부터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었더라면 기꺼이 들어줬을거다. 그 마녀들은 우리들의 적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네놈들은 음식에 독을 타서 우리들을 기만했다. 종래에는 창날까지 들이밀었지. 전부 다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그렇다면 응당 그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해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노파들의 통곡 소리 역시 더 커졌다. 곧이어 온갖 욕설들과 함께 무언가가 휙휙 던져지고 억억하는 신음성이 들렸다. 권위를 잃은 촌장이 주민들의 분노를 몸으로 받아내든 말든. 두더지처럼 숨어있던 주민들이 일행을 욕하든 말든. 세 사람은 다시금 움직였다. 흔들리는 낙타 위에서 카라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을까?”
“다 죽였어야 했습니다. 놈들은 괴물이나 숭배하는 더러운 새끼들이 아닙니까? 운 좋게 살아남아 다른 마을로 섞여 들어간다고 해도 언젠가 다른 사람들을 해코지하거나 팔아먹을 겁니다.”
벨로크는 곧바로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두 사람의 말대로였다. 저들은 이제 곧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든, 자포자기하고 나자빠지든 뭐든 말이다. 뭐, 자기들이 행한 업보가 부메랑처럼 돌아온 것이기는 한데···
그렇다면 불지옥 모드를 선택한 내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인가?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악마들보다 마우스 한 번 딸칵거린 내가 제일 나쁜 새끼가 아닌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라고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알았단 말인가? 느닷없이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오게 될 줄 알았냐고? 시발. 그리고 저들 역시 두 마리의 만티코어와 마녀가 단 세 명에게 박살 날 줄 몰랐겠지. 애들만 불쌍하게 됐군. 벨로크는 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쯤에서 신경 끄도록 하지. 갈 길이 바쁘니까 말이야.”
짧게 중얼거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청명하기는 개뿔. 잡다한 먼지와 샛노란 황사가 가득한 하늘이 그를 반겼다. 내리쬐는 직사광선은 덤이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주시하듯 자연이 만들어낸 천장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마치 하늘 위에 존재한다는 천상궁전. 신들의 보금자리를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벨로크는 느닷없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철컥 소리와 함께 뻗어 나간 중지가 태양빛에 반짝거렸다.
‘만약 그 뒤에 숨어서 나를 비웃고 있는 거라면 조금만 기다려라. 대가리를 깨줄 테니까.’
그건 일종의 경고이자 다짐이었다. 물론, 필멸자가 초월자에게 보이기에는 퍽 오만한 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몸을 내리쬐는 태양빛이 조금씩 서늘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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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빠져나온 일행은 낙타의 고삐를 그러쥐며 달렸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보물상자와 더불어 짐이 워낙 많았기에 제대로 된 속도가 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물 한 모금 나지 않는 사막에서 식량을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며칠이 흘렀다.
“설마하니. 넘쳐나는 황금과 음식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아델. 아리안의 수도까지는 얼마나 남았어?”
마녀들이 거주한다는 탑은 아리안의 끝자락. 룽겐 대사막에 있었다. 그리고 대사막으로 향하려면 아리안의 수도. 알바인을 넘어야 했다. 아델이 지도를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주위 지형을 가늠하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 한참이다. 이 기세라면 수도까지 가는 것만 해도 적어도··· 세 달은 걸릴 거다.”
목덜미에서 끈적하게 흐르는 땀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이 여정의 끝이 안 보이기 때문일까. 카라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팔목에 감아두었던 머리끈을 이용해서 치렁거리는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무언가 수를 짜내야 한다는 건 분명해.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놈들의 본거지를 박살 내기 전에 녀석들이 이 나라를 초토화 시키는 게 더 빠를 거야. 게다가 마력에 잠식당하고 마녀들에게 개조당하고 있는 이자벨 역시 점점 더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되어갈 테고 말이야.”
“하지만··· 방법이 없지 않나? 보물상자를 버린다고 해도 어차피 식량 때문에 낙타 넷은 필요하다. 게다가 중간중간 괴물들 역시 덤벼오니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아델의 말대로였다. 그들이 사막을 횡단하는 동안. 각양각색의 악귀들이 사사건건 일행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전의 그 인면괴조와 더불어 거대한 전갈이나 집게벌레, 하이에나를 닮은 들짐승 등이 대표적이었다. 하물며 생명체인 낙타는 중간중간 쉬어주거나 여물을 먹여야 했으니 그들의 여정은 점점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염병. 진짜 어떡하지? 벨로크 역시 후끈한 갑옷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알타니스 영주로부터 받은 로브가 아니었으면 이곳에서 진작 뼈를 묻었으리라. 그가 말했다.
“카라. 포탈주문을 사용하는 건 무리겠지?”
카라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머리를 탁 치며 고개를 저었다.
“벨로크. 전에도 말했지만, 포탈 주문의 성공률은 8할이야. 1할의 확률로 우리는 차원의 미아가 되거나 나머지 1할의 확률로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버리지. 나는 유령이 된 너희들의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아. 하물며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고.”
그건 그렇지. 위급상황이 아닌 이상. 하나뿐인 목숨을 판돈으로 걸 수는 없지. 젠장. 진짜 무슨 방법이 없나? 그가 머리를 싸맬 때. 카라가 중얼거렸다.
“어디 하늘에서 아티팩트 같은 거 안 떨어지나 몰라?”
“아티팩트?”
“10할의 성공률을 자랑하는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든지. 아니면 주문을 보조해줘서 그 위력이나 안전성을 높여준다는 보물이 있다는 기록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어. 마침, 거기에 나와 있는 장소도 아리안이었던 것 같은데···”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모든 사람이 점처럼 보이는 이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혹은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회색 도시에서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희박할 것이다. 시발. 세상사란게 그렇게 잘 풀리는 거면 내가 지금까지 이 고생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그 순간. 허여멀건 하면서도 누런 건축물들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이제는 익숙한 아리안 양식의 성벽이었다. 도시인가? 하긴, 이제 나올 때가 됐지.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벨로크의 의아함과 함께 지도를 보던 아델이 말했다.
“루탄카라고 불리는 도시입니다. 거대한 오아시스가 표기되어있는 거로 봐서 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곳 같습니다. 헌데···”
아델 역시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것인지. 미간을 찌푸렸다. 성벽 위가 너무나도 허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문 역시 반파되어 있었다. 카라가 중얼거렸다.
“가급적이면 내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고 싶지만... 이번에도 역시 따뜻한 목욕물과 침대는 물 건너간 것 같은데.”
카라의 말은 예언처럼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아리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소용돌이가 예상보다 광범위하다는 걸 일행은 인정 해야했다.
도심의 중앙에 있는 오아시스 위에는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