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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꿍이
컥
피를 토한 괴조 한 마리의 날개가 우득 꺾였다. 갑작스레 몸을 파고든 한기 때문이었다. 날붙이의 서늘함은 곧 화끈한 고통으로 바뀌었고, 악귀의 눈 또한 생명의 빛을 잃어버렸다. 지면으로 추락하는 괴조를 본 벨로크는 손을 척 뻗었다.
녀석의 심장에 박혀있던 장창이 남은 살갗마저 갈라냈다. 이윽고 그의 손으로 휘리릭 날아들었다. 이거 쓸만하네. 완전 부메랑이잖아. 벨로크는 슬쩍 웃었다. 기묘한 파형 무늬가 새겨져 있는 장창은 이 하나 나간 곳이 없었다. 굳이 걸려있는 주문들이 아니더라도 무기로서의 값어치 또한 충분해 보였다.
끄에에엑!
위쪽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가 한층 더 격렬해졌다. 동포를 잃은 악귀들이 복수심을 불태우는 소리였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먹잇감의 저항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내지르는 호통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세 사람은 악귀들에게 먹힐 생각 따위는 없었다.
“비행형 괴물이라 이거지? 마음 같아서는 서리 광선으로 죄다 얼려버리고 싶지만, 여기는 사막이야. 냉기 속성의 주문들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어. 충격파 주문으로 보조할게!”
카라는 그 말을 끝으로 나지막하게 주문을 외웠다. 아델은 도끼창 대신 가시 채찍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괴조들이 달려들었다. 울부짖고 있는 인간 머리통만 여덟 개였다. 깃털 날개를 휘익 접고 찍어 내려오는 게 무슨 바윗덩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벨로크는 내면속의 힘을 끌어올렸다. 손에 들린 장창이 파지직 스파크를 일으키고, 그의 어깨가 흐릿하게 움직였다. 괴조들은 허공에서 급격히 선회하는 기행을 보여줬지만, 창날이 날아드는 것이 더 빨랐다. 한 마리의 날개에 구멍이 뻥 뚫렸다. 감전된 괴물이 몸을 파르르 떨고 있을 때. 벨로크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번쩍
창에서 섬광이 터졌다. 그의 의지에 화답한 내면의 힘이 벼락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콰르릉 소리와 함께 주변에 있던 세 마리가 바싹 익어버렸다. 엿 같은 냄새로군. 이 녀석들은 먹지도 못하겠어. 후두둑 떨어지는 잿더미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칼을 뽑았다. 남은 여섯 마리의 괴조들이 불과 한 보 앞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그와 아델이 무기를 휘두르기 전, 카라의 주문이 먼저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을 교란하는 파동이여!”
그녀의 지팡이 끝 공간이 왜곡되었다. 이윽고 보이지 않는 힘이 뻥 폭발했다. 세 마리의 괴조가 끈 풀린 인형처럼 나가떨어졌다. 훌륭하군. 모래 동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동안, 벨로크의 칼이 번뜩였다. 이 무자비한 날붙이는 악귀의 푹신한 깃털과 가죽을 가르고 뼈와 내장을 쏟아내게 했다.
끄에에엑!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괴물의 궤적에 있는 카라를 밀쳐내는 동시에 칼날을 비수처럼 찔러 넣었다. 배가 꿰뚫린 괴조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놈 역시 격렬하게 저항했다. 기어코 맹금류의 발톱을 휘둘러서 벨로크의 어깨를 떡 잡은 것이다.
괴조는 묵직한 체중으로 그를 내려찍으며 같이 바닥을 굴렀다. 문장 갑옷의 틈새로 미세한 모래 먼지들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기사와 괴물이 바닥을 구르는 동안. 아델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괴조의 육탄돌격을 정면에서 분쇄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놈의 발톱이 닿기 전, 날렵하게 옆구르기를 했다.
모래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괴조의 인간 거죽이 좌우로 돌아갔다. 사냥감을 찾는 모양새였다. 이윽고 놈은 화들짝 놀랐다. 무언가가 자신의 발목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의 뒤편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뜻은 곧 여신의 뜻이며. 사악한 피조물들에게 마땅히 그 힘을 행사하리라. 너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서 고통 받을 것이며 심판받을 것이며...”
아델의 기도문이 끝난 순간, 가시 채찍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이윽고 그 불꽃은 괴조의 다리를 타고 놈의 몸 전체에 옮겨 붙었다. 끔찍한 비명을 내지른 놈이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몸에 붙은 불을 꺼트리기 위함이다.
아델은 녀석의 몸부림을 굳이 제지하려고 들지 않았다. 그저 뚜벅뚜벅 걸어서 바닥에 놓아두었던 도끼를 들어 올렸다. 태양을 등지고 선 성기사의 모습이 짙은 음영을 남겼다. 무슨 사신을 보는 것 같았다.
끄으으으···
괴조의 인간 거죽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이윽고 녀석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몸을 비틀거렸다. 살기 위한 생물체의 발버둥이었다. 더럽고, 추해. 아델은 짧은 감상과 함께 도끼를 내려찍었고, 괴조의 머리통은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녀는 뺨에 묻은 피와 뇌수를 한 손으로 슥 흩었다. 고개를 돌리자, 벨로크가 괴조 두 마리의 목을 뎅겅 날려버리고 있었다. 카라 또한 손에 들린 화염구를 던져서 남은 한 마리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델은 도끼를 어깨에 척 기대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주인이자 구원자, 연모해 마지않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말했다.
“벨로크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이 녀석들 생각보다 터프하군. 모래를 좀 먹은 것만 빼면 괜찮다.”
벨로크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침을 퉤 뱉었다. 옆에 있던 카라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난 괜찮냐고 안 물어봐 줘?”
아델은 헛소리하지 말라고 한 마디 쏘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카라의 갈색 눈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말문이 턱 막혔다. 나쁜 말이 쏙 들어갔다. 아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응? 뭐라고 했어?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줄래?”
카라는 싱글싱글 웃으며 아델에게 다가갔다. 표정으로 보아 일부러 들었는데도 못 들은 척하는 것 같았다. 악취미 같으니. 아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카라를 무시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 역시 미묘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벨로크만을 바라보고 전쟁터만 전전해온 소녀에게 있어 카라 역시 꽤나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아델? 뭐라고 했냐니깐? 응?”
“이익! 시끄럽다! 그때처럼 배에 구멍이나 뚫리지 않게 조심하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라의 익살스러움이나 아델의 무뚝뚝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모래 먼지를 툭툭 털고, 겁에 질려있던 낙타를 모았다. 마지막으로 날붙이에 묻어있던 피와 지방 찌꺼기를 헝겊으로 닦아 냈다.
세 사람은 재빨리 낙타에 올라서 이동을 개시했다. 괴물의 피 냄새에 꼬인 다른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은 질색이었으니까. 흔들거리는 안장 위에서 벨로크가 말했다.
“사막 한복판에서 싸운 건 이게 처음인 것 같은데. 생각보다 쉽지 않군. 다들 조심하는 게 좋겠다.”
“바닥이 푹푹 빠지다 보니 제대로 힘을 줄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태양빛이 시야까지 제한하니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아델이 눈가를 찡그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신을 모시는 성기사라고 해도 저 강렬한 직사광선은 만인에게 평등했다. 듣고 있던 카라 역시 한마디 했다.
“우리를 습격했던 이 괴물들. 난 처음에 만티코어인 줄 알았어. 새의 몸통에 사람 머리가 달려있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많이 약하고 생긴 것도 조금 달라.”
“마법사도 모르는 괴물이라 이거로군.”
“어쩌면 데몬의 왕이라는 그 대악마의 부하일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 이곳의 생태계가 크게 뒤바뀐 건 변함 없는 사실이야.”
“음··· 확실히 문제로군요. 여기 근처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고 나와있습니다만··· 방금 전의 사태로 볼 때. 무사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틈에 꺼내 든 건지. 아델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벨로크는 영주가 챙겨준 고급 건조 식량들과 코딱지만 한 촌락의 음식솜씨 중 어떠한 것이 더 뛰어날지 가늠해보았다. 결론은 금방 났다. 천장 없는 지붕이라 해도 밥맛은 전자가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군. 뭐, 없으면 이번에도 노숙하는 거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낙타를 몰았다. 그렇게 잡담 반, 미래에 대한 걱정 반으로 한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저 앞에 손가락처럼 뻗어있는 바위 세 개가 보였다. 그 옆으로는 토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무슨 치즈 같은데. 이를 본 아델이 눈을 빛냈다.
“표기되어있는 거로 봐서 마을은 저 모래 산 너머, 아래에 존재하고 있을겁니다.”
“괜히 송장 보는 거 아닌가 몰라?”
카라의 우려 섞인 말과 함께 일행은 모래 산을 넘었다. 이윽고 그들은 의외로 멀쩡한 마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알타니스처럼 석벽으로 된 성벽은 없었지만, 목책으로 빈틈없이 둘러싸인 작은 촌락이었다. 안 망했네?
카라와 아델은 뜨거운 물을 끼얹어서 씻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했고, 벨로크는 이곳 여관주인의 음식 솜씨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졌다. 잠시 후.
“누구냐!”
목책 위에서 경계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감각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쇠뇌의 화살촉들을 감지했다. 세 사람은 후드를 벗었다. 또 이방인이니 뭐니, 못 들어오게 난리를 부리기 전. 벨로크가 품으로 손을 뻗었다. 알타니스 영주가 써준 추천서가 손에 잡혔다.
저 녀석들 중에 글을 읽을 줄 아는 놈들이 있기를 바래야겠군. 그 순간. 목책의 문에 열리더니 예의 터번 쓴 경비병 몇이 뛰어나왔다. 이윽고 그들은 일행의 차림새를 보더니 물었다.
“외국에서 오신 거 같군. 용병이오? 아니, 복장으로 봐서 기사처럼 보이는군.”
벨로크가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소? 들어가려면 돈이라도 내야 하나?”
병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가 추천서를 내밀기도 전에 장전된 쇠뇌와 창을 치우더니 길을 텄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주위 사정은 아시겠지? 괴물들이 넘쳐나오. 그리고 우리 마을은 단 한 명의 전사라도 필요한 수준이지. 아, 그렇다고 해서 꼭 싸워달라는 말은 아니오. 그냥 이곳에 머무르면서 가지고 있는 돈이나 좀 써주셔도 좋소. 이방인의 돈이라고 해도 금은 금이니까 말이오.”
싸워주면 좋고, 그게 싫으면 돈이라도 써달라. 경비병들의 제안 어디에도 강압은 없었다. 이방인에 대한 차별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뭐지.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순순히 보내주는 거야? 하다못해 뒷돈이라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이런 생각을 한 건 카라와 아델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의 표정에 경계심이 서렸다. 하지만, 일행은 결국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까지 온 이상.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은 조금 그랬기 때문이다.
도로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척박한 모래투성이의 길을 일행은 터벅터벅 걸었다. 우선 여관으로 가서 배를 채우고 몸을 씻을 생각이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카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 전의 괴조 때문일까? 이방인들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아델이 답했다.
“본인들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강제는 아니라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지? 우리한테 창이랑 화살을 들이밀면서 협박할 수도 있잖아?”
“그때에는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그만 아니겠나?”
“뭐, 그건 그렇지. 하지만... 뭔가 이상해. 내가 보기에 방금 전의 괴조 몇 마리만 이 마을을 습격해도 여기는 이미 쑥대밭이 되었을 것 같은데...”
대화는 금방 끝났다. 시골 마을은 작았으며 여관도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기름칠도 안 된 낡은 궤짝 같은 문을 열어 젖히기 전. 벨로크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의 시커먼 두 눈이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쟁기를 들고 휘파람을 불면서 걸어가는 농부,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어딘가로 향하는 청년들, 아이를 안고 머리에 짐 보따리를 안고 있는 여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갔다.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에게서 끈적한 시선이 느껴진다는 거였다.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과는 다른··· 뭐지? 기대감?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인간을 벗어난 시력이 또 다른 특이점 하나를 발견했다. 마을의 끝자락에 있는, 나무 판때기를 이어 붙이고 횃불 대를 올려놓은 무슨 제단처럼 보이는 건축물이었다. 뭐가 있긴 있군.
“벨로크? 안 들어와?”
카라가 문고리를 잡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벨로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아델이 미리 시켜놓은 건지. 아니면 눈치 좋은 주인이 미리 내온 건지. 원형 테이블 위에는 요깃거리들이 한가득 늘어져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구워놓은 고기 요리부터,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 요상한 과일이 꽂혀있는 음료랑 맥주 등. 시골 마을에서는 꽤나 보기 힘든 메뉴들이었다. 이게 다 뭐야? 그가 조금 놀랄 때. 접시를 내려놓던 여관주인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손님이 뚝 떨어졌지 뭐요? 그렇다고 재료를 썩힐 수는 없으니 내 특별히 솜씨를 좀 발휘해보았소. 물가가 많이 올랐긴 한데... 거기 아가씨들의 미모를 봐서 절반만 받으리다. 은화···”
벨로크는 주인의 말을 끊고는 금화를 탁 튕겼다. 영주로부터 받은 아리안 양식의 진품이었다. 그의 돈 지랄에 주인은 뱉었던 말을 쏙 삼킨 채, 맛있게 드시오. 한 마디를 남기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델이 각자의 앞 접시에 음식을 담아 올려주었다. 카라가 나이프를 들어올리고는 군침을 삼켰다. 눈동자 역시 기대감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자. 이거 뭐로 만든 거지?”
그녀의 손에 들린 나이프가 바삭하게 익은 고기를 손쉽게 잘라냈다. 이윽고 재빨리 움직인 포크가 새빨간 입술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탁. 카라의 손이 멈췄다. 벨로크의 제지 때문이었다.
“왜, 왜?”
눈을 끔뻑 뜨고 있는 카라와 아델을 앞에 두고 벨로크가 손을 뻗었다. 유리잔에 담겨있는 과실음료를 향해서였다. 그는 말도 하지 않은 채, 대뜸 음료를 들이켰다. 이윽고 피식 웃으며 침을 퉤 뱉었다.
“이 마을 자체가 이미 한통속이군. 감히 이딴 수작질을 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