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88화 (88/222)

88

사막

벨로크가 중얼거렸지만,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거나 동료들의 캐릭터 시트가 뜬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모닥불이 보였고, 빨강머리와 단발머리의 여인들이 우두커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뭘 기대한 건데? 이쯤 됐으면 이제 적응할 때도 됐잖아?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무기에 벼락을 담을 수만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대악마를 죽이고 나니 그 힘이 한층 더 강해지더군. 이제는 내 의지대로 벼락을 떨굴 수도 있는 것 같은데···”

“정신력의 소모가 극심해서 자주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아니란 게 문제지.”

카라의 말에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은 정말 엿 같았다. 더군다나 전투 도중 혼절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끝이니까. 카라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입고 있던 갑옷에 대해서도 말했다.

“대마법사가 남긴 유산. 주문 막이 갑옷 또한 아스타로트와의 전투로 인해서 손상되었지. 대장장이의 말을 들어서 알겠지만, 이제 그건 상대방의 주문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해. 그냥 피해를 일부분 감소시켜줄 뿐이야. 그러니까 너는 마법사를 만난다면 몸을 좀 사려야 될 필요가 있어. 알겠어?”

걱정이 섞인 단호한 말투에 벨로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지.”

“좋아. 그럼 이제 내 소개를 할까? 아니면 아델 먼저 할래?”

“음··· 내가 먼저 하겠다.”

아델은 그 말과 함께 품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여신이 내려줬던 성물. 헬레나의 문양이 찍혀있는 붉은 책이 모닥불에 반짝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책 표지를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 여신의 성력을 받아들였을 때. 당황했었습니다. 몸속을 타고 흐르는 이 힘을 도저히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거든요. 하지만, 여정이 계속되면서 그리고 악마들이나 괴물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책 안에 무언가가 떠오르더군요. 그러니까··· 새로운 주문? 기도문? 이런 게 떠오른 겁니다.”

아델은 책을 펼쳐 보였다. 책 안에는 여신을 찬양하는 성가나 교리와 더불어 그동안 아델이 사용했던 기도문의 원리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마도서 같은 거라 이 말이지? 그것도 레벨이 오를수록 능력치가 오르는 성장형.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그 책을 바라보고 그랬던 건가?

“역시나 보통 물건이 아니었네. 성서라고 봐야 할까?”

카라의 감탄을 뒤로한 채, 아델이 다시금 말했다.

“어쨌든 지금 제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크게 세 가집니다. 불꽃을 일으켜서 보호막을 만드는 것. 성력을 무기에 입혀서 휘두르거나 폭발시키는 것. 아. 이 힘은 다른 사람들의 무기에도 걸어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혹여 필요하다면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배의 상처를 아물게 해줬던 힘. 치료술을 말하는 거지?”

“그래, 그때. 호수에 빠졌을 때. 이자벨에게 한 번, 너에게 한 번 사용했었다. 배운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 미숙한 솜씨였지.”

“그렇지 않아. 덕분에 내가 후유증 없이 살아날 수 있었는걸. 물론, 벨로크가 응급처치를 잘해줬기 때문이지만···”

카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고맙다고 속삭였다.

“뭐··· 뭐냐! 어울리지 않게! 카라 너! 요새 이상해진 것 같다! 왜 이렇게 감상적으로 변한 거냐?”

아델이 질색을 하며 손을 떼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는 오히려 베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아델의 옆에 들러붙으며 팔짱을 꼈다.

“내가? 그런가? 어쩌면··· 죽다 살아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 아니면 너희들이 너무 좋아져서 그럴지도 몰라. 아델 너도. 벨로크 너도 말이야···”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우리가 먹었던 음식 중에 술이 있었나? 벨로크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녀의 얼굴은 멀끔해 보였다. 어쩌면 건조한 사막의 공기와 모닥불이 마음을 간지럽혔는지도 모르지.

아델은 찰떡처럼 붙어있는 카라를 한 번, 벨로크를 한 번 바라보다가 다시금 복잡미묘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괜스레 손에 들린 나뭇가지로 불씨를 휘휘 젓다가 툭 꺾어서 불안에 집어넣었다.

“아무튼. 제 능력은 여기까지입니다. 미천한 솜씨라 죄송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뭘. 탱딜힐 버프까지 다 되는 사기캐인데. 아. 버프는 아직까지 아닌가? 그럼에도 범용성으로는 따질 수가 없지. 염병. 난 왜 직업을 이걸 골라서. 번개나 불이나 거기 거 거기잖아? 속으로 투덜거린 벨로크가 말했다.

“아델. 넌 충분히 잘하고 있다.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해라.”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었다.

“아닙니다! 왕성에서 벌어졌던 그 일들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제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이자벨도···”

아델은 그 후로 한참이나 게오르그 공작을 씹어댔다. 그녀의 말속에서 게오르그는 수십 가지의 방법으로 죽어 나갔다. 벨로크조차 감탄할 정도로 기상천외한 처형방식들이 많았다.

그래, 이 사막을 벗어나면 그 새끼한테도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겠지. 놈의 부하들까지 싹 다 잡아서 말이야. 피는 피로써 갚는 법. 복수는 언제나 달콤한 법이었으니까. 벨로크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고, 아델이 조금 진정했을 무렵 카라가 말했다.

“맞아. 그 의리 없는 개새끼들 또한 우리들의 목표지. 우리들 덕분에 살아나간 주제에 은혜를 원수로 갚았으니까 말이야. 엿 같은 귀족 놈 같으니. 아무튼 놈들에게 복수하려면 마법사의 조력이 필요하겠지? 내 주문들을 소개할게.”

카라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룬 북을 펼쳤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일단 난 한 가지 원소나 계파에 구애받는 마법사가 아니야. 따지고 보면 다양한 주문을 폭넓게 익혔다고 봐야겠지. 전부다는 아니고, 냉기나 화염, 벼락과 비전 마법 정도야. 그러니까···”

카라는 말끝을 흐리더니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을 쏟아냈다.

“얼음창, 서리 광선, 서리 폭풍, 사슬 번개, 벼락, 화염구, 용의 숨결, 보호막, 비전 화살, 점멸하는 빛, 충격파. 이 정도야.”

모두 다 일전의 전투에서 한 번씩은 봤었던 주문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설명을 듣는 것은 또 달랐다. 카라는 각 주문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어떠한 것들이 치명적인지 두 사람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끝이야. 지금 보니까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하네. 나도 더 노력할게.”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기로 제대로 된 화염구 주문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여도 영주의 옆자리를 차지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라는 종류에 상관없이 열 가지가 넘는 주문을 사용할 수 있다. 그 대부분이 공격 마법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피를 달고 사는 일행이니만큼 오히려 더 좋다. 거기다가···

“참. 내가 연금술에도 조예가 있는 거 알지? 나는 여러 가지 이로운 효능을 주는 물약이나 독약, 폭발성 물약 같은 것도 제조할 수 있어. 재료랑 설비만 있다면 말이야. 물론, 이 책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보조적인 부분은 연금술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그녀가 만든 힐링포션의 덕을 일행 역시 톡톡히 봤었으니까. 이런, 사기캐 같으니. 아무리 봐도 내가 동료 하나는 잘 고른 것 같단 말이지. 이자벨도··· 벨로크의 미소가 사라졌다. 이를 모르는지 카라는 계속해서 말했다.

“전부 다 네가 구해다 준 이 책 덕분이야. 기상천외한 주문들이 끝도 없이 나오거든. 나에게 시간만 좀 있다면 몇 달 동안 처박혀서 연구만 하고 싶을 지경이야. 아무튼··· 기대해. 다음에는 소환마법을 보여주도록 하지. 이번에 배우고 있는 게 하나 있거든.”

카라는 그 말을 끝으로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오랜만의 여정에 몸이 지친 것 같았다. 그녀는 잠을 쫓아내려 고개를 휘휘 젓다가 벨로크를 바라봤다. 그녀가 말했다.

“그보다 벨로크 너. 슬슬 이발할 때가 되지 않았어?”

“그런가? 정신이 없어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군.”

알타니스에서 머무르는 동안. 습관적으로 면도는 했다. 하지만, 이발은 하지 못했기에 지금 그의 머리칼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의 형태가 되어있었다.

시발. 이건 또 언제 이렇게 자랐어? 카라의 말을 들은 순간. 구불거리는 반곱슬의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한다?

“이상한가? 단검으로라도 자를까?”

“으흠. 아니!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다. 넌 본판이 좋아서 그런가. 뭐든 잘 어울려. 기른 머리를 보니까. 기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딘가의 귀공자 같아.”

카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번에는 아델이 벨로크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 역시 눈을 둥글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다가 건틀릿을 벗었다. 이윽고 굳은살 가득 박힌 손으로 벨로크의 앞머리를 샥샥 빗어서 옆으로 넘겼다.

이거 오대오 가르마 아니야?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그가 인상을 찌푸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델은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윤기 나는 건틀릿을 거울삼아 그의 얼굴 앞에 들이댔다.

“한 번 보십시오. 벨로크님. 무척이나 잘 어울리십니다.”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날카로운 눈매, 언뜻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가를 가진 미남자가 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면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내 얼굴.

그는 언뜻 떠오르는 낯선 생각에 그만 화들짝 놀랐다. 원래의 내가 어떻게 생겼었지? 이름은? 나이는?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젯밤. 전투의 여파인가? 그가 끙끙거릴 때. 카라와 아델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다 좋은데 말이야. 그래도 역시 남자는 짧은 머리가 좋은 것 같아. 깔끔한 게 최고지.”

“확실히 그편이 좀 더 남자다움이 부각되기는··· 앗! 절대로 벨로크님 보고 한 말은 아닙니다!”

염병.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거야. 벨로크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고, 머리를 강타하는 두통은 사라졌다. 오직 모래들만이 가득 쌓인, 날이 졌기 때문에 시커먼 음영 덩어리들로만 보이는 황량한 땅 아래. 일행은 한참동안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이윽고 반쯤 타다만 모닥불이 불씨를 타닥거리고, 머리 위에 떠 있는 하얀 달과 별 무리가 일행을 진하게 주시하는 순간. 벨로크가 첫 번째로 불침번을 섰다. 그는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다. 그저 불씨가 완전히 꺼질 때까지 달과 별을 벗 삼아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

“왜 깨우지 않으신 겁니까. 몸이 상했을까 염려됩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혼자서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델 말이 맞아. 넌 왜 그렇게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해? 미덥지 못하더라도 우리한테도 좀 의지해주고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는 그러도록 하지.”

땍땍거리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낙타에 올라탔다. 낮았던 기온은 어디로 갔냐는 듯 다시금 강렬한 직사광선이 그들을 맞이했다. 젠장. 존나게 덥군. 잠시 후, 말을 꺼낼 힘조차 아끼기 위해서인지 카라와 아델 또한 입을 굳게 닫고는 이동을 개시했다.

낙타가 콧김을 푸르르 일으키고 혹 두 개와 머리통 하나가 더해진. 세 개의 기둥이 태양 빛을 받아 시커먼 그림자를 만들었다.

일행이 그렇게 빠지지 않는 토사를 한참이나 걷고 있을 때였다. 벨로크의 감각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휘이잉 바람을 찢는 소리가 우선적으로 들려왔다. 그 후로 공기의 미세한 진동이 목덜미를 강타했다.

“이건 또 뭐야.”

벨로크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비수 형태의 장창이 철컥거리며 시퍼런 날을 뿜어냈다.

“당장에 보이는 건 없는데··· 위야? 아니면 아래?”

벨로크의 짐승 같은 감각에 이미 적응을 마친, 두 사람은 익숙한 듯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낙타들의 울음소리가 거칠어졌다. 지면을 탄탄하게 받치고 있던 발굽 또한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포식자를 앞에 둔 피식자로서의 본능적인 공포심이었다.

안 되지. 안 돼. 네가 없으면 이 짐을 누구보고 들고 가라고? 낙타의 턱을 쓰다듬으며 녀석을 달랜 벨로크가 창을 치켜 올렸다. 그의 시선과 어깨가 향하는 곳은 떨어지는 태양이 있는 곳. 하늘이었다.

“위다.”

그가 창을 던지기 직전, 세 사람의 머리 위로 거대한 음영이 졌다. 카라와 아델이 고개를 돌렸다.

끼에에-엑!

뻣뻣한 깃털들이 가득 박힌 날개에 맹금류의 발톱.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가진 짐승들이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양옆으로 펼친 날개 때문인지 몰라도 크기가 5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세상에··· 저게 대체 뭐야?”

“역겹게도 생겼군요.”

녀석들은 그냥 덩치 큰 새가 아니었다. 새의 부리와 얼굴 대신, 사람의 머리통이 달려있는 괴물들이었다. 시발. 신박한 새끼들 같으니. 무슨 인면조냐?

끄에에에-에

오랜만에 찾은 먹잇감이 녀석들을 흥분시킨 걸까? 울상을 짓고 있던 인간 가죽이 히죽 웃었다. 그래봤자 눈꼬리가 한 번 더 접히고 톱니 같은 이빨이 드러날 뿐인 악귀의 웃음일 뿐이었다. 벨로크 역시 웃었다. 저 새로운 괴물 놈들은 경험치를 얼마나 줄지 기대가 되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린 후, 한쪽 손을 뻗었다. 한 줄기 섬광이 하늘을 찢어발겼다. 장창이 괴물의 심장에 퍽 틀어박혔다.

0